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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색소폰 문화를 개척하는 '색소폰랜드' 대표, 색소포니스트 강기만
    (월간색소폰)박세정 기자= 비교적 늦은 나이에 연주를 시작하여 누구보다도 처절한 시간들을 보내며 발전을 거듭해온 색소포니스트 강기만. 직접 운영하고 있는 커뮤니티 ‘색소폰랜드’는 현재 6천명이 넘는 회원들과 다양한 활동을 계획하고 있으며, 그를 믿고 따르는 끈끈한 관계의 사람들과 한마음으로 색소폰계의 문화를 주도해 나간다. 강기만에게 ‘변화’는 불안감보다 정확한 예측에 대한 보상과 기대다. 그는 대중들이 원하는 활동과 플랫폼을 간파하는 레이더(Radar)로 색소폰계의 문화를 주도해나가는 리더(Leader)로 자리 잡고 있다. 국내 색소포니스트들 중 꾸준히 거론됩니다.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누군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강기만보다 연주를 잘 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처럼 스타성이 있고 주변인들을 끌어 모으는 연주자는 없다”면서 강기만 고유의 매력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연주를 뛰어나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보러 가고 싶으며, 화려하지 않지만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대중들이 원하는 친근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찾아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어렵지 않은 연주를 하며 대중들이 선호하는 무대를 짜임새 있게 선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에서는 기술적으로 훌륭한 연주자인 ‘테크니션(Technician)’과 대중들이 좋아하는 연주자인 ‘스타’가 구별이 됩니다. 저는 기술적으로 훌륭한 연주보다 퍼포먼스를 중점적으로 선보여, 일부 사람들이 ‘코드 레이더’라고 불러주시는 것처럼 대중들이 좋아하는 무대를 보여드립니다. 서른 살에 처음 색소폰을 시작하신 사연과 비교적 늦은 나이에 색소폰을 시작했다는 불안감은 없으셨나요? 5년간 군대에서 행정 과장으로 일하며 마지막에 복무했던 춘천의 부대 근처에 색소폰 학원이 있어 배우다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신학교에 진학하려고 마음먹었으나 먼저 입학한 친구들과의 동일한 진로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다가, 색소폰 연주에 흥미를 느껴 시작했습니다. 늦게 시작했다는 불안감은 없었지만 늦은 만큼 처절하게 연습했습니다. 제대 후 입학한 백제예술대학에 재학 당시 입술이 멀쩡한 적이 없었고, 연주하다 아랫입술 살점이 떨어져나간 적도 있었습니다. 시작이 늦었기에 오히려 사고가 개방적이라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며, 5년 간 군대 행정과장으로 복무한 경력도 커뮤니티 ‘색소폰랜드’의 운영과 무대 기획에 도움이 됩니다. 이전에는 감정적이고 결단력이 부족했는데 군대에서 행정적인 업무를 맡아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위기 관리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군림보다 획득되는 리더십을 알게 되어 사람들과 원활한 소통을 하는 데 도움을 받았습니다. 2015년 9월 19일에 커뮤니티 ‘색소폰랜드’를 개설하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5천명 돌파, 현재는 약 6,800여 명의 회원이 있습니다. 커뮤니티를 만들게 된 계기와 빠른 시간에 회원을 모집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나요? 2013년도 미국에서 3년 동안 학교 측의 초청으로 ‘웨스턴크리스천대학교(Western Christian Universty)’에서 강의하며 서부지역 교회를 대상으로 투어 공연을 했습니다. 그 당시 구글(Google)회사 근처에 머물면서 인터넷에 관련된 정보를 많이 들었습니다. 귀국 후 청강했던 마케팅 수업에서 포털사이트 ‘네이버’ 플랫폼(Platform) 중 하나인 ‘밴드’의 시대가 온다는 정보를 알게 되어 색소폰랜드를 개설했습니다. 개설 전 운영중이던 카카오스토리채널 ‘하루 5분 색소폰산책’은 이미 만 명의 회원이 있었습니다. 더 많은 회원 수를 보유한 채널의 활동량이 1%정도인 반면 색소폰랜드의 활동비율은 70%에 달하기 때문에 빠른 시간에 회원 모집이 가능했다고 봅니다.활발하게 운영되는 커뮤니티 ‘색소폰랜드’의 운영과 회원 관리 방식, 정기적인 행사 일정을 알고 싶습니다.색소폰랜드는 전국 임원진 320여 명과 본부조직 17명, 앙상블 15팀, 프랜차이즈 30개로 구성됩니다. 회원은 6,800여 명으로 그중 칭다오, 상해 일본, 인도네시아, 라오스 등 해외 각지의 교민 100여 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년 처음 진행된 전국모임에서는 400명의 회원들이 모였으며 정기 행사로는 4월 전국모임, 12월 첫째 주에는 송년회를 합니다. 커뮤니티 운영에 가장 중점적으로 신경을 기울이는 부분은 많은 사람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간혹 벌어지는 불미스러운 사건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본부에서는 회원들의 불만과 요구사항을 듣고, 커뮤니티의 분위기를 저해하는 이들은 다른 회원 분들의 의견을 받아 다수결의 원칙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색소폰랜드는 하나의 기업처럼 프랜차이즈가 늘고, 공식 동호회가 지정되기도 합니다. 프랜차이즈를 도입하게 된 계기와 각 단체들은 어떤 관계로 유지되나요?창원 부지역장님이 학원을 오픈하면서 우연한 계기로 시작되었습니다. 해당 지역민들에게 동호회나 라이브 카페 등을 추천해주고, 식사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사랑방 역할을 부여하고자 추진했던 일이 프랜차이즈 시스템 도입의 계기였습니다. 이후 반응이 좋아 다른 지역을 대상으로 확대되어 현재 동호회, 학원, 악기사, 라이브 카페, 호텔, 펜션 등 30개가 등록되었고, 올해 안에는 50개 정도까지 증가될 것으로 보입니다. 동호회나 학원, 악기사는 홍보 효과를 얻고 사랑방 역할을 하며 펜션의 경우는 색소폰랜드 회원들에게 멤버십 할인 혜택을 제공 하고 있습니다. MOU 체결한 ‘중국 칭다오 적십자 한중의료단’과 내년에는 행사를 기획하고 있으며, 또 다른 MOU업체 은평구의 보육원 ‘선덕원’에서는 사회에 기여하는 차원에서 아이들을 위한 음악회 등 다양한 활동을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현재의 색소폰랜드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색소폰랜드는 만들어진 것을 활용하는 형태가 아닌 새로운 문화를 개척하며 색소폰계의 온라인과 모바일 플랫폼을 주도한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사회의 변화나 흐름에 맞게 전체 플랫폼을 교체하고 새로운 형태로의 조직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최근 앙상블 조직에 집중하는 이유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고, 앞으로도 색소폰계의 새로운 문화를 이끄는 ‘아이콘’으로 입지를 굳혀 나갈 것입니다.현재는 경기도 양평 지역에 ‘색소폰랜드 타운’ 건립을 추진 중입니다. 연주와 파티, 세미나, 캠프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성지’를 만들어 이곳에서 동호회나 앙상블 모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궁극적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은 색소폰 연주 실력의 향상보다 색소폰을 매개로 만난 사람들과 서로 가깝게 교류하며 행복을 느끼고, 서로 배려하며 품격 있는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향인 여수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시다가 서울에 정착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더 많은 기회들을 찾기 위해 여수에서 활동하던 모든 일들을 보름 만에 마무리 짓고 한 달 만에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여수에서는 호남신학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후 5년간 실용음악학원을 운영하고,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었습니다. 대학원 졸업 후 바로 강의를 하였으니 색소폰을 연주한지 6년 만에 강단에 선 것이었고, 7년째부터 경연대회 심사위원장, 라디오 . 신문 . 잡지 등에 칼럼을 기고하고 음반 발매, 책 집필 등 다양한 성취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한 언론에서는 저를 연주자의 ‘그랜드슬램’이라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여수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후 마술사의 초청으로 제주도의 연주회에 참여했는데, 알고 보니 영화감독들과 배우들의 프라이빗한 파티였습니다. 그곳에서 인연이 닿은 배우 안성기 씨는, ‘2014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 개막식 연주 등 좋은 자리에 초대해주셨고, 지금까지도 친분을 이어가며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마련해주시는 감사한 분입니다. 삼익 악기의 중국 모델이며 바이젠버그 모델로서 선생님의 이름을 딴 색소폰 ‘KGM Signature’가 판매되고 있습니다. 모델로 선정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서울에서 색소포니스트 이정식 선배님과 듀엣 공연을 했을 때 관람객 분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이 공연을 계기로 바이젠버그의 모델이 되어 시그니처 색소폰이 제작 되었습니다. 바이젠버그 관계자들과 친분이 있던 삼익 악기의 모델로도 선정되었으며, 매년 ‘상해악기쇼’에서 공연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에 대한 홍보가 가능했습니다.한국인이 최초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한 ‘Color & Harmony’ 콘서트는 어떻게 추진하게 되셨나요?개인적으로 무대에 서는 것보다 다른 이들에게 무대의 기회를 제공하는 기획자의 역할을 선호합니다. 작년 10월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에서 ‘Color & Harmony’ 콘서트를 기획하고, 회원들을 모집하였습니다. 아마추어 앙상블을 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참가시키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22명으로 구성된 아마추어 앙상블을 일시적으로 창단해 임정윤 지휘자에게 지도를 맡겨 ‘엘 빔보(El Bimbo)’와 ‘대니 보이(Danny Boy)’, ‘아리랑’을 연주하도록 했습니다. 저는 이 공연에서 호주의 피아니스트 Nathan Tam과 함께 ‘원더풀 투나잇(Wonderful Tonight)’을 협연하였고, 색소폰 연주와 발레리나, 탱고 댄스, 재즈 피아노 등을 한 무대에서 선보여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공연의 반응이 좋아 현재 제가 음악학교 학장을 맡은 호주기독교대학교(Australian College of Christianity)의 홍보 차 시드니, 캔버라, 브리즈번, 멜버른, 골드 코스트에 방문하여 투어 공연을 했습니다.1집 앨범 ‘Hymns for You’, 2집 ‘Dear Kenny G’, 3집 강기만 알토 색소폰 연주곡집 ‘Saxophone Paradiso’, 4집 ‘Philosophy’ 소개와 추후 앨범 계획이 있다면 알려주세요.1집과 4집은 가스펠 앨범이며 1집은 소프라노로 녹음했습니다. 3, 4집은 색소폰 연주자들이 가장 많이 보유한 알토 색소폰으로 녹음하여 동호인들이 쉽게 연주할 수 있도록 따라하기 쉬운 연주곡을 수록하였습니다. 4집 앨범은 저만의 기독교적 신념과 ‘철학’을 담아낸 가스펠 앨범이며, 올겨울 쯤에는 영화음악을 수록한 5집 앨범을 발매할 예정입니다.2집 앨범의 제목 ‘Dear Kenny G’로 미루어보면 케니 지를 특히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케니 지 외에 존경하는 색소포니스트가 있으신지요.케니 지는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뮤지션이니 연주를 따라하고 싶은 분들이 많을 것이라는 짐작으로 앨범을 발매하고 연주곡집을 냈습니다. 저는 케니 지와 더불어 데이브 코즈도 존경합니다. 국내에서는 훌륭한 뮤지션을 설명할 때 마케팅을 고려하지 않지만 외국은 뮤직 비즈니스가 발달됐습니다. 데이브 코즈는 연주 시 퍼포먼스가 화려하며, 소프라노 색소폰의 대명사 케니 지는 댄스팀을 대동하여 청중의 시선을 끌어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고 자기PR을 훌륭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연주 실력 외에도 시선을 뗄 수 없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점을 본받고 싶습니다.동영상 강의 사이트 ‘색소폰스쿨’과 저서 ‘색소폰 여행’을 집필하시는 등 아마추어 연주자들의 색소폰 교육에도 관심이 높으신데, 강의와 책을 통해 어떤 교육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색소폰스쿨에는 20명 강사진의 동영상 강의 600여 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질문에 따른 답을 5~6분 정도 진행하여 핵심적인 강의를 하는 방식으로 ‘색소폰 관련 백과사전’이라고 생각하시는 편이 가깝습니다. 색소폰 여행은 해설집입니다. 집필 당시에 색소폰과 관련된 해설서가 없어 평소 자주 듣게 되는 질문들을 문답 형식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이 책을 보시면 색소폰에 관한 상식을 넓힐 수 있습니다.추진력이 뛰어나신데 앞으로 색소폰랜드와 연주자 강기만 활동 방향은 어떤 계획을 하고 있으신가요.색소폰랜드에 소속된 앙상블은 현재, 15개 팀이며 단원들은 250여 명 정도입니다. 앙상블 조직에 집중하여 내년에는 300명 정도 단원들과 한 무대에서 협연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또한 색소폰 문화 확대의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경연대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올가을에는 다양한 경연대회 참가도 추진 중입니다. 연주자로서는 4차 혁명 시대에 맞춰 영상기술 발전을 접목하여 시대의 흐름에 맞는 퍼포먼스와 장르를 개발하고, 더 큰 무대에서 수천 명 앞에서 선보여도 부족하지 않을 퍼포먼스와 무대 디자인의 세팅을 목표로 계발해나가고 있습니다. 자기 관리를 위해 다양한 운동을 하며 매일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인간관계의 폭을 넓히고 있습니다.저는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고 꿈꾸는 결과물의 달성을 위하여 기획한 방향에 따라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40살에는 사람들을 의무적으로 만나기보다 ‘선택할 수 있는 삶’을 꿈꾸었는데 어느 정도 이뤄냈습니다. 50살이 되면 조금 더 발전 될 것이란 기대가 있습니다. 어떤 연주자로 남고 싶으세요?라이프가 멋진 연주자로 남고 싶습니다. 멋진 연주는 기본이며 연주만큼 바르고 멋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예술적인 삶을 살았다거나 후학들과 아마추어에게 삶에 대한 지침을 주며, 사는 방식이 멋지고 존경할만한 인품을 갖춘 연주자로 생각해준다면 좋겠습니다. 또한 좋은 연주는 앨범으로만 들어도 되지만 청중들이 직접 찾는 무대는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눈을 뗄 수 없는 무대를 선보였던 연주자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글. 박세정 기자suyeo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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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1
  • 색소폰 문화를 개척하는 '색소폰랜드' 대표, 색소포니스트 강기만
    (월간색소폰)박세정 기자= 비교적 늦은 나이에 연주를 시작하여 누구보다도 처절한 시간들을 보내며 발전을 거듭해온 색소포니스트 강기만. 직접 운영하고 있는 커뮤니티 ‘색소폰랜드’는 현재 6천명이 넘는 회원들과 다양한 활동을 계획하고 있으며, 그를 믿고 따르는 끈끈한 관계의 사람들과 한마음으로 색소폰계의 문화를 주도해 나간다. 강기만에게 ‘변화’는 불안감보다 정확한 예측에 대한 보상과 기대다. 그는 대중들이 원하는 활동과 플랫폼을 간파하는 레이더(Radar)로 색소폰계의 문화를 주도해나가는 리더(Leader)로 자리 잡고 있다. 국내 색소포니스트들 중 꾸준히 거론됩니다.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누군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강기만보다 연주를 잘 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처럼 스타성이 있고 주변인들을 끌어 모으는 연주자는 없다”면서 강기만 고유의 매력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연주를 뛰어나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보러 가고 싶으며, 화려하지 않지만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대중들이 원하는 친근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 찾아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어렵지 않은 연주를 하며 대중들이 선호하는 무대를 짜임새 있게 선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에서는 기술적으로 훌륭한 연주자인 ‘테크니션(Technician)’과 대중들이 좋아하는 연주자인 ‘스타’가 구별이 됩니다. 저는 기술적으로 훌륭한 연주보다 퍼포먼스를 중점적으로 선보여, 일부 사람들이 ‘코드 레이더’라고 불러주시는 것처럼 대중들이 좋아하는 무대를 보여드립니다. 서른 살에 처음 색소폰을 시작하신 사연과 비교적 늦은 나이에 색소폰을 시작했다는 불안감은 없으셨나요? 5년간 군대에서 행정 과장으로 일하며 마지막에 복무했던 춘천의 부대 근처에 색소폰 학원이 있어 배우다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신학교에 진학하려고 마음먹었으나 먼저 입학한 친구들과의 동일한 진로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다가, 색소폰 연주에 흥미를 느껴 시작했습니다. 늦게 시작했다는 불안감은 없었지만 늦은 만큼 처절하게 연습했습니다. 제대 후 입학한 백제예술대학에 재학 당시 입술이 멀쩡한 적이 없었고, 연주하다 아랫입술 살점이 떨어져나간 적도 있었습니다. 시작이 늦었기에 오히려 사고가 개방적이라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며, 5년 간 군대 행정과장으로 복무한 경력도 커뮤니티 ‘색소폰랜드’의 운영과 무대 기획에 도움이 됩니다. 이전에는 감정적이고 결단력이 부족했는데 군대에서 행정적인 업무를 맡아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위기 관리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습니다. 또한 군림보다 획득되는 리더십을 알게 되어 사람들과 원활한 소통을 하는 데 도움을 받았습니다. 2015년 9월 19일에 커뮤니티 ‘색소폰랜드’를 개설하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5천명 돌파, 현재는 약 6,800여 명의 회원이 있습니다. 커뮤니티를 만들게 된 계기와 빠른 시간에 회원을 모집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나요? 2013년도 미국에서 3년 동안 학교 측의 초청으로 ‘웨스턴크리스천대학교(Western Christian Universty)’에서 강의하며 서부지역 교회를 대상으로 투어 공연을 했습니다. 그 당시 구글(Google)회사 근처에 머물면서 인터넷에 관련된 정보를 많이 들었습니다. 귀국 후 청강했던 마케팅 수업에서 포털사이트 ‘네이버’ 플랫폼(Platform) 중 하나인 ‘밴드’의 시대가 온다는 정보를 알게 되어 색소폰랜드를 개설했습니다. 개설 전 운영중이던 카카오스토리채널 ‘하루 5분 색소폰산책’은 이미 만 명의 회원이 있었습니다. 더 많은 회원 수를 보유한 채널의 활동량이 1%정도인 반면 색소폰랜드의 활동비율은 70%에 달하기 때문에 빠른 시간에 회원 모집이 가능했다고 봅니다.활발하게 운영되는 커뮤니티 ‘색소폰랜드’의 운영과 회원 관리 방식, 정기적인 행사 일정을 알고 싶습니다.색소폰랜드는 전국 임원진 320여 명과 본부조직 17명, 앙상블 15팀, 프랜차이즈 30개로 구성됩니다. 회원은 6,800여 명으로 그중 칭다오, 상해 일본, 인도네시아, 라오스 등 해외 각지의 교민 100여 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년 처음 진행된 전국모임에서는 400명의 회원들이 모였으며 정기 행사로는 4월 전국모임, 12월 첫째 주에는 송년회를 합니다. 커뮤니티 운영에 가장 중점적으로 신경을 기울이는 부분은 많은 사람들의 활발한 활동으로 인해 간혹 벌어지는 불미스러운 사건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본부에서는 회원들의 불만과 요구사항을 듣고, 커뮤니티의 분위기를 저해하는 이들은 다른 회원 분들의 의견을 받아 다수결의 원칙으로 문제를 해결합니다. 색소폰랜드는 하나의 기업처럼 프랜차이즈가 늘고, 공식 동호회가 지정되기도 합니다. 프랜차이즈를 도입하게 된 계기와 각 단체들은 어떤 관계로 유지되나요?창원 부지역장님이 학원을 오픈하면서 우연한 계기로 시작되었습니다. 해당 지역민들에게 동호회나 라이브 카페 등을 추천해주고, 식사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사랑방 역할을 부여하고자 추진했던 일이 프랜차이즈 시스템 도입의 계기였습니다. 이후 반응이 좋아 다른 지역을 대상으로 확대되어 현재 동호회, 학원, 악기사, 라이브 카페, 호텔, 펜션 등 30개가 등록되었고, 올해 안에는 50개 정도까지 증가될 것으로 보입니다. 동호회나 학원, 악기사는 홍보 효과를 얻고 사랑방 역할을 하며 펜션의 경우는 색소폰랜드 회원들에게 멤버십 할인 혜택을 제공 하고 있습니다. MOU 체결한 ‘중국 칭다오 적십자 한중의료단’과 내년에는 행사를 기획하고 있으며, 또 다른 MOU업체 은평구의 보육원 ‘선덕원’에서는 사회에 기여하는 차원에서 아이들을 위한 음악회 등 다양한 활동을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현재의 색소폰랜드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색소폰랜드는 만들어진 것을 활용하는 형태가 아닌 새로운 문화를 개척하며 색소폰계의 온라인과 모바일 플랫폼을 주도한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사회의 변화나 흐름에 맞게 전체 플랫폼을 교체하고 새로운 형태로의 조직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최근 앙상블 조직에 집중하는 이유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 사람들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고, 앞으로도 색소폰계의 새로운 문화를 이끄는 ‘아이콘’으로 입지를 굳혀 나갈 것입니다.현재는 경기도 양평 지역에 ‘색소폰랜드 타운’ 건립을 추진 중입니다. 연주와 파티, 세미나, 캠프 등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성지’를 만들어 이곳에서 동호회나 앙상블 모임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궁극적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은 색소폰 연주 실력의 향상보다 색소폰을 매개로 만난 사람들과 서로 가깝게 교류하며 행복을 느끼고, 서로 배려하며 품격 있는 문화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고향인 여수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시다가 서울에 정착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더 많은 기회들을 찾기 위해 여수에서 활동하던 모든 일들을 보름 만에 마무리 짓고 한 달 만에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여수에서는 호남신학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후 5년간 실용음악학원을 운영하고,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었습니다. 대학원 졸업 후 바로 강의를 하였으니 색소폰을 연주한지 6년 만에 강단에 선 것이었고, 7년째부터 경연대회 심사위원장, 라디오 . 신문 . 잡지 등에 칼럼을 기고하고 음반 발매, 책 집필 등 다양한 성취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한 언론에서는 저를 연주자의 ‘그랜드슬램’이라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여수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후 마술사의 초청으로 제주도의 연주회에 참여했는데, 알고 보니 영화감독들과 배우들의 프라이빗한 파티였습니다. 그곳에서 인연이 닿은 배우 안성기 씨는, ‘2014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 개막식 연주 등 좋은 자리에 초대해주셨고, 지금까지도 친분을 이어가며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마련해주시는 감사한 분입니다. 삼익 악기의 중국 모델이며 바이젠버그 모델로서 선생님의 이름을 딴 색소폰 ‘KGM Signature’가 판매되고 있습니다. 모델로 선정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서울에서 색소포니스트 이정식 선배님과 듀엣 공연을 했을 때 관람객 분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이 공연을 계기로 바이젠버그의 모델이 되어 시그니처 색소폰이 제작 되었습니다. 바이젠버그 관계자들과 친분이 있던 삼익 악기의 모델로도 선정되었으며, 매년 ‘상해악기쇼’에서 공연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에 대한 홍보가 가능했습니다.한국인이 최초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한 ‘Color & Harmony’ 콘서트는 어떻게 추진하게 되셨나요?개인적으로 무대에 서는 것보다 다른 이들에게 무대의 기회를 제공하는 기획자의 역할을 선호합니다. 작년 10월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에서 ‘Color & Harmony’ 콘서트를 기획하고, 회원들을 모집하였습니다. 아마추어 앙상블을 오페라하우스 무대에 참가시키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22명으로 구성된 아마추어 앙상블을 일시적으로 창단해 임정윤 지휘자에게 지도를 맡겨 ‘엘 빔보(El Bimbo)’와 ‘대니 보이(Danny Boy)’, ‘아리랑’을 연주하도록 했습니다. 저는 이 공연에서 호주의 피아니스트 Nathan Tam과 함께 ‘원더풀 투나잇(Wonderful Tonight)’을 협연하였고, 색소폰 연주와 발레리나, 탱고 댄스, 재즈 피아노 등을 한 무대에서 선보여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공연의 반응이 좋아 현재 제가 음악학교 학장을 맡은 호주기독교대학교(Australian College of Christianity)의 홍보 차 시드니, 캔버라, 브리즈번, 멜버른, 골드 코스트에 방문하여 투어 공연을 했습니다.1집 앨범 ‘Hymns for You’, 2집 ‘Dear Kenny G’, 3집 강기만 알토 색소폰 연주곡집 ‘Saxophone Paradiso’, 4집 ‘Philosophy’ 소개와 추후 앨범 계획이 있다면 알려주세요.1집과 4집은 가스펠 앨범이며 1집은 소프라노로 녹음했습니다. 3, 4집은 색소폰 연주자들이 가장 많이 보유한 알토 색소폰으로 녹음하여 동호인들이 쉽게 연주할 수 있도록 따라하기 쉬운 연주곡을 수록하였습니다. 4집 앨범은 저만의 기독교적 신념과 ‘철학’을 담아낸 가스펠 앨범이며, 올겨울 쯤에는 영화음악을 수록한 5집 앨범을 발매할 예정입니다.2집 앨범의 제목 ‘Dear Kenny G’로 미루어보면 케니 지를 특히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케니 지 외에 존경하는 색소포니스트가 있으신지요.케니 지는 저를 포함한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뮤지션이니 연주를 따라하고 싶은 분들이 많을 것이라는 짐작으로 앨범을 발매하고 연주곡집을 냈습니다. 저는 케니 지와 더불어 데이브 코즈도 존경합니다. 국내에서는 훌륭한 뮤지션을 설명할 때 마케팅을 고려하지 않지만 외국은 뮤직 비즈니스가 발달됐습니다. 데이브 코즈는 연주 시 퍼포먼스가 화려하며, 소프라노 색소폰의 대명사 케니 지는 댄스팀을 대동하여 청중의 시선을 끌어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고 자기PR을 훌륭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연주 실력 외에도 시선을 뗄 수 없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점을 본받고 싶습니다.동영상 강의 사이트 ‘색소폰스쿨’과 저서 ‘색소폰 여행’을 집필하시는 등 아마추어 연주자들의 색소폰 교육에도 관심이 높으신데, 강의와 책을 통해 어떤 교육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색소폰스쿨에는 20명 강사진의 동영상 강의 600여 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질문에 따른 답을 5~6분 정도 진행하여 핵심적인 강의를 하는 방식으로 ‘색소폰 관련 백과사전’이라고 생각하시는 편이 가깝습니다. 색소폰 여행은 해설집입니다. 집필 당시에 색소폰과 관련된 해설서가 없어 평소 자주 듣게 되는 질문들을 문답 형식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이 책을 보시면 색소폰에 관한 상식을 넓힐 수 있습니다.추진력이 뛰어나신데 앞으로 색소폰랜드와 연주자 강기만 활동 방향은 어떤 계획을 하고 있으신가요.색소폰랜드에 소속된 앙상블은 현재, 15개 팀이며 단원들은 250여 명 정도입니다. 앙상블 조직에 집중하여 내년에는 300명 정도 단원들과 한 무대에서 협연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또한 색소폰 문화 확대의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경연대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올가을에는 다양한 경연대회 참가도 추진 중입니다. 연주자로서는 4차 혁명 시대에 맞춰 영상기술 발전을 접목하여 시대의 흐름에 맞는 퍼포먼스와 장르를 개발하고, 더 큰 무대에서 수천 명 앞에서 선보여도 부족하지 않을 퍼포먼스와 무대 디자인의 세팅을 목표로 계발해나가고 있습니다. 자기 관리를 위해 다양한 운동을 하며 매일 여러 사람들을 만나 인간관계의 폭을 넓히고 있습니다.저는 사는 대로 생각하지 않고 꿈꾸는 결과물의 달성을 위하여 기획한 방향에 따라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40살에는 사람들을 의무적으로 만나기보다 ‘선택할 수 있는 삶’을 꿈꾸었는데 어느 정도 이뤄냈습니다. 50살이 되면 조금 더 발전 될 것이란 기대가 있습니다. 어떤 연주자로 남고 싶으세요?라이프가 멋진 연주자로 남고 싶습니다. 멋진 연주는 기본이며 연주만큼 바르고 멋있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예술적인 삶을 살았다거나 후학들과 아마추어에게 삶에 대한 지침을 주며, 사는 방식이 멋지고 존경할만한 인품을 갖춘 연주자로 생각해준다면 좋겠습니다. 또한 좋은 연주는 앨범으로만 들어도 되지만 청중들이 직접 찾는 무대는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눈을 뗄 수 없는 무대를 선보였던 연주자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글. 박세정 기자suyeo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7-01
  • 색소폰으로 새 삶을 사는 기분 "안양 호계동 신바람색소폰 동호회"
    혼자일 때 더 무겁다. 사람이기에 때때로 느끼는 공허감은 세상을 더욱 크게 그려낸다. 외로움은 고통이다. 그러나 고독은 홀로 즐거울 수 있다. 어쩌면 세상에 홀로 던져진다는 것이 참으로 희망적인 건지도 모르겠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이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실상 그리 대단한 계기가 많지 않다. 삶의 무게를 던져버리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는 반면, 위기를 극복하고 삶을 즐기는 이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색소폰으로 인해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는 이들의 애정 어린 이야기를 접했다. 안양 호계동의 신바람색소폰에서 색소폰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났다. 삼월(三月), 뿌연 하늘이 아쉬운 가운데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한 오후 한 지하 연습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직업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색소폰을 사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후 3시 기다란 탁자를 두고 모인 이들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차 한 잔 하러 커피숍에 온 듯 푸근함이 느껴진다고들 한다. 24시간 개방된 곳이기에 자정이 넘어 홀로 잠옷 차림으로 들르는 이도 있다. 함께 마주보며 즐거움을 나누는 공간에서 더욱 행복한 사람들이다. 공들여 갖춘 연주 환경으로 회원들의 성취·만족감 높여지하 연습실로 들어서자 깨끗한 인테리어와 쾌적한 공기가 먼저 반긴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개인 연습실이 3개씩 나뉘어져 있다. 안쪽에는 열 명 정도 들어갈 법한 공간으로 앰프와 스피커가 눈에 띈다. 동호회 내에서 가장 크다는 공간에 들어서자 널찍한 무대와 색소폰이 진열된 모습이 보인다. 왼쪽에는 악보를 볼 수 있게 만든 크고 작은 스크린이 걸려있고 오른편으로는 바(Bar)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품 선반들이 눈에 띈다. 무대 반대편에는 길다란 테이블이 놓여있어 열 명 남짓의 회원들이 둘러앉아 함께 있기에 적합했다. 이곳을 대표하는 신금호 원장은 회원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소중해 동호회 공간 중 가장 큰 부분인 무대정비에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공들여 작업하였는지 무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스피커와 앰프 등의 음향시설이 많이 갖춰져 있지만, 복잡하게 전선 등이 나와 있는 게 보이지 않고 깔끔한 무대에서 오롯이 연주를 즐기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전자제품 및 부품을 만드는 사업체의 대표이기도 한 신금호 원장은 “무대를 만들어 함께 색소폰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대부분 지하에 위치한 색소폰 연습실. 그만큼 답답한 환경을 예상하지만 신바람색소폰 동호회는 그러한 불편 요소를 제거했다. “건물 자체 내에서는 지하이지만 한쪽 밖에서 보았을 때 지상 1층에 위치한 독특한 구조입니다. 색소폰 연습실이 지하인 곳이 많습니다. 방음과 공기 정화 시설에 꼼꼼하게 신경 쓰고자 했습니다. 보통 지하에서 제습기를 사용하지만 이곳은 지상 13층의 공기를 끌어와 지하 연습실에 공급하고 있습니다.”무대 또한 조명과 음향 시설을 최고급으로 갖추어 회원들이 함께 연주를 듣고 고쳐나가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 원장은 작년 9월 신바람색소폰을 창단하고 무대 재정비를 위해 최근까지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깔끔한 인테리어로 무장한 무대 위를 화려한 조명으로 비추기까지, 복잡하게 얽힌 음향과 관련된 전기선들을 정리하는 데 그의 꼼꼼한 성격이 한몫했다. 연습실과 연습실 사이마다 개인 연주 시간에 몰입할 수 있도록 방음 시설 또한 잘 갖추었다. 빔 프로젝트를 사용하여 스크린으로 악보를 보며 무대에서 연주하면 카메라로 촬영 후 인터넷에 영상을 올리기도 한다. 바쁜 일정 가운데 신 원장이 영상을 손수 편집하는 등 회원들의 성취감과 만족감을 배려했다. 회원 이시안 씨는 “전국에서 제일 좋은 인테리어와 실력파 원장님이 계신 동호회를 선택했습니다”라고 칭찬했다. 매주 목요일 공개수업 통해 상호 피드백신바람색소폰의 동호인들은 40대 초·중반부터 70대의 회원까지 직업도 다양하다. 운수업, 개인사업, 직장인 등 퇴직 후에 오시는 분들도 계시다. 신 원장은 이에 덧붙여 “평소에 음악에 관심이 많거나 일상에 지쳐 돌파구를 찾던 분들께서 찾아오신다”고 전했다. 동호회원들은 연습을 위해 자유롭게 시간을 할애해 연습실을 찾을 수 있다. 매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는 개인별 실력 향상을 위한 공개 수업을 진행하는데, 인원수에 따라 격주로 나누어 공개수업에 참여하고 2주간 연습한 곡을 발표하는 시간을 갖는다. 회원 간 연주를 비교하여 들어보고 하는 등 개인 연습시간과는 또 다른 유익함을 얻을 수 있다. 신 원장은 동호회 회원들이 모두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들을 함께 공유하는 분위기로 나아간다고 한다. “할수록 어려운 게 음악이더군요. 음을 해석하고 연습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받습니다.” 마지막으로 신금호 원장은 색소폰에 대한 자신만의 의미를 “혼자 연주하지만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친구 같다”고 표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색소폰의 매력이 더해진다는 그의 만족감에 동호인들 모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친구가 색소폰 연주를 멋지게 하는 모습을 보고 색소폰을 시작했다는 신 원장. 공통 관심사 덕분에 색소포니스트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등 더욱 새로운 내용의 소통이 가능해졌다는 이야기로 색소폰의 또 다른 영향력을 짐작케 했다. 오감만족 감성 충족으로 신바람 난 동호회 동호회 회원들이 최근 자주 연주하는 곡이 무엇인지 묻자 신 원장은 “유행곡을 주로 한다. 작년에는 ‘안동역’을 많이 연주했다. 연령대나 개인의 취향이 모두 다르다. 트로트나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의 색소폰 연주를 듣고 따라 연주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답했다. 과거 권위적이며 일방통행의 선택만 하던 본인의 성격이 색소폰 연주를 시작하면서 한결 부드러워졌다고. 평소 여가시간에 색소폰 외에도 강인한 모터사이클을 즐기는 신 원장은 하루가 서른 시간이면 좋겠다고 행복한 투정을 한다. “먹거리, 볼거리, 즐길 거리 등 오감을 충족시킬만한 준비가 다 된 곳이다. 회원들이 악기를 잘 연주하고 때가 되면 시간을 맞추어 좋은 곳에 가서 연주회를 열고 싶다”며 올 가을 제주도로 회원들과 함께 야외 연주회를 가고 싶다는 바람을 전하는 신금호 원장. 동호인에만 그치지 않고 원하는 이들 모두 참가하는 방식으로 할 예정이다. 나눔을 중시하고 그와 맞는 방향으로 동호회가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은 신바람색소폰 회원 모두 같은 생각이라고 한다. 색소폰 입문자 강습을 비롯하여 동호회 전체의 관리를 맡고 있는 이효녀 실장은 “좋은 환경, 좋은 음향을 갖춘 시스템과 원장님의 직강으로 많은 이들이 좋은 조건을 누릴 수 있다. 그러니 많이 찾아주셨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동호인 모두 모인 자리에서 신금호 원장의 연주를 들었다. 빔 프로젝트로 악보를 살펴가며 유려한 연주를 선보이는 신 원장. 그 모습을 캠코더로 촬영하는 석진산 회원과 연주를 귀담아 듣는 회원들의 표정이 온화하다. 신바람 나도록 즐거운 색소폰 연주와 회원들의 여유로운 마음이 모두 담긴 안양 호계동의 이곳에 한번쯤 들러보고 싶지 않은가. 글. 남은별 기자 suyeo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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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Focus
    2018-07-01
  • 색소폰으로 새 삶을 사는 기분 "안양 호계동 신바람색소폰 동호회"
    혼자일 때 더 무겁다. 사람이기에 때때로 느끼는 공허감은 세상을 더욱 크게 그려낸다. 외로움은 고통이다. 그러나 고독은 홀로 즐거울 수 있다. 어쩌면 세상에 홀로 던져진다는 것이 참으로 희망적인 건지도 모르겠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이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실상 그리 대단한 계기가 많지 않다. 삶의 무게를 던져버리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는 반면, 위기를 극복하고 삶을 즐기는 이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색소폰으로 인해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는 이들의 애정 어린 이야기를 접했다. 안양 호계동의 신바람색소폰에서 색소폰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났다. 삼월(三月), 뿌연 하늘이 아쉬운 가운데 빗방울이 내리기 시작한 오후 한 지하 연습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직업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두 색소폰을 사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후 3시 기다란 탁자를 두고 모인 이들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차 한 잔 하러 커피숍에 온 듯 푸근함이 느껴진다고들 한다. 24시간 개방된 곳이기에 자정이 넘어 홀로 잠옷 차림으로 들르는 이도 있다. 함께 마주보며 즐거움을 나누는 공간에서 더욱 행복한 사람들이다. 공들여 갖춘 연주 환경으로 회원들의 성취·만족감 높여지하 연습실로 들어서자 깨끗한 인테리어와 쾌적한 공기가 먼저 반긴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개인 연습실이 3개씩 나뉘어져 있다. 안쪽에는 열 명 정도 들어갈 법한 공간으로 앰프와 스피커가 눈에 띈다. 동호회 내에서 가장 크다는 공간에 들어서자 널찍한 무대와 색소폰이 진열된 모습이 보인다. 왼쪽에는 악보를 볼 수 있게 만든 크고 작은 스크린이 걸려있고 오른편으로는 바(Bar)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품 선반들이 눈에 띈다. 무대 반대편에는 길다란 테이블이 놓여있어 열 명 남짓의 회원들이 둘러앉아 함께 있기에 적합했다. 이곳을 대표하는 신금호 원장은 회원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소중해 동호회 공간 중 가장 큰 부분인 무대정비에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공들여 작업하였는지 무대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스피커와 앰프 등의 음향시설이 많이 갖춰져 있지만, 복잡하게 전선 등이 나와 있는 게 보이지 않고 깔끔한 무대에서 오롯이 연주를 즐기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전자제품 및 부품을 만드는 사업체의 대표이기도 한 신금호 원장은 “무대를 만들어 함께 색소폰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대부분 지하에 위치한 색소폰 연습실. 그만큼 답답한 환경을 예상하지만 신바람색소폰 동호회는 그러한 불편 요소를 제거했다. “건물 자체 내에서는 지하이지만 한쪽 밖에서 보았을 때 지상 1층에 위치한 독특한 구조입니다. 색소폰 연습실이 지하인 곳이 많습니다. 방음과 공기 정화 시설에 꼼꼼하게 신경 쓰고자 했습니다. 보통 지하에서 제습기를 사용하지만 이곳은 지상 13층의 공기를 끌어와 지하 연습실에 공급하고 있습니다.”무대 또한 조명과 음향 시설을 최고급으로 갖추어 회원들이 함께 연주를 듣고 고쳐나가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 원장은 작년 9월 신바람색소폰을 창단하고 무대 재정비를 위해 최근까지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깔끔한 인테리어로 무장한 무대 위를 화려한 조명으로 비추기까지, 복잡하게 얽힌 음향과 관련된 전기선들을 정리하는 데 그의 꼼꼼한 성격이 한몫했다. 연습실과 연습실 사이마다 개인 연주 시간에 몰입할 수 있도록 방음 시설 또한 잘 갖추었다. 빔 프로젝트를 사용하여 스크린으로 악보를 보며 무대에서 연주하면 카메라로 촬영 후 인터넷에 영상을 올리기도 한다. 바쁜 일정 가운데 신 원장이 영상을 손수 편집하는 등 회원들의 성취감과 만족감을 배려했다. 회원 이시안 씨는 “전국에서 제일 좋은 인테리어와 실력파 원장님이 계신 동호회를 선택했습니다”라고 칭찬했다. 매주 목요일 공개수업 통해 상호 피드백신바람색소폰의 동호인들은 40대 초·중반부터 70대의 회원까지 직업도 다양하다. 운수업, 개인사업, 직장인 등 퇴직 후에 오시는 분들도 계시다. 신 원장은 이에 덧붙여 “평소에 음악에 관심이 많거나 일상에 지쳐 돌파구를 찾던 분들께서 찾아오신다”고 전했다. 동호회원들은 연습을 위해 자유롭게 시간을 할애해 연습실을 찾을 수 있다. 매주 목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는 개인별 실력 향상을 위한 공개 수업을 진행하는데, 인원수에 따라 격주로 나누어 공개수업에 참여하고 2주간 연습한 곡을 발표하는 시간을 갖는다. 회원 간 연주를 비교하여 들어보고 하는 등 개인 연습시간과는 또 다른 유익함을 얻을 수 있다. 신 원장은 동호회 회원들이 모두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들을 함께 공유하는 분위기로 나아간다고 한다. “할수록 어려운 게 음악이더군요. 음을 해석하고 연습하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받습니다.” 마지막으로 신금호 원장은 색소폰에 대한 자신만의 의미를 “혼자 연주하지만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친구 같다”고 표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색소폰의 매력이 더해진다는 그의 만족감에 동호인들 모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친구가 색소폰 연주를 멋지게 하는 모습을 보고 색소폰을 시작했다는 신 원장. 공통 관심사 덕분에 색소포니스트에 대한 정보를 나누는 등 더욱 새로운 내용의 소통이 가능해졌다는 이야기로 색소폰의 또 다른 영향력을 짐작케 했다. 오감만족 감성 충족으로 신바람 난 동호회 동호회 회원들이 최근 자주 연주하는 곡이 무엇인지 묻자 신 원장은 “유행곡을 주로 한다. 작년에는 ‘안동역’을 많이 연주했다. 연령대나 개인의 취향이 모두 다르다. 트로트나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의 색소폰 연주를 듣고 따라 연주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답했다. 과거 권위적이며 일방통행의 선택만 하던 본인의 성격이 색소폰 연주를 시작하면서 한결 부드러워졌다고. 평소 여가시간에 색소폰 외에도 강인한 모터사이클을 즐기는 신 원장은 하루가 서른 시간이면 좋겠다고 행복한 투정을 한다. “먹거리, 볼거리, 즐길 거리 등 오감을 충족시킬만한 준비가 다 된 곳이다. 회원들이 악기를 잘 연주하고 때가 되면 시간을 맞추어 좋은 곳에 가서 연주회를 열고 싶다”며 올 가을 제주도로 회원들과 함께 야외 연주회를 가고 싶다는 바람을 전하는 신금호 원장. 동호인에만 그치지 않고 원하는 이들 모두 참가하는 방식으로 할 예정이다. 나눔을 중시하고 그와 맞는 방향으로 동호회가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은 신바람색소폰 회원 모두 같은 생각이라고 한다. 색소폰 입문자 강습을 비롯하여 동호회 전체의 관리를 맡고 있는 이효녀 실장은 “좋은 환경, 좋은 음향을 갖춘 시스템과 원장님의 직강으로 많은 이들이 좋은 조건을 누릴 수 있다. 그러니 많이 찾아주셨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동호인 모두 모인 자리에서 신금호 원장의 연주를 들었다. 빔 프로젝트로 악보를 살펴가며 유려한 연주를 선보이는 신 원장. 그 모습을 캠코더로 촬영하는 석진산 회원과 연주를 귀담아 듣는 회원들의 표정이 온화하다. 신바람 나도록 즐거운 색소폰 연주와 회원들의 여유로운 마음이 모두 담긴 안양 호계동의 이곳에 한번쯤 들러보고 싶지 않은가. 글. 남은별 기자 suyeon@keri.or.kr
    • 월간색소폰
    • Focus
    2018-07-01
  • [창간2주년기념 특집] 색소포니스트로 재조명하는 한국색소폰 역사의 발자취
    운명의 장난인가, 시대의 불운인가. 색소폰이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힘겹게 자라온 성장 과정은 우리의 아픈 역사와 나란하게 맥을 잇는다. 미국 흑인 특유의 한이 담긴 재즈, 그 감성은 일제강점기 식민의 한을 품은 우리의 정서와도 많이 닮았다. 시대의 운명과 함께 성장해온 한국색소폰은 그 시대가 낳은 보석과 같은 뮤지션들에 의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재즈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재즈의 근간을 마련하고 대중음악계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한 엄토미. 그가 발굴한 문하생인 이봉조는 한국 대중음악으로 세계무대에 진출하였고, 길옥윤은 불행했던 시대에 대중가요의 부흥을 일으켰다. 이들을 비롯하여 한국색소폰의 과거를 차근차근 되짚어 재즈와 가요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색소폰 연주자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기사는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색소폰의 장르를 재즈와 대중가요 부분으로 편의상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 도움주신 색소포니스트 강승용 선생님과 그 외 연주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한국 재즈와 대중가요, 그리고 색소폰의 초석 엄토미색소폰이 한국에 상륙할 당시로 거슬러 오르면 재즈 뮤지션이자 우리나라 대중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엄토미(1922~ 2002, 본명 엄재욱)를 반드시 거론해야 한다. 한국색소폰 역사의 뿌리를 논할 때 이를 생략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가 남긴 굵직한 족적 때문일 것이다.함경북도 출신의 테너 색소폰주자 엄토미는 미8군에서 토미 엄(Tommy Ohm)이라는 예명으로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연주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경성음악전문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 일본의 우에노 악단에서 전속단원으로 활동하며 재즈와 대중음악을 모두 넘나든 보기 드문 수재다. 1962년에는 영화 ‘월급쟁이’의 음악감독으로, TBC동양방송 악단의 전속 연주자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1950년 ‘엄토미 악단’을 결성하여, 걸출한 색소포니스트 길옥윤과 이봉조를 발굴한 것은 지금까지도 뮤지션들 사이에서 전설로 회자된다. Jazz정통 재즈를 고수하며 많은 수제자를 배출한 이정식테너 색소폰주자 이정식(1932~1971, 현재 활동중인 재즈 뮤지션 이정식과 동명이인)은 KBS교향악단 창단 초기의 비올라 연주자이자 서울음대 교수였던 이재옥의 아들이다. 그는 존 콜트레인, 스탄 게츠와 소니 롤린스를 연구한 정통 재즈뮤지션이다. 군악대 시절 재즈를 접하여 미군 클럽에서 재즈 음반과 악보를 구해 독학하였고 미 8군 스프링버라이어티쇼에서 활동하였다. 1970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아트 블래키’ 내한 공연의 사회를 맡았던 일본 재즈평론가는 이정식이 활동하던 뉴서울호텔 나이트클럽에 찾아와 연주를 들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스윙저널’에 이정식의 재즈 연주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한국에도 이런 연주자가 있다니!’라는 감격과 함께. 연주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것에 비하여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여 수제자 최성준을 비롯하여 색소폰계의 대부라 불리는 김수열, 트럼피터 강대관 등 많은 뮤지션이 그의 연주에 영향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그에게 영향을 받은 ‘재즈계의 거목’이라 불리는 이판근(1934~)은, 첫 제자 황천수에 이어 기자촌에 학당을 설립한 후 김수열과 강태환을 양성하게 된다. 암울했던 시대, 재즈 음악의 부흥을 일으킨 길옥윤길옥윤(1927~1995, 본명 최치정)은 1949년 부친의 권유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고교시절부터 악기연주를 즐겨하던 음악인의 피는 그를 재즈의 길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 시기는 우리의 역사상 손에 꼽을 만큼 암울했던 시대였다. 해방 직후 일제의 잔재가 채 가시기 전에 발발한 6·25전쟁, 강대국들의 세력 다툼에 온 국민이 희생양이던 시대. 절망의 그림자로 어두워진 세상에서 하루하루 실낱같은 생명의 끈을 붙잡고 살아오던, 그 시대가 바로 길옥윤이 음악을 시작한 시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는 오명을 안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부족했던 시절이었기에 음악에 대한 저변은 전무했다. 그렇기에 치과의사가 되기를 강권하던 선친의 뜻을 꺾고 음악을 선택한 순간은 그의 인생에, 나아가 우리 음악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장면인 것이다. “인생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자신의 앨범 서문에 남긴 글처럼.고교 때부터 트럼펫, 피아노, 기타 등을 즐겼던 길옥윤은 대학 재학시절 미8군 악단장이자 학교 선배인 김영순을 만나 본격적인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높게 평가한 김영순이 그를 악단의 멤버로 영입한 것이다. 길옥윤은 해방 직후 당시 음악인들에게 ‘꿈의 무대’였던 미8군에서 재즈에 매료되었고, 그곳에서 프로 연주자에게 색소폰을 배우게 된다. 그 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10년 동안 재즈 음악과 색소폰을 배우고, ‘동경 스윙 오케스트라 악단’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온다. 1966년 작곡한 ‘서울의 찬가’가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며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고, ‘사랑하는 마리아’, ‘사랑이란 두 글자’, ‘구월의 노래’ 등이 연이어 히트하면서 1960년대부터 1980년대의 대중가요 역사에도 큰 획을 긋게 된다. 해방 직후 암흑기나 다름없던 1950년대, 맥이 끊겨 깜깜했던 한국 대중음악계에 부흥을 다시금 끌어올렸으며, 대중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격상시킨 인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았다. 즉흥연주로 한국 색소폰의 새 지평을 연 김수열 재즈를 연주할 수 있는 무대라곤 미8군 쇼단이 거의 유일하던 1958년, 김수열(1941~)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첫 무대에서 그의 색소폰 인생은 시작되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연습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웠던 시절, 인적이 드문 산과 무대 뒤에서 소리를 죽여 짬짬이 하던 연습이 전부였으니 그야말로 ‘형설지공’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그는 독학으로 국내 재즈 뮤지션의 길을 개척해 온 인물이다.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 뮤지션은 존 콜트레인, 찰리 파커, 덱스터 고든, 레스터 영, 듀크 엘링턴, 소니 롤린스 등의 외국 뮤지션과 이정식, 김강섭, 이판근 등 국내 뮤지션을 들 수 있다.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연주자로서의 꿈을 키우고, 연주를 따라하던 시절을 거친 그는 현재 재즈 색소폰계의 ‘대부’라 불린다.재즈의 매력은 ‘즉흥연주’에 있다는 김수열의 음악 철학은 무대 위의 열정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후배 연주자들도 그의 즉흥연주에 매료되어 뮤지션의 꿈을 키워왔다. 거친 토양에 뿌리를 내린 한국 재즈 역사의 자양분은 김수열의 열정과 영감이 있었다. 아트 블래키와 협연한 최성준, 음악선교 목사 정창균, 그리고 세계적인 프리재즈 연주자 강태환최성준(1942~)은 이정식의 수제자로, 나이트클럽에서 오랜 기간 밴드마스터 활동을 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1970년 아트 블래키가 내한을 했을 때 뉴서울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아트 블래키, 이정식과 함께 색소폰을 연주한 실력파다. 강태환(1944~)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세계 5대 프리재즈 뮤지션’이란 명성을 얻었다. 안소니 브랙스톤(Anthony Braxton)의 레코드를 듣고 무작정 연습하며 실력을 쌓았고 1968년 국내 최연소로 재즈 밴드의 리더가 되었다. 1978년에는 타악주자 김대환, 트럼피터 최선배와 함께 국내 최초 프리재즈 그룹 ‘강태환 트리오’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현재까지도 연습에 집중하며 재즈 마니아층이 두터운 일본에서 정기 공연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정찬균(1946~)은 현재 미국 LA에서 찬양 사역을 하는 음악선교 목사다. 그는 학창 시절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색소폰 소리에 감명을 받아 매료되었으며, 동시대에 활동하던 사람들 중 유일하게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했다고 한다. 3대의 색소폰을 동시에 연주하는 기법으로 한국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다. 실용음악과 창설, 색소폰 교육 체계화에 앞장 선 정성조정성조(1946~2014)는 서울대학교 작곡과 졸업 후, 미국 버클리 음악대학교를 한국인 최초로 졸업했다.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 LA에 있는 한국 클럽에서 일을 하며 학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 색소폰의 매력에 빠져 음악인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이후 패티김, 길옥윤 등과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일본에서 유학을 마친 길옥윤이 귀국하자마자 그를 찾아 함께 연주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정성조의 나이는 10대 후반이었다. 두 사람은 아스토리아 호텔, 국제호텔에서 7년 가량 연주를 하였다. 1974년에는 영화 음악감독으로 데뷔하여 재즈 외에 대중음악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당시 가수 윤형주에게 써준 영화 ‘어제 내린 비’의 OST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영자의 전성시대’, ‘겨울여자’, ‘이장호의 외인구단’ 등 영화 음악을 40편 이상 작곡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그는 서울예술대학, 서울종합예술학교 전임교수를 지냈으며 1988년에 서울예술대학에 국내 최초로 실용음악과를 창설하여 한국 대중음악을 교육할 수 있는 체계를 정립한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94년에는 KBS 관현악단 단장을 맡아 10년간 이끌며 ‘열린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활동으로 이름을 알렸다. 콜라보레이션으로 새로운 재즈를 개척하는 이정식“제가 추구하는 것은 프리스타일 재즈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제멋대로는 아닙니다. 규격화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자유롭게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프리스타일 재즈지요.” 항상 다양한 시도로 색소폰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나가는 이정식(1961~). 재즈의 본고장인 미국보다 더욱 재즈를 사랑하는 일본 무대에서 팬들과 연주자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재즈 마니아층이 두텁기로 유명한 일본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만큼 색소폰 실력은 세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외 유명 아티스트들과의 활발한 협연의 장인, 그 무대에 선다는 자체만으로도 뮤지션으로서의 이정식의 입지를 증명한 셈이다.재즈에 비트박스 리듬을 채우고, 바이올린, 피아노, 디제잉이 어우러진 새로운 시도를 하며 현재의 연주 방식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는 이정식. 그의 개방된 마인드는 대중들에게 색소폰의 새로운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큰 무기다. 그의 마인드는 결국 국악과 양악의 콜라보레이션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전자바이올리니스트 김권식, 국악계의 조갑용, 장구 명인 이부산과 함께 프리 재즈 스타일의 색소폰 연주와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였다. 그가 재즈 명문 레이블인 블루노트에서 처음 녹음할 당시에는 적지 않은 부담을 안고 있었다. 카세트테이프에 본인의 연주곡을 담아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청할 때만 해도, 그들은 “한국에도 재즈가 있느냐” 물을 정도로 한국의 재즈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재즈 피아니스트 케니 배런(Kenny Barron), 트럼피터 히노 테루마사(日野皓正) 등 뉴욕의 거장들과 한국인 최초로 ‘이정식 in New York’을 녹음하게 된다. 당시를 소회하면 ‘내가 역사적인 분들과 함께 했구나’하는 벅찬 감동이 느껴진다. Pop & Trot재즈를 입힌 대중가요를 세계에 알린 이봉조색소폰이라는 다소 생소하던 악기를 들고 대중 속으로 성큼 다가간 인물. 한국 가요사에 굵직한 선 하나를 그으며 지금까지도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공전의 히트곡을 써낸 인물. 한국 가요에 재즈를 입히며, 대중음악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 수많은 수식어를 남기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그 인물은 바로 이봉조(1931~1987)다.천재적인 뮤지션 이봉조에게는 엄토미와 작곡가 이재호 두 명의 스승이 있었다. 이재호는 이봉조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여 그를 색소폰의 세계로 이끌었고, 엄토미는 그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여 프로 색소포니스트로서의 기량과 자질을 갖추도록 전수하였다. 이재호가 천재성을 지닌 이봉조의 재능을 발견했다면 엄토미는 그 재능을 완성시킨 스승인 셈이다. 1959년에는 김광수 악단에 입단하여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하였다. 1967년에 이봉조 악단을 결성하고 그해 MBC 전국경음악단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다. 이를 계기로 TBC 경음악단장을 맡으며 대중 앞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현미, 김추자, 정훈희 세 명의 여가수를 발굴하여 스타로 발돋움하게 했고, 최희준, 차중락, 남일해, 펄 시스터즈, 조영남 등 ‘이봉조 사단’이라 불리는 톱스타 군단을 이끌게 되었다. 1960년대 트로트, 1970년대 록과 포크로 대변되던 단조로운 한국 가요에 재즈를 도입하고 접목시킨 인물이 바로 이봉조다. 또한 1970년 39개국 총580편의 곡이 출품된 제1회 동경국제가요제에서 이봉조가 작곡하고 정훈희가 부른 ‘안개’는 월드 베스트10에 입상, 세계 속에 당당히 국내 가요를 알리는 계기도 마련하였다. 이어서 정훈희의 ‘너’, 현미의 ‘나의 별’로 그리스 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였으며, 정훈희의 ‘좋아서 만났지요’, ‘꽃밭에서’와 김추자의 ‘부인도’로 남미 칠레가요제에서 입상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그는 한국 가요를 당당히 세계무대에 진출시켰고, 이는 현재 K-POP 열풍의 초석을 마련한 셈이다. 트로트 연주로 강렬한 음악적 영감을 남긴 최석재이봉조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함경도 출신의 테너 색소폰주자 최석재(1934~, 본명 최인재). 그는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강승용을 비롯한 많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 인물이다. KBS 김광섭 악단에서 활동하였고 나훈아의 ‘머나먼 고향’, 배호의 ‘마지막 잎새’를 비롯 국내를 대표하는 대중음악가들의 앨범 연주에 참여하였다. 그의 거구에서 분출되는 파워풀한 소리와 독특한 톤은 대중가요 연주자로서 대단한 강점을 지녀, 연주자들 사이에서 “그의 톤은 따라올 자가 없다”고 회자되는 색소폰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현대적 대중가요의 기반이 된 안건마와 홍원표한국 대중음악의 현대적 초석을 마련한 주요 인물인 안건마(1947~). 연주자 김광수, 김광빈, 가수 배호는 그와 친인척 관계다. 음악인의 운명을 타고난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밴드활동을 하고 중학교 3학년 때 일찍이 음악가의 길을 걷는다. 20살에는 6인조 밴드 ‘캄보’에 입단하여 아스토리아 호텔 등에서 연주하였고 20대 초반에는 본인의 악단을 창단하는 저력을 보였으며, MBC라디오 악단과 정성조와 함께 길옥윤 악단에서도 연주하였다. 그는 음반 녹음과 영화 ‘마음은 푸른 하늘’, ‘내가 버린 여자’ 등의 음악 작업을 하는 등 대중음악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정성조, 안건마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홍원표는 장익환 악단장이 이끌었던 MBC악단 가수 세션으로 활동을 하였다. 이후 MBC관현악단의 단장을 역임했고,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막식, 폐회식 음악의 편곡과 연주를 했다. 이후 그는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토론토 한인회 문화강좌 색소폰 교실을 여는 등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50년간의 세션활동, 한국 대중음악의 산증인 강승용“색소포니스트는 멜로디 메이커가 돼야 한다. 그리고 기록을 남겨야 한다” 색소포니스트로서의 예술철학이 확고한 강승용(1946~). 그는 음반이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던 시절, 1961년 백판으로 감상했던 샘 테일러의 일본 공연 실황을 담은 음반에 큰 감동을 받고 색소포니스트의 길로 들어선다. 고교시절 ‘강토벤’이라 불린 만큼 음악적 재능이 다분했던 그는 프로 입문 후 지방극단 ‘중앙쇼’에 입단하여 악단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968년부터 가수 세션에 참여하여, KBS 김강섭 악단장, 길옥윤, 패티김 등 유명 뮤지션들의 공연장소로 대표되는 명동의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김희갑 악단 단원으로 연주하게 된다. 김희갑과의 연을 통해 ‘마장동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세션을 시작하고, 그 후로도 수많은 가수들의 세션에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신촌블루스, 김희갑 악단 음반의 세션 활동으로 대중들에게 색소폰의 진한 감동과 여운을 선사하였고, 나훈아, 주현미, 설운도, 이지연 등의 세션을 맡으며 현재까지도 대중음악 감성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연주자들에게 귀감이 된 황천수황천수(1946-2010)는 한국재즈 거목 이판근의 첫 번째 제자이며, 미국 흑인 색소포니스트 실 오스틴의 영향을 받아 흑인 특유의 정서와 감성을 표현한 색소폰주자다. 중학교 시절 학교 밴드부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다 색소폰 파트에 결원이 생기면서 색소폰을 불기 시작하였다. 이후 공군 군악대를 거쳐 미8군 밴드에서 활동하였고, 1976년을 전후로 약 2년간 TBC 방송국의 밴드에서 색소폰을 연주하였다. 재즈와 가요, 샹숑, 칸초네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연주하며 알토 색소폰 특유의 섬세하고 로맨틱한 매력을 세련되게 표현하는 황천수. 그가 30대 초반에 발매한 ‘고향의 봄’은 크게 히트하여 약 백만 장이 팔리는, 대중음악계에 전무후무한 판매고를 기록했다. 또한 재즈에 우리나라의 한이 담긴 전통 리듬을 접목하여 한국적 재즈 색소폰 음악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하였고, 특히 황천수의 ‘아리랑’은 젊은 연주자들에게 아직까지도 감동적인 연주로 각인되었다. 시대를 대표하는 대중음악 그 중심에 서 있는 김원용 김원용(1954~)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미 미8군 하우스밴드에서 활동했다. 당시 미8군 밴드 리더였던 서봉석은 추후 KBS관현악단 단장으로 33년간 열정적인 트롬본 연주, 편곡, 지휘를 맡아 활약한 인물이다. 서봉석이 1970년대 초, 지인의 소개로 고등학교 1학년의 김원용을 소개받았다. 어린 그의 모습이 미심쩍었지만 그가 연주한 ‘Forever with you’를 듣곤 저음의 서브톤과 감정들이 나무랄 데가 없어 급기야 악단 멤버로 영입하였다. 그는 ‘타양살이’로 유명한 가수 고복수의 세션을 시작으로 MBC관현악단에서 활동하며 남진, 이미자, 나훈아, 심수봉, 조용필, 조성모, 핑클 등 시대를 대표하는 유명 가수들의 세션을 맡았다. 그는 1978년부터 20년간 MBC관현악단 수석 단원으로 활동하며 드라마 ‘전원일기’ 음반 작업에 참여하였고 1991년에 방송대상 공로상, 2011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색소포니스트로서 대중음악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족적을 인정받은 김원용은 색소폰이 우리나라의 국악, 특히 트로트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대중음악 작곡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김원용은 활발한 연주 활동 외에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단체인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이하 음실련)’과 ‘한국색소폰협회(KSA)’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KSA를 이끌며 색소폰 교육 자료를 제공하고 세미나 및 워크샵 개최, 아마추어와 프로연주자의 원활한 교류, 신인 연주자 발굴 등 색소폰 저변 확대와 바람직한 문화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음실련 회장으로서는 실연자의 열악한 지위와 처우를 개선하기 위하여 막중한 책임감으로 정책 개발에 힘쓰고 있다.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7-01
  • [창간2주년기념 특집] 색소포니스트로 재조명하는 한국색소폰 역사의 발자취
    운명의 장난인가, 시대의 불운인가. 색소폰이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힘겹게 자라온 성장 과정은 우리의 아픈 역사와 나란하게 맥을 잇는다. 미국 흑인 특유의 한이 담긴 재즈, 그 감성은 일제강점기 식민의 한을 품은 우리의 정서와도 많이 닮았다. 시대의 운명과 함께 성장해온 한국색소폰은 그 시대가 낳은 보석과 같은 뮤지션들에 의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재즈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재즈의 근간을 마련하고 대중음악계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한 엄토미. 그가 발굴한 문하생인 이봉조는 한국 대중음악으로 세계무대에 진출하였고, 길옥윤은 불행했던 시대에 대중가요의 부흥을 일으켰다. 이들을 비롯하여 한국색소폰의 과거를 차근차근 되짚어 재즈와 가요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색소폰 연주자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기사는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색소폰의 장르를 재즈와 대중가요 부분으로 편의상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 도움주신 색소포니스트 강승용 선생님과 그 외 연주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한국 재즈와 대중가요, 그리고 색소폰의 초석 엄토미색소폰이 한국에 상륙할 당시로 거슬러 오르면 재즈 뮤지션이자 우리나라 대중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엄토미(1922~ 2002, 본명 엄재욱)를 반드시 거론해야 한다. 한국색소폰 역사의 뿌리를 논할 때 이를 생략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가 남긴 굵직한 족적 때문일 것이다.함경북도 출신의 테너 색소폰주자 엄토미는 미8군에서 토미 엄(Tommy Ohm)이라는 예명으로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연주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경성음악전문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 일본의 우에노 악단에서 전속단원으로 활동하며 재즈와 대중음악을 모두 넘나든 보기 드문 수재다. 1962년에는 영화 ‘월급쟁이’의 음악감독으로, TBC동양방송 악단의 전속 연주자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1950년 ‘엄토미 악단’을 결성하여, 걸출한 색소포니스트 길옥윤과 이봉조를 발굴한 것은 지금까지도 뮤지션들 사이에서 전설로 회자된다. Jazz정통 재즈를 고수하며 많은 수제자를 배출한 이정식테너 색소폰주자 이정식(1932~1971, 현재 활동중인 재즈 뮤지션 이정식과 동명이인)은 KBS교향악단 창단 초기의 비올라 연주자이자 서울음대 교수였던 이재옥의 아들이다. 그는 존 콜트레인, 스탄 게츠와 소니 롤린스를 연구한 정통 재즈뮤지션이다. 군악대 시절 재즈를 접하여 미군 클럽에서 재즈 음반과 악보를 구해 독학하였고 미 8군 스프링버라이어티쇼에서 활동하였다. 1970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아트 블래키’ 내한 공연의 사회를 맡았던 일본 재즈평론가는 이정식이 활동하던 뉴서울호텔 나이트클럽에 찾아와 연주를 들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스윙저널’에 이정식의 재즈 연주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한국에도 이런 연주자가 있다니!’라는 감격과 함께. 연주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것에 비하여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여 수제자 최성준을 비롯하여 색소폰계의 대부라 불리는 김수열, 트럼피터 강대관 등 많은 뮤지션이 그의 연주에 영향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그에게 영향을 받은 ‘재즈계의 거목’이라 불리는 이판근(1934~)은, 첫 제자 황천수에 이어 기자촌에 학당을 설립한 후 김수열과 강태환을 양성하게 된다. 암울했던 시대, 재즈 음악의 부흥을 일으킨 길옥윤길옥윤(1927~1995, 본명 최치정)은 1949년 부친의 권유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고교시절부터 악기연주를 즐겨하던 음악인의 피는 그를 재즈의 길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 시기는 우리의 역사상 손에 꼽을 만큼 암울했던 시대였다. 해방 직후 일제의 잔재가 채 가시기 전에 발발한 6·25전쟁, 강대국들의 세력 다툼에 온 국민이 희생양이던 시대. 절망의 그림자로 어두워진 세상에서 하루하루 실낱같은 생명의 끈을 붙잡고 살아오던, 그 시대가 바로 길옥윤이 음악을 시작한 시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는 오명을 안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부족했던 시절이었기에 음악에 대한 저변은 전무했다. 그렇기에 치과의사가 되기를 강권하던 선친의 뜻을 꺾고 음악을 선택한 순간은 그의 인생에, 나아가 우리 음악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장면인 것이다. “인생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자신의 앨범 서문에 남긴 글처럼.고교 때부터 트럼펫, 피아노, 기타 등을 즐겼던 길옥윤은 대학 재학시절 미8군 악단장이자 학교 선배인 김영순을 만나 본격적인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높게 평가한 김영순이 그를 악단의 멤버로 영입한 것이다. 길옥윤은 해방 직후 당시 음악인들에게 ‘꿈의 무대’였던 미8군에서 재즈에 매료되었고, 그곳에서 프로 연주자에게 색소폰을 배우게 된다. 그 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10년 동안 재즈 음악과 색소폰을 배우고, ‘동경 스윙 오케스트라 악단’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온다. 1966년 작곡한 ‘서울의 찬가’가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며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고, ‘사랑하는 마리아’, ‘사랑이란 두 글자’, ‘구월의 노래’ 등이 연이어 히트하면서 1960년대부터 1980년대의 대중가요 역사에도 큰 획을 긋게 된다. 해방 직후 암흑기나 다름없던 1950년대, 맥이 끊겨 깜깜했던 한국 대중음악계에 부흥을 다시금 끌어올렸으며, 대중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격상시킨 인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았다. 즉흥연주로 한국 색소폰의 새 지평을 연 김수열 재즈를 연주할 수 있는 무대라곤 미8군 쇼단이 거의 유일하던 1958년, 김수열(1941~)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첫 무대에서 그의 색소폰 인생은 시작되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연습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웠던 시절, 인적이 드문 산과 무대 뒤에서 소리를 죽여 짬짬이 하던 연습이 전부였으니 그야말로 ‘형설지공’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그는 독학으로 국내 재즈 뮤지션의 길을 개척해 온 인물이다.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 뮤지션은 존 콜트레인, 찰리 파커, 덱스터 고든, 레스터 영, 듀크 엘링턴, 소니 롤린스 등의 외국 뮤지션과 이정식, 김강섭, 이판근 등 국내 뮤지션을 들 수 있다.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연주자로서의 꿈을 키우고, 연주를 따라하던 시절을 거친 그는 현재 재즈 색소폰계의 ‘대부’라 불린다.재즈의 매력은 ‘즉흥연주’에 있다는 김수열의 음악 철학은 무대 위의 열정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후배 연주자들도 그의 즉흥연주에 매료되어 뮤지션의 꿈을 키워왔다. 거친 토양에 뿌리를 내린 한국 재즈 역사의 자양분은 김수열의 열정과 영감이 있었다. 아트 블래키와 협연한 최성준, 음악선교 목사 정창균, 그리고 세계적인 프리재즈 연주자 강태환최성준(1942~)은 이정식의 수제자로, 나이트클럽에서 오랜 기간 밴드마스터 활동을 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1970년 아트 블래키가 내한을 했을 때 뉴서울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아트 블래키, 이정식과 함께 색소폰을 연주한 실력파다. 강태환(1944~)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세계 5대 프리재즈 뮤지션’이란 명성을 얻었다. 안소니 브랙스톤(Anthony Braxton)의 레코드를 듣고 무작정 연습하며 실력을 쌓았고 1968년 국내 최연소로 재즈 밴드의 리더가 되었다. 1978년에는 타악주자 김대환, 트럼피터 최선배와 함께 국내 최초 프리재즈 그룹 ‘강태환 트리오’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현재까지도 연습에 집중하며 재즈 마니아층이 두터운 일본에서 정기 공연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정찬균(1946~)은 현재 미국 LA에서 찬양 사역을 하는 음악선교 목사다. 그는 학창 시절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색소폰 소리에 감명을 받아 매료되었으며, 동시대에 활동하던 사람들 중 유일하게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했다고 한다. 3대의 색소폰을 동시에 연주하는 기법으로 한국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다. 실용음악과 창설, 색소폰 교육 체계화에 앞장 선 정성조정성조(1946~2014)는 서울대학교 작곡과 졸업 후, 미국 버클리 음악대학교를 한국인 최초로 졸업했다.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 LA에 있는 한국 클럽에서 일을 하며 학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 색소폰의 매력에 빠져 음악인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이후 패티김, 길옥윤 등과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일본에서 유학을 마친 길옥윤이 귀국하자마자 그를 찾아 함께 연주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정성조의 나이는 10대 후반이었다. 두 사람은 아스토리아 호텔, 국제호텔에서 7년 가량 연주를 하였다. 1974년에는 영화 음악감독으로 데뷔하여 재즈 외에 대중음악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당시 가수 윤형주에게 써준 영화 ‘어제 내린 비’의 OST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영자의 전성시대’, ‘겨울여자’, ‘이장호의 외인구단’ 등 영화 음악을 40편 이상 작곡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그는 서울예술대학, 서울종합예술학교 전임교수를 지냈으며 1988년에 서울예술대학에 국내 최초로 실용음악과를 창설하여 한국 대중음악을 교육할 수 있는 체계를 정립한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94년에는 KBS 관현악단 단장을 맡아 10년간 이끌며 ‘열린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활동으로 이름을 알렸다. 콜라보레이션으로 새로운 재즈를 개척하는 이정식“제가 추구하는 것은 프리스타일 재즈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제멋대로는 아닙니다. 규격화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자유롭게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프리스타일 재즈지요.” 항상 다양한 시도로 색소폰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나가는 이정식(1961~). 재즈의 본고장인 미국보다 더욱 재즈를 사랑하는 일본 무대에서 팬들과 연주자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재즈 마니아층이 두텁기로 유명한 일본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만큼 색소폰 실력은 세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외 유명 아티스트들과의 활발한 협연의 장인, 그 무대에 선다는 자체만으로도 뮤지션으로서의 이정식의 입지를 증명한 셈이다.재즈에 비트박스 리듬을 채우고, 바이올린, 피아노, 디제잉이 어우러진 새로운 시도를 하며 현재의 연주 방식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는 이정식. 그의 개방된 마인드는 대중들에게 색소폰의 새로운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큰 무기다. 그의 마인드는 결국 국악과 양악의 콜라보레이션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전자바이올리니스트 김권식, 국악계의 조갑용, 장구 명인 이부산과 함께 프리 재즈 스타일의 색소폰 연주와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였다. 그가 재즈 명문 레이블인 블루노트에서 처음 녹음할 당시에는 적지 않은 부담을 안고 있었다. 카세트테이프에 본인의 연주곡을 담아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청할 때만 해도, 그들은 “한국에도 재즈가 있느냐” 물을 정도로 한국의 재즈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재즈 피아니스트 케니 배런(Kenny Barron), 트럼피터 히노 테루마사(日野皓正) 등 뉴욕의 거장들과 한국인 최초로 ‘이정식 in New York’을 녹음하게 된다. 당시를 소회하면 ‘내가 역사적인 분들과 함께 했구나’하는 벅찬 감동이 느껴진다. Pop & Trot재즈를 입힌 대중가요를 세계에 알린 이봉조색소폰이라는 다소 생소하던 악기를 들고 대중 속으로 성큼 다가간 인물. 한국 가요사에 굵직한 선 하나를 그으며 지금까지도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공전의 히트곡을 써낸 인물. 한국 가요에 재즈를 입히며, 대중음악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 수많은 수식어를 남기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그 인물은 바로 이봉조(1931~1987)다.천재적인 뮤지션 이봉조에게는 엄토미와 작곡가 이재호 두 명의 스승이 있었다. 이재호는 이봉조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여 그를 색소폰의 세계로 이끌었고, 엄토미는 그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여 프로 색소포니스트로서의 기량과 자질을 갖추도록 전수하였다. 이재호가 천재성을 지닌 이봉조의 재능을 발견했다면 엄토미는 그 재능을 완성시킨 스승인 셈이다. 1959년에는 김광수 악단에 입단하여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하였다. 1967년에 이봉조 악단을 결성하고 그해 MBC 전국경음악단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다. 이를 계기로 TBC 경음악단장을 맡으며 대중 앞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현미, 김추자, 정훈희 세 명의 여가수를 발굴하여 스타로 발돋움하게 했고, 최희준, 차중락, 남일해, 펄 시스터즈, 조영남 등 ‘이봉조 사단’이라 불리는 톱스타 군단을 이끌게 되었다. 1960년대 트로트, 1970년대 록과 포크로 대변되던 단조로운 한국 가요에 재즈를 도입하고 접목시킨 인물이 바로 이봉조다. 또한 1970년 39개국 총580편의 곡이 출품된 제1회 동경국제가요제에서 이봉조가 작곡하고 정훈희가 부른 ‘안개’는 월드 베스트10에 입상, 세계 속에 당당히 국내 가요를 알리는 계기도 마련하였다. 이어서 정훈희의 ‘너’, 현미의 ‘나의 별’로 그리스 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였으며, 정훈희의 ‘좋아서 만났지요’, ‘꽃밭에서’와 김추자의 ‘부인도’로 남미 칠레가요제에서 입상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그는 한국 가요를 당당히 세계무대에 진출시켰고, 이는 현재 K-POP 열풍의 초석을 마련한 셈이다. 트로트 연주로 강렬한 음악적 영감을 남긴 최석재이봉조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함경도 출신의 테너 색소폰주자 최석재(1934~, 본명 최인재). 그는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강승용을 비롯한 많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 인물이다. KBS 김광섭 악단에서 활동하였고 나훈아의 ‘머나먼 고향’, 배호의 ‘마지막 잎새’를 비롯 국내를 대표하는 대중음악가들의 앨범 연주에 참여하였다. 그의 거구에서 분출되는 파워풀한 소리와 독특한 톤은 대중가요 연주자로서 대단한 강점을 지녀, 연주자들 사이에서 “그의 톤은 따라올 자가 없다”고 회자되는 색소폰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현대적 대중가요의 기반이 된 안건마와 홍원표한국 대중음악의 현대적 초석을 마련한 주요 인물인 안건마(1947~). 연주자 김광수, 김광빈, 가수 배호는 그와 친인척 관계다. 음악인의 운명을 타고난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밴드활동을 하고 중학교 3학년 때 일찍이 음악가의 길을 걷는다. 20살에는 6인조 밴드 ‘캄보’에 입단하여 아스토리아 호텔 등에서 연주하였고 20대 초반에는 본인의 악단을 창단하는 저력을 보였으며, MBC라디오 악단과 정성조와 함께 길옥윤 악단에서도 연주하였다. 그는 음반 녹음과 영화 ‘마음은 푸른 하늘’, ‘내가 버린 여자’ 등의 음악 작업을 하는 등 대중음악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정성조, 안건마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홍원표는 장익환 악단장이 이끌었던 MBC악단 가수 세션으로 활동을 하였다. 이후 MBC관현악단의 단장을 역임했고,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막식, 폐회식 음악의 편곡과 연주를 했다. 이후 그는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토론토 한인회 문화강좌 색소폰 교실을 여는 등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50년간의 세션활동, 한국 대중음악의 산증인 강승용“색소포니스트는 멜로디 메이커가 돼야 한다. 그리고 기록을 남겨야 한다” 색소포니스트로서의 예술철학이 확고한 강승용(1946~). 그는 음반이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던 시절, 1961년 백판으로 감상했던 샘 테일러의 일본 공연 실황을 담은 음반에 큰 감동을 받고 색소포니스트의 길로 들어선다. 고교시절 ‘강토벤’이라 불린 만큼 음악적 재능이 다분했던 그는 프로 입문 후 지방극단 ‘중앙쇼’에 입단하여 악단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968년부터 가수 세션에 참여하여, KBS 김강섭 악단장, 길옥윤, 패티김 등 유명 뮤지션들의 공연장소로 대표되는 명동의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김희갑 악단 단원으로 연주하게 된다. 김희갑과의 연을 통해 ‘마장동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세션을 시작하고, 그 후로도 수많은 가수들의 세션에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신촌블루스, 김희갑 악단 음반의 세션 활동으로 대중들에게 색소폰의 진한 감동과 여운을 선사하였고, 나훈아, 주현미, 설운도, 이지연 등의 세션을 맡으며 현재까지도 대중음악 감성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연주자들에게 귀감이 된 황천수황천수(1946-2010)는 한국재즈 거목 이판근의 첫 번째 제자이며, 미국 흑인 색소포니스트 실 오스틴의 영향을 받아 흑인 특유의 정서와 감성을 표현한 색소폰주자다. 중학교 시절 학교 밴드부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다 색소폰 파트에 결원이 생기면서 색소폰을 불기 시작하였다. 이후 공군 군악대를 거쳐 미8군 밴드에서 활동하였고, 1976년을 전후로 약 2년간 TBC 방송국의 밴드에서 색소폰을 연주하였다. 재즈와 가요, 샹숑, 칸초네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연주하며 알토 색소폰 특유의 섬세하고 로맨틱한 매력을 세련되게 표현하는 황천수. 그가 30대 초반에 발매한 ‘고향의 봄’은 크게 히트하여 약 백만 장이 팔리는, 대중음악계에 전무후무한 판매고를 기록했다. 또한 재즈에 우리나라의 한이 담긴 전통 리듬을 접목하여 한국적 재즈 색소폰 음악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하였고, 특히 황천수의 ‘아리랑’은 젊은 연주자들에게 아직까지도 감동적인 연주로 각인되었다. 시대를 대표하는 대중음악 그 중심에 서 있는 김원용 김원용(1954~)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미 미8군 하우스밴드에서 활동했다. 당시 미8군 밴드 리더였던 서봉석은 추후 KBS관현악단 단장으로 33년간 열정적인 트롬본 연주, 편곡, 지휘를 맡아 활약한 인물이다. 서봉석이 1970년대 초, 지인의 소개로 고등학교 1학년의 김원용을 소개받았다. 어린 그의 모습이 미심쩍었지만 그가 연주한 ‘Forever with you’를 듣곤 저음의 서브톤과 감정들이 나무랄 데가 없어 급기야 악단 멤버로 영입하였다. 그는 ‘타양살이’로 유명한 가수 고복수의 세션을 시작으로 MBC관현악단에서 활동하며 남진, 이미자, 나훈아, 심수봉, 조용필, 조성모, 핑클 등 시대를 대표하는 유명 가수들의 세션을 맡았다. 그는 1978년부터 20년간 MBC관현악단 수석 단원으로 활동하며 드라마 ‘전원일기’ 음반 작업에 참여하였고 1991년에 방송대상 공로상, 2011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색소포니스트로서 대중음악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족적을 인정받은 김원용은 색소폰이 우리나라의 국악, 특히 트로트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대중음악 작곡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김원용은 활발한 연주 활동 외에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단체인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이하 음실련)’과 ‘한국색소폰협회(KSA)’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KSA를 이끌며 색소폰 교육 자료를 제공하고 세미나 및 워크샵 개최, 아마추어와 프로연주자의 원활한 교류, 신인 연주자 발굴 등 색소폰 저변 확대와 바람직한 문화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음실련 회장으로서는 실연자의 열악한 지위와 처우를 개선하기 위하여 막중한 책임감으로 정책 개발에 힘쓰고 있다.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7-01
  • [창간2주년기념 특집] 사회 역사적 배경으로 보는 색소폰 열풍, 성취감 회복의 악기 ‘색소폰’
    색소폰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50년대 생은 보릿고개 시절을 겪은 세대이며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일으킨 주역이기도 합니다. ‘트라우마 한국사회’의 저자 김태형 심리학자 는 50년대 생을 한국의 5.16 군사정변과 유신 독재의 역사적 배경과 맞물려 유년기 시 절부터 좌절을 겪어온 ‘좌절세대’라고 일컫습니다. 그들은 현재 좌절의 극복 방법으로 색소폰을 택하여 연주 활동과 음악 봉사로 건강한 노후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색소폰 열풍이 불어 온 이유를 한국의 사회적 배경과 관련하여 짐작해보려 합니다. 색소폰 열풍과 경제발전의 주역 베이비 붐 세대현재 우리나라의 색소폰 열풍이 부는 연령대는 베이비 붐(Baby Boom) 세대가 압도적입니다. 베이비 붐 세대란 6.25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부터 가족계획정책이 시행된 1963년 내에 태어난 세대를 말하지만 그 기준이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1970~80년대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베이비 붐 세대들은 경제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주역들입니다. 이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불철주야 일에만 매달린 세대였습니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하여 야근, 특근, 잔업으로 청춘을 바친 성과는 나라의 경제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결과 한국은 1996년 12월 12일 29번째 OECD회원국으로 가입합니다. 경제성장으로 겪은 급격한 사회 변화급격히 맞은 경제성장으로 인하여 사회전반에 있어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한창 추진될 당시 외친 ‘마이 홈’, ‘마이 카’ 시대가 온다는 구호가 2000년대에 들어서는 현실화되었습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시대의 도래와 모든 생활상의 변화는 놀라웠습니다. 단군 이래 역사에서 가장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은 세대가 바로 베이비 붐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베이비 붐 세대들은 어릴 때 굶던 기억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는 밥을 먹고 난 다음 뛰어 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배가 금방 고파지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간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그 당시는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기라 물로 허기를 달랬던 기억이 많이 납니다. 여가문화의 춘추전국시대 도래경제 성장의 혜택으로 마이 홈, 마이 카를 소유하고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베이비 붐 세대는 그동안 고생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각종 여가활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이 세대는 노후의 취미나 여가생활을 누린 경험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은 고가의 악기로 분류되는 피아노, 기타를 배웠지만 절대다수의 베이비 붐 세대는 노후를 위한 여가생활을 고려해본 적도 전혀 없었습니다. 베이비 붐 세대의 어린 시절에서는 무엇 하나 풍족하지 않았고 오늘과 같은 놀이문화도 없었습니다. 반면에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룬 지금은 개인의 취향, 개성에 따라 취미생활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여가문화, 놀이문화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면의 성찰과 성취감 회복의 방법, 색소폰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으로 인하여 얻은 여유는 사회 전반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중 많이 선택되는 여가활동은 음악 활동이며, 음악 중에서도 색소폰 인구가 가장 많습니다. 중장년층에게 색소폰 배우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베이비 붐 세대들이 여가 욕구와 자아성취감 고취를 위한 도구로 색소폰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주역을 담당했던 지금 중년층들의 젊은 시절은 일에만 쫓겨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와 내면을 성찰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경제적 안정, 사회적 변화와 문화적 욕구의 상승세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색소폰’이라는 악기를 선택합니다. 색소폰은 한 세대 이전만 하더라도 고급악기이며 사치로 여겨져 쉽게 접근 할 수 없는 고가의 악기였지만, 값싼 중국제와 대만제의 보급과 어느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생기며 많은 중년들이 색소폰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색소폰은 일단 배우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초보자도 6개월 정도 배우면 웬만한 곡을 연주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또한 중년의 위기라 할까요. 중년의 텅 빈 마음을, 문화적 욕구와 성취감을 채워 줄 도구로, 그리고 봉사의 도구로, 교회에서는 찬양으로 활용할 수 있는 도구로 색소폰 만한 악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민족(韓民族)의 정서 ‘한(恨)’을 표현하는 색소폰우리나라에 색소폰이 도입된 것은 6.25전쟁 때 미군이 주둔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물론 일본 식민지 시대에도 있었다고 하지만 색소폰이 대중들의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전쟁 후에 미군이 주둔하며 위문공연이 시작된 시점입니다. 색소폰은 그때부터 대중가요나 팝에서 빠지지 않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즐겨 연주하는 색소폰 열풍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선 선조들의 풍류(風流)의 도(道)가 부활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민족(韓民族)은 예로부터 풍류를 즐겼으며, 한(恨)의 정서가 있는 민족입니다. 색소폰 음색은 인간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어, 이처럼 한민족의 정서와 절묘하게 교감하고 마음을 달래어 근심과 시름을 없애고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는 악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베이비 붐 세대의 대표적 악기가 색소폰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반도 역사상 이렇게 한 종류의 악기로 정서적인 교감을 하고 또래집단을 형성하여 즐기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색소폰은 정통 트로트와도 잘 어울리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와 부합하는 특징으로 열풍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또한 필자는 색소폰 열풍의 근원을 김태형 심리학자의 저서 ‘한국사회 트라우마’에서 찾았습니다. 색소폰 열풍의 근원, 50년대 생 ‘좌절세대’의 트라우마IMF경제위기 이후 생존을 위협당하는 한국사회의 불안한 현실을 사회심리학적 관점으로 냉철히 분석한 ‘불안증폭사회’, ‘트라우마 한국사회’의 저자인 김태형 심리학자가 오늘날 온갖 마음의 병으로 신음하며 힐링을 찾아 나선 한국인들의 심리를, 사회와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세대별로 겪는 ‘트라우마’를 분석하였습니다. 베이비 붐 세대들은 동일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는 왜곡된 역사와 사회 구조적 비리, 부패로 인해 생겨난 ‘집단 트라우마’와 대다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관련된 ‘개인적 트라우마’가 복합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50년대 생을 ‘좌절세대’라고 칭합니다. 색소폰 열풍의 주역인 현재 중장년층들은 이 땅의 1950년대에 태어났습니다. 이들은 좌절에 대한 보상으로 사회적 힐링 열풍에 편승하여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갖게 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책을 통해 열풍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세대가 50년대 생임을 간주하여 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해보겠습니다. 유년기 5.16 군사정변, 청소년기 박정희 독재정권을 겪은 세대좌절세대는 유년기 또는 청소년기에 4.19 혁명을 잠깐 목격하였으나, 그것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기도 전에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으로 좌절되는 장면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공책 표지에는 군사혁명에 관한 홍보 글이 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동안 부모 세대뿐 아니라 공교육기관으로부터도 강제적인 반공교육을 받아야 했고, 끊임없이 권위주의적인 압력에 노출되었습니다.청소년기는 한마디로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에 짓눌려 있던 시기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중 .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강도 높은 군사훈련, 즉 교련을 실시하는 등 학교를 ‘병영화’했고 반공 . 반북 교육을 지속적으로 강화했습니다. 좌절세대는 이런 암울한 청소년기를 보내며 지속적인 욕구 좌절을 경험하였고, 유년기부터 자라나기 시작한 권위에 대한 공포감과 복종, 동시에 반항심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유신 독재의 폭압이 절정에 이르렀던 1970년대에 대학생이 된 좌절세대 중 일부는 반 유신 학생운동에 뛰어들기도 했지만, 당시 학생운동은 학생 수가 워낙 소수인 데다 참여자 역시 많지 않아 결국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좌절세대는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좌절을 경험하여 유년기 심리가 건강하지 못한 세대여서 1980년대 학생들처럼 다양한 사상에 과감하게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와 권위주의 사회에서 억눌린 좌절세대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나는 1966년 무렵부터 한국인들 사이에는 서서히 성취동기, 상향이동의 열망, 성공지향의 가치관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1987년 이후의 3저 호황기 그리고 민주화운동과 노동자대투쟁으로 기업의 인건비 비중이 가장 높았던 시절에 직장생활을 했기에 소득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인기의 경제적 안정은 좌절세대가 1987년 6월 민중항쟁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조건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며 동구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세계화의 파도가 밀려오자 다시 비관주의와 회의주의로 빠져 들었고, 세계인들과 경쟁하기 위해 개인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당시의 사회적 요구에 굴복했습니다. 50년대 생은 돈을 벌기 위해 직업 활동을 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취미생활을 할 수 없는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대부분 청소년기 이전에 가난과 배고픔을 경험하다 청소년기에는 권위적인 사회와 부모에 의해 자신의 동기와 감정을 억누르도록 강요당했습니다. 이들은 빈곤에 대한 불안감과 동시에 권위주의에 대한 공포와 복종심,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와 반발심을 간직하고 있는 세대입니다. 보릿고개에서 웰빙을 넘어 힐링(Healing)의 시대로불과 한 세대 이전인 1950년대에는 보릿고개, 즉 먹고 살기 급급했던 춘궁기에는 절대적인 배고픔의 시기라 무엇이든 먹을거리가 되었습니다. 베이비 붐 세대가 중장년이 되고 나서는 절대적 배고픔이 아니라 이제는 ‘무엇을 얼마나 맛있게 먹을까?’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제는 음식을 양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몸에 좋은 음식을 찾는 이른바 ‘웰빙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현시대는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급변하고 있습니다. 몸에 좋다면 아무리 비싸더라도 먹으려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웰빙 열풍이 불었습니다. 각박한 삶에서 지친 현대인들에게 이제 웰빙을 넘어 ‘치유’라는 키워드가 가슴에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불교에서는 템플스테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법정스님, 법륜스님, 혜민스님 등의 에세이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힐링’ 열풍의 영향이 큽니다. 좌절세대의 트라우마를 여가 활동으로 극복 좌절세대의 유년기에는 부모와 사회의 권위주의, 청소년기에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에 의해 좌절을 강요받았습니다. 청년기에는 유신독재에 도전했으나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좌절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세대입니다. IMF 경제위기가 시작되기 전인 1996년 하반기부터 명예퇴직 등 광범위한 구조조정 바람을 타고, 가장 우선적인 정리해고의 대상으로 부상합니다. 이들은 또 다시 시대적인 아픔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대부분 가장이었던 좌절세대 남성들은 당시 자녀양육 및 교육비 부담이 가장 큰 생애주기 단계였기에, 경제적 위기는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커다란 정신적 충격과 피해를 주었습니다. 좌절세대는 80년대 생인 자식들에게 시대적 아픔과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게 됩니다. 부모님을 모시면서도 자녀를 부양하는 이중고의 세대이며, 또한 부모님을 모시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으로부터는 부양을 받지 못하는 세대라고 자학합니다.좌절세대의 트라우마는 조국근대화의 불행한 역사적 경험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즉 한국인들은 동일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는 왜곡된 역사와 잘못된 구조적 비리, 부패 사회로 인해 생겨난 집단 트라우마와 대다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관련된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복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좌절세대에게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사회적인 힐링 열풍에 편승하여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원하게 됩니다. 좌절세대의 자아 성취와 트라우마의 회복 방법, 색소폰 50년대 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좌절’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야 합니다. 벗어나지 못할 경우 앞으로의 정신건강이 악화될 수 있습니다. ‘100세 시대’인 고령화 사회에서 좌절 세대가 앞으로 남은 인생에 좌절을 반복하며 산다는 것은 지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탈출구는 늦게나마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색소폰 연주 활동은 쌓인 트라우마의 회복을 도와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자기혐오감에서부터 자유로워지고, 본인의 삶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을 회복 시켜 주기도 합니다. 과거의 아픔을 공유한 동년배들과 진솔하게 대화하면서 색소폰을 취미로 삼는다면 청년기의 아름다운 꿈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좌절세대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색소폰은 이제 외국 악기라기보다 국민 악기로 인식되는 친근한 생활 악기로 정착되었습니다. 색소폰 인구의 대부분은 좌절세대인 50년대 생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색소폰 선율로 지난 세월에서 상처받은 트라우마를 회복하고 음악봉사를 하며 느끼는 행복은 어쩌면 역사적인 아픔의 치유로 볼 수 있습니다. (월간색소폰)최종운 기자= suyeo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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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1
  • [창간2주년기념 특집] 사회 역사적 배경으로 보는 색소폰 열풍, 성취감 회복의 악기 ‘색소폰’
    색소폰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50년대 생은 보릿고개 시절을 겪은 세대이며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일으킨 주역이기도 합니다. ‘트라우마 한국사회’의 저자 김태형 심리학자 는 50년대 생을 한국의 5.16 군사정변과 유신 독재의 역사적 배경과 맞물려 유년기 시 절부터 좌절을 겪어온 ‘좌절세대’라고 일컫습니다. 그들은 현재 좌절의 극복 방법으로 색소폰을 택하여 연주 활동과 음악 봉사로 건강한 노후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색소폰 열풍이 불어 온 이유를 한국의 사회적 배경과 관련하여 짐작해보려 합니다. 색소폰 열풍과 경제발전의 주역 베이비 붐 세대현재 우리나라의 색소폰 열풍이 부는 연령대는 베이비 붐(Baby Boom) 세대가 압도적입니다. 베이비 붐 세대란 6.25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부터 가족계획정책이 시행된 1963년 내에 태어난 세대를 말하지만 그 기준이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1970~80년대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베이비 붐 세대들은 경제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주역들입니다. 이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불철주야 일에만 매달린 세대였습니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하여 야근, 특근, 잔업으로 청춘을 바친 성과는 나라의 경제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결과 한국은 1996년 12월 12일 29번째 OECD회원국으로 가입합니다. 경제성장으로 겪은 급격한 사회 변화급격히 맞은 경제성장으로 인하여 사회전반에 있어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한창 추진될 당시 외친 ‘마이 홈’, ‘마이 카’ 시대가 온다는 구호가 2000년대에 들어서는 현실화되었습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시대의 도래와 모든 생활상의 변화는 놀라웠습니다. 단군 이래 역사에서 가장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은 세대가 바로 베이비 붐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베이비 붐 세대들은 어릴 때 굶던 기억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는 밥을 먹고 난 다음 뛰어 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배가 금방 고파지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간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그 당시는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기라 물로 허기를 달랬던 기억이 많이 납니다. 여가문화의 춘추전국시대 도래경제 성장의 혜택으로 마이 홈, 마이 카를 소유하고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베이비 붐 세대는 그동안 고생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각종 여가활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이 세대는 노후의 취미나 여가생활을 누린 경험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은 고가의 악기로 분류되는 피아노, 기타를 배웠지만 절대다수의 베이비 붐 세대는 노후를 위한 여가생활을 고려해본 적도 전혀 없었습니다. 베이비 붐 세대의 어린 시절에서는 무엇 하나 풍족하지 않았고 오늘과 같은 놀이문화도 없었습니다. 반면에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룬 지금은 개인의 취향, 개성에 따라 취미생활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여가문화, 놀이문화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면의 성찰과 성취감 회복의 방법, 색소폰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으로 인하여 얻은 여유는 사회 전반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중 많이 선택되는 여가활동은 음악 활동이며, 음악 중에서도 색소폰 인구가 가장 많습니다. 중장년층에게 색소폰 배우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베이비 붐 세대들이 여가 욕구와 자아성취감 고취를 위한 도구로 색소폰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주역을 담당했던 지금 중년층들의 젊은 시절은 일에만 쫓겨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와 내면을 성찰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경제적 안정, 사회적 변화와 문화적 욕구의 상승세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색소폰’이라는 악기를 선택합니다. 색소폰은 한 세대 이전만 하더라도 고급악기이며 사치로 여겨져 쉽게 접근 할 수 없는 고가의 악기였지만, 값싼 중국제와 대만제의 보급과 어느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생기며 많은 중년들이 색소폰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색소폰은 일단 배우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초보자도 6개월 정도 배우면 웬만한 곡을 연주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또한 중년의 위기라 할까요. 중년의 텅 빈 마음을, 문화적 욕구와 성취감을 채워 줄 도구로, 그리고 봉사의 도구로, 교회에서는 찬양으로 활용할 수 있는 도구로 색소폰 만한 악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민족(韓民族)의 정서 ‘한(恨)’을 표현하는 색소폰우리나라에 색소폰이 도입된 것은 6.25전쟁 때 미군이 주둔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물론 일본 식민지 시대에도 있었다고 하지만 색소폰이 대중들의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전쟁 후에 미군이 주둔하며 위문공연이 시작된 시점입니다. 색소폰은 그때부터 대중가요나 팝에서 빠지지 않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즐겨 연주하는 색소폰 열풍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선 선조들의 풍류(風流)의 도(道)가 부활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민족(韓民族)은 예로부터 풍류를 즐겼으며, 한(恨)의 정서가 있는 민족입니다. 색소폰 음색은 인간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어, 이처럼 한민족의 정서와 절묘하게 교감하고 마음을 달래어 근심과 시름을 없애고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는 악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베이비 붐 세대의 대표적 악기가 색소폰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반도 역사상 이렇게 한 종류의 악기로 정서적인 교감을 하고 또래집단을 형성하여 즐기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색소폰은 정통 트로트와도 잘 어울리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와 부합하는 특징으로 열풍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또한 필자는 색소폰 열풍의 근원을 김태형 심리학자의 저서 ‘한국사회 트라우마’에서 찾았습니다. 색소폰 열풍의 근원, 50년대 생 ‘좌절세대’의 트라우마IMF경제위기 이후 생존을 위협당하는 한국사회의 불안한 현실을 사회심리학적 관점으로 냉철히 분석한 ‘불안증폭사회’, ‘트라우마 한국사회’의 저자인 김태형 심리학자가 오늘날 온갖 마음의 병으로 신음하며 힐링을 찾아 나선 한국인들의 심리를, 사회와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세대별로 겪는 ‘트라우마’를 분석하였습니다. 베이비 붐 세대들은 동일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는 왜곡된 역사와 사회 구조적 비리, 부패로 인해 생겨난 ‘집단 트라우마’와 대다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관련된 ‘개인적 트라우마’가 복합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50년대 생을 ‘좌절세대’라고 칭합니다. 색소폰 열풍의 주역인 현재 중장년층들은 이 땅의 1950년대에 태어났습니다. 이들은 좌절에 대한 보상으로 사회적 힐링 열풍에 편승하여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갖게 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책을 통해 열풍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세대가 50년대 생임을 간주하여 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해보겠습니다. 유년기 5.16 군사정변, 청소년기 박정희 독재정권을 겪은 세대좌절세대는 유년기 또는 청소년기에 4.19 혁명을 잠깐 목격하였으나, 그것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기도 전에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으로 좌절되는 장면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공책 표지에는 군사혁명에 관한 홍보 글이 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동안 부모 세대뿐 아니라 공교육기관으로부터도 강제적인 반공교육을 받아야 했고, 끊임없이 권위주의적인 압력에 노출되었습니다.청소년기는 한마디로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에 짓눌려 있던 시기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중 .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강도 높은 군사훈련, 즉 교련을 실시하는 등 학교를 ‘병영화’했고 반공 . 반북 교육을 지속적으로 강화했습니다. 좌절세대는 이런 암울한 청소년기를 보내며 지속적인 욕구 좌절을 경험하였고, 유년기부터 자라나기 시작한 권위에 대한 공포감과 복종, 동시에 반항심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유신 독재의 폭압이 절정에 이르렀던 1970년대에 대학생이 된 좌절세대 중 일부는 반 유신 학생운동에 뛰어들기도 했지만, 당시 학생운동은 학생 수가 워낙 소수인 데다 참여자 역시 많지 않아 결국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좌절세대는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좌절을 경험하여 유년기 심리가 건강하지 못한 세대여서 1980년대 학생들처럼 다양한 사상에 과감하게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와 권위주의 사회에서 억눌린 좌절세대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나는 1966년 무렵부터 한국인들 사이에는 서서히 성취동기, 상향이동의 열망, 성공지향의 가치관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1987년 이후의 3저 호황기 그리고 민주화운동과 노동자대투쟁으로 기업의 인건비 비중이 가장 높았던 시절에 직장생활을 했기에 소득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인기의 경제적 안정은 좌절세대가 1987년 6월 민중항쟁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조건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며 동구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세계화의 파도가 밀려오자 다시 비관주의와 회의주의로 빠져 들었고, 세계인들과 경쟁하기 위해 개인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당시의 사회적 요구에 굴복했습니다. 50년대 생은 돈을 벌기 위해 직업 활동을 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취미생활을 할 수 없는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대부분 청소년기 이전에 가난과 배고픔을 경험하다 청소년기에는 권위적인 사회와 부모에 의해 자신의 동기와 감정을 억누르도록 강요당했습니다. 이들은 빈곤에 대한 불안감과 동시에 권위주의에 대한 공포와 복종심,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와 반발심을 간직하고 있는 세대입니다. 보릿고개에서 웰빙을 넘어 힐링(Healing)의 시대로불과 한 세대 이전인 1950년대에는 보릿고개, 즉 먹고 살기 급급했던 춘궁기에는 절대적인 배고픔의 시기라 무엇이든 먹을거리가 되었습니다. 베이비 붐 세대가 중장년이 되고 나서는 절대적 배고픔이 아니라 이제는 ‘무엇을 얼마나 맛있게 먹을까?’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제는 음식을 양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몸에 좋은 음식을 찾는 이른바 ‘웰빙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현시대는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급변하고 있습니다. 몸에 좋다면 아무리 비싸더라도 먹으려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웰빙 열풍이 불었습니다. 각박한 삶에서 지친 현대인들에게 이제 웰빙을 넘어 ‘치유’라는 키워드가 가슴에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불교에서는 템플스테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법정스님, 법륜스님, 혜민스님 등의 에세이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힐링’ 열풍의 영향이 큽니다. 좌절세대의 트라우마를 여가 활동으로 극복 좌절세대의 유년기에는 부모와 사회의 권위주의, 청소년기에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에 의해 좌절을 강요받았습니다. 청년기에는 유신독재에 도전했으나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좌절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세대입니다. IMF 경제위기가 시작되기 전인 1996년 하반기부터 명예퇴직 등 광범위한 구조조정 바람을 타고, 가장 우선적인 정리해고의 대상으로 부상합니다. 이들은 또 다시 시대적인 아픔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대부분 가장이었던 좌절세대 남성들은 당시 자녀양육 및 교육비 부담이 가장 큰 생애주기 단계였기에, 경제적 위기는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커다란 정신적 충격과 피해를 주었습니다. 좌절세대는 80년대 생인 자식들에게 시대적 아픔과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게 됩니다. 부모님을 모시면서도 자녀를 부양하는 이중고의 세대이며, 또한 부모님을 모시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으로부터는 부양을 받지 못하는 세대라고 자학합니다.좌절세대의 트라우마는 조국근대화의 불행한 역사적 경험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즉 한국인들은 동일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는 왜곡된 역사와 잘못된 구조적 비리, 부패 사회로 인해 생겨난 집단 트라우마와 대다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관련된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복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좌절세대에게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사회적인 힐링 열풍에 편승하여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원하게 됩니다. 좌절세대의 자아 성취와 트라우마의 회복 방법, 색소폰 50년대 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좌절’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야 합니다. 벗어나지 못할 경우 앞으로의 정신건강이 악화될 수 있습니다. ‘100세 시대’인 고령화 사회에서 좌절 세대가 앞으로 남은 인생에 좌절을 반복하며 산다는 것은 지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탈출구는 늦게나마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색소폰 연주 활동은 쌓인 트라우마의 회복을 도와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자기혐오감에서부터 자유로워지고, 본인의 삶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을 회복 시켜 주기도 합니다. 과거의 아픔을 공유한 동년배들과 진솔하게 대화하면서 색소폰을 취미로 삼는다면 청년기의 아름다운 꿈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좌절세대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색소폰은 이제 외국 악기라기보다 국민 악기로 인식되는 친근한 생활 악기로 정착되었습니다. 색소폰 인구의 대부분은 좌절세대인 50년대 생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색소폰 선율로 지난 세월에서 상처받은 트라우마를 회복하고 음악봉사를 하며 느끼는 행복은 어쩌면 역사적인 아픔의 치유로 볼 수 있습니다. (월간색소폰)최종운 기자= suyeo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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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1
  • ‘마리오 가토’와‘파브리지오 말레르바’가 함께하는
    (마리오 가토와 파브리지오 말레르바 듀오)따사로운 햇살에 눈이 부셨던 5월 26일, 동묘앞역에는 아코디언 연주를 보기위한 발걸음들로 가득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모두가 한마음으로 연주자들의 등장을 고대하고 있는 와중에 첫 연주자들이 등장했다.아코디언과 기타의 조화자유로운 복장과 덥수룩한 턱수염을 하고 등장한 아코디언 아티스트 ‘마리오 가토’와 기타리스트 ‘파브리지오 말레르바’의 등장에 모두들 신기해하는 듯했다. 총 열 한 곡으로 구성된 무대의 처음과 끝은 이 두 사람이 맡았다. 영화음악,팝, 재즈, 심지어 한국의 가요인 <그 겨울의 찻집>과 <낭만에 대하여>를 연주하는 이 둘의 호흡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잘 맞았다. 악기를 자유분방하게 다루는 테크닉은 물론이고(마리오 가토가 첫 곡으로 연주한 <왕벌의 비행>은 테크닉적으로 매우 훌륭했다), 음악적으로도 이미 완성된 그들의 연주는 보는 내내 최고의 찬사가 터져 나왔다.계속되는 아코디언의 향연이탈리안 듀오의 뜨거운 무대 뒤로 국내 연주자들의 연주가 계속 이어졌다. ‘최복희’의 심금을 울리는 가요 연주와 청주 아코디언 교실을 운영하는 ‘김인성’ 원장과회원들의 조화로운합주 무대, 그리고 <뻐꾹 왈츠>를 발랄하게 연주했던 ‘이상희’와 프로페셔널한 아코디언 연주로 앙코르 요청까지 받은 ‘공병희’까지 그렇게 무대는 점점 더 뜨겁게 중반부로 향했다. (연변대학 아코디언을 전공한 최덕범) 능수능란한 아코디언 연주자들인터미션 없이 2시간 동안 진행되는 공연이었기에 1시간 정도 지난 시점에는 사람들의 엉덩이가 조금씩 들썩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그때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무대 의상 차림의 가수 ‘원정숙’이 등장했다. 여유로운 모습과 곱고낭랑한 목소리로 1집 타이틀곡 <낙원동 사람들>과 <사랑의시계>를 불러 다소 경직되어 있었던 청중들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 주었다. ‘김성란’, ‘김다은’의 훈훈했던 모녀 아코디언 합주를 지나 중국의 연변대학 졸업생 출신인 아코디언 연주자 ‘최덕범’이 등장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모습에 사람들도 숨죽여 그의 음악을 경청했다. TV채널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했던 탈북강사 ‘윤설미’의기가 막히도록 능숙한 무대 퍼포먼스와 이 연주회의 주최 측이기도 했던 ㈜중앙악기 과장인 ‘주문길’의 무대까지 지루할틈 없이 빠르게 2시간이 지나갔다.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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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1
  • ‘마리오 가토’와‘파브리지오 말레르바’가 함께하는 아코디언 초청연주회
    따사로운 햇살에 눈이 부셨던 5월 26일, 동묘앞역에는 아코디언 연주를 보기 위한 발걸음들로 가득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모두가 한마음으로 연주자들의 등장을 고대하고 있는 와중에 첫 연주자들이 등장했다. 아코디언과 기타의 조화자유로운 복장과 덥수룩한 턱수염을 하고 등장한 아코디언 아티스트 ‘마리오 가토’와 기타리스트 ‘파브리지오 말레르바’의 등장에 모두들 신기해하는 듯했다. 총 열 한 곡으로 구성된 무대의 처음과 끝은 이 두 사람이 맡았다. 영화음악,팝, 재즈, 심지어 한국의 가요인 <그 겨울의 찻집>과 <낭만에 대하여>를 연주하는 이 둘의 호흡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잘 맞았다. 악기를 자유분방하게 다루는 테크닉은 물론이고(마리오 가토가 첫 곡으로 연주한 <왕벌의 비행>은 테크닉적으로 매우 훌륭했다), 음악적으로도 이미 완성된 그들의 연주는 보는 내내 최고의 찬사가 터져 나왔다. 계속되는 아코디언의 향연이탈리안 듀오의 뜨거운 무대 뒤로 국내 연주자들의 연주가 계속 이어졌다. ‘최복희’의 심금을 울리는 가요 연주와 청주 아코디언 교실을 운영하는 ‘김인성’ 원장과회원들의 조화로운합주 무대, 그리고 <뻐꾹 왈츠>를 발랄하게 연주했던 ‘이상희’와 프로페셔널한 아코디언 연주로 앙코르 요청까지 받은 ‘공병희’까지 그렇게 무대는 점점 더 뜨겁게 중반부로 향했다. 능수능란한 아코디언 연주자들인터미션 없이 2시간 동안 진행되는 공연이었기에 1시간 정도 지난 시점에는 사람들의 엉덩이가 조금씩 들썩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그때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무대 의상 차림의 가수 ‘원정숙’이 등장했다. 여유로운 모습과 곱고낭랑한 목소리로 1집 타이틀곡 <낙원동 사람들>과 <사랑의시계>를 불러 다소 경직되어 있었던 청중들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 주었다. ‘김성란’, ‘김다은’의 훈훈했던 모녀 아코디언 합주를 지나 중국의 연변대학 졸업생 출신인 아코디언 연주자 ‘최덕범’이 등장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모습에 사람들도 숨죽여 그의 음악을 경청했다. TV채널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했던 탈북강사 ‘윤설미’의기가 막히도록 능숙한 무대 퍼포먼스와 이 연주회의 주최 측이기도 했던 ㈜중앙악기 과장인 ‘주문길’의 무대까지 지루할틈 없이 빠르게 2시간이 지나갔다.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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