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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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USIC ESSAY] 벨기에 디낭에서 아돌프 삭스를 만나다.
    디낭, 색소폰의 고향 디낭은 벨기에 남동쪽 프랑스에 인접한 국경 도시이다. 색소폰의 발명가 아돌프 삭스의 고향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도원 맥주 레페 브라운(Leffe Brune)의 본산이다. 나는 프랑스 국경도시 샤를빌-메지에르에서 자동차로 출발해 오십분 가량 달려 디낭에 닿았다. 울창한 아르덴 숲을 통과하자 강가에 거대한 암벽이 우뚝 서 있는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아기자기한 건축물이 뮈즈강을 따라 조화롭게 늘어서 있었다. 전형적인 유럽의 예쁜 소도시 정경이다. 오는 길에 마주쳤던 선사시대 종유석 동굴과 대저택들의 안내판이 떠올랐다. 강과 숲 깊숙이 들어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강변 숙소에 짐을 풀고 산책에 나섰다. 강 건너편에 강과 나란히 기찻길이 나 있었다. 강가를 따라 조금 걷자 암벽이 병풍처럼 비호하는 노트르담 성당에 이르렀다. 성당 앞은 사방으로 길이 퍼져나가는 마을의 교차로였다. 그 중 하나는 다리로 이어졌다. 샤를 드골 대교였다. 성당 앞 광장을 돌아 다리로 들어섰다.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다리 양편 보도에 다채로운 색깔의 색소폰 조형물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있었다. 헤아려보니 모두 스물일곱 개였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세상의 유일한 색소폰 다리였다. 과연 색소폰의 탄생지다웠다. 이렇게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에서 색소폰이 탄생하다니! 예로부터 디낭은 동과 놋쇠제품의 산지로 유명했다. 이 마을에 아돌프 삭스라는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뛰어난 악기제작자였다. 소년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공방에서 놀며 아버지의 악기 제작을 보고 자랐다. 여섯 살 때 소년은 아버지가 만든 클라리넷에 구멍을 내고 나팔 모양으로 돌려 깎아보기도 했다. 아버지의 공방은 소년의 놀이터였고, 아버지가 만든 악기들은 소년의 장난감이었다. 집요하게 조립하고 변형하기를 반복하면서 소년이 얻고자 한 것이 있었다. 새로운 소리였다. 새로운 소리에 대한 열정은 소년의 상상력을 끝없이 자극했다. 소년은 열다섯 살에 브뤼셀 산업박람회에 상아로 만든 플루트와 클라리넷을 출품했다. 스무 살 때에는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베이스 클라리넷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소년은 어른이 되어서도 음악이론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직접 악기를 연주하면서 악기개량 작업에 몰두했다. 그는 현악기와 관악기 사이의 음색, 나아가 금관과 목관악기의 음색의 차이를 탐구했다. 실험과 창조정신으로 거듭된 실패를 물리치고 마침내 원추관 모양의 새로운 악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목관도 금관도 아닌 음색, 탁하면서 동시에 청아한 음색의 악기, 바로 오늘의 색소폰이다. 색소폰은 현악기의 유연성, 목관악기의 음색, 금관악기의 음량을 겸비한 악기가 되었다. 나는 샤를 드골 대교 위의 휘황찬란한 색소폰들을 감상하며 다리를 건너갔다가 다시 건너왔다. 마치 색소폰들의 공연장 한가운데를 걷는 듯 환상적이었다. 저녁 바람은 상쾌하고 강물은 유유히 흘러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 아돌프 삭스의 집(La Maison de Monsieur Sax)으로 향했다. 길가에 마음씨 좋게 생긴 중년사내가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돌프 삭스씨!” 그러자 그는 오래 사귀어온 지인처럼 미소를 머금고 나를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내 귀에 속삭였다. “바로 이 집에서 내가 악기들을 실험하며 색소폰을 만들었지.” 나는 그의 어깨 너머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색소포니스트란 걸 알고 있다는 듯 집안으로 안내했다. 나는 그를 따라 내부를 둘러보며 상상의 날개를 활짝 펼치고 색소폰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아돌프 삭스와의 대화 아돌프 삭스 씨를 만나다니 꿈만 같아요. 이 집에서 태어났고, 여기서 색소폰을 발명하셨나요. 예, 그래요. 난 여기서 1814년 11월 6일에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악기제작자였지요. 당시 맏아들이 어려서 아버지 기술을 배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때는 악기를 만든 사람이 바로 실험을 하던 때라 나도 일찍 악기 다루는 법을 익혔어요. 그래서 플루트와 클라리넷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어요. 색소폰은 기존의 클라리넷, 오피클라이드 등의 소리원리를 탐구하면서 그 악기들을 개량해 만들게 된 것입니다. 색소폰을 발명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원래 오케스트라에서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였죠. 내가 현악기와 관악기, 금관과 목관악기의 음색을 비교해보니 현악기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걸 알았어요. 또 밴드에선 금관악기가 목관악기를 압도하지요. 난 이런 간극을 보완할 수 있는 악기를 찾으려고 했어요. 우선 새로운 저음악기의 연구에 몰두했죠. 그래서 베이스 클라리넷을 만들게 되었고, 그것과 저음 관악기 오피클라이드를 참조해서 베이스 색소폰을 만들었어요. 한마디로 목관악기인 베이스 클라리넷의 마우스피스와 금관악기인 오피클라이드의 황동 몸체를 결합시켜서 새로운 저음 관악기인 베이스 색소폰이 탄생한 것이지요. 이 베이스 색소폰은 오케스트라에서 저음 목관과 금관악기를 연계하는 중간 역할을 하리라 기대했어요. 당신의 색소폰의 특징과 활용도를 설명해주세요. 주요 재료는 황동(brass)입니다. 벨을 원뿔 형태로 하여 싱글리드와 마우스피스를 사용해요. 색소폰의 발음체가 갈대로만든 리드이고 공명되는 몸체는 금속인 것이지요. 이것이 특이한 음질을 생성해요. 결국 목관과 금관의 혼성된 음질인 셈이죠. 색소폰은 내부구조상 여러 악기의 특색이 합쳐진 소리가 나와요. 현악기의 유연성, 목관악기의 음색, 금관악기의 음량까지 겸비하고 있어요. 음역(音域)이나 음질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고, 소리의 다양한 뉘앙스(nuance)를 창조할 수 있어요. 알토와 테너색소폰은 독주, 실내악, 경음악, 관현악 등에, 소프라노와 바리톤색소폰은 경음악 이외에 색소폰 실내악 관악 합주에, 베이스 색소폰은 관악합주 등에 사용됩니다. 황동으로 만들었다면 금관악기가 아닌가요. 목관과 금관악기의 구분은 원래 악기의 재질로 구분합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건 어떤 방식으로 소리를 발생시키고, 어떻게 음계를 구성하는가에 있습니다. 색소폰은 목관악기인 클라리넷과 유사한 마우스피스와 나무 리드를 사용하고, 목관악기와 같은 원리의 키시스템을 활용하기 때문에 목관악기로 분류됩니다. 색소폰이란 이름은 누가 지었나요. 색소폰은 내가 만든악기이니, 내가 창조한 소리란 뜻이지요. 그래서 내 이름 삭스(Sax)와 소리라는 뜻의 폰(phone)이 합쳐져서 ‘삭스의 소리’가 된 것이죠. 삭스가 영어식으로 색스로 발음되어서 색소폰이 된 것입니다. 벨기에나 프랑스에선 여전히 삭소폰으로 불러요. 색소폰 특허를 프랑스에서 받았다고요. 예, 맞아요. 파리는 나의 본거지였어요. 28살, 그러니까 1842년에 파리로 이주해서 죽을 때까지 살았어요. 색소폰 특허는 정확히 1846년 6월 22일 파리에서 받았어요. 바로 이 날이 색소폰의 탄생일인 셈이죠. 난 이 악기를 오케스트라용과 군악대용, 두 그룹으로 나누어 특허를 냈어요. 오케스트라용으로는 C키와 F키를 기본음으로 시리즈를 만들었고, 군악대용으로는 Bb키와 Eb키를 기본음으로 또 하나의 시리즈를 만들었지요. 나의 특허가 1866년 만료되면서 이후 다른 사람들도 색소폰 제작에 뛰어들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 악기에 대한 반응은 어땠나요. 파리에 색소폰이 등장하자 음악가들로부터 환호를 받았어요. 색소폰이 리드가 있는 금속제 목관악기라는 점에 큰 매력을 느꼈지요. 무엇보다도 음량이 풍부하고 소리가 유연하며 세기 조절도 용이하다며 신기해했죠. 낮은 B플랫부터 세 옥타브의 음역에 운지법이 클라리넷이나 플루트와 비슷해 다루기도 쉬웠죠. 또한 리드가 있어서 소리의 강약 조절이 수월했어요. 고음역의 소리는 매우 강하게 울리기 때문에 선율적인 표현에 유용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당시 유명한 음악가 장 조르주 카스트너(Jean Georges Kastner)는 오페라에 색소폰을 사용한 최초의 작곡가입니다. 그는 1843년에 초연된 오페라 <유다의 마지막 왕>(Le Dernier Roi de Juda)에서 C조 베이스 색소폰을 사용했는데, 난 바로 그 공연에서 베이스 색소폰을 맡아 연주했어요. 당신의 편에서 도움을 주거나 후원한 사람들도 있었지요. 프랑스왕 루이 필립 1세, 파산으로부터 구해준 나폴레옹 3세, 뤼미니(Rumigny) 장군, 벨기에 주재 프랑스대사 다니엘 프랑수아 오베르(Daniel-François Auber)등은 적극적으로 나를 도왔지요. 초창기에 색소폰이 군악대에서 대대적으로 환영받은 것은 그들의 도움이 컸어요. 그리고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헥토르 베를리오즈, 메이어비어, 할레비, 로시니 등 저명한 음악가들은 색소폰의 음색이 매우 아름답다며, 미래에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할 것이라 확신했어요. 바로 당신처럼 전 세계 사람들이 즐기고 있으니 그들의 판단이 적중한 것이지요. 파리에 사업장을 열었지요?그리고 색소폰에 반감을 표한 사람들은 왜 그랬나요. 예, 파리 북쪽 당쿠르 거리에 가게를 열었어요. 그리고 작곡가들을 찾아다니며 새 악기를 홍보했지요. 그들은 악기를 품평할 수 있는 최적의 사람들이었으니까요. 베를리오즈는 벨 모양의 색소폰을 보더니 소리의 방향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고, 소리의 유실을 막아 음량을 증가시켰다고 호평하더군요. 베를리오즈가 최초의 색소폰 곡 <신성한 노래>을 작곡했어요. 우린 첫 만남 이후 친구가 되었어요. 그는 1842년 6월 12일 <논쟁>(Journal des Débats)이란 잡지에 ‘색소폰의 탄생’이란 칼럼을 발표했어요. “발명가의 이름을 딴 색소폰은 오피클라이드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으며, 19개의 키가 있는 금관악기이다. 마우스피스는 다른 금관악기와 달리 베이스 클라리넷의 마우스피스와 비슷하다. (…) 이 악기의 음색(공명성)은 지금껏 사용해 온 악기들과 다르다. 거대한 음량과 더불어 꽉 차고, 부드럽고, 진동이 있고, 쉽게 소리를 조절할 수 있다.” 색소폰은 수많은 작곡가, 음악가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지만 기존의 악기제조자들은 악의에 차서 내 악기를 표절한 것이라고 공격했지요. 사실 색소폰은 클라리넷과 유사한 마우스피스를 사용하지요. 기존의 악기들을 모방했다고 본 것이지요. 어쩌면 당연해요. 자기들 기득권을 위협했으니까요. 그러나 나의 새로운 아이디어는 바로 금속의 곡관 형태, 즉 원추관에 있어요. 몇몇 사람들이 내 특허권을 빼앗으려고 시비를 거는 바람에 법적 소송에 휘말렸어요. 난 이 싸움으로 1856년, 1873년 두 번 파산하기에 이르렀지요. 삶이 완전히 거덜 났어요. 만약 색소폰이 클라리넷을 모방했다고 한다면 근본적으로 두 악기 모두 리가춰(ligature)로 싱글리드를 마우스피스에 고정시키는 방식의 발성장치를 사용하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실제 색소폰의 마우스피스는 클라리넷의 마우스피스와 내실설계(chamber design)가 다릅니다. 소리의 공명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마우스피스의 내부공간이지요. 악기의 구조도 키 시스템의 유사성 이외에 전체적으로 다르지요. 오케스트라에 많은 악기들이 편성되어 있지만 색소폰은 배제될 때가 많습니다. 왜 그런가요. 색소폰은 건반악기나 현악기와 달리 연주자의 개성이 강하게 표현되는 악기입니다. 연주자에 따라 톤과 음색이 전혀 다르지요. 그것은 이 악기의 장점인 동시에 단점으로 작용해요. 음의 강한 색깔이 다른 악기들, 즉 합주에서는 한순간에 방해가 될 수 있지요. 그 때문에 클래식 오케스트라에서 배제되는 편입니다. 오케스트라에서 색소폰이 필수는 아니지만, 장르에 따라 중요한 파트를 맡기도 합니다. 색소폰을 사용한 작곡가들은 카스트너, 비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호네거, 미요 등 무수히 많습니다. 또한 색소폰 소리의 다양성과 화려함은 오히려 팝이나 재즈, 가요에서 장점으로 작용하지요. 연주자의 개성이 중시되는 음악장르에선 단연 색소폰이 많이 쓰이지요. 색소폰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색소폰은 테크니컬한 연주를 할 수 있어요. 자극적이고, 은밀하고, 호소력 강한 매혹적 음색, 터질 듯 강하고, 미세한 감정표현 등 가장 연약한 음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는 것…, 금속적인 쇳소리, 콧소리, 바람소리등 어떤 음향도 비슷하게 창조할 수 있는 겁니다. 아무튼 색소폰은 이조악기로서 인간의 목소리에 가장 가깝고, 또 자연을 모방하는 효과음도 폭넓게 구사할 수 있지요. 20세기에 오면서 딕시랜드 재즈에서부터 지금의 퓨전 음악까지 색소폰이 주요 악기로 자리를 잡게 되었군요. 색소폰이 악기로서 자리를 잡은 것은 프랑스 육군 군악대에서 사용하면서부터죠. 그후 군악대와 고적대 등 취주악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으로 빠르게 전파되었어요. 그후 20세기 초 미국으로 건너가 남부 아프로-아메리카 음악, 딕시랜드 밴드, 북부의 스윙과 시카고 재즈에 이르기까지 대중적인 악기로 자리를 잡았어요. 초기 재즈 시대에 마칭밴드(Marching band)에서 저음역 리듬파트를 맡던 튜바는 스트링베이스(더블베이스)에 밀려났고, 색소폰은 재즈에서 클라리넷을 사라지게 만들었죠. 클라리넷은 초기 재즈에서 감미로운 소리로 유명했어요. 베니굿맨 마칭밴드에서 클라리넷 비중이 높았었는데, 그 자리를 결국 테너색소폰이 차지해버렸죠. 당시 콜맨 호킨스란 테너 연주자가 처음 재즈에 색소폰을 도입했어요. 클래식 분야에서도…. 프랑스에서 특허 난 악기인 만큼, 프랑스 작곡가들이 클래식 분야에서 가장 먼저 도입했어요. 조르주 비제는 알퐁스 도데의 연극 <아를의 여인>의 극음악에서 알토색소폰 독주를 삽입했지요. 2악장은 색소폰이 주인공인 셈이죠. 클로드 드뷔시는 소프라노 색소폰과 관현악을 위한 광시곡을 작곡했어요. 모리스 라벨도 볼레로에서 소프라니노와 소프라노, 테너 세 종류의 색소폰을 관현악 편성에 사용했지요. 뭐, 그 외에도 다리우스 미요, 뱅상 댕디 등 여러 작곡가들이 색소폰을 위한 곡들을 썼습니다. 프랑스 외에 독일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스트리아의 알반 베르크, 러시아의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영국의 벤자민 브리튼, 랠프 본윌리엄스, 미국의 조지 거슈윈, 레너드 번스타인(<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이탈리아의 푸치니(<투란도트>) 등 여러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했어요. 현대적 색소폰을 제작하고 널리 보급한 사람은 프랑스의 앙리 셀머(Henri Selmer) 일가이지요. 그렇습니다. 앙리 셀머는 유명한 클라리넷 연주자였어요. 그의 동생 알랙상드르 역시 미국 보스톤 심포니, 뉴욕 필하모니의 클라리넷 주자였지요. 앙리 셀머는 1898년 직접 클라리넷을 제작하기 시작해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국제악기박람회에서 클라리넷으로 금메달을 획득했어요. 그리고 1921년 12월 31일 셀머 색소폰 첫 모델인 시리즈22 알토색소폰을 출시했지요. 그들은 대단한 열정으로 색소폰 개발에 뛰어들어 성공했습니다. 1928년 나의 색소폰공장을 인수해 대량생산 체계를 갖추는 동시에 색소폰 계의 정통성을 잇게 된 셈이죠. 그 이후 앙리 셀머는 밸런시드 액션(Balanced Action)시리즈, 1954년 세계적 명품인 마크식스(MarkVI)를 탄생시켰습니다. 색소폰 중 최고의 명품 빈티지로 불리지요. “꿈길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다 아돌프 삭스의 삶은 음악에 바쳐졌지만 말년엔 가난에 찌들어 피폐했다. 그는 프랑스 정부의 보잘 것 없는 연금으로 생활하다 80세에 죽어 베를리오즈와 함께 파리 몽마르트르 묘지에 잠들어 있다. 나는 아돌프 삭스와 환상의 대화를 나누고 나오면서 삭스의 집이 박물관이 아니라 기념관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삶과 악기 작업을 당시 모습 그대로 재현한 것이 돋보였다. 삭스가 처음 실험한 여러 종류의 악기들, 도구들, 악보들을 가까이 볼 수있어 좋았다. 나는 그의 음악과 혁신적인 기술 공헌, 놀라운 발명, 끊임없는 실패와 도전 그리고 성공 등 일련의 파노라마를 보았다. 색소폰애호가들에게 매우 귀중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삭스와의 대화로 색소폰에 대한 이해도 넓어졌다. 악기는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도 작곡가가 그 악기를 위한 곡을 쓰지 않거나 연주자가 없으면 빛을 볼 수 없다. 나는 노트르담 대성당 앞의 아돌프 삭스 거리로 향했다. 거리는 색소폰 모형, 색소폰 키, 부속품 모양의 다양한 조형물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보도블록 위에 헥토르 베를리오즈, 존 콜트레인 등 음악가들의 발자국 마크도 보였다. 이 작은 도시 곳곳이 색소폰의 탄생지를 알리는 지표들로 채워져 있었다. 색소폰의 다양한 색과 문양, 독특한 디자인 그 자체로도 야외전시장으로 손색이 없었다. 나와 아내는 숨바꼭질 하듯 숨어있는 색소폰 상징을 찾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오늘날 이 도시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색소폰 콩쿠르가 열리고 있다. 매 4년마다 개최되는 “아돌프 삭스 국제색소폰경연대회”(Adolphe Sax International Competition)가 그것이다. 서른 살 미만의 연주자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지난 2014년 제6회 대회 때는 26개국 109명의 연주자들이 예선을 통과했다. 그 가운데 여성이 26명, 남성이 83명이다. 참가자들은 개인 피아니스트를 동반하거나 주최 측의 공식반주자를 요청할 수 있다고 한다.나는 색소폰의 도시 디낭을 떠나면서 삭스를 위한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색소폰 다리 한가운데서 아름다운 몽상가, 아돌프 삭스에게 바치는 노래로 무엇이 좋을까. 나는 벅찬 가슴으로 학창시절 즐겨 불렀던 S.C. 포스터의 <꿈길에서>(Beautiful dreamer)를 떠올렸다. “아름다운 꿈꾸는 사람이여 잠에서 깨어나요. 별빛도 이슬방울도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한낮의 시끄럽던 소리도 달빛에 사라졌지요. 꿈꾸는 그대는 내 노래의 여왕, 부드러운 나의 가락을 들어 주오. 세상의 모든 괴로움들이 사라지네. 아름다운 꿈꾸는 사람이여.” 다리를 수놓은 만국기들과 다채로운 색소폰들도 합주에 동참하는 듯했다. 힘차게 흘러가는 강물과 싱그러운 바람결을 따라 색소폰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멀리 아돌프 삭스가 날 바라보며 손을 흔든다. “조심해서 가게. 또 만나요!” 늦은 오후의 햇살이 청동으로 조각된 그의 전신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글 Ι 박형섭 부산대 불문과 교수 사진 Ι HAM.J.I
    • 월간색소폰
    2018-09-01
  • 서울 광화문 광장에 울려퍼진 하모니카 선율 '제6회 서울국제하모니카페스티벌'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어느덧 6회째를 맞은 <서울국제하모니카페스티벌>이 8월 3일부터 8월 5일까지 서울시민청과 서울광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서울국제하모니카페스티벌>에서는 풍성한 공연과 경연대회 그리고 악기전시를 비롯한 다양한 하모니카 콘텐츠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국제적 열린 장이었다. 국제 페스티벌의 명성에 걸맞은 프로그램이틀간의 프로그램은 풍성하고 잘 짜인 구성으로 ‘콘서트 프로그램’, ‘경연 프로그램’ 그리고 마스터 클래스와 하모니카 전시가 포함된 ‘이벤트 프로그램’ 세 가지 구성으로 각기 다른 공간에서 동시에 진행하였다. 서울광장을 가득 채운 하모니카 선율국내외 다수의 많은 참가자를 비롯하여 국제적 명성을 가진 화려한 아티스트진들의 공연과 마스터 클래스 또한 빼놓을 수 없었는데, 이번 공연 참가자로는 ‘고든 리’, ‘인디아라 스페어’, ‘키이스 던’, ‘싸이 레오’, ‘프레스코 하모니카 앙상블’ 등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유명 연주자들의 훌륭한 연주를 들을 좋은 기회였다. 하모니카 전시&클리닉이번 페스티벌에서는 세계적인 하모니카 모델들의 과거와 현재를 총집합한 또 다른 장이었다. ‘코스모스악기사’와 ‘WEISSEN BER G(바이젠버그)’등 유명 하모니카 브랜드의 악기들을 직접 시연해보고 비교하며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며, 또한 하모니카 무상수리를 통한 팬서비스로 하모니카 업체와 고객들 간의 즐거운 유대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한편 서울특별시와의 민관협력사업으로 진행된 서울국제하모니 카페스티벌은 세계적인 하모니카 연주자들의 초청공연을 통하여 국제 교류를 활성화하고 국내외 재능있는 신인들을 발굴하고 하모니카 음악 보급 활성화를 통한 사회공동체의 파트너십을 구축하며 명실공히 국제적인 하모니카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글·사진Ι안지인 기자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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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01
  • 서울 광화문 광장에 울려퍼진 하모니카 선율 '제6회 서울국제하모니카페스티벌'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어느덧 6회째를 맞은 <서울국제하모니카페스티벌>이 8월 3일부터 8월 5일까지 서울시민청과 서울광장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서울국제하모니카페스티벌>에서는 풍성한 공연과 경연대회 그리고 악기전시를 비롯한 다양한 하모니카 콘텐츠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국제적 열린 장이었다. 국제 페스티벌의 명성에 걸맞은 프로그램이틀간의 프로그램은 풍성하고 잘 짜인 구성으로 ‘콘서트 프로그램’, ‘경연 프로그램’ 그리고 마스터 클래스와 하모니카 전시가 포함된 ‘이벤트 프로그램’ 세 가지 구성으로 각기 다른 공간에서 동시에 진행하였다. 서울광장을 가득 채운 하모니카 선율국내외 다수의 많은 참가자를 비롯하여 국제적 명성을 가진 화려한 아티스트진들의 공연과 마스터 클래스 또한 빼놓을 수 없었는데, 이번 공연 참가자로는 ‘고든 리’, ‘인디아라 스페어’, ‘키이스 던’, ‘싸이 레오’, ‘프레스코 하모니카 앙상블’ 등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유명 연주자들의 훌륭한 연주를 들을 좋은 기회였다. 하모니카 전시&클리닉이번 페스티벌에서는 세계적인 하모니카 모델들의 과거와 현재를 총집합한 또 다른 장이었다. ‘코스모스악기사’와 ‘WEISSEN BER G(바이젠버그)’등 유명 하모니카 브랜드의 악기들을 직접 시연해보고 비교하며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며, 또한 하모니카 무상수리를 통한 팬서비스로 하모니카 업체와 고객들 간의 즐거운 유대관계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한편 서울특별시와의 민관협력사업으로 진행된 서울국제하모니 카페스티벌은 세계적인 하모니카 연주자들의 초청공연을 통하여 국제 교류를 활성화하고 국내외 재능있는 신인들을 발굴하고 하모니카 음악 보급 활성화를 통한 사회공동체의 파트너십을 구축하며 명실공히 국제적인 하모니카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글·사진Ι안지인 기자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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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01
  • 색소폰과 함께 숲속에서 펼쳐지는 한여름 밤의 콘서트 '2018 평창색소폰페스티벌'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8월 10일과 11일 이틀간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에 있는 ‘음악 치유의 숲’ 야외무대에서 ‘꿈 같은 한여름 밤의 콘서트’와 ‘평화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뮤즈 人 포레스트>와 <2018 평창색소폰페스티벌> 콘서트가 열렸다. ‘음악 치유의 숲’ 야외무대구불구불한 산길을 1.3km정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음악 치유의 숲’ 야외무대는 공연과는 별개로 또 다른 특별함을 선사했다. 상쾌한 숲 공기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공연을 더욱 기대할 수 있었다는 것. 산 길목에 드문드문 안내판이 걸려있어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었다. 열광의 무대11일 오후 2시부터 진행된 <2018 평창색소폰페스티벌>에서는 대한민국의 유명 색소포니스트들이 수준 높은 색소폰 연주를 들려주어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아름다운 울림과 감동을 선물하였다. 저녁 7시 30분부터 열린 본무대에서는 색소포니스트 ‘김원용’과 가수 ‘양수경’이 함께 무대에 올랐고 그 밖에 가수 ‘마야’, ‘김국찬’이 출연하여 숲을 울리는 가창력과 능숙한 무대매너로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평화의 하모니공연의 마지막 순서는 음악 치유의 숲을 찾은 색소폰 동호인들과 관객, 출연 뮤지션들이 다 함께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며 평화의 하모니를 이루는 장관을 연출하였는데, 1,000여명의 색소폰 연주자가 일제히 같은 곡을 연주하는 기록으로 기네스북 등재에도 도전하여 모두에게 의미 있는 시간으로 기억될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하기도 하였다. 글·사진Ι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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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01
  • 색소폰과 함께 숲속에서 펼쳐지는 한여름 밤의 콘서트 '2018 평창색소폰페스티벌'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8월 10일과 11일 이틀간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에 있는 ‘음악 치유의 숲’ 야외무대에서 ‘꿈 같은 한여름 밤의 콘서트’와 ‘평화의 시작’이라는 주제로 <뮤즈 人 포레스트>와 <2018 평창색소폰페스티벌> 콘서트가 열렸다. ‘음악 치유의 숲’ 야외무대구불구불한 산길을 1.3km정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음악 치유의 숲’ 야외무대는 공연과는 별개로 또 다른 특별함을 선사했다. 상쾌한 숲 공기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공연을 더욱 기대할 수 있었다는 것. 산 길목에 드문드문 안내판이 걸려있어 어렵지 않게 올라갈 수 있었다. 열광의 무대11일 오후 2시부터 진행된 <2018 평창색소폰페스티벌>에서는 대한민국의 유명 색소포니스트들이 수준 높은 색소폰 연주를 들려주어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아름다운 울림과 감동을 선물하였다. 저녁 7시 30분부터 열린 본무대에서는 색소포니스트 ‘김원용’과 가수 ‘양수경’이 함께 무대에 올랐고 그 밖에 가수 ‘마야’, ‘김국찬’이 출연하여 숲을 울리는 가창력과 능숙한 무대매너로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평화의 하모니공연의 마지막 순서는 음악 치유의 숲을 찾은 색소폰 동호인들과 관객, 출연 뮤지션들이 다 함께 ‘우리의 소원은 통일’ 노래를 부르며 평화의 하모니를 이루는 장관을 연출하였는데, 1,000여명의 색소폰 연주자가 일제히 같은 곡을 연주하는 기록으로 기네스북 등재에도 도전하여 모두에게 의미 있는 시간으로 기억될 아름다운 추억을 선사하기도 하였다. 글·사진Ι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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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01
  • [JAZZ CLUB]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청정 재즈공간 'CAFE JAZZDA'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재즈다의 무대가 음악 창작소라는 공간을 자처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카페 ‘재즈다’(JAZZDA)는 음악만을 연구하며 창작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기 위해 트럼펫터 ‘김예중’이 만든 라이브 재즈카페이다. 트럼펫을 분 지 올해로 31년째 접어든 베테랑이다 보니 무대에 서는 연주자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며, 다채로운 장르의 음악과 젊은 연주자들의 열정을 고스란히 존중하여 무대에 담아주려 애쓰는 사장님의 상냥한 마음씨가 엿보인다. 이날 재즈다(JAZZDA)에서는 무려 세 팀의 공연이 있었다. 관악 11인조 재즈 앙상블팀인 <이창민 스몰앙상블>과 현재 초등학교 3학년으로 싱글 앨범 <다경몽>을 발표하고 천재 트럼펫터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은 우리나라 최연소 jazz 뮤지션 ‘곽다경’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아니스트 ‘이한샘’, 베이시스트 ‘우희창’, 드러머 ‘김기원’이 결성한 재즈트리오 의 연주가 연이어졌다. 이 세 팀 모두 앞으로 한국 재즈 음악을 이끌어나갈 젊은 신예들로 절대로 얕볼 수 없는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재즈다(JAZZDA)의 특징 중 하나는 여느 다른 재즈바들과는 다르게 술을 팔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술과 담배는 정신과 건강을 해치니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무익하다고 생각하며 순수한 재즈의 정신은 맨 정신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미래의 교육적인 차원으로 봤을 때도 이렇게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밝은 희망을 꿈꿀 수 있다.”고 말하는 사장님의 신념이 지금의 재즈다(JAZZDA)를 만들었다. 대신 재즈다(JAZZDA)에서는 가지각색의 커피와 논알코올 맥주, 논알코올 칵테일 그리고 차를 즐길 수가 있는데, 막상 이 조화를 겪어 본다면 빠져들게 될 것이다. 재즈다(JAZZDA)에 들어선 순간 눈에 띄는 점은 내부의 벽면에 걸린 그림들이었다. 심지어 입구 벽면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귀가 잘린 자화상>이 그려져 있어 사장님께 물어보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1년 5개월 된 동생의 작품들이라고 한다.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와 함께 유럽의 정취를 내뿜으며 재즈 음악과의 오묘한 조화가 이루어지는 독특한 문화공간이 아닐 수 없다. 글·사진Ι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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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01
  • [JAZZ CLUB]온 가족이 함께할 수 있는 청정 재즈공간 'CAFE JAZZDA'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재즈다의 무대가 음악 창작소라는 공간을 자처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카페 ‘재즈다’(JAZZDA)는 음악만을 연구하며 창작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기 위해 트럼펫터 ‘김예중’이 만든 라이브 재즈카페이다. 트럼펫을 분 지 올해로 31년째 접어든 베테랑이다 보니 무대에 서는 연주자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며, 다채로운 장르의 음악과 젊은 연주자들의 열정을 고스란히 존중하여 무대에 담아주려 애쓰는 사장님의 상냥한 마음씨가 엿보인다. 이날 재즈다(JAZZDA)에서는 무려 세 팀의 공연이 있었다. 관악 11인조 재즈 앙상블팀인 <이창민 스몰앙상블>과 현재 초등학교 3학년으로 싱글 앨범 <다경몽>을 발표하고 천재 트럼펫터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은 우리나라 최연소 jazz 뮤지션 ‘곽다경’ 그리고 마지막으로 피아니스트 ‘이한샘’, 베이시스트 ‘우희창’, 드러머 ‘김기원’이 결성한 재즈트리오 의 연주가 연이어졌다. 이 세 팀 모두 앞으로 한국 재즈 음악을 이끌어나갈 젊은 신예들로 절대로 얕볼 수 없는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재즈다(JAZZDA)의 특징 중 하나는 여느 다른 재즈바들과는 다르게 술을 팔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술과 담배는 정신과 건강을 해치니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무익하다고 생각하며 순수한 재즈의 정신은 맨 정신으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미래의 교육적인 차원으로 봤을 때도 이렇게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밝은 희망을 꿈꿀 수 있다.”고 말하는 사장님의 신념이 지금의 재즈다(JAZZDA)를 만들었다. 대신 재즈다(JAZZDA)에서는 가지각색의 커피와 논알코올 맥주, 논알코올 칵테일 그리고 차를 즐길 수가 있는데, 막상 이 조화를 겪어 본다면 빠져들게 될 것이다. 재즈다(JAZZDA)에 들어선 순간 눈에 띄는 점은 내부의 벽면에 걸린 그림들이었다. 심지어 입구 벽면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귀가 잘린 자화상>이 그려져 있어 사장님께 물어보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1년 5개월 된 동생의 작품들이라고 한다. 천장에 걸린 샹들리에와 함께 유럽의 정취를 내뿜으며 재즈 음악과의 오묘한 조화가 이루어지는 독특한 문화공간이 아닐 수 없다. 글·사진Ι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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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01
  • 재즈의 선율을 빌려 색소폰으로 말하는 '색소포니스트 구민상'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재즈 색소폰 잘 부는 사람 누가 있어?” 이 질문의 대답에 “구민상”이라는 이름이 들려온다. 색소포니스트 구민상은 현재의 재즈씬에서 유서가 깊다. 호주국립대학교(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이하 ANU 표기)에서 유학 생활을 마친 후 현재 백석대학교 콘서바토리 실용음악과에 출강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고, 관객과 소통하는 연주자가 되기 위해 무던히도 자신을 성찰하는 부지런한 연주자이기도 하다. 색소폰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에, “하루 중 말을 하는 시간보다 색소폰으로 이야기하는 시간이 더 많기에 이제는 제 목소리보다 더 편한 의미전달의 도구죠.” 라고 말하는 소통하는 연주자 구민상을 만났다. 색소폰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고등학생 때 메탈 음악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남학생들에게 메탈음악이라는 것은 로망 그 자체였다. 어머니를 졸라 낙원상가로 가서 기타를 사서 독학으로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 음악에 발을 들여놓은 첫걸음이었다. 이후 밴드부에 들어가 이런저런 악기를 만지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색소폰을 하게 됐다. 당시에는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그렇게 자연스럽게 색소폰을 잡게 되고 지금까지 이어져 흘러온 것이다.재즈 색소폰을 연주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되었나.우리 때에는 재즈라는 이름조차도 생소했었다. 재즈를 전문적으로 가르쳐 주는 아카데미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연습하고자 구하는 교재들도 클래식을 다루는 교재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클래식 쪽으로 공부를 하는 것도 생각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찰리 파커의 음반을 듣게 되었는데, 당시의 내게 너무 충격적으로 다가왔었다. 장난치는 것 내지는 음을 틀리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떻게 색소폰을 저렇게 자유자재로 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 것들을 신기하게 생각하다가 점점 더 궁금증이 생겨 조금씩 그에 대해 알아가다 보니 재즈라는 말도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 빠져들게 되었다.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찰리 파커의 음악이 난해하게 다가오진 않았었나.당시에는 ‘꼭 전공해야지ʼ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다. 악기라는 것을 편안하게 하기 시작했고, 그냥 하다 보니 찰리 파커를 알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찰리 파커의 음악이 좋은 음악인지 아닌지에 대해 알고 들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의 내게는 신기한 음악이었고, 궁금증이 생겨 더 파고들게 만드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음악이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음대 진학을 준비하였나. 그때는 재즈과라는 학과가 없었다. 실용음악과는 한 두 개 정도 있었는데, 알아보면서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유학을 가기에 앞서 군대를 다녀와야 했었기에 군악대 시험에 지원하여 합격 후 군악대에 가게 된 것이다.군대에서의 생활은 어땠었나.군악대에서는 연습했던 기억밖에 안 난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되어 있었던 시대도 아니었고, 약간 과장을 보태 말하면 턴테이블 시대였기 때문에 연습 교재 같은 것은 정말 구하기 어려웠다. 누군가 그런 교재를 갖고 있다 하면 그것이 색소폰교재가 아닐지라도 그것으로 연습할 정도로 뭐든 닥치는 대로 연습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습관으로 남아있는 것 중 하나가 잠을 많이 자지 않는 것인데, 고등학교 때부터 유학 시절까지 하루에 서너 시간 정도만 자면서 연습했다. 그런 부분에서 군악대가 일조를 많이 했고, 또한 지금의 주춧돌이 되었다고도 생각한다.호주에서 유학했다 들었다. 처음 호주로 건너갔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었나.유학가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내 스스로가 정말 연주를 잘하는 줄로 알았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유학길에 임했었다. 그러나 막상 나가보니 내 수준은 정말 유치원 수준에 불과했다. 어학연수 기간을 좀 갖다가 시험을 쳐서 실기는 합격했으나 IELTS(국제영어능력시험) 시험점수가 부족하여 교수님에게 2, 3개월 정도 유예를 구해 그 기간 동안 준비를 해 시험을 쳤던 기억이 난다. 1학년 첫 수업은 충격 그 자체였다. 찰리 파커와 같은 커다란 덩치를 가진 친구들의 연주 실력에 ‘내가 정말 여기서 할 수 있을까?ʼ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강한 인상을 받았었다. 그 이후 연습을 거듭하며 조금씩 수업을 따라잡았다.재즈과라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실용음악학과와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점이 있나.예전에 만들어져 그런지 몰라도 실용음악과라는 말은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단어로 알고 있다. 해외는 클래식 아니면 재즈과만 존재한다. 내가 공부하러 호주에 갔을 당시만 해도 한국의 실용음악학과 커리큘럼과 재즈과 커리큘럼이 달랐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거의 비슷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를 포함한 다른 많은 교수 및 강사진들이 해외에서 공부하고 들어오다 보니 대체로 본인들이 배웠던 커리큘럼 대로 수업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지금은 거의 흡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호주에서 공부하면서 호주인들은 재즈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나.무엇보다 재즈를 편하게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음악을 접하며 자라다 보니 어디선가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면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리고, 혹은 결혼식에서 신부와 아버지가 스윙 음악에 춤을 추기도 하고, 그런 것을 보면 재즈는 아주 자연스럽게 원래 그네 문화인 것처럼 삶에 녹아 있었던 것 같다.호주에서 공부하며 있었던 일화가 있나.ANU 학교에 1학년으로 입학을 하면 빅밴드 오디션을 볼 기회가 주어진다. 빅밴드 오디션에 합격하여 학과 시간 이후에 연습하며 공연준비를 하고 명절이나 방학시즌에 버스를 타고 호주의 먼 지방으로 투어를 가거나 재즈페스티벌에서 연주했었던 기억들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본인이 생각하는 재즈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재즈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단어가 자유로움이지 않나. 나 역시 다르지 않다. 내가 어떤 표현을 하더라도 그것이 다 통용된다는 자유로움이다. 대신 한 가지 덧붙인다면 아무래도 그 자유로움 안에는 책임이 동반된다는 것이다. 가끔 어떤 친구들은 재즈는 자유로워도 된다 생각해서 무조건적인 자유로만 생각하는 경우도 있곤 한데, 실제로는 내가 자유스러워질 수 있는 만큼에 대한 책임도 본인이 져야 한다. 그 전제만 가지고 간다면 재즈만큼 매력적인 음악이 없는 것 같다. 재즈를 표현하는 데에 색소폰은 어떤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나.재즈를 얘기할 때 색소폰을 빼고 얘기할 수 없지 않나. 만약 누군가 내게 “재즈를 말할 때 재즈라는 단어를 빼고 설명해보아라”라고 얘기한다면 아마도 색소폰이라는 단어가 재즈를 대신할 수 있는 정도의 위치에 있지 않을까 혹은 그런 역할을 하고있진 않겠나라고 말할 수 있겠다. 또한 호흡으로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악기로는 ‘색소폰이 목소리보다 그 표현 범위가 ​더 넓다ʼ라는 생각도 든다.자신만의 음악 철학이 있나.“어떤 순간에나 어떤 곳에서든 즐기면서 연주하자”이다. 일전에 Y 악기사 브랜드 데몬 디렉터를 몇 년 정도 했었다. 그쪽에서 악기를 홍보하는 공간들은 주로 불특정 다수들이 모이는 곳, 예를 들면 코엑스 광장 혹은 백화점의 넓은 공간 같은 곳이다. 그런 곳에 무대를 설치하고 연주해서 Y 악기 브랜드를 홍보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했던 음악이 아닌 다른 음악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잘 몰랐던 부분도 있어서 무대에 올라가는 일이 즐겁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그렇게 일적인 마인드로만 무대에 올랐더니 관객들도 잘 모이지도 않고, 모이더라도 연주가 끝났을 때의 호응도가 거의 없었다. 그런 부분에서 스스로 ‘환경이 이러니까’, ‘공연장 혹은 시스템이 안 좋으니까’ 등의 여러 가지 핑곗거리를 만들었던 거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점을 나에게서 찾기 시작하면서 생각에 변화가 찾아왔다. ‘내가 이것을 하기 싫어하는구나, 그렇다면 다음 무대에선 즐거운 마음으로 연주 해 보자ʼ라고 마음먹고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곡으로, 그러나 진심으로 즐기면서 연주해 보았다. 관객의 반응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50명이 모였으면 그 다음에는 100명이 모이고, 이전에 박수 소리가 작았었다면 다음에는 박수소리가 훨씬 더 커지고… 곡이 끝났을 때는 관객들의 표정부터가 달라져 있었다. 그런 변화를 한 번 느끼고 나서는 열명이 있는 재즈클럽에서 공연하던, 천 명이 있는 공연장에서 공연하던 항상 나 스스로가 먼저 그 음악을 즐기려고 노력한다.많은 팀에서 연주 활동을 했는데 몇 팀 소개한다면.유학 초반에 선후배끼리 만나서 결성되었던 ‘모던스팟’이라는 팀은 가벼운 퓨전 음악을 주로 했던 팀이었고, 주로 많이 활동했던 팀은 ‘구민상 스윙스텝’이라고 해서 좀 특이한 컨셉으로 만든 팀이다. 이 팀을 만들게 된 경위가 처음에 우연한 기회로 연주를 하러 갔는데 스윙 댄스를 하시는 분들이 계시더라. 서울 시내에 스윙 댄스만을 위해서 모여 스윙 댄스를 추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이 계시는데 그분들은 라이브 음악에 춤추는 것을 정말 좋아하신다. 그렇게 스윙 댄서들을 위해서 앨범을 내게 된 것이 스윙스텝 앨범이었다. 신나는 스윙 춤곡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지금도 ‘스윙스텝’으로 활동을 하고 있고, 빅밴드는 <서울재즈 빅밴드>라는 곳과 <코리아 재즈오케스트라>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 코리아 재즈오케스트라는 집중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시 접은 상태다. 이토록 한 길만을 걷게 한 원동력이 무엇인가.관객들의 호응이다. 무대에서 한 시간 반, 두 시간 반 동안에 받은 관객들의 에너지가 몇 날 며칠을 연습하고 또 정진하게 만든다. 덧붙여 음악 생활이라는 게 아주 환상적이지만은 않을 때가 많은데, 연주자가 연주 중심으로 살다 보면 어떤 때에는 연주 기회가 적을 때도 있고, 난관에 부딪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것들을 묵묵히 지켜봐 주고 어깨 토닥여주는 와이프와 음악을 할 수 있게 초반에 길을 잘 닦아 주셨던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잘해서 혹은 내가 실력이 좋아서라는 말보다 결국은 관객과 가족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직도 일각에선 재즈가 어려운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에 따라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 보이나. 단순하게 대답한다면 ‘노출ʼ인 것 같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재즈 음악을 접하게 되면 그 음악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음악에 대한 거부반응이 없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재즈 음악의 노출이 적거나 거의 없게 되면, 성인이 되었을 때는 어느 정도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재즈라고 얘기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비밥일 것이다. 비밥 이후의 어려운 음악들 혹은 음악 공부하는 친구들도 어려워할 정도의 난이도가 있는 그런 것들을 먼저 떠올린다는 거다. 재즈1세대 때부터라고 쳐도 그 당시도 마찬가지로 재즈 음악이 저변에 퍼졌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재즈라는 것은 이제 조금씩 서서히 퍼져가고 있는 상태라고 본다. 그러다 보니 듣는 사람들 입장에선 재즈가 어렵게 느껴지고 머리가 아프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매스컴 혹은 다양한 곳에서 재즈라는 음악이 자연스럽게 한 번 노출되고 두 번 노출되다보면, 지금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은 성인이 되었을 때 재즈라는 음악이 어려운 음악이 아닌 편하고 일상적인 음악으로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20년 전부터 편지나 문자를 할 때에 ‘Saxoholic 민상ʼ이라는 꼬리말을 붙여 써오고 있다. (가끔 웃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한 가지에 집중하고 몰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다. 색소폰을 좋아해서 색소폰을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단순히 ‘해보고 싶다’ 혹은 ‘무대 위에서 누군가 하는 걸 보니 멋져 보여 나도 해봐야겠다ʼ라는 막연한 생각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만큼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많은 발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글Ι안지인 기자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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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01
  • 재즈의 선율을 빌려 색소폰으로 말하는 '색소포니스트 구민상'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재즈 색소폰 잘 부는 사람 누가 있어?” 이 질문의 대답에 “구민상”이라는 이름이 들려온다. 색소포니스트 구민상은 현재의 재즈씬에서 유서가 깊다. 호주국립대학교(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이하 ANU 표기)에서 유학 생활을 마친 후 현재 백석대학교 콘서바토리 실용음악과에 출강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고, 관객과 소통하는 연주자가 되기 위해 무던히도 자신을 성찰하는 부지런한 연주자이기도 하다. 색소폰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에, “하루 중 말을 하는 시간보다 색소폰으로 이야기하는 시간이 더 많기에 이제는 제 목소리보다 더 편한 의미전달의 도구죠.” 라고 말하는 소통하는 연주자 구민상을 만났다. 색소폰은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고등학생 때 메탈 음악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남학생들에게 메탈음악이라는 것은 로망 그 자체였다. 어머니를 졸라 낙원상가로 가서 기타를 사서 독학으로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 음악에 발을 들여놓은 첫걸음이었다. 이후 밴드부에 들어가 이런저런 악기를 만지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색소폰을 하게 됐다. 당시에는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그렇게 자연스럽게 색소폰을 잡게 되고 지금까지 이어져 흘러온 것이다.재즈 색소폰을 연주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되었나.우리 때에는 재즈라는 이름조차도 생소했었다. 재즈를 전문적으로 가르쳐 주는 아카데미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연습하고자 구하는 교재들도 클래식을 다루는 교재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클래식 쪽으로 공부를 하는 것도 생각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찰리 파커의 음반을 듣게 되었는데, 당시의 내게 너무 충격적으로 다가왔었다. 장난치는 것 내지는 음을 틀리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떻게 색소폰을 저렇게 자유자재로 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 것들을 신기하게 생각하다가 점점 더 궁금증이 생겨 조금씩 그에 대해 알아가다 보니 재즈라는 말도 있고, 그것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 알게 되면서부터 빠져들게 되었다.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찰리 파커의 음악이 난해하게 다가오진 않았었나.당시에는 ‘꼭 전공해야지ʼ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 아니었다. 악기라는 것을 편안하게 하기 시작했고, 그냥 하다 보니 찰리 파커를 알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찰리 파커의 음악이 좋은 음악인지 아닌지에 대해 알고 들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의 내게는 신기한 음악이었고, 궁금증이 생겨 더 파고들게 만드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던 음악이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음대 진학을 준비하였나. 그때는 재즈과라는 학과가 없었다. 실용음악과는 한 두 개 정도 있었는데, 알아보면서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유학을 가기에 앞서 군대를 다녀와야 했었기에 군악대 시험에 지원하여 합격 후 군악대에 가게 된 것이다.군대에서의 생활은 어땠었나.군악대에서는 연습했던 기억밖에 안 난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되어 있었던 시대도 아니었고, 약간 과장을 보태 말하면 턴테이블 시대였기 때문에 연습 교재 같은 것은 정말 구하기 어려웠다. 누군가 그런 교재를 갖고 있다 하면 그것이 색소폰교재가 아닐지라도 그것으로 연습할 정도로 뭐든 닥치는 대로 연습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습관으로 남아있는 것 중 하나가 잠을 많이 자지 않는 것인데, 고등학교 때부터 유학 시절까지 하루에 서너 시간 정도만 자면서 연습했다. 그런 부분에서 군악대가 일조를 많이 했고, 또한 지금의 주춧돌이 되었다고도 생각한다.호주에서 유학했다 들었다. 처음 호주로 건너갔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었나.유학가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내 스스로가 정말 연주를 잘하는 줄로 알았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유학길에 임했었다. 그러나 막상 나가보니 내 수준은 정말 유치원 수준에 불과했다. 어학연수 기간을 좀 갖다가 시험을 쳐서 실기는 합격했으나 IELTS(국제영어능력시험) 시험점수가 부족하여 교수님에게 2, 3개월 정도 유예를 구해 그 기간 동안 준비를 해 시험을 쳤던 기억이 난다. 1학년 첫 수업은 충격 그 자체였다. 찰리 파커와 같은 커다란 덩치를 가진 친구들의 연주 실력에 ‘내가 정말 여기서 할 수 있을까?ʼ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강한 인상을 받았었다. 그 이후 연습을 거듭하며 조금씩 수업을 따라잡았다.재즈과라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실용음악학과와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른 점이 있나.예전에 만들어져 그런지 몰라도 실용음악과라는 말은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단어로 알고 있다. 해외는 클래식 아니면 재즈과만 존재한다. 내가 공부하러 호주에 갔을 당시만 해도 한국의 실용음악학과 커리큘럼과 재즈과 커리큘럼이 달랐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거의 비슷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나를 포함한 다른 많은 교수 및 강사진들이 해외에서 공부하고 들어오다 보니 대체로 본인들이 배웠던 커리큘럼 대로 수업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지금은 거의 흡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호주에서 공부하면서 호주인들은 재즈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생각하나.무엇보다 재즈를 편하게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음악을 접하며 자라다 보니 어디선가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면 박자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리고, 혹은 결혼식에서 신부와 아버지가 스윙 음악에 춤을 추기도 하고, 그런 것을 보면 재즈는 아주 자연스럽게 원래 그네 문화인 것처럼 삶에 녹아 있었던 것 같다.호주에서 공부하며 있었던 일화가 있나.ANU 학교에 1학년으로 입학을 하면 빅밴드 오디션을 볼 기회가 주어진다. 빅밴드 오디션에 합격하여 학과 시간 이후에 연습하며 공연준비를 하고 명절이나 방학시즌에 버스를 타고 호주의 먼 지방으로 투어를 가거나 재즈페스티벌에서 연주했었던 기억들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본인이 생각하는 재즈의 매력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재즈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단어가 자유로움이지 않나. 나 역시 다르지 않다. 내가 어떤 표현을 하더라도 그것이 다 통용된다는 자유로움이다. 대신 한 가지 덧붙인다면 아무래도 그 자유로움 안에는 책임이 동반된다는 것이다. 가끔 어떤 친구들은 재즈는 자유로워도 된다 생각해서 무조건적인 자유로만 생각하는 경우도 있곤 한데, 실제로는 내가 자유스러워질 수 있는 만큼에 대한 책임도 본인이 져야 한다. 그 전제만 가지고 간다면 재즈만큼 매력적인 음악이 없는 것 같다. 재즈를 표현하는 데에 색소폰은 어떤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나.재즈를 얘기할 때 색소폰을 빼고 얘기할 수 없지 않나. 만약 누군가 내게 “재즈를 말할 때 재즈라는 단어를 빼고 설명해보아라”라고 얘기한다면 아마도 색소폰이라는 단어가 재즈를 대신할 수 있는 정도의 위치에 있지 않을까 혹은 그런 역할을 하고있진 않겠나라고 말할 수 있겠다. 또한 호흡으로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악기로는 ‘색소폰이 목소리보다 그 표현 범위가 ​더 넓다ʼ라는 생각도 든다.자신만의 음악 철학이 있나.“어떤 순간에나 어떤 곳에서든 즐기면서 연주하자”이다. 일전에 Y 악기사 브랜드 데몬 디렉터를 몇 년 정도 했었다. 그쪽에서 악기를 홍보하는 공간들은 주로 불특정 다수들이 모이는 곳, 예를 들면 코엑스 광장 혹은 백화점의 넓은 공간 같은 곳이다. 그런 곳에 무대를 설치하고 연주해서 Y 악기 브랜드를 홍보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했던 음악이 아닌 다른 음악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잘 몰랐던 부분도 있어서 무대에 올라가는 일이 즐겁지 않았던 게 사실이었다. 그렇게 일적인 마인드로만 무대에 올랐더니 관객들도 잘 모이지도 않고, 모이더라도 연주가 끝났을 때의 호응도가 거의 없었다. 그런 부분에서 스스로 ‘환경이 이러니까’, ‘공연장 혹은 시스템이 안 좋으니까’ 등의 여러 가지 핑곗거리를 만들었던 거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점을 나에게서 찾기 시작하면서 생각에 변화가 찾아왔다. ‘내가 이것을 하기 싫어하는구나, 그렇다면 다음 무대에선 즐거운 마음으로 연주 해 보자ʼ라고 마음먹고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곡으로, 그러나 진심으로 즐기면서 연주해 보았다. 관객의 반응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50명이 모였으면 그 다음에는 100명이 모이고, 이전에 박수 소리가 작았었다면 다음에는 박수소리가 훨씬 더 커지고… 곡이 끝났을 때는 관객들의 표정부터가 달라져 있었다. 그런 변화를 한 번 느끼고 나서는 열명이 있는 재즈클럽에서 공연하던, 천 명이 있는 공연장에서 공연하던 항상 나 스스로가 먼저 그 음악을 즐기려고 노력한다.많은 팀에서 연주 활동을 했는데 몇 팀 소개한다면.유학 초반에 선후배끼리 만나서 결성되었던 ‘모던스팟’이라는 팀은 가벼운 퓨전 음악을 주로 했던 팀이었고, 주로 많이 활동했던 팀은 ‘구민상 스윙스텝’이라고 해서 좀 특이한 컨셉으로 만든 팀이다. 이 팀을 만들게 된 경위가 처음에 우연한 기회로 연주를 하러 갔는데 스윙 댄스를 하시는 분들이 계시더라. 서울 시내에 스윙 댄스만을 위해서 모여 스윙 댄스를 추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이 계시는데 그분들은 라이브 음악에 춤추는 것을 정말 좋아하신다. 그렇게 스윙 댄서들을 위해서 앨범을 내게 된 것이 스윙스텝 앨범이었다. 신나는 스윙 춤곡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지금도 ‘스윙스텝’으로 활동을 하고 있고, 빅밴드는 <서울재즈 빅밴드>라는 곳과 <코리아 재즈오케스트라>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 코리아 재즈오케스트라는 집중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시 접은 상태다. 이토록 한 길만을 걷게 한 원동력이 무엇인가.관객들의 호응이다. 무대에서 한 시간 반, 두 시간 반 동안에 받은 관객들의 에너지가 몇 날 며칠을 연습하고 또 정진하게 만든다. 덧붙여 음악 생활이라는 게 아주 환상적이지만은 않을 때가 많은데, 연주자가 연주 중심으로 살다 보면 어떤 때에는 연주 기회가 적을 때도 있고, 난관에 부딪히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것들을 묵묵히 지켜봐 주고 어깨 토닥여주는 와이프와 음악을 할 수 있게 초반에 길을 잘 닦아 주셨던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잘해서 혹은 내가 실력이 좋아서라는 말보다 결국은 관객과 가족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직도 일각에선 재즈가 어려운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에 따라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 보이나. 단순하게 대답한다면 ‘노출ʼ인 것 같다.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재즈 음악을 접하게 되면 그 음악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음악에 대한 거부반응이 없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재즈 음악의 노출이 적거나 거의 없게 되면, 성인이 되었을 때는 어느 정도 부담을 느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재즈라고 얘기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비밥일 것이다. 비밥 이후의 어려운 음악들 혹은 음악 공부하는 친구들도 어려워할 정도의 난이도가 있는 그런 것들을 먼저 떠올린다는 거다. 재즈1세대 때부터라고 쳐도 그 당시도 마찬가지로 재즈 음악이 저변에 퍼졌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재즈라는 것은 이제 조금씩 서서히 퍼져가고 있는 상태라고 본다. 그러다 보니 듣는 사람들 입장에선 재즈가 어렵게 느껴지고 머리가 아프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매스컴 혹은 다양한 곳에서 재즈라는 음악이 자연스럽게 한 번 노출되고 두 번 노출되다보면, 지금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은 성인이 되었을 때 재즈라는 음악이 어려운 음악이 아닌 편하고 일상적인 음악으로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20년 전부터 편지나 문자를 할 때에 ‘Saxoholic 민상ʼ이라는 꼬리말을 붙여 써오고 있다. (가끔 웃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한 가지에 집중하고 몰두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이다. 색소폰을 좋아해서 색소폰을 시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단순히 ‘해보고 싶다’ 혹은 ‘무대 위에서 누군가 하는 걸 보니 멋져 보여 나도 해봐야겠다ʼ라는 막연한 생각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만큼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많은 발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글Ι안지인 기자jii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9-01
  • 야탑 올뮤직색소폰동호회
    야탑동에 위치한 ‘올뮤직색소폰동호회’는 색소폰 연주자 이성만이 만든 지 올해로 8, 9년이 되어가는 이름난 동호회다. 3,40대 젊은 연령대부터 7, 80대 고연령층까지 두루두루 활발하게 활동하는 올뮤직색소폰동호회는 이 일대는 물론이고 서울 저 멀리에서 오는 사람들로 빈번하다. 회원 수 50명을 가까이 바라보며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는 야탑 올뮤직색소폰동호회의 비결이 궁금해졌다. (이성만 원장)동호회를 운영하며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동호회를 운영하는 데에 나의 역할은 우리 회원님들이 즐겁게 취미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본다. 회원님들의 즐겁고 다채로운 경험을 위해서 동영상이나 연주회를 만들어 재미있는 상황들을 자꾸 기획하고 진행해야 한다는 즐거운 부담감이 있다.색소폰 교육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레슨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항상 상주하면서 매일 레슨을 한다. 금요일에는 좀 특이하게 오전반을 만들어 오전에만 시간이 가능하신 분들을 모아서 연주회를 한다. 보통 우리가 음악회를 한다고 하면 저녁에 하지 않나. 저녁 시간대에 시간이 안 되는 분들을 위하여 특별히 오전 연주반을 만들었다. 오전연주회는 오전 11시에 모여 1시간 정도 하고 근처에서 다 같이 점심을 먹고 헤어진다. 또한 매주 금요일마다 우리 회원님들을 대상으로 격주로 동영상 촬영을 하고 있다.동영상 촬영을 하는 것이 동호회 운영에 있​어 큰 장점으로 작용할 것 같은데?많이 작용한다. 인터넷을 보면 많은 동호인들이 사진도 올리고 동영상도 올리고 하는데 사실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몇 군데 정도밖에 없더라. 이전에 사진작업을 한 경험이 있어 예쁜 사진, 정확한 동영상을 위한 노력을 많이 했다. 편집기술을 익혀서 동영상을 예쁘게 편집한다거나 소리를 만드는 법을 배워서 우리 회원들이 연주하는 것을 깔끔한 음질로 녹음해 유튜브나 카페에 올리기도 한다. 혹은 핸드폰으로 전송해드리면 회원님들이 간직하고 다니며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거나 하면 다들 좋아하신다.자료화가 굉장히 잘 돼 있을 것 같다.얼마 전에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수를 따져보니 1,300개 정도를 올렸더라. 회원님 중에 한 분은 자신의 동영상을 100개 넘게 갖고 계신 분도 있다. 그 정도로 사진이나 동영상을 자료화하여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고 회원님들과도 잘 공유가 되는 편이다. 그런 부분들 때문에 회원님들 또한 고마움을 많이 표현하신다.연세가 있으신 분들을 대상으로 녹음하고 동영상을 찍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은데?처음에는 틀리면 끊고 “어우 나 다시 갈게!”이러시는 분들이 많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이 전혀 없다. 틀려도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그냥 한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교육을 한 점도 있는데, “여기 앉아있는 사람들도 관객이라고 생각해라. 우리가 앉아서 구경하고 듣고 있는 만큼 그만큼의 배려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했던 게 기억이 난다. 마이크 꽂고 뿌뿌 불어 보는 것도 자제를 시키는 편인데, 가수가 마이크를 잡고 목을 가다듬지 않지 않나. 이제는 우리 회원님들도 앞에 몇 명이 앉아 있지 않더라도 무대라고 생각을 하고 관객에 대한 예의를 철저하게 지킨다.(올뮤직색소폰 최연장자 ‘한종희’ 회원)색소폰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평상시에도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당시 70, 80년도였을 때 길호균 씨나 이봉조씨가 색소폰 연주하는 것을 보고 많이 좋아했었고, 소리가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직접적으로 색소폰을 만난 것은 일본에 살았던 동생과 서로 색소폰에 대한 얘기를 종종 하곤 했었는데, 그러다 보니 생일선물로 색소폰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 직장을 다니고 있던 터라 당시에는 하지 못했고 시간이 흘러 주변에 한 두 명씩 색소폰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나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시작하게 되었다.색소폰을 연주하며 어떤 것들을 느끼나?좋아하는 노래를 색소폰으로 연주할 수 있어 재미있고 보람을 느낀다. 또 올뮤직색소폰 동호회에서 연주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좋고, 부가적으로는 손가락을 계속 움직이다 보니 치매 예방도 되지 않겠는가 하는 기대감도 있다. 여가 활동으로는 최적인 것 같다.색소폰을 한 지는 얼마나 되었고, 올뮤직동호회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가?색소폰을 한 지는 5년 정도 되었다. 처음부터 이곳 올뮤직색소폰동호회에서 시작했다. 매주 금요일마다 와서 연주하고 한 달에 한 번씩 ‘향상음악회’에 참여하여 연주한다. 또 동호회 회장님이 특별히 만든 실버들 모임이 있어 그 실버 멤버들이 모여서 분기별로 야유​회를 나가기도 한다.연주회는 주로 어떤 방식으로 하나?매주 금요일 무대에서 연주하고, 녹화는 2주에 한 번씩 한다. 녹화를 한다고 생각하니 처음에는 많이 떨렸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떨리는데다가 몸에 힘이 많이 들어간 나머지 손가락도 엄청 아팠었다. 그렇게 녹화한 것을 보면 부끄러운 부분, 고쳐야 하는 부분이 피부로 와 닿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부끄러웠지만, 그것이 피드백되어 실력증진에 도움이 많이 되더라. 그렇게 잘 안 되다가 2년 정도 지나니 자연적으로 힘이 빠지고 호흡 조절도 좀 할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무대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특별히 연습하고 있는 곡이나 목표로 하는 곡이 있나?요즘은 새로 나온 곡 ‘소풍 같은 인생’ 등 여러 가지를 연습하는데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연주곡은 가수 ‘조용필’의 <친구여>이다. 이 곡을 연주하다 보면 가슴에 와 닿는게 많고 느낌이 남다르다. 같이 동고동락했던 친구들…, 예전에 산에 같이 다녔던 친구들…, 하나둘씩 나보다 먼저 떠나보낸 친구들이 많이 생각난다.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 먼저 간 경우가 있다. 보기에는 엄청 건강할 것 같은데 어느 날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먼저 그렇게 가면 “참 아쉽다…”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제 올해로 여든 살이다. 팔순 잔치를 하게 되면 가족들을 위해 색소폰을 연주할 계획을 갖고있다. 곡명은 <동해>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사랑해요> 이렇게 두 곡을 하고 싶다.(동호회장 ‘박준우’)동호회 회장을 맡게 된 사연이 있나?보시다시피 우리 동호회에는 나이가 있으신 분들이 많다. 나와 띠동갑인 분들도 있고 일흔이 넘는 분들이 많다 보니 “이 형님들을 위해서 할 게 뭐가 있을까…”하는 마음으로 동호회 회장을 맡았다.회원들끼리의 사이가 돈독해 보이는데?우리는 두 달에 한 번씩 야외로 나간다. 야외에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연주도 하고 그런다. 체계가 잘 잡혀 있는 편이라 어수선한 분위기도 없다. 다만 우리 동호회가 사람이 많다 보니 어느 정도의 트러블은 피할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런 것을 잘 중재하는 것이 동호회 회장으로서 하는 일이기도 하다. 연말에는 여느 동호회와 다르지 않게 장소를 빌려 모두의 가족들과 한자리에 모여 화기애애한 시간을 갖기도 한다.색소폰의 즐거움이 언제 느껴지나?처음에는 도레미의 도자도 몰랐었다. 내가 속한 모임에 있는 형님들 네댓 명이 색소폰을 하는데 그게 정말 좋아 보였다. 그래서 색소폰을 배우게 된 거다. 배운 지 1년 만에 악기를 들고 제주도에 여행까지 갔었다. 색소폰 부시는 분하고 3박 4일 동안 신나게 놀았다. 온 제주도를 돌아다니면서 연주를 하니까 정말 좋더라. 지금은 그렇게 색소폰 분 지 6년차 정도 된 것 같다.밖에서 연주할 때 무섭거나 떨리진 않았나?밖에서 연주하는 건 무섭지가 않다. 이곳 앞에 서서 연주하는 게 최고로 무섭다. 우리가 서로의 실력을 다 알고 있어서인지 여기에만서면 자꾸 버벅거리는데 일단 나가면 그런 게 하나도 없다. 나가서 무대에 서면 거기서는 신이 나는데 여기에 있는 오 센티미터짜리 무대에서는 덜덜덜 떨게 된다.(김종빈, 김명숙 회원 부부)색소폰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김종빈 회원) 탄천에 운동을 나갔다가 탄천에서 누군가 색소폰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반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인터넷에 색소폰을 할 만한 가까운 곳이 어디에 있나 찾다가 우연히 이곳 올뮤직색소폰동호회에 들르게 되어 그 날 바로 등록을 하고 악기를 구입하여 시작했다.(김명숙 회원) 남편이 하는 것을 따라다니며 지켜보다 같이 하게 되었다. 옆에서 남편이 많이 도와주고 어렸을 때 피아노를 쳐 기본적인 음감이 있어서 즐겁게 색소폰을 배울 수있었던 것 같다.색소폰 연습은 얼마나 어떻게 하나?(김종빈 회원) 나는 노력을 많이 하는 노력형이다. 지금 현재 같은 경우는 녹음기를 사서 연주할 때마다 꼭 녹음한다. 오늘 연주하며 녹음한 곡들을 매일 출퇴근하면서 듣고 또 듣고 하면서 잘못된 것을 수정해 또 녹음하는 식으로 계속 연습을 한다.(김명숙 회원) 남편은 정말 공부를 많이 하는 편이다. 인터넷 강의 같은 것을 항상 찾아보고 그것을 바로 해보기 위해 퇴근하자마자 연습실로 간다. 그런 모습에 나 또한 저절로 그렇게 연습하게 되는 것 같다.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꼭 와서 연습하려고 한다.<2015년 야마하 아마추어 색소폰대회> 금상을 받은 이력이 있던데?(김명숙 회원) 이성만 선생님의 권유로 나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그만한 실력이 될까 싶기도 하고 두렵기도 해서 만류하다가 선생님의 거듭된 권유로 나가게 되었다. 그렇게 나가서 본의 아니게 금상을 타서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상을 받은 것도 기쁜 일이었지만 사실 그것을 준비해 나가는 과정이 지금은 더 많이 남는 것 같다. 대회에 나가기 위해 악보도 외우고, 또 그것을 변형해서 악보를 직접 그리면서 연습을 했었다. 그 과정에서 실력이 정말 많이 늘었던 것 같다. 올뮤직색소폰동호회를 위한 이성만 원장의 ‘기록’은 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 아닐까 싶다. 단지 색소폰의 소리나 음색이 아닌 그들의 추억과 존재의 향기를 담아내는 것일 테니 말이다. 열정과 사랑으로 뭉친 이성만 원장 그리고 올뮤직색소폰동호회 회원 모두를 응원한다. 글Ι안지인 기자 jiin@keri.or.kr사진Ι이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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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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