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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멋있기보다 맛있다! 색소폰으로 웃음을 전하는 황금나팔 ‘윤정현- 1부
    현시대에 멀티의 기능을 한다는 것은 사람이건 사물이건 대세의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부정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한 가지만 잘해서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고, 사물들 또한 제 기능이 무엇인지도 의심이 될 만큼 본래의 기능을 능가한 멀티기능들이 탑재되어 인간의 편의를 돕는다. 이처럼 음악가들 또한 이러한 시대에 편승하여 변화되는 양상이 보이기도 하는데 색소폰계에서는 이 사람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기타연주자, 레크레이션 강사, 웃음치료사, 지금은 색소폰 연주자로 이 모든 것들을 융화시켜 대중을 웃게 해주는 색소폰계의 멀티플레이어 황금나팔 ‘윤정현’을 만나보자. 황금나팔이라는 애칭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나?웃음치료사로 활동했을 당시에 어느 행사에 초대되어 갔던 적이 있었다. 그날의 행사 사회자가 나를 관객에게 소개하기를 “이번에 나오실 웃음치료사 님은 말도 참 예쁘게 잘하시지만 색소폰을 연주하시는 분인데요, 색소폰이 황금으로 만든 것처럼 아주 번쩍번쩍해요. 황금나팔을 가지고 오신웃음치료사 님 나오세요!”라고 하더라. 그 어감이 너무 좋기도 하고, 번뜩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했다. ‘윤정현’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기보다 황금나팔이라는 애칭을 붙인다면 사람들이 나를 더 잘 기억하겠구나 싶더라. 그때부터 황금나팔이라는 애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이 남달랐을 것 같은데?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가 워낙 음악을 좋아하는 분이셨다. 얼마나 좋아하셨냐면 한 해 농사 지은 쌀을 다 팔아서 오디오를 구매하실 정도였다. 아버님이 약주를 한 잔씩 하실 때면 꼭 음악을 트셨는데 그 때문에 어려서부터 트로트 음악을 따라 부르며 좋아했었다. 아마 지금도 뽕짝 전문 연주자로 불리는 것이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다보니 소풍에 가서 장기자랑을할 때도 이름이 호명되기 일쑤였고, 트로트 한 곡 부르고 공책 받아오고 하는 일도 잦았다. 기타를 연주한 적이 있었다고?어렸을 때 집 앞에 군악대가 있었다. 아침에는 군악대 음악 소리에 깼고, 학교에 다녀와서는 군인 아저씨들이 색소폰 부는것, 기타 치는 것을 몰래 훔쳐보곤 했다. 당시에는 색소폰보다는 기타 치는 군인이 그렇게 멋져 보였다. 매일 가서 몰래 훔쳐보다 보니 어느 날은 군인 아저씨가 너 왜 왔냐고 묻더라. 그래서 “기타 치는 거 구경하러 왔어요” 했더니 들어오라 그러길래 그때부터 거기서 기타를 배웠다. 거기서 기타를 배우다 보니 얘가 공부하기 글렀다 싶었는지 아버지가 기타를 사가지고 오셨다. 그때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당시에는 기타를 배우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빠져 살았었다.색소폰과의 인연은 어떻게 닿게 되었나?기타를 치면서 그룹 활동을 하던 당시 그룹사운드에서 록 그룹으로 변화되던 시절이었다. 가라오케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룹사운드를 하는 사람들의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이섬에 행사를 하러 갔는데 어떤 레크레이션 강사가 나오더니 화술로 관객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고 반하여 나의 진로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와 너무나 잘 맞는 길이라 생각하여 레크레이션 강사 자격증을 따고, 사무실을 차려 활동을 하려는 찰나에 IMF가 터진 거다. 그렇게 너무나 힘들었던 찰나에 황수관 박사님의 웃음치료에 영감을 받아 그 쪽 길로 전향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해야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는 웃음치료사가 될 수 있을까를 고심하다 색소폰을 배워보기로 결심했던 것이었다. 그게 벌써 20년 전 일이다.재미있는 진행하면 황금나팔이다. 타고나길 언변이 좋았었나?그렇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언어장애가 심했었다. 너무 심한 나머지 사회생활마저 걱정될 지경이었는데, 누가 신문 사설을 아나운서처럼 읽어보라고 하더라. 수년 동안 신문 사설을 읽었더니 정말 언어장애가 고쳐졌다. 만약 그때 극복하지 못했다면 웃음치료사라는 것은 꿈도 못 꿨을 일이다. 사실 이런 얘길 지금 와서 누군가에게 하면 아무도 안 믿는다.본인만의 연주 스타일이 있나?내가 생각하는 색소폰 연주에는 멋있는 연주가 있고, 맛있는 연주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멋있는 연주는 잘 못 한다고 생각한다. ‘워렌 힐’이나 ‘데이브 코즈’ 같은 연주를 하면 트로트 느낌이 섞여 있다고들 한다. 우스갯소리로 황금나팔은 ‘Hey Jude’라는 곡을 해도 Jude가 한국인의 피가 섞인 혼혈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나는 멋있기보다는 맛있는 연주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열린 ‘맛집’ 같은 황금나팔이 되고 싶다.색소폰의 ‘맛집’이어서 누구라도 찾아와 맛있는 연주를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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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01
  • 멋있기보다 맛있다! 색소폰으로 웃음을 전하는 황금나팔 윤정현- 1부
    현시대에 멀티의 기능을 한다는 것은 사람이건 사물이건 대세의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부정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한 가지만 잘해서 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고, 사물들 또한 제 기능이 무엇인지도 의심이 될 만큼 본래의 기능을 능가한 멀티기능들이 탑재되어 인간의 편의를 돕는다. 이처럼 음악가들 또한 이러한 시대에 편승하여 변화되는 양상이 보이기도 하는데 색소폰계에서는 이 사람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기타연주자, 레크레이션 강사, 웃음치료사, 지금은 색소폰 연주자로 이 모든 것들을 융화시켜 대중을 웃게 해주는 색소폰계의 멀티플레이어 황금나팔 ‘윤정현’을 만나보자. 황금나팔이라는 애칭은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나? 웃음치료사로 활동했을 당시에 어느 행사에 초대되어 갔던 적이 있었다. 그날의 행사 사회자가 나를 관객에게 소개하기를 “이번에 나오실 웃음치료사 님은 말도 참 예쁘게 잘하시지만 색소폰을 연주하시는 분인데요, 색소폰이 황금으로 만든 것처럼 아주 번쩍번쩍해요. 황금나팔을 가지고 오신웃음치료사 님 나오세요!”라고 하더라. 그 어감이 너무 좋기도 하고, 번뜩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했다. ‘윤정현’이라는 이름을 기억하기보다 황금나팔이라는 애칭을 붙인다면 사람들이 나를 더 잘 기억하겠구나 싶더라. 그때부터 황금나팔이라는 애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이 남달랐을 것 같은데?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가 워낙 음악을 좋아하는 분이셨다. 얼마나 좋아하셨냐면 한 해 농사 지은 쌀을 다 팔아서 오디오를 구매하실 정도였다. 아버님이 약주를 한 잔씩 하실 때면 꼭 음악을 트셨는데 그 때문에 어려서부터 트로트 음악을 따라 부르며 좋아했었다. 아마 지금도 뽕짝 전문 연주자로 불리는 것이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러다보니 소풍에 가서 장기자랑을할 때도 이름이 호명되기 일쑤였고, 트로트 한 곡 부르고 공책 받아오고 하는 일도 잦았다. 기타를 연주한 적이 있었다고? 어렸을 때 집 앞에 군악대가 있었다. 아침에는 군악대 음악 소리에 깼고, 학교에 다녀와서는 군인 아저씨들이 색소폰 부는것, 기타 치는 것을 몰래 훔쳐보곤 했다. 당시에는 색소폰보다는 기타 치는 군인이 그렇게 멋져 보였다. 매일 가서 몰래 훔쳐보다 보니 어느 날은 군인 아저씨가 너 왜 왔냐고 묻더라. 그래서 “기타 치는 거 구경하러 왔어요” 했더니 들어오라 그러길래 그때부터 거기서 기타를 배웠다. 거기서 기타를 배우다 보니 얘가 공부하기 글렀다 싶었는지 아버지가 기타를 사가지고 오셨다. 그때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당시에는 기타를 배우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빠져 살았었다. 색소폰과의 인연은 어떻게 닿게 되었나? 기타를 치면서 그룹 활동을 하던 당시 그룹사운드에서 록 그룹으로 변화되던 시절이었다. 가라오케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그룹사운드를 하는 사람들의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이섬에 행사를 하러 갔는데 어떤 레크레이션 강사가 나오더니 화술로 관객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고 반하여 나의 진로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와 너무나 잘 맞는 길이라 생각하여 레크레이션 강사 자격증을 따고, 사무실을 차려 활동을 하려는 찰나에 IMF가 터진 거다. 그렇게 너무나 힘들었던 찰나에 황수관 박사님의 웃음치료에 영감을 받아 그 쪽 길로 전향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해야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는 웃음치료사가 될 수 있을까를 고심하다 색소폰을 배워보기로 결심했던 것이었다. 그게 벌써 20년 전 일이다. 재미있는 진행하면 황금나팔이다. 타고나길 언변이 좋았었나? 그렇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언어장애가 심했었다. 너무 심한 나머지 사회생활마저 걱정될 지경이었는데, 누가 신문 사설을 아나운서처럼 읽어보라고 하더라. 수년 동안 신문 사설을 읽었더니 정말 언어장애가 고쳐졌다. 만약 그때 극복하지 못했다면 웃음치료사라는 것은 꿈도 못 꿨을 일이다. 사실 이런 얘길 지금 와서 누군가에게 하면 아무도 안 믿는다. 본인만의 연주 스타일이 있나? 내가 생각하는 색소폰 연주에는 멋있는 연주가 있고, 맛있는 연주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멋있는 연주는 잘 못 한다고 생각한다. ‘워렌 힐’이나 ‘데이브 코즈’ 같은 연주를 하면 트로트 느낌이 섞여 있다고들 한다. 우스갯소리로 황금나팔은 ‘Hey Jude’라는 곡을 해도 Jude가 한국인의 피가 섞인 혼혈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부분에서 나는 멋있기보다는 맛있는 연주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열린 ‘맛집’ 같은 황금나팔이 되고 싶다. 색소폰의 ‘맛집’이어서 누구라도 찾아와 맛있는 연주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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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01
  • 색소폰을 불며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들'분당 해피색소폰클럽'
    해피색소폰 앙상블의 구조는 매우체계적이다. 65세 이상의 회원으로 구성된 골드앙상블, 64세 미만으로 구성된 그랜드앙상블,이 모든 회원을 총집합한 해피앙상블 세 가지로 나뉘어 지역공연 및 봉사활동에 앞장서고 있다.해피색소폰 앙상블의 연주 활동은 2009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진행되어 오고 있는데, 매년 중앙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정기연주회를 하는가 하면 매주 금요일에는 요양원을 방문하여 봉사 연주를 해오고 있다. 한 요양원 같은 경우는 이들이 10년 동안 봉사를 해오고 있고, 2016년도부터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본부’에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각종 행사에 참여하여 봉사연주를 한다고하니 이들이 지역 발전과 사회문화 증진에 이바지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동호회 회장 곽 병 도해피색소폰클럽에는 어떤 계기로 가입하게 되었나.어렸을 적부터 음악을 좋아했었고, 대학교 때에는 밴드에서 기타를 쳤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오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음악을 잠시 놓았다가 6년 5개월 정도 전부터 이곳을 다니며 알토색소폰을 배우게 되었다.색소폰을 시작하고 나서 찾아온 변화가 있다면.일단은 음악을 접할 수 있다는 자체가 즐겁다는 것이다. 반주기를 틀어놓고 색소폰을 연주하다 보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심취가 된다. 그 순간에는 모든 잡생각이 사라져 오로지 음악에만 집중하여 나만의 사색에 잠길 수가 있다. 또한색소폰을 통해서 건강을 찾은 부분도 크다. 일전 에 과도한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한 부정맥이 온적이 있었다. 갑자기 앞이 깜깜해진다든지 가슴이 두근거린다든지 증상이 심각했고, 또한 담배도 하루에 두 갑 가까이 피웠었다. 색소폰을 배우면서 호흡이 가쁜 증상을 경험하며, 담배를 단칼에 끊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지금까지도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되었고, 이전에는 내기 어려웠던 롱톤 또한 1분 넘게 낼 수 있게 되었다. 건강이 좋아진 것은 색소폰을 통한 계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해피색소폰클럽만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나.첫째로 마음이 잘 맞는다. 우린 앙상블 연습을 주로 하다 보니 서로의 마음이 잘 맞아야 한다는 것을 많이 느끼는데, 그런 부분에서 서로의 마음이잘 맞는다고 느낀다. 서로의 소리를 듣고 조화롭게 소리를 내는 것은 서로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잘 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두 번째로는 개인 모두가 솔선수범한다는 것이다. 앙상블을 위해 열심히 연습하고, 서로 모르면 잘 알려주고,클럽 활동에 있어 모두가 적극적인 편이다.박 재 식 단원해피색소폰클럽에서 활동한 지는 얼마나 되었나.색소폰은 분 지 10년 정도 되었고 이곳에서 활동한 것은 5년 정도 되었다.해피색소폰 활동 전엔 어떻게 색소폰을 했었나.해군에서 건축 장교를 하고 있을 때에 군악대가가까이 있어 군악대에서 배우기 시작했다. 군에서 5년 정도 하고 제대 후에는 집에서 연습을 못하기 때문에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집 근처 가까운 곳이 어디 있을까 하고 찾아보다 분당해피색소폰동호회로 오게 되었다.합주를 한다는 것이 어렵지 않나.처음에는 반주기를 틀어놓고 하다 보니 반주기가없으면 악보도 볼 줄 모르고, 그저 반주기만 따라가고 했었는데. 앙상블을 하니까 박자를 정확히 맞춰야 하지 않나. 그러다 보니 박자 감각도생기고 여럿이서 하다 보니 더 재미가 있다.기억에 남는 공연을 한 적이 있나.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할 때 서울에 있는 해군해관에서 가족과 친척들을 모아놓고 전역기념 콘서트를 한 적이 있었다. 곡 제목에 맞춰 스토리를 만들어 스토리텔링 콘서트로 기획했었는데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스토리텔링 음악회에 대해 더 얘기해 달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살에 해군사관 학교에들어갔을 적에 아마 그곳에 왔던 대부분의 사람이 이 노래를 듣고 갔을 것입니다.” 하면서 첫 곡으로 ‘최백호’의 <입영전야>를, “사관 학교 다닐적의 우리들은 원대한 꿈을 가지고 살았다. 바로이 노래처럼 말이다.” 하며 ‘남궁옥분’의 꿈을 먹는 젊은이를 기타로 연주했다. 한 가지 악기로만하면 지루할까 봐 색소폰, 기타, 오카리나 이렇게 세 가지 악기로 연주를 했는데, 오카리나로는2개월씩 배를 타고 다니다가 항구로 들어가는 불빛을 기억하며 ‘등대지기’를 연주했었다. 마지막곡으로는 “35년간 몸담았던 해군을 떠나는데, 해군은 내게 정말 행복한 군이었고, 나를 완성되게해준 곳이다.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말하며 ‘나훈아’의 <영영>까지 총 14곡을 연주했었다.김 현 숙 단원색소폰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본래 나는 음악하고는 정말로 거리가 멀었었다.어느 날 우연찮게 공원에서 연주하는 것을 듣게되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 좋았다. 속으로는 나도 해보고 싶다고 생각을 했지만, 그 마음은 금세 “나는 나이가 많은데…”라는 말로 좌절되기일쑤였다. 그런 두려움을 갖고 있었는데, 해피색소폰 원장님이 “나이와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라. 그래야 후회가 없다”라는 말에 용기를 얻어 첫걸음을 뗐었다. 나와는 절대 인연이없으리라 생각했던 색소폰을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빨리 배우게 되고 적응하게 되었다. 나는 절대 못 할 것이라고 계속 접어 두었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색소폰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나.내고 싶은 소리를 마음대로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노래 같은 경우는 목소리를 타고나서 잘하는경우가 많지 않나. 따라 하고 싶어도 소리가 안올라간다든지 하는 경우 말이다. 색소폰은 내 목소리를 대신해서 노래를 할 수 있다. 내고 싶었던 혹은 하고 싶었던 소리를 시원하게 내 지르면 희열이 느껴질 정도로 정말 통쾌하다. 조금 더 실력이 올라간다면 더 통쾌하지 않을까 기대가된다.색소폰을 하며 찾아온 일상의 변화가 있나.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에 맞춰 내가 색소폰을 분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TV에서 ‘불후의 명곡’ 같은 프로를 보다가도 ‘저 노래를 색소폰으로불면 정말 멋있겠다.’든가, ‘가을에는 저 곡을 연주하면 좋겠구나…’, ‘겨울에 눈 올 때 저 노래가좋겠구나…’같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예전에는 예사로 들렸던 음악이 지금은 하고 싶은 음악들로 들려서 너무 신기하다. 그냥 듣기만 하는 음악과 내가 악기를 다룰 수 있으면서 듣는 음악은다른 것 같다.나이 때문에 색소폰을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일전에 어떤 여든 되신 어르신이 “5년만 젊었어도 정말 더 잘할 수 있을 텐데”라고 말씀하시는것을 듣는데 가슴이 정말 짠했다. 그분이 말하는 5년 전은 75세인데 그렇게 따지면 내게는 그분보다 십 년도 더 넘게 일찍 색소폰을 접하는 것이 아닌가. “늦었다고 할 때가 빠른 거구나”라는것을 새삼 실감했다. 나이, 환경 이런 것 저런 것생각하지 말고 못 해본 것, 혹은 하고 싶었던 것에 도전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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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01
  • 색소폰을 불며 행복을 찾아가는 사람들 '분당 해피색소폰클럽'
    해피색소폰 앙상블의 구조는 매우체계적이다. 65세 이상의 회원으로 구성된 골드앙상블, 64세 미만으로 구성된 그랜드앙상블,이 모든 회원을 총집합한 해피앙상블 세 가지로 나뉘어 지역공연 및 봉사활동에 앞장서고 있다. 해피색소폰 앙상블의 연주 활동은 2009년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진행되어 오고 있는데, 매년 중앙공원 야외음악당에서 정기연주회를 하는가 하면 매주 금요일에는 요양원을 방문하여 봉사 연주를 해오고 있다. 한 요양원 같은 경우는 이들이 10년 동안 봉사를 해오고 있고, 2016년도부터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본부’에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각종 행사에 참여하여 봉사연주를 한다고하니 이들이 지역 발전과 사회문화 증진에 이바지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동호회 회장 곽 병 도 해피색소폰클럽에는 어떤 계기로 가입하게 되었나. 어렸을 적부터 음악을 좋아했었고, 대학교 때에는 밴드에서 기타를 쳤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오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음악을 잠시 놓았다가 6년 5개월 정도 전부터 이곳을 다니며 알토색소폰을 배우게 되었다. 색소폰을 시작하고 나서 찾아온 변화가 있다면. 일단은 음악을 접할 수 있다는 자체가 즐겁다는 것이다. 반주기를 틀어놓고 색소폰을 연주하다 보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심취가 된다. 그 순간에는 모든 잡생각이 사라져 오로지 음악에만 집중하여 나만의 사색에 잠길 수가 있다. 또한색소폰을 통해서 건강을 찾은 부분도 크다. 일전 에 과도한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한 부정맥이 온적이 있었다. 갑자기 앞이 깜깜해진다든지 가슴이 두근거린다든지 증상이 심각했고, 또한 담배도 하루에 두 갑 가까이 피웠었다. 색소폰을 배우면서 호흡이 가쁜 증상을 경험하며, 담배를 단칼에 끊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지금까지도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되었고, 이전에는 내기 어려웠던 롱톤 또한 1분 넘게 낼 수 있게 되었다. 건강이 좋아진 것은 색소폰을 통한 계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해피색소폰클럽만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나. 첫째로 마음이 잘 맞는다. 우린 앙상블 연습을 주로 하다 보니 서로의 마음이 잘 맞아야 한다는 것을 많이 느끼는데, 그런 부분에서 서로의 마음이잘 맞는다고 느낀다. 서로의 소리를 듣고 조화롭게 소리를 내는 것은 서로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잘 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두 번째로는 개인 모두가 솔선수범한다는 것이다. 앙상블을 위해 열심히 연습하고, 서로 모르면 잘 알려주고,클럽 활동에 있어 모두가 적극적인 편이다. 박 재 식 단원 해피색소폰클럽에서 활동한 지는 얼마나 되었나. 색소폰은 분 지 10년 정도 되었고 이곳에서 활동한 것은 5년 정도 되었다. 해피색소폰 활동 전엔 어떻게 색소폰을 했었나. 해군에서 건축 장교를 하고 있을 때에 군악대가가까이 있어 군악대에서 배우기 시작했다. 군에서 5년 정도 하고 제대 후에는 집에서 연습을 못하기 때문에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집 근처 가까운 곳이 어디 있을까 하고 찾아보다 분당해피색소폰동호회로 오게 되었다. 합주를 한다는 것이 어렵지 않나. 처음에는 반주기를 틀어놓고 하다 보니 반주기가없으면 악보도 볼 줄 모르고, 그저 반주기만 따라가고 했었는데. 앙상블을 하니까 박자를 정확히 맞춰야 하지 않나. 그러다 보니 박자 감각도생기고 여럿이서 하다 보니 더 재미가 있다. 기억에 남는 공연을 한 적이 있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할 때 서울에 있는 해군해관에서 가족과 친척들을 모아놓고 전역기념 콘서트를 한 적이 있었다. 곡 제목에 맞춰 스토리를 만들어 스토리텔링 콘서트로 기획했었는데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스토리텔링 음악회에 대해 더 얘기해 달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살에 해군사관 학교에들어갔을 적에 아마 그곳에 왔던 대부분의 사람이 이 노래를 듣고 갔을 것입니다.” 하면서 첫 곡으로 ‘최백호’의 <입영전야>를, “사관 학교 다닐적의 우리들은 원대한 꿈을 가지고 살았다. 바로이 노래처럼 말이다.” 하며 ‘남궁옥분’의 꿈을 먹는 젊은이를 기타로 연주했다. 한 가지 악기로만하면 지루할까 봐 색소폰, 기타, 오카리나 이렇게 세 가지 악기로 연주를 했는데, 오카리나로는2개월씩 배를 타고 다니다가 항구로 들어가는 불빛을 기억하며 ‘등대지기’를 연주했었다. 마지막곡으로는 “35년간 몸담았던 해군을 떠나는데, 해군은 내게 정말 행복한 군이었고, 나를 완성되게해준 곳이다.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말하며 ‘나훈아’의 <영영>까지 총 14곡을 연주했었다. 김 현 숙 단원 색소폰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본래 나는 음악하고는 정말로 거리가 멀었었다.어느 날 우연찮게 공원에서 연주하는 것을 듣게되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 좋았다. 속으로는 나도 해보고 싶다고 생각을 했지만, 그 마음은 금세 “나는 나이가 많은데…”라는 말로 좌절되기일쑤였다. 그런 두려움을 갖고 있었는데, 해피색소폰 원장님이 “나이와 상관없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라. 그래야 후회가 없다”라는 말에 용기를 얻어 첫걸음을 뗐었다. 나와는 절대 인연이없으리라 생각했던 색소폰을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빨리 배우게 되고 적응하게 되었다. 나는 절대 못 할 것이라고 계속 접어 두었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색소폰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내고 싶은 소리를 마음대로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노래 같은 경우는 목소리를 타고나서 잘하는경우가 많지 않나. 따라 하고 싶어도 소리가 안올라간다든지 하는 경우 말이다. 색소폰은 내 목소리를 대신해서 노래를 할 수 있다. 내고 싶었던 혹은 하고 싶었던 소리를 시원하게 내 지르면 희열이 느껴질 정도로 정말 통쾌하다. 조금 더 실력이 올라간다면 더 통쾌하지 않을까 기대가된다. 색소폰을 하며 찾아온 일상의 변화가 있나.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음악에 맞춰 내가 색소폰을 분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TV에서 ‘불후의 명곡’ 같은 프로를 보다가도 ‘저 노래를 색소폰으로불면 정말 멋있겠다.’든가, ‘가을에는 저 곡을 연주하면 좋겠구나…’, ‘겨울에 눈 올 때 저 노래가좋겠구나…’같은 생각들이 떠오른다. 예전에는 예사로 들렸던 음악이 지금은 하고 싶은 음악들로 들려서 너무 신기하다. 그냥 듣기만 하는 음악과 내가 악기를 다룰 수 있으면서 듣는 음악은다른 것 같다. 나이 때문에 색소폰을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일전에 어떤 여든 되신 어르신이 “5년만 젊었어도 정말 더 잘할 수 있을 텐데”라고 말씀하시는것을 듣는데 가슴이 정말 짠했다. 그분이 말하는 5년 전은 75세인데 그렇게 따지면 내게는 그분보다 십 년도 더 넘게 일찍 색소폰을 접하는 것이 아닌가. “늦었다고 할 때가 빠른 거구나”라는것을 새삼 실감했다. 나이, 환경 이런 것 저런 것생각하지 말고 못 해본 것, 혹은 하고 싶었던 것에 도전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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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01
  • [MATCHING PARTNER] 하늘을 뚫는 악기 ‘트롬본(Trombone)’
    어릴 적 취주 악단이나 군대의 마칭 밴드(Marching Band) 공연을 본 이들은 기억하리라. 악단 맨 앞자리에 도열해, 길고 큼지막한 악기를 하늘로 뻗으며 보무도 당당히 행진하던 나팔수들을. 그들이 연주하던 악기가 바로 트롬본이다. 맨 앞에 서는 이유는 사실, 팔을 뻗을 때 앞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중저음을 담당하는 악기지만 그 소리는 장엄하고 웅장하다. 외관이 화려한 만큼 소리와 동작으로 하늘을 뚫을 듯한 트롬본은 금관악기 가운데 단연 스타로 손꼽힌다. 트롬본의 역사 트롬본(Trombone)의 어원은 이탈리아어로 ‘큰 트럼펫’이라는 뜻에서 파생하였다. 영국에서는 트롬본이라는 명칭 대신, 르네상스 시대부터 색벗(Sackbut)이라고 불렀다. 색벗은 현대 트롬본과 비교할 때 벨이 작고 슬라이드 내경(bore)이 작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색벗은 슬라이드 내경과 벨 크기가 점차 커져 현재의 트롬본으로 발전했다. 독특한 슬라이드 구조와 따뜻한 음색이 잘 울려 퍼져, 많은 작곡가들이 신성하고 종교적인 악기로 여겼으며 주로 교회 예배용 악기로 연주되었다. 이렇듯 트롬본은 종교음악 연주에 주로 쓰여 지다가, 베토벤에 이르러 교향악단에 포함되어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비롯해 6번과 9번에 등장하면서 슈베르트와 멘델스존, 슈만을 거치면서 금관악기의 주요 파트를 담당하게 된다. 재즈에서는 초창기 뉴올리언스 재즈 시대부터 트롬본이 등장한다. 당시 미국은 숱한 전쟁을 치렀는데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창단된 군대 악단에서 트롬본은 빠질 수 없는 악기였다. 전쟁이 끝나자 군인들이 버리고 간 신기한 서양 악기로 흑인들이 아프리카 토속 멜로디를 연주하면서 미국 재즈가 탄생하게 된다. 트롬본은 색소폰, 트럼펫과 더불어 재즈 악단에서 주요 혼(Horn) 섹션을 담당하며, 특유의 웅장한 중저음 사운드로 악단의 연주를 더욱 파워풀하고 풍성하게 해 주는 스타로 부상한다. 트롬본의 구조반음계 연주가 자유로운 목관 악기와 달리, 금관 악기들은 반음계 연주를 위해 여러 방법들을 동원하였다. 클라리넷처럼 키를 사용하거나, 밸브 혹은 슬라이드를 더하기도 하였다. 슬라이드를 사용하여 반음계 연주가 가능토록 고안 된 악기가 트롬본이다. 연주자가 음을 조절하기 위해 오른 손으로 밀고 당기는 부분이 바로 슬라이드다. 대부분 관악기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이어져오며 구조상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트롬본은 벨과 마우스피스를 제외하고 개발 당시부터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원래의 모습을 유지해 온 드문 악기다. 트롬본은 소리를 확대시켜주는 벨과 음정을 조절하는 슬라이드, 마우스피스로 구성된 악기다. 소재는 놋쇠, 크롬, 니켈이다. 전체 길이는 약 113cm이며 길이의 약 2/3가 관으로 구성되어있고 나팔에 가까워지면서 원추형을 이룬다. 나팔의 직경은 약 7인치이다. 음역에 따라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로 나누어진다. 하지만 소프라노 트롬본은 차츰 자취를 감추고 주로 테너 트롬본이 연주용으로 널리 사용된다. 마성의 중저음, 트롬본의 매력프랑스의 작곡가 베를리오즈는 “트롬본은 관악기 중 진정한 우두머리며 하나의 웅장한 서사시다.”며 트롬본의 음색을 극찬하였다. 종교적인 평온함과 당당하고 우렁찬 사운드를 내면서 엄숙하고도 강력한 음색을 지닌 마성의 악기가 바로 트롬본이다. 때로는 깊은 신음을 토하듯 저음은 사뭇 비장하고, 때로는 한없이 부드럽게 다가와 구름처럼 폭신한 음색을 전해준다. 또한 트롬본은 사람의 목소리와도 잘 어울릴 뿐 아니라 동일한 선율을 낼 수 있어 성악곡에서 합주 악기로 인기가 많다. 부드러운 선율로 서정미를 극대화 시키며 시적 감성을 더해준다.반면, 고음에 이르면 긴장감과 흥분을 고조시켜주면서 특유의 웅장한 사운드로 다른 관악기를 삼켜버린다. 오케스트라에서는 트럼펫과 더불어 피아니시모(pp, 매우 여리게)부터 포르티시모(ff, 더욱 세게)에 이르기까지 넓은 표현력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트럼펫과 동시에 연주할 때면 다른 악기가 도저히 따라 올 수 없는 파워풀하고 압도적인 강렬한 사운드를 낸다. 재즈역사와 함께 한 트롬본스윙 시대의 트롬본 연주자들은 더욱 빠른 연주와 기교를 바탕으로 트롬본의 위치를 격상시켰다. 30년 대 중반, 튜바(tuba) 연주자였던 존 커비(John Kirby)는 단순한 리듬을 연주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트롬본의 영역을 더욱 다양하게 넓혔다. 그의 솔로 연주는 다른 악기 파트와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하모니의 대가로 군림하였다.재즈계의 가장 유명한 트롬본 연주자로 손꼽히는 글렌 밀러는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지휘자겸 트롬본주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한 글렌 밀러에게 영향을 끼친 토미 도시(Tommy Dorsey)는 독특한 저음부의 빠른 연주로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40년대에 이르러 트롬본은 색소폰, 트럼펫과 더불어 솔로 악기로 부상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은 자신의 밴드에서 트롬본 주자로 활약하던 샘 낸톤(Sam Nanton)을 위해 많은 트롬본 솔로 곡들을 작곡해주었던 만큼 트롬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다. 샘 낸톤은 자신이 쓰던 모자로 관의 앞부분을 소음기처럼 사용해 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하면서 독특한 연주를 펼쳤다. 훗날 많은 트롬본 연주자들이 그를 흉내 내어 모자로 소음기 역할을 하며 연주하는 유행을 낳기도 하였다. 클래식과 재즈 그리고 대중음악과 록뮤직에 이르기까지 트롬본의 활약은 폭넓고도 다채롭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슬라이드의 움직임으로 인해 트롬본은 듣는 악기뿐만 아니라 보는 재미까지 더해주는 매력적인 악기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글렌 밀러(Glenn Miller, 1904-1944)미국 아이오와 주에서 태어난 독일계 미국인이다.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코넷과 만돌린을 연주하였고 12세 때 부터 트롬본을 시작하였다. 레드 니콜스(Red Nichols), 도시 브라더 밴드(Dorcey Brother band) 등에서 연주자, 작곡자, 편곡자로 활동하다 1938년 글렌 밀러 악단을 결성하였다. 글렌 밀러는 베니 굿맨과 함께 뉴올리언스 흑인재즈에서 벗어나, 미국의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스윙재즈를 확립한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으로 손꼽힌다.1942년 자원입대하여 위문공연 차 유럽을 방문하던 때, 영국해협에서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를 당해 4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의 전기를 다룬 영화 ‘Glenn Miller Story(1954. 안토니 맨 감독, 제임스 스튜어트 주연)’가 만들어질 만큼, 글렌 밀러는 대중적인 인기와 국민적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재즈 뮤지션이다. Moonlight Serenade(1939, RCA Bluebird)은은한 달빛이 흐르는 듯 트롬본과 클라리넷, 트럼펫 등 금관 악기가 빚는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더욱 놀랍다. 누구나 한번 들으면 ‘아! 글렌 밀러 악단이구나’라고 알아차릴 만큼, 유려하고 세밀한 연주가 돋보이는 대표곡이다. In the Mood(1939, Bluebird)빅밴드 스윙재즈의 진수를 보여주는 곡이다. 일사불란하게 연주하는 금관 악기의 경쾌한 사운드와 트롬본의 독특한 매력이 무한 발산되는 신나는 스윙 댄스곡이다. 베니 굿맨의 ‘Sing Sing Sing’과 더불어 빅밴드 스윙 재즈의 전설적인 곡으로 남아있다. 제이 존슨(J. J. Johnson, 1924-2001)미국 인디아나주에서 태어나 14세 때부터 트롬본을 불기 시작한 그는 색소폰 연주자인 레스터 영의 영향을 받아 트롬본의 부드러운 음색과 중후한 사운드를 표현한 연주자이다.19세 때부터 클래런스 러브(Clarence Love) 악단과 스누쿰 러셀(Snookum Russel) 악단에서 리더로 활동하였고 그 후 베니 카터(Benny Carter), 카운트 베이시(Count Baisie) 악단 등 유명 악단에서 트롬본주자로 활동했다. 그 밖에도 찰리 파커, 마일스 데이비스, 스탄 게츠 등 최고의 재즈 뮤지션과 협연 및 레코딩하며 명성을 쌓았다. Modern Jazz Trombone Series(1949, Prestige)제이 존슨 특유의 부드럽고 중후한 사운드의 트롬본 연주의 백미를 느낄 수 있는 앨범이다. 특히 소니 스팃(Sonny Stitt)의 색소폰과 버드 파웰(Bud Powell)의 피아노가 어우러진 박진감 넘치는 제이 존슨의 연주는 멋진 조화를 이룬다. At the Opera House(1957, Verve)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The Oscar Peterson Trio)가 반주를 맡은 라이브 공연으로 귀에 착착 감기는 스탄 게츠의 감성 넘치는 색소폰, 따스하고 중후한 제이 존슨의 트롬본과의 하모니를 듣노라면, 왜 이 앨범이 재즈사에서 레전드 앨범으로 일컬어지는지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위클리프 고든(Wycliffe Gordon, 1967- )미국 조지아 주 출신 트럼보니스트. 클래식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로부터 음악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링컨 재즈센터 오케스트라의 수석 트롬본주자로 활동하면서 지휘와 작곡, 편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위클리프 고든 콰르텟과 연주한 13개의 솔로 앨범과 7개의 공동 제작 앨범 등 수많은 앨범을 발표하였으며, 현재 맨해튼 음대 재즈아트프로그램 학부에서 재즈 후학 양성에 열정을 쏟고 있다. Standards Only (2007, Nagel Heyer)위클리프 고든 콰르텟이 발표한 앨범으로 피아노, 베이스, 트럼펫 모두 최고의 실력자들이 환상적인 사운드를 들려준다. ‘Stardust’, ‘Georgia on my mind’ 등 잘 알려진 재즈 명곡들과 스윙 곡, 애잔한 발라드 곡들이 수록되어 대중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앨범이다. Dreams of New Orleans(2012, Chesky Record)제목이 시사하듯 미국 초기 재즈인 뉴올리언스 재즈를 현대적 버전으로 재해석한 앨범이다. 위클리프 고든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편안하고 자유로운 트롬본 연주가 매력적이다. (월간색소폰)전현숙 칼럼니스트= suyeo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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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19
  • [MATCHING PARTNER] 하늘을 뚫는 악기 ‘트롬본(Trombone)’
    어릴 적 취주 악단이나 군대의 마칭 밴드(Marching Band) 공연을 본 이들은 기억하리라. 악단 맨 앞자리에 도열해, 길고 큼지막한 악기를 하늘로 뻗으며 보무도 당당히 행진하던 나팔수들을. 그들이 연주하던 악기가 바로 트롬본이다. 맨 앞에 서는 이유는 사실, 팔을 뻗을 때 앞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중저음을 담당하는 악기지만 그 소리는 장엄하고 웅장하다. 외관이 화려한 만큼 소리와 동작으로 하늘을 뚫을 듯한 트롬본은 금관악기 가운데 단연 스타로 손꼽힌다. 트롬본의 역사 트롬본(Trombone)의 어원은 이탈리아어로 ‘큰 트럼펫’이라는 뜻에서 파생하였다. 영국에서는 트롬본이라는 명칭 대신, 르네상스 시대부터 색벗(Sackbut)이라고 불렀다. 색벗은 현대 트롬본과 비교할 때 벨이 작고 슬라이드 내경(bore)이 작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색벗은 슬라이드 내경과 벨 크기가 점차 커져 현재의 트롬본으로 발전했다. 독특한 슬라이드 구조와 따뜻한 음색이 잘 울려 퍼져, 많은 작곡가들이 신성하고 종교적인 악기로 여겼으며 주로 교회 예배용 악기로 연주되었다. 이렇듯 트롬본은 종교음악 연주에 주로 쓰여 지다가, 베토벤에 이르러 교향악단에 포함되어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비롯해 6번과 9번에 등장하면서 슈베르트와 멘델스존, 슈만을 거치면서 금관악기의 주요 파트를 담당하게 된다. 재즈에서는 초창기 뉴올리언스 재즈 시대부터 트롬본이 등장한다. 당시 미국은 숱한 전쟁을 치렀는데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창단된 군대 악단에서 트롬본은 빠질 수 없는 악기였다. 전쟁이 끝나자 군인들이 버리고 간 신기한 서양 악기로 흑인들이 아프리카 토속 멜로디를 연주하면서 미국 재즈가 탄생하게 된다. 트롬본은 색소폰, 트럼펫과 더불어 재즈 악단에서 주요 혼(Horn) 섹션을 담당하며, 특유의 웅장한 중저음 사운드로 악단의 연주를 더욱 파워풀하고 풍성하게 해 주는 스타로 부상한다. 트롬본의 구조반음계 연주가 자유로운 목관 악기와 달리, 금관 악기들은 반음계 연주를 위해 여러 방법들을 동원하였다. 클라리넷처럼 키를 사용하거나, 밸브 혹은 슬라이드를 더하기도 하였다. 슬라이드를 사용하여 반음계 연주가 가능토록 고안 된 악기가 트롬본이다. 연주자가 음을 조절하기 위해 오른 손으로 밀고 당기는 부분이 바로 슬라이드다. 대부분 관악기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이어져오며 구조상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트롬본은 벨과 마우스피스를 제외하고 개발 당시부터 지금까지 큰 변화 없이 원래의 모습을 유지해 온 드문 악기다. 트롬본은 소리를 확대시켜주는 벨과 음정을 조절하는 슬라이드, 마우스피스로 구성된 악기다. 소재는 놋쇠, 크롬, 니켈이다. 전체 길이는 약 113cm이며 길이의 약 2/3가 관으로 구성되어있고 나팔에 가까워지면서 원추형을 이룬다. 나팔의 직경은 약 7인치이다. 음역에 따라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로 나누어진다. 하지만 소프라노 트롬본은 차츰 자취를 감추고 주로 테너 트롬본이 연주용으로 널리 사용된다. 마성의 중저음, 트롬본의 매력프랑스의 작곡가 베를리오즈는 “트롬본은 관악기 중 진정한 우두머리며 하나의 웅장한 서사시다.”며 트롬본의 음색을 극찬하였다. 종교적인 평온함과 당당하고 우렁찬 사운드를 내면서 엄숙하고도 강력한 음색을 지닌 마성의 악기가 바로 트롬본이다. 때로는 깊은 신음을 토하듯 저음은 사뭇 비장하고, 때로는 한없이 부드럽게 다가와 구름처럼 폭신한 음색을 전해준다. 또한 트롬본은 사람의 목소리와도 잘 어울릴 뿐 아니라 동일한 선율을 낼 수 있어 성악곡에서 합주 악기로 인기가 많다. 부드러운 선율로 서정미를 극대화 시키며 시적 감성을 더해준다.반면, 고음에 이르면 긴장감과 흥분을 고조시켜주면서 특유의 웅장한 사운드로 다른 관악기를 삼켜버린다. 오케스트라에서는 트럼펫과 더불어 피아니시모(pp, 매우 여리게)부터 포르티시모(ff, 더욱 세게)에 이르기까지 넓은 표현력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트럼펫과 동시에 연주할 때면 다른 악기가 도저히 따라 올 수 없는 파워풀하고 압도적인 강렬한 사운드를 낸다. 재즈역사와 함께 한 트롬본스윙 시대의 트롬본 연주자들은 더욱 빠른 연주와 기교를 바탕으로 트롬본의 위치를 격상시켰다. 30년 대 중반, 튜바(tuba) 연주자였던 존 커비(John Kirby)는 단순한 리듬을 연주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트롬본의 영역을 더욱 다양하게 넓혔다. 그의 솔로 연주는 다른 악기 파트와 동등한 대우를 받으면서 하모니의 대가로 군림하였다.재즈계의 가장 유명한 트롬본 연주자로 손꼽히는 글렌 밀러는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지휘자겸 트롬본주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또한 글렌 밀러에게 영향을 끼친 토미 도시(Tommy Dorsey)는 독특한 저음부의 빠른 연주로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40년대에 이르러 트롬본은 색소폰, 트럼펫과 더불어 솔로 악기로 부상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은 자신의 밴드에서 트롬본 주자로 활약하던 샘 낸톤(Sam Nanton)을 위해 많은 트롬본 솔로 곡들을 작곡해주었던 만큼 트롬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다. 샘 낸톤은 자신이 쓰던 모자로 관의 앞부분을 소음기처럼 사용해 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하면서 독특한 연주를 펼쳤다. 훗날 많은 트롬본 연주자들이 그를 흉내 내어 모자로 소음기 역할을 하며 연주하는 유행을 낳기도 하였다. 클래식과 재즈 그리고 대중음악과 록뮤직에 이르기까지 트롬본의 활약은 폭넓고도 다채롭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슬라이드의 움직임으로 인해 트롬본은 듣는 악기뿐만 아니라 보는 재미까지 더해주는 매력적인 악기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글렌 밀러(Glenn Miller, 1904-1944)미국 아이오와 주에서 태어난 독일계 미국인이다. 어릴 적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코넷과 만돌린을 연주하였고 12세 때 부터 트롬본을 시작하였다. 레드 니콜스(Red Nichols), 도시 브라더 밴드(Dorcey Brother band) 등에서 연주자, 작곡자, 편곡자로 활동하다 1938년 글렌 밀러 악단을 결성하였다. 글렌 밀러는 베니 굿맨과 함께 뉴올리언스 흑인재즈에서 벗어나, 미국의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스윙재즈를 확립한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으로 손꼽힌다.1942년 자원입대하여 위문공연 차 유럽을 방문하던 때, 영국해협에서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를 당해 4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의 전기를 다룬 영화 ‘Glenn Miller Story(1954. 안토니 맨 감독, 제임스 스튜어트 주연)’가 만들어질 만큼, 글렌 밀러는 대중적인 인기와 국민적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재즈 뮤지션이다. Moonlight Serenade(1939, RCA Bluebird)은은한 달빛이 흐르는 듯 트롬본과 클라리넷, 트럼펫 등 금관 악기가 빚는 부드러움과 섬세함이 더욱 놀랍다. 누구나 한번 들으면 ‘아! 글렌 밀러 악단이구나’라고 알아차릴 만큼, 유려하고 세밀한 연주가 돋보이는 대표곡이다. In the Mood(1939, Bluebird)빅밴드 스윙재즈의 진수를 보여주는 곡이다. 일사불란하게 연주하는 금관 악기의 경쾌한 사운드와 트롬본의 독특한 매력이 무한 발산되는 신나는 스윙 댄스곡이다. 베니 굿맨의 ‘Sing Sing Sing’과 더불어 빅밴드 스윙 재즈의 전설적인 곡으로 남아있다. 제이 존슨(J. J. Johnson, 1924-2001)미국 인디아나주에서 태어나 14세 때부터 트롬본을 불기 시작한 그는 색소폰 연주자인 레스터 영의 영향을 받아 트롬본의 부드러운 음색과 중후한 사운드를 표현한 연주자이다.19세 때부터 클래런스 러브(Clarence Love) 악단과 스누쿰 러셀(Snookum Russel) 악단에서 리더로 활동하였고 그 후 베니 카터(Benny Carter), 카운트 베이시(Count Baisie) 악단 등 유명 악단에서 트롬본주자로 활동했다. 그 밖에도 찰리 파커, 마일스 데이비스, 스탄 게츠 등 최고의 재즈 뮤지션과 협연 및 레코딩하며 명성을 쌓았다. Modern Jazz Trombone Series(1949, Prestige)제이 존슨 특유의 부드럽고 중후한 사운드의 트롬본 연주의 백미를 느낄 수 있는 앨범이다. 특히 소니 스팃(Sonny Stitt)의 색소폰과 버드 파웰(Bud Powell)의 피아노가 어우러진 박진감 넘치는 제이 존슨의 연주는 멋진 조화를 이룬다. At the Opera House(1957, Verve)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The Oscar Peterson Trio)가 반주를 맡은 라이브 공연으로 귀에 착착 감기는 스탄 게츠의 감성 넘치는 색소폰, 따스하고 중후한 제이 존슨의 트롬본과의 하모니를 듣노라면, 왜 이 앨범이 재즈사에서 레전드 앨범으로 일컬어지는지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위클리프 고든(Wycliffe Gordon, 1967- )미국 조지아 주 출신 트럼보니스트. 클래식 피아니스트였던 아버지로부터 음악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링컨 재즈센터 오케스트라의 수석 트롬본주자로 활동하면서 지휘와 작곡, 편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하고 있다. 위클리프 고든 콰르텟과 연주한 13개의 솔로 앨범과 7개의 공동 제작 앨범 등 수많은 앨범을 발표하였으며, 현재 맨해튼 음대 재즈아트프로그램 학부에서 재즈 후학 양성에 열정을 쏟고 있다. Standards Only (2007, Nagel Heyer)위클리프 고든 콰르텟이 발표한 앨범으로 피아노, 베이스, 트럼펫 모두 최고의 실력자들이 환상적인 사운드를 들려준다. ‘Stardust’, ‘Georgia on my mind’ 등 잘 알려진 재즈 명곡들과 스윙 곡, 애잔한 발라드 곡들이 수록되어 대중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앨범이다. Dreams of New Orleans(2012, Chesky Record)제목이 시사하듯 미국 초기 재즈인 뉴올리언스 재즈를 현대적 버전으로 재해석한 앨범이다. 위클리프 고든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편안하고 자유로운 트롬본 연주가 매력적이다. (월간색소폰)전현숙 칼럼니스트= suyeo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9-19
  • [JAZZ AGE]세계 재즈의 역사 '1940-1950년대 비밥에서 쿨 재즈로'
    (월간색소폰)이종우 칼럼니스트= 모던재즈의 시대인 1940년대는 관중들을 위한 음악이 아닌 연주자 중심의 음악으로 바뀌는 중요한 시기이다. 재즈의 황금기인 스윙시대에 수많은 연주자들이 등장했지만 2차세계대전 등의 미국의 재정난은 빅밴드의 해체로 이어지게 되었고, 클럽은 보다 저렴한 캄보밴드(Comb Band, 소편성 밴드)중심으로 바뀌어 갔다. 연주자들은 살아 남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해야 했고 이는 음악적인 발전과 함께 연주력의 상승을 촉구하기도 했다. 개인의 기량보다는 밴드 전체의 조화로움을 중요시하는 빅밴드 스타일은 즉흥 연주를 잘하는 연주자들에게는 아쉬움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캄보밴드 같은 소편성 악단에서는 솔로 연주자들이 각광을 받았고 이는 새로운 형태의 재즈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영화 ‘버드(Bird)’캔자스시티(Kansas City)의 어느 재즈클럽. 잼 세션(Jam session)이 한창인 이곳에 자신의 솔로 연주 순서를 기다리는 연주자들 사이에 앳댄 얼굴을 한 소년이 자신의 차례를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순서가 다가올수록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쿵쾅대는 심장 때문에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여기서 잘해야 카운터 베이시 악단에 들어갈 수 있다.’ 드디어 무대에 오른 소년은 자신의 갈고 닦은 연주 실력을 뽐내기 시작한다. 수많은 클럽을 다니며 존경하는 선배 연주자들의 기교를 보고 따라하며 쌓아올린 실력을 선배들 앞에서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소년의 연주는 절정에 이르렀다. 이제 자신의 꿈이 손을 뻗으면 잡힐 만큼 가까이 왔다. 그 순간 무대 중앙으로 조 존스(Jo Jones, 당시 카운터 베이시악단 드러머)의 심벌이 굉음을 내며 떨어진다. 연주는 순간 끊기고 관중들의 웃음소리만 가득 들린다. 연주하던 소년은 떨어진 심벌만 바라보며 무대 중앙에 멀뚱히 서 있을 뿐이다. 찰리 파커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버드 (Bird)’의 처음 부분이다. 비밥 색소포니스트 찰리 파커(Charlie Parker, 1920-1955)댄스홀의 저녁 연주가 끝난 후 삼삼오오 모인 연주자들이 자신들만의 특별한 잼 세션을 가지게 되는데, 뉴욕 52번가에 위치한 민튼즈 플레이하우스 (Minton's Play House)의 밤은 자신의 연주력을 뽐내기 위한 연주자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었다. 당시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1917-1993)는 민튼즈의 간판 스타였고 찰리 파커도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 당대 최고의 연주자로 명성을 얻어 가고 있었다. “민튼즈에서 인정받은 연주자는 어느 클럽에서도 인정받는 연주자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민튼즈 플레이하우스 클럽은 뛰어난 연주자들의 등용문이며 경합장 같은 곳이었다. 찰리 파커는 이런 정글 같은 곳에서 연주력이 가장 뛰어난 색소폰 주자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러나 20대 초반의 찰리 파커는 고향인 캔자스의 밴드생활에서부터 이미 마약중독으로 인해 멤버들과의 불화를 겪고 있었고, 획일화된 연주 방식에 낯설어하며 밴드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뉴욕 행을 결정하고 도착하였지만 가진 것이 하나도 없어서 뉴욕에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렇게 1939년 뉴욕 생활을 시작하던 찰리 파커는 당시 레스토랑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하던 아트 테이텀(Art Tatum, 1909-1956)의 연주를 들으며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당시 피아노의 신처럼 추앙받던 아트 테이텀의 연주를 듣는다는 것은 후에 찰리 파커의 음악적인 성향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찰리 파커의 변화무쌍한 코드 변화, 빠른 속주에도 무뎌지지 않는 정교한 텅잉은 아트 테이텀의 연주 스타일을 색소폰으로 옮겨 놓은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새로운 스타일의 연주와 편곡 방식이렇게 아트 테이텀은 찰리 파커의 연주를 어느 색소폰 연주자보다 빠르고 정확한 기교를 탑재하게 만들었으며 더욱 혁신적인 스타일로 바꾸어 놓게 된다. 그렇게 어려움을 극복하게 된 찰리 파커는 1940년대 초반 얼 하인즈 밴드에 있던 디지 길레스피를 만나게 된다. 밴드 일이 끝난 후 민튼즈 플레이하우스에서의 잼 세션을 통해 조금씩 이름을 알리며 디지 길레스피, 델로니 오스 몽크(Thelonious Monk, 1917-1982)와 함께 새로운 스타일의 연주와 편곡 방식을 정립해 나가게 된다. 빠른 속도에 격정적인 솔로와 스윙시대의 제한을 벗어난 리하모니제이션 (Reharmonization:기존의 코드를 새롭게 변화시키는 편곡)은 다른 재즈 연주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재즈를 예술적인 음악장르로 격상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새로운 재즈의 장르로서 비밥(Be Bop)1944년 디지 길레스피와 같이 작업한 앨범 ‘Be Bop’은 새로운 재즈의 장르로서 비밥(Be Bop)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시작점이 되었다. 이로써 재즈사에서 비밥의 공식적인 탄생을 알리고 스윙시대 이후 비밥시대가 새롭게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수준 높은 연주와 편곡을 인정하기에 준비되지 못한 대중들은 여전히 스윙의 달달함에 젖어 있었다. 오로지 재즈의 식견이 높은 소수 마니아 층에게서만 사랑받는 음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5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찰리 파커는 비밥의 최고봉으로 인정받게 된다. 많은 연주자들이 찰리 파커의 속주를 모방하며 따라 했고, 찰리 파커의 음악적인 아이디어들은 다른 연주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처럼 비범한 연주력과 혁신적인 편곡에도 일찍 빛을 보지 못한 것은 비밥의 어려움도 이유가 되겠지만 찰리 파커 본인의 사생활이 매우 좋지 못함의 이유도 있었다. 술과 마약 중독으로 인해 연주를 펑크 내기 일쑤였고 만취 상태에서 담배를 피우다 호텔 침대를 태워 불을 내는 등 갖은 기행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자서전에 보면, 찰리 파커가 호텔 침대 위에 올려놓은 자신의 트럼펫을 훔쳐 마약을 사는 데 썼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1954년 딸 프라이어스의 죽음은 그를 더욱 나락으로 빠지게 했다. 결국 1955년 클럽 공연 중에 클럽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쫓겨나 35세의 나이에 짧은 생을 호텔방에서 쓸쓸하게 마감하게 된다. 부검을 담당한 의사가 술과 마약 등으로 망가져 버린 그의 시신을 60대 노인으로 판정할 정도였다 한다. 디지 길레스피와 함께 비밥의 창시자로서 최고의 기교와 속주를 가진 비운의 천재는 재즈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사라졌고, 이후의 모든 재즈 연주자들은 재즈를 예술로 승화시킨 찰리 파커의 덕을 보게 되며 재즈는 더욱더 큰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 현재도 찰리 파커를 기리는 페스티벌이 매년 미국에서 열리고 있고 전 세계 재즈클럽에서는 그의 곡과 크고 작은 공연들이 계속해서 열리고 있다. 쿨재즈 시작(The Birth of the Cool)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스윙재즈는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인 유행을 타게 되었고 그에 대한 거부감은 비밥재즈를 탄생시켰다. 재즈가 비밥(BeBop)으로서의 예술성을 인정받으며 이후 재즈사에 나오는 거의 모든 스타일에 영향을 주게 된다. 그러나 비밥은 예술성과는 반비례하게 대중적인 인기와는 멀어져가게 된다. 연주자들은 너도나도 할 거 없이 비밥을 연주했고 예술성을 겸비한 비밥 재즈는 단단한 마니아 층을 만들어 가며 발전된 형태로 나아갔다. 그렇다고 스윙이 사라지고 비밥만 남은 것은 아니다. 여전히 다운타운에서는 스윙이 계속 연주되었고, 듀크 엘링턴, 루이 암스트롱 등의 스윙재즈 연주자들의 인기는 여전했다. 오히려 대중들은 비밥은 어렵다는 편견을 가지게 되고 전통재즈인 뉴올리언즈 스타일이나 딕시랜드 스타일이 다시금 인기를 얻게 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하였다. 하지만 비밥의 시작은 다운타운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악사들이 관중들을 의식하지 않고 즐기려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시작되었기에 굳이 대중적인 인기를 의식할 필요는 없었기에 연주자 자신이 즐겁기 위한 연구들이 계속 진행되었다. 더욱 격렬해지고 빨라지며 뜨거워지기에 이를 ‘핫 재즈’(Hot Jazz)라 통칭하였으며 후에 이에 반대되는 의미의 ‘쿨 재즈’(Cool Jazz)의 출현을 만들게 되었다. 쿨재즈(Cool Jazz)쿨재즈는 핫재즈와 대조되는 개념이다. 비밥의 뜨거운 연주 스타일과는 다르게 다이나믹과 비브라토는 절제되고 스마트한 느낌이며 서정적인 멜로디가 특징이다. 리듬 파트(드럼, 피아노, 베이스)는 여전히 격렬하지만 좀 더 지적이고 계획적이다. 클래식의 대위법(두 개 이상의 멜로디가 조화롭게 움직이는 작곡법)을 이용하여 작곡한 곡들이 많아 조화로움을 추구하는 라인들이 많다. 주로 클래식 이론 교육을 받은 백인 연주자들에 의해 연주되었지만 시작은 흑인 트럼펫터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1926-1991)의 ‘쿨의 탄생’(The Birth of Cool)으로 대중 앞에 나오게 되었다.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1926-1991)마일스 데이비스는 찰리 파커 퀸텟(5중주)에 디지 길레스피 대신 연주를 하게 되면서 비밥 연주자로서 그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찰리 파커의 연주를 보러간 마일스 데이비스는 현장에서 병가를 낸 트럼펫 연주자 대신 연주할 기회를 얻었고 찰리 파커에게 뉴욕에 오면 찾아오라는 말을 듣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줄리어드에 합격한 마일스 데이비스는 뉴욕에서 찰리 파커를 만났다. 그리고 이듬해 9월 줄리어드 음대를 관두고 곧바로 찰리 파커 팀에 합류하여 비밥에 중심에서 찰리 파커와 함께 활동하게 된다. 얼마 가지 않아 술과 마약에 찌든 찰리 파커 대신에 팀의 실질적인 리더를 맡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후에 마일스 데이비스가 자신의 밴드를 이끄는 데 유용한 자산이 되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자서전에 보면, 찰리 파커의 음악적인 천재성과 존경심 이면에 아쉬움과 원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찰리 파커 작품인 ‘도나리’(Donna Lee)는 헤로인 중독으로 제 시간 안에 쓰지 못한 곡을 마일스 데이비스가 대신 써서 보낸 곡이다.결국 마일스 데이비스는 디지 길레스피처럼 찰리 파커를 떠나게 되었고 이후 길 에반스(Gill Evans,1912-1988)를 만나 쿨재즈의 전신인 노넷(Nonet 9인조)을 결성하게 된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노넷은 디지 길레스피와 찰리 파커의 화려한 비밥에 대안적인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였다. 그리하여 1954년 게리 멀리건(Gerry Mulligan)과 길 에반스 편곡으로 ‘Birth of Cool’이 발표 되었고 마일스 데이비스는 쿨재즈의 창시자로 역사에 새로운 주류를 만들어가게 된다. 쿨재즈는 이후 서부 지역의 백인 연주자들 중심으로 발전하게 된다.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 폴 데스몬드(Paul Desmond), 쳇 베이커(Chet Baker), 스탄 게츠(Stan Getz) 그리고 브라질 작곡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Antonio Carlos Jobim) 등이 쿨을 대표하는 연주자들이고 이들의 음악은 차분하고 세련되다. 흔히 재즈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권하는 재즈음반들은 쿨재즈 시대에 발표된 곡들이 많다. 미국 서부 스타일의 웨스트코스트재즈(West Coast Jazz)는 쿨재즈와 미국서부 해안의 풍요롭고 온화한 기후의 영향으로 아름답고 달달한 스타일로 발전하고 유행하게 된다. 글 Ι 이종우 경성대 동주대 외래 교수suyeo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9-13
  • 대한민국 소비자만족도 1위 수상기념 '2018 경연대회'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2018년 7월 28일 평택 북부문예회관에서 <킴스색소폰> 경연대회가 있었다. 이번 경연대회는 동아일보와 마케팅 포럼에서 실시한 ‘대한민국 소비자만족도 1위’에서 악기 부문으로 영예의 대상을 받아 이를 기념하고자 개최되어 시작 전부터 많은 이목을 끌었었다.이번 대회는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E.S.Q의 초청연주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쉼 없이 진행되었으며, 더욱 공정한 심사를 위해 갖춰진 무대에서 외부의 잡음 없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경연대회의 심사위원은 현재 킴스색소폰과 킴스코리아의 고문이자 <서울내셔널심포니오케스트라> 제작 감독을 맡고 있는 ‘김병수’, 대표곡 <불나방>과 <강태공>으로 유명한 가수 ‘김재이’ 그리고 미국의 재즈 보컬 ‘사라 본’, ‘헬렌 매릴’등 유명재즈연주가들과 다수 협연 및 ‘스위스 몽트뢰 재즈페스티벌’, ‘네덜란드 노우스시 재즈페스티벌’ 등 해외의 다수 지역에서 초청연주와 작, 편곡 및 교육자와 연주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Kose Kikuchi’가 맡았다. 이번 대회의 시상 부문은 청년·전공부, 중년부, 장년부, 합주부로 나누어 졌으며 각 부문 대상, 우수상, 장려상 그리고 특별상으로 최연소 참가자와 최고령 참가자로 나누어 주어졌다. 청년·전공부의 수상자는 대상 ‘김경민’, 우수상 ‘김지웅’, 장려상 ‘진혜원’ 중년부로는 대상 ‘박은정’, 우수상 ‘지영휘’, 장려상 ‘태형’ 장년부로는 대상 ‘최현기’, 우수상 ‘김종선’, 장려상 ‘이정진’ 합주부문은 대상 ‘색소퍼니’, 우수상 ‘나눔팝스 앙상블’, 장려상 ‘비바앙상블’로 수준 높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2009년생 최연소 참가자부터, 1938년생 최고령 연주자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참가하여, 다채로운 연령대에게 사랑받고 있는 <킴스색소폰>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년부 대상 박은정 참가자는 “이번 대회로 받은 좋은 색소폰으로 열심히 연습하여 멋진 연주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기쁨을 전했고, 장년부 대상 최현기는“이번 대회를 주최하신 킴스코리아 색소폰 ‘김병호’ 사장님과 후원해주신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번에 부족한 저에게 큰상을 주셔서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며 수상소감을 전했다. 이번 대회의 심사위원을 맡은 ‘김병수’는 “아마와 프로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높은 연주 실력에 심사가 힘들었다”며 참가자들의 높은 수준을 칭찬하였고, 일본인 심사위원인 ‘Kose Kikuchi’는 “킴스색소폰 주최의 경연대회 수준이 이렇게 높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색소폰 인구 100만 명을 넘는다는 한국의 색소폰 수준이 인구 두배나 되는 일본과 비교해도 쳐지지 않은 수준이었다고 본다. 대중음악을 중심으로 이렇게 훌륭한 전국적인 색소폰 대회가 있다는 것이 부럽다. 한국인들의 음악 사랑에 감동하였다.”라고 전하며 심사 소감을 밝혔다. 글Ι안지인 기자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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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01
  • 대한민국 소비자만족도 1위 수상기념 '2018 경연대회'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2018년 7월 28일 평택 북부문예회관에서 <킴스색소폰> 경연대회가 있었다. 이번 경연대회는 동아일보와 마케팅 포럼에서 실시한 ‘대한민국 소비자만족도 1위’에서 악기 부문으로 영예의 대상을 받아 이를 기념하고자 개최되어 시작 전부터 많은 이목을 끌었었다.이번 대회는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E.S.Q의 초청연주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쉼 없이 진행되었으며, 더욱 공정한 심사를 위해 갖춰진 무대에서 외부의 잡음 없이 순차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경연대회의 심사위원은 현재 킴스색소폰과 킴스코리아의 고문이자 <서울내셔널심포니오케스트라> 제작 감독을 맡고 있는 ‘김병수’, 대표곡 <불나방>과 <강태공>으로 유명한 가수 ‘김재이’ 그리고 미국의 재즈 보컬 ‘사라 본’, ‘헬렌 매릴’등 유명재즈연주가들과 다수 협연 및 ‘스위스 몽트뢰 재즈페스티벌’, ‘네덜란드 노우스시 재즈페스티벌’ 등 해외의 다수 지역에서 초청연주와 작, 편곡 및 교육자와 연주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Kose Kikuchi’가 맡았다. 이번 대회의 시상 부문은 청년·전공부, 중년부, 장년부, 합주부로 나누어 졌으며 각 부문 대상, 우수상, 장려상 그리고 특별상으로 최연소 참가자와 최고령 참가자로 나누어 주어졌다. 청년·전공부의 수상자는 대상 ‘김경민’, 우수상 ‘김지웅’, 장려상 ‘진혜원’ 중년부로는 대상 ‘박은정’, 우수상 ‘지영휘’, 장려상 ‘태형’ 장년부로는 대상 ‘최현기’, 우수상 ‘김종선’, 장려상 ‘이정진’ 합주부문은 대상 ‘색소퍼니’, 우수상 ‘나눔팝스 앙상블’, 장려상 ‘비바앙상블’로 수준 높은 연주를 들려주었다. 2009년생 최연소 참가자부터, 1938년생 최고령 연주자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참가하여, 다채로운 연령대에게 사랑받고 있는 <킴스색소폰>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년부 대상 박은정 참가자는 “이번 대회로 받은 좋은 색소폰으로 열심히 연습하여 멋진 연주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기쁨을 전했고, 장년부 대상 최현기는“이번 대회를 주최하신 킴스코리아 색소폰 ‘김병호’ 사장님과 후원해주신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번에 부족한 저에게 큰상을 주셔서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며 수상소감을 전했다. 이번 대회의 심사위원을 맡은 ‘김병수’는 “아마와 프로의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높은 연주 실력에 심사가 힘들었다”며 참가자들의 높은 수준을 칭찬하였고, 일본인 심사위원인 ‘Kose Kikuchi’는 “킴스색소폰 주최의 경연대회 수준이 이렇게 높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색소폰 인구 100만 명을 넘는다는 한국의 색소폰 수준이 인구 두배나 되는 일본과 비교해도 쳐지지 않은 수준이었다고 본다. 대중음악을 중심으로 이렇게 훌륭한 전국적인 색소폰 대회가 있다는 것이 부럽다. 한국인들의 음악 사랑에 감동하였다.”라고 전하며 심사 소감을 밝혔다. 글Ι안지인 기자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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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01
  • [MUSIC ESSAY]벨기에 디낭에서 아돌프 삭스를 만나다.
    (월간색소폰)박형섭 칼럼니스트= 디낭, 색소폰의 고향디낭은 벨기에 남동쪽 프랑스에 인접한 국경 도시이다. 색소폰의 발명가 아돌프 삭스의 고향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도원 맥주 레페 브라운(Leffe Brune)의 본산이다. 나는 프랑스 국경도시 샤를빌-메지에르에서 자동차로 출발해 오십분 가량 달려 디낭에 닿았다. 울창한 아르덴 숲을 통과하자 강가에 거대한 암벽이 우뚝 서 있는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아기자기한 건축물이 뮈즈강을 따라 조화롭게 늘어서 있었다. 전형적인 유럽의 예쁜 소도시 정경이다. 오는 길에 마주쳤던 선사시대 종유석 동굴과 대저택들의 안내판이 떠올랐다. 강과 숲 깊숙이 들어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강변 숙소에 짐을 풀고 산책에 나섰다. 강 건너편에 강과 나란히 기찻길이 나 있었다. 강가를 따라 조금 걷자 암벽이 병풍처럼 비호하는 노트르담 성당에 이르렀다. 성당 앞은 사방으로 길이 퍼져나가는 마을의 교차로였다. 그 중 하나는 다리로 이어졌다. 샤를 드골 대교였다. 성당 앞 광장을 돌아 다리로 들어섰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다리 양편 보도에 다채로운 색깔의 색소폰 조형물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있었다. 헤아려보니 모두 스물일곱 개였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세상의 유일한 색소폰 다리였다. 과연 색소폰의 탄생지다웠다. 이렇게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에서 색소폰이 탄생하다니! 예로부터 디낭은 동과 놋쇠제품의 산지로 유명했다. 이 마을에 아돌프 삭스라는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뛰어난 악기제작자였다. 소년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공방에서 놀며 아버지의 악기 제작을 보고 자랐다. 여섯 살 때 소년은 아버지가 만든 클라리넷에 구멍을 내고 나팔 모양으로 돌려 깎아보기도 했다. 아버지의 공방은 소년의 놀이터였고, 아버지가 만든 악기들은 소년의 장난감이었다. 집요하게 조립하고 변형하기를 반복하면서 소년이 얻고자 한 것이 있었다. 새로운 소리였다. 새로운 소리에 대한 열정은 소년의 상상력을 끝없이 자극했다. 소년은 열다섯 살에 브뤼셀 산업박람회에 상아로 만든 플루트와 클라리넷을 출품했다. 스무 살 때에는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베이스 클라리넷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소년은 어른이 되어서도 음악이론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직접 악기를 연주하면서 악기개량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현악기와 관악기 사이의 음색, 나아가 금관과 목관악기의 음색의 차이를 탐구했다. 실험과 창조정신으로 거듭된 실패를 물리치고 마침내 원추관 모양의 새로운 악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목관도 금관도 아닌 음색, 탁하면서 동시에 청아한 음색의 악기, 바로 오늘의 색소폰이다. 색소폰은 현악기의 유연성, 목관악기의 음색, 금관악기의 음량을 겸비한 악기가 되었다. 나는 샤를 드골 대교 위의 휘황찬란한 색소폰들을 감상하며 다리를 건너갔다가 다시 건너왔다. 마치 색소폰들의 공연장 한가운데를 걷는 듯 환상적이었다. 저녁 바람은 상쾌하고 강물은 유유히 흘러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아돌프 삭스의 집(La Maison de Monsieur Sax)으로 향했다. 길가에 마음씨 좋게 생긴 중년사내가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돌프 삭스씨!” 그러자 그는 오래 사귀어온 지인처럼 미소를 머금고 나를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내 귀에 속삭였다. “바로 이 집에서 내가 악기들을 실험하며 색소폰을 만들었지.” 나는 그의 어깨 너머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색소포니스트란 걸 알고 있다는 듯 집안으로 안내했다. 나는 그를 따라 내부를 둘러보며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 색소폰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아돌프 삭스와의 대화아돌프 삭스 씨를 만나다니 꿈만 같아요. 이 집에서 태어났고, 여기서 색소폰을 발명하셨나요. 예, 그래요. 난 여기서 1814년 11월 6일에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악기제작자였지요. 당시 맏아들이 어려서 아버지 기술을 배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때는 악기를 만든 사람이 바로 실험을 하던 때라 나도 일찍 악기 다루는 법을 익혔어요. 그래서 플루트와 클라리넷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어요. 색소폰은 기존의 클라리넷, 오피클라이드 등의 소리원리를 탐구하면서 그 악기들을 개량해 만들게 된 것입니다. 색소폰을 발명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원래 오케스트라에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였죠. 내가 현악기와 관악기, 금관과 목관악기의 음색을 비교해보니 현악기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걸 알았어요. 또 밴드에선 금관악기가 목관악기를 압도하지요. 난 이런 간극을 보완할 수 있는 악기를 찾으려고 했어요. 우선 새로운 저음악기의 연구에 몰두했죠. 그래서 베이스 클라리넷을 만들게 되었고, 그것과 저음 관악기 오피클라이드를 참조해서 베이스 색소폰을 만들었어요. 한마디로 목관악기인 베이스 클라리넷의 마우스피스와 금관악기인 오피클라이드의 황동 몸체를 결합시켜서 새로운 저음 관악기인 베이스 색소폰이 탄생한 것이지요. 이 베이스 색소폰은 오케스트라에서 저음 목관과 금관악기를 연계하는 중간 역할을 하리라 기대했어요.당신의 색소폰의 특징과 활용도를 설명해주세요. 주요 재료는 황동(brass)입니다. 벨을 원뿔 형태로 하여 싱글리드와 마우스피스를 사용해요. 색소폰의 발음체가 갈대로만든 리드이고 공명되는 몸체는 금속인 것이지요. 이것이 특이한 음질을 생성해요. 결국 목관과 금관의 혼성된 음질인 셈이죠. 색소폰은 내부구조상 여러 악기의 특색이 합쳐진 소리가 나와요. 현악기의 유연성, 목관악기의 음색, 금관악기의 음량까지 겸비하고 있어요. 음역(音域)이나 음질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고, 소리의 다양한 뉘앙스(nuance)를 창조할 수 있어요. 알토와 테너색소폰은 독주, 실내악, 경음악, 관현악 등에, 소프라노와 바리톤색소폰은 경음악 이외에 색소폰 실내악 관악 합주에, 베이스 색소폰은 관악합주 등에 사용됩니다. 황동으로 만들었다면 금관악기가 아닌가요. 목관과 금관악기의 구분은 원래 악기의 재질로 구분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어떤 방식으로 소리를 발생시키고, 어떻게 음계를 구성하는가에 있습니다. 색소폰은 목관악기인클라리넷과 유사한 마우스피스와 나무 리드를 사용하고, 목관악기와 같은 원리의 키시스템을 활용하기 때문에 목관악기로 분류됩니다.색소폰이란 이름은 누가 지었나요. 색소폰은 내가 만든악기이니, 내가 창조한 소리란 뜻이지요. 그래서 내 이름 삭스(Sax)와 소리라는 뜻의 폰(phone)이 합쳐져서 ‘삭스의 소리’가 된 것이죠. 삭스가 영어식으로 색스로 발음되어서 색소폰이 된 것입니다. 벨기에나 프랑스에선 여전히 삭소폰으로 불러요.색소폰 특허를 프랑스에서 받았다고요. 예, 맞아요. 파리는 나의 본거지였어요. 28살, 그러니까 1842년에 파리로 이주해서 죽을 때까지 살았어요. 색소폰 특허는 정확히 1846년 6월 22일 파리에서 받았어요. 바로 이 날이 색소폰의 탄생일인 셈이죠. 난 이 악기를 오케스트라용과 군악대용, 두 그룹으로 나누어 특허를 냈어요. 오케스트라용으로는 C키와 F키를 기본음으로 시리즈를 만들었고, 군악대용으로는 Bb키와 Eb키를 기본음으로 또 하나의 시리즈를 만들었지요. 나의 특허가 1866년 만료되면서 이후 다른 사람들도 색소폰 제작에 뛰어들게 된 것입니다.처음에 악기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요. 파리에 색소폰이 등장하자 음악가들로부터 환호를 받았어요. 색소폰이 리드가 있는 금속제 목관악기라는 점에 큰 매력을 느꼈지요. 무엇보다도 음량이 풍부하고 소리가 유연하며 세기 조절도 용이하다며 신기해했죠. 낮은 B플랫부터 세 옥타브의 음역에 운지법이 클라리넷이나 플루트와 비슷해 다루기도 쉬웠죠. 또한 리드가 있어서 소리의 강약 조절이 수월했어요. 고음역의 소리는 매우 강하게 울리기 때문에 선율적인 표현에 유용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유명한 음악가 장 조르주 카스트너(Jean Georges Kastner)는 오페라에 색소폰을 사용한 최초의 작곡가입니다. 그는 1843년에 초연된 오페라 <유다의 마지막 왕>(Le Dernier Roi de Juda)에서 C조 베이스 색소폰을 사용했는데, 난 바로 그 공연에서 베이스 색소폰을 맡아 연주했어요. 당신의 편에서 도움을 주거나 후원한 사람들도 있었지요. 프랑스왕 루이 필립 1세, 파산으로부터 구해준 나폴레옹 3세, 뤼미니(Rumigny) 장군, 벨기에 주재 프랑스대사 다니엘 프랑수아 오베르(Daniel-François Auber)등은 적극적으로 나를 도왔지요. 초창기에 색소폰이 군악대에서 대대적으로 환영받은 것은 그들의 도움이 컸어요. 그리고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헥토르 베를리오즈, 메이어비어, 할레비, 로시니 등 저명한 음악가들은 색소폰의 음색이 매우 아름답다며, 미래에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할 것이라 확신했어요. 바로 당신처럼 전 세계 사람들이 즐기고 있으니 그들의 판단이 적중한 것이지요.파리에 사업장을 열었지요? 그리고 색소폰에 반감을 표한 사람들은 왜 그랬나요. 예, 파리 북쪽 당쿠르 거리에 가게를 열었어요. 그리고 작곡가들을 찾아다니며 새 악기를 홍보했지요. 그들은 악기를 품평할 수 있는 최적의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베를리오즈는 벨 모양의 색소폰을 보더니 소리의 방향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고, 소리의 유실을 막아 음량을 증가시켰다고 호평하더군요. 베를리오즈가 최초의 색소폰 곡 <신성한 노래>을 작곡했어요. 우린 첫 만남 이후 친구가 되었어요. 그는 1842년 6월 12일 <논쟁>(Journal des Débats)이란 잡지에 ‘색소폰의 탄생’이란 칼럼을 발표했어요. “발명가의 이름을 딴 색소폰은 오피클라이드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19개의 키가 있는 금관악기이다. 마우스피스는 다른 금관악기와 달리 베이스 클라리넷의 마우스피스와 비슷하다. (…) 이 악기의 음색(공명성)은 지금껏 사용해 온 악기들과 다르다. 거대한 음량과 더불어 꽉 차고, 부드럽고, 진동이 있고, 쉽게 소리를 조절할 수 있다.” 색소폰은 수많은 작곡가, 음악가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지만 기존의 악기제조자들은 악의에 차서 내 악기를 표절한 것이라고 공격했지요. 사실 색소폰은 클라리넷과 유사한 마우스피스를 사용하지요. 기존의 악기들을 모방했다고 본 것이지요. 어쩌면 당연해요. 자기들 기득권을 위협했으니까요. 그러나 나의 새로운 아이디어는 바로 금속의 곡관 형태, 즉 원추관에 있어요. 몇몇 사람들이 내 특허권을 빼앗으려고 시비를 거는 바람에 법적 소송에 휘말렸어요. 난 이 싸움으로 1856년, 1873년 두 번 파산하기에이르렀지요. 삶이 완전히 거덜 났어요. 만약 색소폰이 클라리넷을 모방했다고 한다면 근본적으로 두 악기 모두 리가춰(ligature)로 싱글리드를 마우스피스에 고정시키는 방식의 발성장치를 사용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실제 색소폰의 마우스피스는 클라리넷의 마우스피스와 내실설계(chamber design)가 다릅니다. 소리의 공명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마우스피스의 내부공간이지요. 악기의 구조도 키 시스템의 유사성 이외에 전체적으로 다르지요.오케스트라에 많은 악기들이 편성되어 있지만 색소폰은 배제될 때가 많습니다. 왜 그런가요. 색소폰은 건반악기나 현악기와 달리 연주자의 개성이 강하게 표현되는 악기입니다. 연주자에 따라 톤과 음색이 전혀 다르지요. 그것은 이 악기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으로 작용해요. 음의 강한 색깔이 다른 악기들, 즉 합주에서는 한순간에 방해가 될 수 있지요. 그 때문에 클래식 오케스트라에서 배제되는 편입니다. 오케스트라에서 색소폰이 필수는 아니지만, 장르에 따라 중요한 파트를 맡기도 합니다. 색소폰을 사용한 작곡가들은 카스트너, 비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호네거, 미요 등 무수히 많습니다. 또한 색소폰 소리의 다양성과 화려함은 오히려 팝이나 재즈, 가요에서 장점으로 작용하지요. 연주자의 개성이 중시되는 음악장르에선 단연 색소폰이 많이 쓰이지요.색소폰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색소폰은 테크니컬한 연주를 할 수 있어요. 자극적이고, 은밀하고, 호소력 강한 매혹적 음색, 터질 듯 강하고, 미세한 감정표현 등 가장 연약한 음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는 것…, 금속적인 쇳소리, 콧소리, 바람소리등 어떤 음향도 비슷하게 창조할 수 있는 겁니다. 아무튼 색소폰은 이조악기로서 인간의 목소리에 가장 가깝고, 또 자연을 모방하는 효과음도 폭넓게 구사할 수 있지요.20세기에 오면서 딕시랜드 재즈에서부터 지금의 퓨전 음악까지 색소폰이 주요 악기로 자리를 잡게 되었군요. 색소폰이 악기로서 자리를 잡은 것은 프랑스 육군 군악대에서 사용하면서부터죠. 그후 군악대와 고적대 등 취주악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으로 빠르게 전파되었어요. 그후 20세기 초 미국으로 건너가 남부 아프로-아메리카 음악, 딕시랜드 밴드, 북부의 스윙과 시카고 재즈에 이르기까지 대중적인 악기로 자리를 잡았어요. 초기 재즈 시대에 마칭밴드(Marching band)에서 저음역 리듬파트를 맡던 튜바는 스트링베이스(더블베이스)에 밀려났고, 색소폰은 재즈에서 클라리넷을 사라지게 만들었죠. 클라리넷은 초기 재즈에서 감미로운 소리로 유명했어요. 베니굿맨 마칭밴드에서 클라리넷 비중이 높았었는데, 그 자리를 결국 테너색소폰이 차지해버렸죠. 당시 콜맨 호킨스란 테너 연주자가 처음 재즈에 색소폰을 도입했어요. 클래식 분야에서도…. 프랑스에서 특허 난 악기인 만큼, 프랑스 작곡가들이 클래식 분야에서 가장 먼저 도입했어요. 조르주 비제는 알퐁스 도데의 연극 <아를의 여인>의 극음악에서 알토색소폰 독주를 삽입했지요. 2악장은 색소폰이 주인공인 셈이죠. 클로드 드뷔시는 소프라노 색소폰과 관현악을 위한 광시곡을 작곡했어요. 모리스 라벨도 볼레로에서 소프라니노와 소프라노, 테너 세 종류의 색소폰을 관현악 편성에 사용했지요. 뭐, 그 외에도 다리우스 미요, 뱅상 댕디 등 여러 작곡가들이 색소폰을 위한 곡들을 썼습니다. 프랑스 외에 독일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스트리아의 알반 베르크, 러시아의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영국의 벤자민 브리튼, 랠프 본윌리엄스, 미국의 조지 거슈윈, 레너드 번스타인(<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이탈리아의 푸치니(<투란도트>) 등 여러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했어요. 현대적 색소폰을 제작하고 널리 보급한 사람은 프랑스의 앙리 셀머(Henri Selmer) 일가이지요. 그렇습니다. 앙리 셀머는 유명한 클라리넷 연주자였어요. 그의 동생 알랙상드르 역시 미국 보스톤 심포니, 뉴욕 필하모니의 클라리넷 주자였지요. 앙리 셀머는 1898년 직접 클라리넷을 제작하기 시작해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국제악기박람회에서 클라리넷으로 금메달을 획득했어요. 그리고 1921년 12월 31일 셀머 색소폰 첫 모델인 시리즈22 알토색소폰을 출시했지요. 그들은 대단한 열정으로 색소폰 개발에 뛰어들어 성공했습니다. 1928년 나의 색소폰공장을 인수해 대량생산 체계를 갖추는 동시에 색소폰 계의 정통성을 잇게 된 셈이죠. 그 이후 앙리 셀머는 밸런시드 액션(Balanced Action)시리즈, 1954년 세계적 명품인 마크식스(MarkVI)를 탄생시켰습니다. 색소폰 중 최고의 명품 빈티지로 불리지요.“꿈길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다 아돌프 삭스의 삶은 음악에 바쳐졌지만 말년엔 가난에 찌들어 피폐했다. 그는 프랑스 정부의 보잘 것 없는 연금으로 생활하다 80세에 죽어 베를리오즈와 함께 파리 몽마르트르 묘지에 잠들어 있다. 나는 아돌프 삭스와 환상의 대화를 나누고 나오면서 삭스의 집이 박물관이 아니라 기념관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삶과 악기 작업을 당시 모습 그대로 재현한 것이 돋보였다. 삭스가 처음 실험한 여러 종류의 악기들, 도구들, 악보들을 가까이 볼 수있어 좋았다. 나는 그의 음악과 혁신적인 기술 공헌, 놀라운 발명, 끊임없는 실패와 도전 그리고 성공 등 일련의 파노라마를 보았다. 색소폰애호가들에게 매우 귀중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삭스와의 대화로 색소폰에 대한 이해도 넓어졌다. 악기는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작곡가가 그 악기를 위한 곡을 쓰지 않거나 연주자가 없으면 빛을 볼 수 없다. 나는 노트르담 대성당 앞의 아돌프 삭스 거리로 향했다. 거리는 색소폰 모형, 색소폰 키, 부속품 모양의 다양한 조형물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보도블록 위에 헥토르 베를리오즈, 존 콜트레인 등 음악가들의 발자국 마크도 보였다. 이 작은 도시 곳곳이 색소폰의 탄생지를 알리는 지표들로 채워져 있었다. 색소폰의 다양한 색과 문양, 독특한 디자인 그 자체로도 야외전시장으로 손색이 없었다. 나와 아내는 숨바꼭질 하듯 숨어있는 색소폰 상징을 찾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오늘날 이 도시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색소폰 콩쿠르가 열리고 있다. 매 4년마다 개최되는 “아돌프 삭스 국제색소폰경연대회”(Adolphe Sax International Competition)가 그것이다. 서른 살 미만의 연주자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지난 2014년 제6회 대회 때는 26개국 109명의 연주자들이 예선을 통과했다. 그 가운데 여성이 26명, 남성이 83명이다. 참가자들은 개인 피아니스트를 동반하거나 주최 측의 공식반주자를 요청할 수 있다고 한다.나는 색소폰의 도시 디낭을 떠나면서 삭스를 위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색소폰 다리 한가운데서 아름다운 몽상가, 아돌프 삭스에게 바치는 노래로 무엇이 좋을까. 나는 벅찬 가슴으로 학창시절 즐겨 불렀던 S.C. 포스터의 <꿈길에서>(Beautiful dreamer)를 떠올렸다. “아름다운 꿈꾸는 사람이여 잠에서 깨어나요. 별빛도 이슬방울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한낮의 시끄럽던 소리도 달빛에 사라졌지요. 꿈꾸는 그대는 내 노래의 여왕, 부드러운 나의 가락을 들어 주오. 세상의 모든 괴로움들이 사라지네. 아름다운 꿈꾸는 사람이여.” 다리를 수놓은 만국기들과 다채로운 색소폰들도 합주에 동참하는 듯했다. 힘차게 흘러가는 강물과 싱그러운 바람결을 따라 색소폰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멀리 아돌프 삭스가 날 바라보며 손을 흔든다. “조심해서 가게. 또 만나요!” 늦은 오후의 햇살이 청동으로 조각된 그의 전신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글Ι박형섭 부산대 불문과 교수 suyeon@keri.or.kr사진ΙHAM.J.I
    • 월간색소폰
    201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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