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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채로운 퍼포먼스와 삶의 감동을 전하는 '양주윈드오케스트라 9회 정기연주회'
    경기도 양주시에서 활동하며 아름다운 선율과 수려한 리듬으로 지역사회에 생기를 불어넣는 순수 예술단체 양주윈드오케스트라. 이들이 2017년 12월 9일, 제9회 정기연주회를 개최하였다. 국악, 댄스팀과의 콜라보레이션 공연과 관악기와 타악기로 구성된 독특한오케스트라 선율, 그리고 색소포니스트 심삼종 교수와의 협연 등 시민에게 가깝게 다가가 편안함과 즐거움을 선사했다. 양주시의 문화 활성화에 이바지하는 양주윈드오케스트라, 그들의 인생 내면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감동의 하모니를 느껴보자.'양주시에 기쁨을 전하는 장수 오케스트라'양주윈드오케스트라가 2009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정기연주회가 올해 9회를 맞이했다. 이들은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공동체’를 목표로 ‘찾아가는 문화활동’ 등 다양한 공연으로 시민들에게 다가간다. 2016년에는 양주시의 문화 부흥을 위하여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경기도 전문예술단체’로 지정되는 특별한 사명감을부여받았다.심재선 지휘자는 “양주윈드오케스트라가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은단원들 서로 간의 믿음과 배려 덕분”이라고 전했다. 이들은 시민들에게 수준 높은 공연을 선보이기 위하여 음악선생님을 초빙하였다. 이후 다양한 직업을 가진 단원 모두가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받으며 전문 오케스트라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게 된다. 제9회 정기연주회에서는 색소포니스트 심삼종 교수와의 협연을 통해 연주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관객에게 신선한 즐거움과 감동을 안긴 정기연주회'지인의 소개로 이번 정기연주회를 찾은 관객 이홍민 씨는 양주윈드오케스트라의 하모니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다양한 연령대, 직업군을 가진 단원들이 색소폰, 트럼펫, 호른의 소리에 삶에 고단함이 느껴졌던 것. 바쁜 일상 속에서 공연을 위한 노력과 시간이역력하게 느껴지는 그들의 소리는 어떠한 유명 연주자의 선율보다아름다웠다고 전했다.‘모차르트 팝 심포니’부터 사물놀이 단체 ‘한버들예술단’과 관악기의 이색적인 조화, 바이올리니스트 조재윤과의 협연으로 감미로운 선율을, 심삼종 교수와의 ‘헤이 주드’, ‘오 해피데이’ 협연은 아마추어 예술단체 양주윈드오케스트라와 실력파 색소포니스트의 특별한 조화를 엿볼 수 있었다. 또한 초등학생으로 구성된 ‘GN댄스팀’과의 신나는 콜라보레이션 공연까지, 어렵게만 느껴졌던 기존 오케스트라 공연과는 차별화된 즐거움을 전했다.양주시 음악문화의 밝은 희망 ‘양주윈드오케스트라 정기공연’ 양주시민들로 구성된 양주윈드오케스트라는 대도시에 비하여 문화적 혜택이 부족한 양주시에서 다양한 문화공연을 위해 힘쓰는음악단체다. 10대 청소년부터 7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 령대의 단원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기연주회를 통해 매년 발전된 실력을 선보이는 이들은, 앞으로도 정기연주회와 지역 봉사를 비롯 전국 무대에서 감동의 선율을 전할 예정이다.심재선 지휘자는 “내부적으로 단원들의 연주 실력을 향상시켜 훌륭한 공연을 선보이고, 외부적으로는 흥미로운 콘텐츠를 개발하여 지역민이 사랑하는 음악단체로 발전해 나갈 것”이라며, “양주윈드오케스트라는 궁극적으로 음악 인구의 저변을 확대하여 일상 속에서 주민들이 손쉽게 예술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앞으로 2, 30년은 물론, 50주년 기념음악회도 개최할 것”이라며 청사진을 그렸다.'양주시의 대표 음악단체 ‘양주윈드오케스트라’'2007년 양주시의 남문중학교 음악 교사로 부임한 심재선 지휘자는, 한적한 마을의 한 화훼농원에서 고정택 단장의 아름다운 색소폰 선율을 듣게 된다. 단순한 취미로 보기에 놀라운 그의 실력에 함께 오케스트라 창단을 결심한 그는, 화훼농원을 운영하는 고정택 단장에게 “음악의 꽃도 한 번 피워보지 않겠냐”며 설득한다. 심재선 지휘자의 권유에 “고된 농사일로 지친 주민들의 심신을 달래줄 수 있다면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고 답하여 2009년 양주윈드오케스트라가 탄생한다.양주윈드오케스트라는 2009년 창단연주회를 시작으로 올해 총 9회의 정기연주회를 개최하였다. 2016년에는 경기도 전문예술단체로 지정되어 ‘찾아가는 문화활동’을 53회 개최, 지역축제와 초청공연을 90여 회 진행하였다. 클래식부터 대중가요, 팝, 국악등 다양한 장르로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양주윈드오케스트라. 고정택 단장과 심재선 지휘자를 주축으로 54명의 단원들이 ‘행복과 즐거움을 주는 공연’을 목표 삼아 다양한 연주를 선보인다.글 | 박세정 기자suyeo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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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01
  • [MUSIC ESSAY] 반고흐의 아를과 오베르에서 '봄날은 가고'
    (월간색소폰)박형섭 칼럼니스트= 오, 사랑하는 ‘빈센트!’모든 예술은 하나로 통한다. 음악가가 아름다운 시를 읽던 중 멜로디가 떠올라 악곡을 만들고, 화가는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캔버스에 물감을 칠한다. 소설이 영화로 각색되어 스크린에 오르고, 연극 속 인물이 소설 주인공으로 변신하기도한다. 예술(예술가)은 또 다른 장르의 예술에 영감을 준다.뛰어난 것일수록 그 생명력이 도약한다. 감각의 제국에서 예술가들의 언어는 그렇게 소통된다. 그들 상호간 창조적 감정이나 상상력을 공유하는 근거가 거기에 있다. 시와 회화와 음악은 표현 기호만 다를 뿐 인간 내부의 같은 장소로 수렴된다. 그래서 음악의 귀로 미술을 감상하고 그림을 보며 멜로디를 떠올리는 것이 가능하다.고흐가 자신의 안에 음악이 흐른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마음속에서 울리는 소리, 즉 내면의 울림이 붓의 터치로 표출된다. 위대한 존재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다. 예술가의 경우, 그의 삶과 예술은 분리될 수 없다. 작품은 곧 예술가의 총체이다. 반 고흐, 바이런, 슈만, 마일즈 데이비스 등.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노랫말이 가슴깊이 와 닿고, 그림 앞에서 화가의 영혼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미학적 정서에 호소하기 때문이다.얼마 전 감동적인 예술영화 한 편을 보았다.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ʼ(코비엘라 감독). 37세에 자살한 천재화가빈센트 반 고흐의 최후, 생 레미에서 오베르 쉬르 와즈에서의 마지막 시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유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단계부터 무수한 화제를 일으켰다. 세계 최초 유화들로 구성된 영화로 참여화가들이 107명, 두 해 동안 6만2,450여 점의 그림이 그려졌다. 실제 고흐의 회화작품 130여 점이 대형 스크린에서 실물처럼 움직였다. 영화가 끝났음에도 관객들은 영상에 도취된 듯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스크린 속에 살아있는 고흐 그림들, 모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복받쳐 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나는엔딩 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노래 ‘빈센트ʼ에 또다시 넋을 잃고말았다. 리앤 라 하바스(Lianne La Havas)의 부드럽고 애잔한 음색이 어둠 속에서 은은한 별처럼 다가왔다. 별이 빛나는 밤그대 팔레트의 블루와 회색으로칠해 주세요.내 영혼의 어둠을 아는 눈으로 여름날의 밖을 내다보세요.언덕 위의 어두운 그림자에 나무와 수선화를 그려요.눈처럼 하얀 린넨 천 바탕에 미풍과겨울의 추위를 채색해 봐요.나는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아요.맑은 영혼을 가지려 얼마나 당신이 고통스러웠는지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려 얼마나 애썼는지아무도 들으려하지 않았고, 어떻게 들을지도 몰랐어요아마 이제는 들을 거예요. (...)아무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당신의 사랑만은 진실했는데가슴 속 아무런 희망도 남아있지 않던 바로 그 별이 빛나던 밤에당신은 종종 연인들이 그렇게 하듯 생을 마감했어요. 이 노래는 원래 미국의 포크송 싱어송라이터 돈 맥클린이 고흐의 ‘영혼의 편지ʼ를 읽고 작곡했다. 고흐의 시적 산문이 아름다운 노래로 전화(轉化)된 것이다. 고흐는 화가인 동시에뛰어난 시인이었다. 짙은 감동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것이 창조적 영감이 아니고 무엇이랴.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지난날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했던 추억의 장소들로 몽상하는 기분에 취했다. 프랑스 파리,아를 그리고 오베르 쉬르 와즈. 무엇보다도 고흐가 머물렀던 파리 몽마르트르 구역 동생 테오의 아파트, 고갱과 함께 화가공동체를 꿈꾸었던 프로방스 론 강가의 아를, 그리고 스스로세상을 등진 오베르의 밀밭 등. 나는 대예술가가 스스로 가슴에 총을 쏘았던 그 밀밭, 그 뜨거운 태양의 여름을 상상하며현장을 순례했던 것이다.반 고흐 그림 속의 음악어떤 음악일까? 나는 반 고흐의 그림과 영혼의 편지들을 고독과 우울, 고통의 노래로 읽었다. 간혹 자연에서 느끼는 벅찬 감정, 테오나 동료들과 나눈 사랑과 우정, 그림에 대한 열정 등을 말하고 있지만 고흐의 심상(心狀)은 언제나 고독하고 쓸쓸하게 보였다. 음악으로 말하면 단조의 멜랑꼴릭한 음조인 것이다. 이글거리는 태양이든 노란색의 해바라기든 포도를 수확하는 아낙네든 다를 바 없다. 캔버스의 오브제들은 모두 우울한 표정이다. 그 어두운 감정은 색채와 붓의 터치로 나타난다. 음악과 그림은 표현형식의 차이 너머에 공유적 차원이 존재한다. 즉, 둘 모두 내적 세계의 에너지와 운동을 표현하는 매체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반 고흐를 인상파, 빛과 색의 화가라고 부른다. 무엇보다도난 그를 영혼을 채색한 화가로 부르고 싶다. 그가 그린 대지는 온통 물결로 출렁인다. 그의 붓질과 빛깔은 물감이 무한정 겹쳐지면서 뉘앙스를 만들어낸다. 아문 상처에 또 다른 고통이 덧씌워지듯 붓의 결이 색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면서 영혼과 지성을 화폭에 옮겨놓는다. 반 고흐는 말했다. 색채를 통해 무언가 보여주기를 원했다. 서로 보완적인 두 색을 결합해 연인의 사랑을 보여주기, 색을 혼합하거나 대조해 마음의 신비로운 떨림을 표현하기, 얼굴을 어두운 배경과 대비되는 밝은 톤의 광채로 빛나게 해서 일부 생각을 드러내기,별을 그려서 희망을 표현하기, 석양을 통해 특정 사람의 열정을 표현하기 등은 눈속임이 아니다. 실제 존재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니까.반 고흐는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붓길로 도달하고자 했다. 말로 대체할 수 없는 인상(印象)을 색으로 대신하려는 것이다. 그 순간 화가의 마음속에 음악이 흐른다. 일렁이는 이미지가 음악의 선율로 변한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흐르는 멜로디를 어떻게 해서든 이미지로 표출하려고 했다.시적이라 할 만큼 운율 그득한 고흐의 붓놀림 패턴은 도와 레사이에 있는 도#(레♭), 레와 미 사이에 있는 레#(미♭)을 연주하려 애쓰는 연주자의 행위와 다름없다. 이러한 반음(半音)적 기질로 인해 그의 화폭은 간결하게 정돈되지 않은 채 어지럽게 중첩되어 꿈틀댄다. 소니 롤린스, 존 콜트레인, 윈튼 마샬리스 등 재즈 뮤지션들의 연주를 듣는 것처럼 불편할 수 있다. 그들의 음악은 자유분방한 즉흥적 리듬 패턴과 박자로 이루어져있다. 연주자의 개성이 극대화되는 음악인 것이다. 그들의 음악을 반 고흐의 그림에서 듣는다고 한들 누가 뭐랄까.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ʼ반 고흐는 태양과 색채를 찾아 거처를 남프랑스 아를로 옮겼다. 그의 그림이 정점에 이르고 완성되는 시기였다. 뜨거운태양빛 아래의 자연은 그에게 더없이 아름답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갈망한 것은 어떤 구체적인 장소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빛의 이미지를 좀 더 깊이 탐색하고 포착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아를의 자연풍경을 맘껏 즐기며 화폭에 옮겼다.반 고흐는 아를에 화가공동체를 기획하며 파리의 화가 고갱을 불렀다. 그러나 반 고흐와 고갱은 모든 면에서 대립했다.그림에 있어서 특히 입장차가 심했다. 고갱은 반 고흐가 싫어하는 앵그르, 라파엘의 그림을 좋아했다. 게다가 고갱은 반고흐의 화가공동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두화가 사이의 미적 가치관, 화풍의 차이가 컸다. 개성이 강한 예술가들이 어떻게 공동으로 창작에 임한단 말인가. 반 고흐가 거칠게 그릴 때, 고갱은 아라베스크 장식을 그렸다. 반 고흐가 카페의 밤 풍경을 그렸을 때, 고갱은 단조롭게 정원을 걷는 여자들을 그렸다. 반 고흐는 태양이 가득한 충만함을,고갱은 동양적 신비가 뒤섞인 장중함을 추구했다. 반 고흐의잠재적 정신질환은 이때부터 도진 듯하다. 즉 고갱과의 인간적 갈등에서 폭발한 것이다.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라 창녀에게 준 것은 고갱과 심하게다툰 후였다. 누가 봐도 광인의 행위였다. 그의 병은 악화되고 화가공동체의 계획은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에 대한실망과 자책은 간간이 발작으로 번졌다. 그는 자신의 불안한 정신을 추스를 수 없어 스스로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병원에서 그림 작업실을 배려해주어 1년 동안 열정적으로 정원, 꽃, 자연을 소재로 그렸다. 당시의 그림은 마치 그가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광기가 화폭에 스며있는 듯했다. 모든 것이 흔들리거나 요동치는 형상으로 묘사되었다.반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인 ‘별이 빛나는 밤ʼ은 생 레미 병원에서 완성했다. 화가에게 밤하늘은 무한을 나타내는 대상이었고, 이보다 먼저 제작된 아를의 ‘밤의 카페 테라스ʼ나 ‘론 강위의 별이 빛나는 밤ʼ 역시 별이 반짝이는 밤 풍경을 소재로했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오늘 아침 나는 해가 뜨기 한참 전에 창문을 통해 아무것도 없고 아주 커 보이는 샛별밖에 없는 시골을 보았다.”고 했다. 이 샛별은 그림 가운데 왼쪽에 있는 커다란 흰 별일 것이다. 그가 그린 밤하늘에서는 구름과 대기, 별빛과 달빛이 폭발하고 있다. 황량하고 짙은 파란색 하늘은 세상의 종말을 연상케 하고, 그 위로 구름이 흘러가며 소용돌이친다. 달과 별의 언저리에는 뿌옇게 무리가 져있다.반 고흐는 언제나 하늘의 별을 보며 꿈을 꾸었다.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이랄까. “왜 하늘의 빛나는 점들에는 프랑스 지도의 검은 점처럼 닿을 수 없을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듯이, 우리는 별에 다다르기 위해 죽는다.”고말하듯이. 이 시기에 그의 색칠은 더욱 두터워지고 열정적으로 변한다. 별의 광채에 한층 가까이 다가가려는 듯하다. 강렬한 색과 회오리치는 모양의 필치는 자신의 격한 내면을 반영한다. 바람결을 따라 무작정 어딘가로 향하는 운동성을 보여준다. 그는 그림에 의지하며 존재들에 대한 사랑을 믿으려애썼다. 순수하고 연약한 영혼의 소유자, 반 고흐는 존재에 대한 격한 사랑을 물리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성향 때문에 하늘의 운행과 바람의 숨결, 별의 노래를 온몸으로 느끼고 그렸는지 모른다. 그의 그림에서 진실성이 엄숙하게 묻어난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메시지를 전한다. “진정한 화가는 양심의 인도를 받는다. 화가의 영혼과 지성이 붓을 위해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붓이 그의 영혼과 지성을 위해 존재한다.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반 고흐는 자신이 프로방스 지방에 홀로 있다는 생각에 견딜수 없었다. 머릿속은 온통 파리의 테오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도시의 번잡함과 동생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맘에걸렸다. 어느 날 테오와 화가 피사로가 고흐에게 오베르 쉬르와즈의 가셰 박사를 소개하며 그곳으로 갈 것을 제안했다. 가셰는 아마추어 화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다. 그는 반 고흐의생애 마지막 두 달을 함께 보냈다. 오베르 쉬르 와즈 공동묘지파리 북쪽의 조용하고 한적한 전원마을 오베르 쉬르 와즈. 세잔, 피사로, 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이 이곳에서 그림 작업을 하여 유명해졌다. 강을 끼고 있고 구름의 색깔과 형태가 변화무쌍한 곳이다. 반 고흐는 오베르에서 두 달가량 머물며 7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화가의 눈에 비친 농가와 마을풍경, 오베르 교회, 시청, 마을사람들이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반 고흐를 추억하기 위해 마을을 방문한 여행객들은 도처에서 화가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다. 그림에서 본 모습들이 눈앞에 펼쳐져있으니 말이다. 반 고흐는 시골 분위기에 만족한 듯하다. “이곳은 색상이 다양해. 오베르는 정말 아름다워.” 심신(心身)의 건강상태도 호전되었다. 창작에 대한 열정은 병을 퇴치하는 가장 좋은 치료제가 되었다. 반 고흐는 테오에게 장기적 계획을 언급하며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깊은 고뇌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화가가 진정 격하게 고뇌한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어쩌면 내 그림의 거친 특성 때문에 절실하게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모든 것을 바쳐서 그 경지에 이르고 싶다. 그것이 나의야망이다.” 반 고흐는 라부여인숙(Auberge Ravoux)에 머물면서 ‘오베르 교회ʼ, ‘가셰 박사의 초상ʼ, ‘까마귀가 나는 밀밭ʼ 등 걸작들을 완성했다. 지금도 라부여인숙, 오베르 교회, 밀밭, 시청, 광장 등 그림 속의 대상들이 당시 모습 그대로 있다. 교회 앞에는 반 고흐가 그린 ‘오베르 교회ʼ의 복사본이 있다. 반고흐 동상이 서 있는 아담한 반 고흐 공원도 있었다.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담장 아래에는 반 고흐가 즐겨 그렸던 붓꽃을비롯해 야생화들이 널려있었다. 마을 곳곳이 작품의 현장이다. 나는 반 고흐가 땅바닥에 앉아 뚫어지게 바라보고 스케치했을 붓꽃 한 송이를 꺾어들었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고흐의 그림 속을 뛰어다녔다.오베르 교회 오른쪽 언덕길을 오르면 금세 넓은 벌판이 시야에 들어온다. 수확을 앞둔 밀밭의 풍경은 온통 누런 물결로 일렁인다. 바로 ‘까마귀가 나는 밀밭ʼ의 배경이자 그가 권총으로 자살한 곳이다. 이 그림은 정말 죽음을 암시하고 있을까? 길가 팻말에 “구름 낀 하늘 아래, 넓은 밀밭이 펼쳐져 있고, 나는 주저 없이 깊은 슬픔과 고독을 표현했다.”라고 적혀있다. 반 고흐는 죽음에 이르기 전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그렇게 심정을 토로했다. 반 고흐는 물감을 살 수 없을 정도로궁핍했다. 그렇지만 그를 괴롭힌 것은 물질적 어려움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이었다. 그것이 그를 우울과 고독으로 내몰았다. “언젠가 카페에서 작품전을 열 방법을 찾을수 있을 거야!” 반 고흐의 꺼져가는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나는 묘지 밖 공터에 앉아 푸른 하늘과 끝없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정지된 듯 사방이 노랗게 물들어갔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누런 빛의 밀밭이 흔들거렸다. 저 멀리서고뇌하는 한 사내의 모습이 어렴풋 보였다. 그는 오른쪽 귀가잘린 채 붕대를 감고 있었고, 닳아빠진 붓으로 캔버스를 하염없이 덧칠하고 있었다. 잿빛 구름이 몰려오면서 황금색 들판을 나는 까마귀 떼 울음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열댓 마리의까마귀들이 캔버스 속으로 날아들었다.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어.” 이어서 정적을 깨는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반고흐의 운명을 알고 있다는 듯 거센 바람이 묘지 주변에서 휘몰아쳤다.반 고흐가 잠든 오베르 공동묘지는 밀밭 중앙의 한 구역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무덤은 입구의 왼쪽 담장 아래 놓였다.‘빈센트 반 고흐, 여기 잠들다.ʼ 어떤 수식도 없는 비문이담백하게 보였다. 반 고흐는 테오, 베르나르, 탕귀영감, 가셰 의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오베르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해 1890년 8월 테오는 베르나르의 도움으로 몽마르트르 자신의 집에서 반 고흐 추모전을 열었다. 테오는 형이 자기와 돈 문제로 언쟁 후 자살했다며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 역시 이듬해 형의 뒤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테오의 유해는 반 고흐의 서간집 ‘영혼의 편지ʼ가 출간된 1914년 형의 무덤 옆에 안치되었다. 두 형제의 사랑은 죽어서도 뗄 수없었다. 그들의 무덤은 담쟁이덩굴로 엉켜있었다. 나는 어두운 석회암 비석과 담쟁이덩굴 사이에 개양귀비 한 송이를 올려놓았다.오늘 날 반 고흐는 대중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로 인식되고,그의 그림은 경매시장에서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다. 반 고흐사후에 봄날이 온 것인가! 나란히 누운 반 고흐와 테오의 무덤을 보며 덧없는 세월에 격세지감과 인생무상의 회한이 몰려왔다. 난 묘지 밖 공터를 배회하다가 색소폰을 꺼내들었다.불현 듯 ‘봄날은 간다ʼ의 멜로디가 떠올랐다. “새파란 꽃잎이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 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글 | 박형섭 부산대 불문과 교수, 색소포니스트 suyeo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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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01
  • [MUSIC ESSAY] 반고흐의 아를과 오베르에서 '봄날은 가고'
    오, 사랑하는 ‘빈센트!’ 모든 예술은 하나로 통한다. 음악가가 아름다운 시를 읽던 중 멜로디가 떠올라 악곡을 만들고, 화가는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캔버스에 물감을 칠한다. 소설이 영화로 각색되어 스크린에 오르고, 연극 속 인물이 소설 주인공으로 변신하기도한다. 예술(예술가)은 또 다른 장르의 예술에 영감을 준다. 뛰어난 것일수록 그 생명력이 도약한다. 감각의 제국에서 예술가들의 언어는 그렇게 소통된다. 그들 상호간 창조적 감정이나 상상력을 공유하는 근거가 거기에 있다. 시와 회화와 음악은 표현 기호만 다를 뿐 인간 내부의 같은 장소로 수렴된다. 그래서 음악의 귀로 미술을 감상하고 그림을 보며 멜로디를 떠올리는 것이 가능하다. 고흐가 자신의 안에 음악이 흐른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마음속에서 울리는 소리, 즉 내면의 울림이 붓의 터치로 표출된다. 위대한 존재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드라마다. 예술가의 경우, 그의 삶과 예술은 분리될 수 없다. 작품은 곧 예술가의 총체이다. 반 고흐, 바이런, 슈만, 마일즈 데이비스 등. 우리가 음악을 들을 때 노랫말이 가슴깊이 와 닿고, 그림 앞에서 화가의 영혼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미학적 정서에 호소하기 때문이다.얼마 전 감동적인 예술영화 한 편을 보았다.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ʼ(코비엘라 감독). 37세에 자살한 천재화가빈센트 반 고흐의 최후, 생 레미에서 오베르 쉬르 와즈에서의 마지막 시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유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단계부터 무수한 화제를 일으켰다. 세계 최초 유화들로 구성된 영화로 참여화가들이 107명, 두 해 동안 6만2,450여 점의 그림이 그려졌다. 실제 고흐의 회화작품 130여 점이 대형 스크린에서 실물처럼 움직였다. 영화가 끝났음에도 관객들은 영상에 도취된 듯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스크린 속에 살아있는 고흐 그림들, 모두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복받쳐 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그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나는엔딩 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노래 ‘빈센트ʼ에 또다시 넋을 잃고말았다. 리앤 라 하바스(Lianne La Havas)의 부드럽고 애잔한 음색이 어둠 속에서 은은한 별처럼 다가왔다. 별이 빛나는 밤그대 팔레트의 블루와 회색으로칠해 주세요.내 영혼의 어둠을 아는 눈으로 여름날의 밖을 내다보세요.언덕 위의 어두운 그림자에 나무와 수선화를 그려요.눈처럼 하얀 린넨 천 바탕에 미풍과겨울의 추위를 채색해 봐요.나는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이제 알 수 있을 것 같아요.맑은 영혼을 가지려 얼마나 당신이 고통스러웠는지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려 얼마나 애썼는지아무도 들으려하지 않았고, 어떻게 들을지도 몰랐어요아마 이제는 들을 거예요. (...)아무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당신의 사랑만은 진실했는데가슴 속 아무런 희망도 남아있지 않던 바로 그 별이 빛나던 밤에당신은 종종 연인들이 그렇게 하듯 생을 마감했어요. 이 노래는 원래 미국의 포크송 싱어송라이터 돈 맥클린이 고흐의 ‘영혼의 편지ʼ를 읽고 작곡했다. 고흐의 시적 산문이 아름다운 노래로 전화(轉化)된 것이다. 고흐는 화가인 동시에뛰어난 시인이었다. 짙은 감동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것이 창조적 영감이 아니고 무엇이랴.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지난날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했던 추억의 장소들로 몽상하는 기분에 취했다. 프랑스 파리,아를 그리고 오베르 쉬르 와즈. 무엇보다도 고흐가 머물렀던 파리 몽마르트르 구역 동생 테오의 아파트, 고갱과 함께 화가공동체를 꿈꾸었던 프로방스 론 강가의 아를, 그리고 스스로세상을 등진 오베르의 밀밭 등. 나는 대예술가가 스스로 가슴에 총을 쏘았던 그 밀밭, 그 뜨거운 태양의 여름을 상상하며현장을 순례했던 것이다. 반 고흐 그림 속의 음악어떤 음악일까? 나는 반 고흐의 그림과 영혼의 편지들을 고독과 우울, 고통의 노래로 읽었다. 간혹 자연에서 느끼는 벅찬 감정, 테오나 동료들과 나눈 사랑과 우정, 그림에 대한 열정 등을 말하고 있지만 고흐의 심상(心狀)은 언제나 고독하고 쓸쓸하게 보였다. 음악으로 말하면 단조의 멜랑꼴릭한 음조인 것이다. 이글거리는 태양이든 노란색의 해바라기든 포도를 수확하는 아낙네든 다를 바 없다. 캔버스의 오브제들은 모두 우울한 표정이다. 그 어두운 감정은 색채와 붓의 터치로 나타난다. 음악과 그림은 표현형식의 차이 너머에 공유적 차원이 존재한다. 즉, 둘 모두 내적 세계의 에너지와 운동을 표현하는 매체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반 고흐를 인상파, 빛과 색의 화가라고 부른다. 무엇보다도난 그를 영혼을 채색한 화가로 부르고 싶다. 그가 그린 대지는 온통 물결로 출렁인다. 그의 붓질과 빛깔은 물감이 무한정 겹쳐지면서 뉘앙스를 만들어낸다. 아문 상처에 또 다른 고통이 덧씌워지듯 붓의 결이 색의 스펙트럼을 형성하면서 영혼과 지성을 화폭에 옮겨놓는다. 반 고흐는 말했다. 색채를 통해 무언가 보여주기를 원했다. 서로 보완적인 두 색을 결합해 연인의 사랑을 보여주기, 색을 혼합하거나 대조해 마음의 신비로운 떨림을 표현하기, 얼굴을 어두운 배경과 대비되는 밝은 톤의 광채로 빛나게 해서 일부 생각을 드러내기,별을 그려서 희망을 표현하기, 석양을 통해 특정 사람의 열정을 표현하기 등은 눈속임이 아니다. 실제 존재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니까. 반 고흐는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세계를 붓길로 도달하고자 했다. 말로 대체할 수 없는 인상(印象)을 색으로 대신하려는 것이다. 그 순간 화가의 마음속에 음악이 흐른다. 일렁이는 이미지가 음악의 선율로 변한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흐르는 멜로디를 어떻게 해서든 이미지로 표출하려고 했다. 시적이라 할 만큼 운율 그득한 고흐의 붓놀림 패턴은 도와 레사이에 있는 도#(레♭), 레와 미 사이에 있는 레#(미♭)을 연주하려 애쓰는 연주자의 행위와 다름없다. 이러한 반음(半音)적 기질로 인해 그의 화폭은 간결하게 정돈되지 않은 채 어지럽게 중첩되어 꿈틀댄다. 소니 롤린스, 존 콜트레인, 윈튼 마샬리스 등 재즈 뮤지션들의 연주를 듣는 것처럼 불편할 수 있다. 그들의 음악은 자유분방한 즉흥적 리듬 패턴과 박자로 이루어져있다. 연주자의 개성이 극대화되는 음악인 것이다. 그들의 음악을 반 고흐의 그림에서 듣는다고 한들 누가 뭐랄까.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ʼ반 고흐는 태양과 색채를 찾아 거처를 남프랑스 아를로 옮겼다. 그의 그림이 정점에 이르고 완성되는 시기였다. 뜨거운태양빛 아래의 자연은 그에게 더없이 아름답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갈망한 것은 어떤 구체적인 장소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빛의 이미지를 좀 더 깊이 탐색하고 포착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아를의 자연풍경을 맘껏 즐기며 화폭에 옮겼다.반 고흐는 아를에 화가공동체를 기획하며 파리의 화가 고갱을 불렀다. 그러나 반 고흐와 고갱은 모든 면에서 대립했다.그림에 있어서 특히 입장차가 심했다. 고갱은 반 고흐가 싫어하는 앵그르, 라파엘의 그림을 좋아했다. 게다가 고갱은 반고흐의 화가공동체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두화가 사이의 미적 가치관, 화풍의 차이가 컸다. 개성이 강한 예술가들이 어떻게 공동으로 창작에 임한단 말인가. 반 고흐가 거칠게 그릴 때, 고갱은 아라베스크 장식을 그렸다. 반 고흐가 카페의 밤 풍경을 그렸을 때, 고갱은 단조롭게 정원을 걷는 여자들을 그렸다. 반 고흐는 태양이 가득한 충만함을,고갱은 동양적 신비가 뒤섞인 장중함을 추구했다. 반 고흐의잠재적 정신질환은 이때부터 도진 듯하다. 즉 고갱과의 인간적 갈등에서 폭발한 것이다. 반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라 창녀에게 준 것은 고갱과 심하게다툰 후였다. 누가 봐도 광인의 행위였다. 그의 병은 악화되고 화가공동체의 계획은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에 대한 실망과 자책은 간간이 발작으로 번졌다. 그는 자신의 불안한 정신을 추스를 수 없어 스스로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병원에서 그림 작업실을 배려해주어 1년 동안 열정적으로 정원, 꽃, 자연을 소재로 그렸다. 당시의 그림은 마치 그가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광기가 화폭에 스며있는 듯했다. 모든 것이 흔들리거나 요동치는 형상으로 묘사되었다.반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인 ‘별이 빛나는 밤ʼ은 생 레미 병원에서 완성했다. 화가에게 밤하늘은 무한을 나타내는 대상이었고, 이보다 먼저 제작된 아를의 ‘밤의 카페 테라스ʼ나 ‘론 강위의 별이 빛나는 밤ʼ 역시 별이 반짝이는 밤 풍경을 소재로했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오늘 아침 나는 해가 뜨기 한참 전에 창문을 통해 아무것도 없고 아주 커 보이는 샛별밖에 없는 시골을 보았다.”고 했다. 이 샛별은 그림 가운데 왼쪽에 있는 커다란 흰 별일 것이다. 그가 그린 밤하늘에서는 구름과 대기, 별빛과 달빛이 폭발하고 있다. 황량하고 짙은 파란색 하늘은 세상의 종말을 연상케 하고, 그 위로 구름이 흘러가며 소용돌이친다. 달과 별의 언저리에는 뿌옇게 무리가 져있다.반 고흐는 언제나 하늘의 별을 보며 꿈을 꾸었다.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이랄까. “왜 하늘의 빛나는 점들에는 프랑스 지도의 검은 점처럼 닿을 수 없을까? 타라스콩이나 루앙에 가려면 기차를 타듯이, 우리는 별에 다다르기 위해 죽는다.”고말하듯이. 이 시기에 그의 색칠은 더욱 두터워지고 열정적으로 변한다. 별의 광채에 한층 가까이 다가가려는 듯하다. 강렬한 색과 회오리치는 모양의 필치는 자신의 격한 내면을 반영한다. 바람결을 따라 무작정 어딘가로 향하는 운동성을 보여준다. 그는 그림에 의지하며 존재들에 대한 사랑을 믿으려애썼다. 순수하고 연약한 영혼의 소유자, 반 고흐는 존재에 대한 격한 사랑을 물리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한 성향 때문에 하늘의 운행과 바람의 숨결, 별의 노래를 온몸으로 느끼고 그렸는지 모른다. 그의 그림에서 진실성이 엄숙하게 묻어난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메시지를 전한다. “진정한 화가는 양심의 인도를 받는다. 화가의 영혼과 지성이 붓을 위해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붓이 그의 영혼과 지성을 위해 존재한다.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반 고흐는 자신이 프로방스 지방에 홀로 있다는 생각에 견딜수 없었다. 머릿속은 온통 파리의 테오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대도시의 번잡함과 동생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맘에걸렸다. 어느 날 테오와 화가 피사로가 고흐에게 오베르 쉬르와즈의 가셰 박사를 소개하며 그곳으로 갈 것을 제안했다. 가셰는 아마추어 화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다. 그는 반 고흐의생애 마지막 두 달을 함께 보냈다. 오베르 쉬르 와즈 공동묘지 파리 북쪽의 조용하고 한적한 전원마을 오베르 쉬르 와즈. 세잔, 피사로, 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이 이곳에서 그림 작업을 하여 유명해졌다. 강을 끼고 있고 구름의 색깔과 형태가 변화무쌍한 곳이다. 반 고흐는 오베르에서 두 달가량 머물며 7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화가의 눈에 비친 농가와 마을풍경, 오베르 교회, 시청, 마을사람들이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반 고흐를 추억하기 위해 마을을 방문한 여행객들은 도처에서 화가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다. 그림에서 본 모습들이 눈앞에 펼쳐져있으니 말이다. 반 고흐는 시골 분위기에 만족한 듯하다. “이곳은 색상이 다양해. 오베르는 정말 아름다워.” 심신(心身)의 건강상태도 호전되었다. 창작에 대한 열정은 병을 퇴치하는 가장 좋은 치료제가 되었다. 반 고흐는 테오에게 장기적 계획을 언급하며 자신의 뜻을 피력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깊은 고뇌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화가가 진정 격하게 고뇌한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어쩌면 내 그림의 거친 특성 때문에 절실하게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모든 것을 바쳐서 그 경지에 이르고 싶다. 그것이 나의야망이다.” 반 고흐는 라부여인숙(Auberge Ravoux)에 머물면서 ‘오베르 교회ʼ, ‘가셰 박사의 초상ʼ, ‘까마귀가 나는 밀밭ʼ 등 걸작들을 완성했다. 지금도 라부여인숙, 오베르 교회, 밀밭, 시청, 광장 등 그림 속의 대상들이 당시 모습 그대로 있다. 교회 앞에는 반 고흐가 그린 ‘오베르 교회ʼ의 복사본이 있다. 반고흐 동상이 서 있는 아담한 반 고흐 공원도 있었다.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담장 아래에는 반 고흐가 즐겨 그렸던 붓꽃을비롯해 야생화들이 널려있었다. 마을 곳곳이 작품의 현장이다. 나는 반 고흐가 땅바닥에 앉아 뚫어지게 바라보고 스케치했을 붓꽃 한 송이를 꺾어들었다. 그리고 영화에서처럼 고흐의 그림 속을 뛰어다녔다.오베르 교회 오른쪽 언덕길을 오르면 금세 넓은 벌판이 시야에 들어온다. 수확을 앞둔 밀밭의 풍경은 온통 누런 물결로 일렁인다. 바로 ‘까마귀가 나는 밀밭ʼ의 배경이자 그가 권총으로 자살한 곳이다. 이 그림은 정말 죽음을 암시하고 있을까? 길가 팻말에 “구름 낀 하늘 아래, 넓은 밀밭이 펼쳐져 있고, 나는 주저 없이 깊은 슬픔과 고독을 표현했다.”라고 적혀있다. 반 고흐는 죽음에 이르기 전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그렇게 심정을 토로했다. 반 고흐는 물감을 살 수 없을 정도로궁핍했다. 그렇지만 그를 괴롭힌 것은 물질적 어려움이 아니라 작품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이었다. 그것이 그를 우울과 고독으로 내몰았다. “언젠가 카페에서 작품전을 열 방법을 찾을수 있을 거야!” 반 고흐의 꺼져가는 목소리가 귓전을 맴돈다.나는 묘지 밖 공터에 앉아 푸른 하늘과 끝없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정지된 듯 사방이 노랗게 물들어갔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누런 빛의 밀밭이 흔들거렸다. 저 멀리서고뇌하는 한 사내의 모습이 어렴풋 보였다. 그는 오른쪽 귀가잘린 채 붕대를 감고 있었고, 닳아빠진 붓으로 캔버스를 하염없이 덧칠하고 있었다. 잿빛 구름이 몰려오면서 황금색 들판을 나는 까마귀 떼 울음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열댓 마리의까마귀들이 캔버스 속으로 날아들었다.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어.” 이어서 정적을 깨는 한발의 총성이 울렸다. 반고흐의 운명을 알고 있다는 듯 거센 바람이 묘지 주변에서 휘몰아쳤다.반 고흐가 잠든 오베르 공동묘지는 밀밭 중앙의 한 구역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무덤은 입구의 왼쪽 담장 아래 놓였다.‘빈센트 반 고흐, 여기 잠들다.ʼ 어떤 수식도 없는 비문이담백하게 보였다. 반 고흐는 테오, 베르나르, 탕귀영감, 가셰 의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오베르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해 1890년 8월 테오는 베르나르의 도움으로 몽마르트르 자신의 집에서 반 고흐 추모전을 열었다. 테오는 형이 자기와 돈 문제로 언쟁 후 자살했다며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 역시 이듬해 형의 뒤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테오의 유해는 반 고흐의 서간집 ‘영혼의 편지ʼ가 출간된 1914년 형의 무덤 옆에 안치되었다. 두 형제의 사랑은 죽어서도 뗄 수없었다. 그들의 무덤은 담쟁이덩굴로 엉켜있었다. 나는 어두운 석회암 비석과 담쟁이덩굴 사이에 개양귀비 한 송이를 올려놓았다.오늘 날 반 고흐는 대중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로 인식되고,그의 그림은 경매시장에서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다. 반 고흐사후에 봄날이 온 것인가! 나란히 누운 반 고흐와 테오의 무덤을 보며 덧없는 세월에 격세지감과 인생무상의 회한이 몰려왔다. 난 묘지 밖 공터를 배회하다가 색소폰을 꺼내들었다.불현 듯 ‘봄날은 간다ʼ의 멜로디가 떠올랐다. “새파란 꽃잎이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 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글 | 박형섭 부산대 불문과 교수, 색소포니스트
    • 월간색소폰
    2018-01-01
  • 정통을 기반으로 울리는 깨끗한 선율 '색소포니스트 최정환'
    (월간색소폰)박세정 기자= MBC관현악단 수석 연주자로서 40년간 방송연주를 하며 음악인생을 우직하게 걸어온 색소포니스트 최정환. 그는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2002년 월드컵 등 한국의 영광스러운 무대에 함께 기록된 산증인이다. 꾸준히 연주를 거듭했던 50여 년, 더욱 맑아지는 색소폰 음색은 그만의 속삭이듯 다정한 선율을 만들어냈다. 후배들에게는 그의 따뜻한 음색처럼 인간적인 면모와 정통을 지켜내 귀감이 되는 연주인으로서 찬사를 받는다. 배려하고 베푸는 행복에 살아가는 그는 아직까지도 순수한 색소폰 선율을 간직한다. '음악을 전공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중학교 2학년 때 밴드부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했습니다. 어린 제 눈으로는 음악선생님이 특히 멋지고 여유로워 보여 진로를 정한 것이었죠. 대구고등학교에 재학하며 고등학교 2학년 때 남산의 서울시립교향악단 클라리넷 연주자에게 레슨을 받았습니다. 당시 거주지였던 대구에서 밤에만 이동하는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을 왕복했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금성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일과였어요. 3개월이 지나니 피로감에 코피가 멎지를 않아 결국 친구들과 함께 용산에서 자취하며 레슨을 받았습니다. 이후 경희대학교 관악부가 우수하다는 정보를 듣고 1964년에 입학을 했습니다.'색소폰을 접하게 된 시점을 회상하신다면?'육군사관학교 군악대에 입대하며 색소폰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클라리넷보다 표현이 다양하고 밴딩을 활용할 수 있으며 사람의 목소리와 비슷한 색소폰에 매료되었죠. 제대 후에는 아르바이트 겸 미8군 하우스 캄보밴드에서 활동했는데 ‘로라(Laura)’를 배우면서 악기로 우는 소리를 표현하는 방법을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밤에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다섯 시간 가량 연습을 했죠. 열심히 하다 보니 선배가 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소개해주는 등 길이 자연스레 열렸습니다. '미8군 캄보밴드에서 외국인 뮤지션들과 활동하던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60년대 후반이었는데, 얼음을 깨고 빨래하던 추억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소위 ‘도나스판’이라고 불리는 EP(Extended Play, 확장재생 음반)에 1센트를 넣으면 음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EP에 녹음된 음악을 들으며 ‘해변의 길손’, ‘대니보이’, ‘테이크 파이브’ 등 다양한 곡을 연주를 했고 표현법을 습득했습니다. ‘해변의 길손’ 같은 경우 밴딩과 드롭이 심한 곡인데, 고민을 거듭해보니 해변의 파도를 밴딩으로 형상화한 것이라 생각됩니다.밴드에서 팝송 등 평소 접하지 않았던 음악을 연주하다 보니 밤업소에서 악단 생활을 할 때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밤업소 악단장은 연주자들이 곡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악보를 가져가 버렸는데, 덕분에 악보를 빨리 외울 수 있었습니다. 저희 악단은 특별하게 마지막 무대에서 모든 조명을 소등한 채로 의자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색소폰 연주를 했습니다. 당시 그곳에서는 일주일 단위로 악단을 교체했었는데, 저희는 7년간 초청하더군요. 매주 다른 곡을 외워서 연주한 덕분에 악보집에 수록된 1001개의 곡 중, 300곡을 외웠습니다. '악단 생활을 하시며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더 들려주세요.'색소포니스트 길옥윤 선생님이 만든 보난자 악단, 엄수성 악단 등에 여러악단에 입단하여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했습니다. 엄수성 악단에서 활동했던 주요 무대 중에 무교동의 5성급 서린호텔에서는 사장님이 바뀌어도 늘저희를 불러주셨습니다. 악단에서 연주 실력을 인정받아 29세에는 TBC라디오 김인배 악단으로 방송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방송국 MBC관현악단 생활을 했지요. 일정이 바빠 하루에도 방송, 밤업소 등 다양한 스케줄을 소화했습니다. 워커힐탑, 서린호텔, 대영관호텔 등 일본 관광객을 위해 연주도 많이 했습니다. '故황천수 선생님과는 서로 어떤 영향을 주는 사이였나요?'황천수 씨는 1964년부터 함께 활동한 동기입니다. 만리동에서 자주 음주를 즐겼으며, 그의 연주법을 어깨너머로 배우며 음악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훌륭한 그의 연주법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음악스타일을 좋아하냐고 묻자, ‘무드음악’을 선호한다고 하더군요. 박자를 분할해서 연주하는 황천수 씨의 방법에 착안하여 저는 박자를 끌어서 연주하는 방식을 찾게 되었습니다. 2박자라면 2박자 반을 끌어 부드럽게 여음 처리를 하는 방법을 선택했죠. 이렇게 연주하면 듣는 사람은 소름이 돋습니다. 이후 저변에는 속삭이듯 부드러운 소리, 중간 소리는 맑게 내는 저만의 톤을 찾게 되었습니다.'현역에서 활동하시는 72세 최고령 방송연주인이며 MBC관현악단 수석 연주자입니다. 오래도록 연주할 수 있던 비결이 있나요?'실력이 특히 뛰어나기보다 출석률이 좋고 몸이 아플 때도 성실하게 출근하며, 타인에게 좋은 말을 하도록 노력한 덕분인 것 같습니다. 변함없이 충실하게 활동하려면 행동거지를 조심하라는 선배의 말을 굳게 믿고 실천하니 이제껏 트러블이 없었습니다. 평안하게 생활하고 타인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베풀었습니다.또한 연주하기 전에 과식을 하면 튜닝도 매끄럽지 않고 긴장 상태에서 무대의 강한 조명을 받으면 몸이 지쳐, 소식을 합니다. 대부분 베테랑 연주자는 무대에서 떨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어떤 무대든 실수 없이 잘 해내야한다는 생각에 매번 떨립니다. 건강관리를 위해 골프, 자전거,볼링 등 운동도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방송연주를 40년간 활동하시며 다양한 연주와 많은 무대를 경험하셨을것 같습니다.'방송에서는 클래식 전공자임에도 어린이 프로그램, 가곡, 재즈, 팝송, 타령, 신파극 등 처음 접하는 연주도 소화해야 합니다. ‘불효자는 웁니다’ 연주를 요청해오면 어린 시절 시장에서 보았던 옛날 약장수들을 상상하면서연주하곤 했습니다. 또한 피아노 악보를 건네며 색소폰 연주를 요청하고,알토색소폰 악보로 테너색소폰 연주를 하는 등 이조(移調)를 하는 경우가많습니다. 제 경우는 클라리넷 연주가 가능하기에 상황에 맞춰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병행하여 연주했습니다.방송활동을 하며 연주 뿐 아니라 많은 무대에도 설 수 있었죠. 1980년대 MBC ‘주부가요열창’ 프로그램에서 이상벽 씨와 관현악단이 LA에 방문하여 연주한 적이 있었으며 사할린 교포 위문공연, 90년대에는 서독 교포 위문공연, 1999년 한·중 친선 가요제, 201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진행된 한·독 수교 130주년 기념 이미자 특별공연, 88올림픽, 장애인올림픽 개막식과 폐회식 연주를 했습니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88올림픽, 장애인 올림픽 개막식과 폐회식 연주 등 역사적인 무대에 기록된 산증인이십니다. 웅장한 무대에섰던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각 나라 선수단의 입장과 퇴장, 시상 시 시립교향국악단, 시립교향악단,MBC관현악단, 대합창단 등이 함께 연주를 했습니다. 애국가와 각 나라의 국가를 연주했던 그 웅장한 무대에서의 전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장익환 단장님의 지휘 하에 MBC관현악단 86인조가 함께 협연하였고 색소폰 연주자는 저와 김수열, 임병국, 유용준, 김삼룡 씨 총 5인이 함께했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연주했던 기억이 나네요. '가수 남진, 나훈아, 이미자, 주현미 등의 정기콘서트 연주도 활발하신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다면?'하와이에 방문하여 진행된 공연 ‘나훈아 콘서트’가 기억에 남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가수 나훈아, 김정택 단장, 그리고 저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어 영광스러웠죠. 나훈아 씨가 공연 후에 리무진을 빌려 15여 명의 연주자들을 관광도 시켜주어 좋은 추억도 만들었습니다.나훈아 씨와는 20년 넘도록 함께 공연을 했는데, 퍼포먼스를 중시하는 연주자라 흥겨울 때 연주자들을 의자 위로 올라가라는 등 갑작스러운 요청을 합니다. 어떤 날은 연주자 한 명이 의자에 올라가다 넘어지며 다른 단원들을 붙잡고 쓰러져 간주에 연주를 하나도 못했었죠. 비슷한 예로 홍제동 힐튼호텔에서 연주했을 때는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무대효과로 비누방울이 나왔는데 SBS관현악단 김정택 악단장이 넘어져 우스웠던 기억이 있어요. '동호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소리를 작게 내는 롱톤 연습과 혀를 잘 사용하는 방법, 호흡하기 전 암부슈어에 신경을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6개월 정도는 훈련해야 하니 쉽지 않습니다. 호흡하기 전 혀를 가볍게 사용하여 여음처리가 중요하며, 첫 박자는 꼭 맞춰야 합니다. 첫 소리는 가볍게 혀를 대는 것이 좋습니다. 편안한 대화를 한다는 생각으로 정답게 말하듯 작고 예쁜 소리를 내기 추천합니다. 큰 소리로 연주하는 이들은 작은 소리를 내지 못하지만, 작은 볼륨을 자유자재로 낼 수 있다면 큰 소리도 수월하게 납니다. 원곡을 이해하셔야 감정표현이 잘 되기 때문에 최소한 3번 이상 듣고, 가사도 마찬가지로 3번은 정독하셔야 합니다. 기차가 레일 위를 가듯 기본적인 연주법을 습득하신 후 과하지 않은 적절한 애드리브를 하시는 것이 듣기도 편하고 실력향상에도 좋습니다. 또한 리드와 피스의 조합을 잘 찾으셔야 합니다. 오프닝이 두꺼우면 얇은 리드를, 좁다면 두꺼운 리드를 사용하시고 형편껏 좋은 악기를 구입하시기를 추천합니다.'대한민국색소폰연주자협회(KSA, Korean SaxophonistAssociation) 자문 위원으로서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요?'색소폰계의 발전을 위하여 임원진들과 회의를 하고 도움을 줍니다. 찰리박색소포니스트가 KSA설립을 추진하였고, 저와 친구이자 원로 색소포니스트인 황천수, 강승용 씨에게 연락을 해오며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초대멤버인 김미영, 이경환 씨 등 다양한 연주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협회에서는 색소폰을 연주하는 분들에게 화합과 토론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며, 지난해 8월에는 여의도 한강공원 물빛무대에서 시민과 동호인을 위한 무료공연을 진행했습니다. 올봄 5월에는 강남구민회관에서도 공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색소폰 계에 어떤 도움을 주고 싶으신지, 그리고 어떤 연주자로 남고 싶으신지요.'깨끗한 연주자로 남고 싶습니다. 연주도 깔끔하고 생활도 깨끗했던 색소포니스트 최정환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색소폰을 사랑하는 이들의 활동에 관심이 높아 가르침을 원하는 분들에게 기초부터 기꺼이 알려드릴 마음이 있으며, 현재 전국 동호회를 방문하여 레슨을 하고 있습니다. 글. 박세정 기자suyeo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1-01
  • 정통을 기반으로 울리는 깨끗한 선율 '색소포니스트 최정환'
    (월간색소폰)박세정 기자= MBC관현악단 수석 연주자로서 40년간 방송연주를 하며 음악인생을 우직하게 걸어온 색소포니스트 최정환. 그는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 2002년 월드컵 등 한국의 영광스러운 무대에 함께 기록된 산증인이다. 꾸준히 연주를 거듭했던 50여 년, 더욱 맑아지는 색소폰 음색은 그만의 속삭이듯 다정한 선율을 만들어냈다. 후배들에게는 그의 따뜻한 음색처럼 인간적인 면모와 정통을 지켜내 귀감이 되는 연주인으로서 찬사를 받는다. 배려하고 베푸는 행복에 살아가는 그는 아직까지도 순수한 색소폰 선율을 간직한다. '음악을 전공하시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중학교 2학년 때 밴드부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했습니다. 어린 제 눈으로는 음악선생님이 특히 멋지고 여유로워 보여 진로를 정한 것이었죠. 대구고등학교에 재학하며 고등학교 2학년 때 남산의 서울시립교향악단 클라리넷 연주자에게 레슨을 받았습니다. 당시 거주지였던 대구에서 밤에만 이동하는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을 왕복했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금성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일과였어요. 3개월이 지나니 피로감에 코피가 멎지를 않아 결국 친구들과 함께 용산에서 자취하며 레슨을 받았습니다. 이후 경희대학교 관악부가 우수하다는 정보를 듣고 1964년에 입학을 했습니다.'색소폰을 접하게 된 시점을 회상하신다면?'육군사관학교 군악대에 입대하며 색소폰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클라리넷보다 표현이 다양하고 밴딩을 활용할 수 있으며 사람의 목소리와 비슷한 색소폰에 매료되었죠. 제대 후에는 아르바이트 겸 미8군 하우스 캄보밴드에서 활동했는데 ‘로라(Laura)’를 배우면서 악기로 우는 소리를 표현하는 방법을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밤에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다섯 시간 가량 연습을 했죠. 열심히 하다 보니 선배가 직업 활동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소개해주는 등 길이 자연스레 열렸습니다. '미8군 캄보밴드에서 외국인 뮤지션들과 활동하던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60년대 후반이었는데, 얼음을 깨고 빨래하던 추억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소위 ‘도나스판’이라고 불리는 EP(Extended Play, 확장재생 음반)에 1센트를 넣으면 음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EP에 녹음된 음악을 들으며 ‘해변의 길손’, ‘대니보이’, ‘테이크 파이브’ 등 다양한 곡을 연주를 했고 표현법을 습득했습니다. ‘해변의 길손’ 같은 경우 밴딩과 드롭이 심한 곡인데, 고민을 거듭해보니 해변의 파도를 밴딩으로 형상화한 것이라 생각됩니다.밴드에서 팝송 등 평소 접하지 않았던 음악을 연주하다 보니 밤업소에서 악단 생활을 할 때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밤업소 악단장은 연주자들이 곡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악보를 가져가 버렸는데, 덕분에 악보를 빨리 외울 수 있었습니다. 저희 악단은 특별하게 마지막 무대에서 모든 조명을 소등한 채로 의자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색소폰 연주를 했습니다. 당시 그곳에서는 일주일 단위로 악단을 교체했었는데, 저희는 7년간 초청하더군요. 매주 다른 곡을 외워서 연주한 덕분에 악보집에 수록된 1001개의 곡 중, 300곡을 외웠습니다. '악단 생활을 하시며 기억나는 에피소드를 더 들려주세요.'색소포니스트 길옥윤 선생님이 만든 보난자 악단, 엄수성 악단 등에 여러악단에 입단하여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했습니다. 엄수성 악단에서 활동했던 주요 무대 중에 무교동의 5성급 서린호텔에서는 사장님이 바뀌어도 늘저희를 불러주셨습니다. 악단에서 연주 실력을 인정받아 29세에는 TBC라디오 김인배 악단으로 방송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방송국 MBC관현악단 생활을 했지요. 일정이 바빠 하루에도 방송, 밤업소 등 다양한 스케줄을 소화했습니다. 워커힐탑, 서린호텔, 대영관호텔 등 일본 관광객을 위해 연주도 많이 했습니다. '故황천수 선생님과는 서로 어떤 영향을 주는 사이였나요?'황천수 씨는 1964년부터 함께 활동한 동기입니다. 만리동에서 자주 음주를 즐겼으며, 그의 연주법을 어깨너머로 배우며 음악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훌륭한 그의 연주법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음악스타일을 좋아하냐고 묻자, ‘무드음악’을 선호한다고 하더군요. 박자를 분할해서 연주하는 황천수 씨의 방법에 착안하여 저는 박자를 끌어서 연주하는 방식을 찾게 되었습니다. 2박자라면 2박자 반을 끌어 부드럽게 여음 처리를 하는 방법을 선택했죠. 이렇게 연주하면 듣는 사람은 소름이 돋습니다. 이후 저변에는 속삭이듯 부드러운 소리, 중간 소리는 맑게 내는 저만의 톤을 찾게 되었습니다.'현역에서 활동하시는 72세 최고령 방송연주인이며 MBC관현악단 수석 연주자입니다. 오래도록 연주할 수 있던 비결이 있나요?'실력이 특히 뛰어나기보다 출석률이 좋고 몸이 아플 때도 성실하게 출근하며, 타인에게 좋은 말을 하도록 노력한 덕분인 것 같습니다. 변함없이 충실하게 활동하려면 행동거지를 조심하라는 선배의 말을 굳게 믿고 실천하니 이제껏 트러블이 없었습니다. 평안하게 생활하고 타인을 위한다는 생각으로 베풀었습니다.또한 연주하기 전에 과식을 하면 튜닝도 매끄럽지 않고 긴장 상태에서 무대의 강한 조명을 받으면 몸이 지쳐, 소식을 합니다. 대부분 베테랑 연주자는 무대에서 떨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어떤 무대든 실수 없이 잘 해내야한다는 생각에 매번 떨립니다. 건강관리를 위해 골프, 자전거,볼링 등 운동도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방송연주를 40년간 활동하시며 다양한 연주와 많은 무대를 경험하셨을것 같습니다.'방송에서는 클래식 전공자임에도 어린이 프로그램, 가곡, 재즈, 팝송, 타령, 신파극 등 처음 접하는 연주도 소화해야 합니다. ‘불효자는 웁니다’ 연주를 요청해오면 어린 시절 시장에서 보았던 옛날 약장수들을 상상하면서연주하곤 했습니다. 또한 피아노 악보를 건네며 색소폰 연주를 요청하고,알토색소폰 악보로 테너색소폰 연주를 하는 등 이조(移調)를 하는 경우가많습니다. 제 경우는 클라리넷 연주가 가능하기에 상황에 맞춰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병행하여 연주했습니다.방송활동을 하며 연주 뿐 아니라 많은 무대에도 설 수 있었죠. 1980년대 MBC ‘주부가요열창’ 프로그램에서 이상벽 씨와 관현악단이 LA에 방문하여 연주한 적이 있었으며 사할린 교포 위문공연, 90년대에는 서독 교포 위문공연, 1999년 한·중 친선 가요제, 201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진행된 한·독 수교 130주년 기념 이미자 특별공연, 88올림픽, 장애인올림픽 개막식과 폐회식 연주를 했습니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88올림픽, 장애인 올림픽 개막식과 폐회식 연주 등 역사적인 무대에 기록된 산증인이십니다. 웅장한 무대에섰던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각 나라 선수단의 입장과 퇴장, 시상 시 시립교향국악단, 시립교향악단,MBC관현악단, 대합창단 등이 함께 연주를 했습니다. 애국가와 각 나라의 국가를 연주했던 그 웅장한 무대에서의 전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장익환 단장님의 지휘 하에 MBC관현악단 86인조가 함께 협연하였고 색소폰 연주자는 저와 김수열, 임병국, 유용준, 김삼룡 씨 총 5인이 함께했습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연주했던 기억이 나네요. '가수 남진, 나훈아, 이미자, 주현미 등의 정기콘서트 연주도 활발하신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공연이 있다면?'하와이에 방문하여 진행된 공연 ‘나훈아 콘서트’가 기억에 남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가수 나훈아, 김정택 단장, 그리고 저에게 꽃목걸이를 걸어주어 영광스러웠죠. 나훈아 씨가 공연 후에 리무진을 빌려 15여 명의 연주자들을 관광도 시켜주어 좋은 추억도 만들었습니다.나훈아 씨와는 20년 넘도록 함께 공연을 했는데, 퍼포먼스를 중시하는 연주자라 흥겨울 때 연주자들을 의자 위로 올라가라는 등 갑작스러운 요청을 합니다. 어떤 날은 연주자 한 명이 의자에 올라가다 넘어지며 다른 단원들을 붙잡고 쓰러져 간주에 연주를 하나도 못했었죠. 비슷한 예로 홍제동 힐튼호텔에서 연주했을 때는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무대효과로 비누방울이 나왔는데 SBS관현악단 김정택 악단장이 넘어져 우스웠던 기억이 있어요. '동호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소리를 작게 내는 롱톤 연습과 혀를 잘 사용하는 방법, 호흡하기 전 암부슈어에 신경을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6개월 정도는 훈련해야 하니 쉽지 않습니다. 호흡하기 전 혀를 가볍게 사용하여 여음처리가 중요하며, 첫 박자는 꼭 맞춰야 합니다. 첫 소리는 가볍게 혀를 대는 것이 좋습니다. 편안한 대화를 한다는 생각으로 정답게 말하듯 작고 예쁜 소리를 내기 추천합니다. 큰 소리로 연주하는 이들은 작은 소리를 내지 못하지만, 작은 볼륨을 자유자재로 낼 수 있다면 큰 소리도 수월하게 납니다. 원곡을 이해하셔야 감정표현이 잘 되기 때문에 최소한 3번 이상 듣고, 가사도 마찬가지로 3번은 정독하셔야 합니다. 기차가 레일 위를 가듯 기본적인 연주법을 습득하신 후 과하지 않은 적절한 애드리브를 하시는 것이 듣기도 편하고 실력향상에도 좋습니다. 또한 리드와 피스의 조합을 잘 찾으셔야 합니다. 오프닝이 두꺼우면 얇은 리드를, 좁다면 두꺼운 리드를 사용하시고 형편껏 좋은 악기를 구입하시기를 추천합니다.'대한민국색소폰연주자협회(KSA, Korean SaxophonistAssociation) 자문 위원으로서 어떤 활동을 하시는지요?'색소폰계의 발전을 위하여 임원진들과 회의를 하고 도움을 줍니다. 찰리박색소포니스트가 KSA설립을 추진하였고, 저와 친구이자 원로 색소포니스트인 황천수, 강승용 씨에게 연락을 해오며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초대멤버인 김미영, 이경환 씨 등 다양한 연주자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협회에서는 색소폰을 연주하는 분들에게 화합과 토론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며, 지난해 8월에는 여의도 한강공원 물빛무대에서 시민과 동호인을 위한 무료공연을 진행했습니다. 올봄 5월에는 강남구민회관에서도 공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색소폰 계에 어떤 도움을 주고 싶으신지, 그리고 어떤 연주자로 남고 싶으신지요.'깨끗한 연주자로 남고 싶습니다. 연주도 깔끔하고 생활도 깨끗했던 색소포니스트 최정환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색소폰을 사랑하는 이들의 활동에 관심이 높아 가르침을 원하는 분들에게 기초부터 기꺼이 알려드릴 마음이 있으며, 현재 전국 동호회를 방문하여 레슨을 하고 있습니다. 글. 박세정 기자suyeo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1-01
  • 중년의 화려한 색소폰 찬사, SM색소폰앙상블
    앙상블의 매력 전파하기 위해 SM색소폰앙상블을 창단한 색소포니스트 손민은, 색소폰에 대한 열정으로 결속한 중장년층 단원들과 조화로운 선율을 만들어나간다. 진심으로 색소폰을 사랑하는 그들은 연주회를 목표로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1년간 하모니를 맞춰나갔다. 손민 원장과 앙상블을 처음 접한 10여 명의 단원들이 결속을 다지며 우여곡절 끝에 개최한 ‘2017년 SM색소폰앙상블창단연주회ʼ. 색소폰에 찬사를 보내는 그들 인생의 가장 값진 순간이면 언제나 색소폰이 함께했다.이번 창단연주회는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으며, 앞으로도 그들의 연주생활은 더욱 깊이 있는 찬란함으로 빛날 것이다. SM색소폰앙상블(이하 SM색소폰)을 창단하고 단원들을 지도하는 색소포니스트 손민은 몇 년 전 성남아트센터에서 윈드오케스트라 앙상블을 지도한 적이 있다. 당시 정확한 박자를 지켜 화음, 텅잉, 호흡을 맞춰갈 때 특별한 즐거움을 주는 앙상블에 흥미를 느낀 그는 색소폰앙상블 창단을 결심하고,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연습하는 회원들에게 1년간 연주회를 목표로연습을 제안하고 앙상블 창단을 추진한다. 그렇게 창단된 SM색소폰은 지난 해 12월, ‘SM색소폰앙상블 창단연주회’를 개최하여 1년간 갈고 닦은 실력을 관객에게 선보였다. '서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발전한 앙상블'10여 년 동안 색소폰을 연주한 이종석 단장은 평소 색소폰을 연주하는 동호인에게 앙상블은 필수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SM색소폰에 입단하며 도전해보고 싶었던 앙상블 연주의 기회가 주어졌다. 독주 시에 특기를 드러내고 자기표현을 중시하는 것과 달리, 단원들의 소리와 조화를 이루고 서로 화음을 맞추는 앙상블. 처음 접한 앙상블은 수월하지 않았지만 큰 흥미를 느꼈다.강세환 단원은 앙상블이 색소폰을 진정 즐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소리로 화음을 맞춰 이해한 곡이 연주를 통해 가슴속에 완전하게 녹아들 때면, 마치 기도할 때처럼 마음이 깨끗해진다고 한다. SM색소폰 단원들은 서로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자신의 소리를 맞춰가는 앙상블 연주를 통해 서로 배려하며 실력을 발전해나갔다. '배려를 바탕으로 끈끈하게 결속된 단원들'SM색소폰 손민 원장은 단원들의 연주 방식을 존중하며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이종석 단장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단원들을 개별 맞춤형으로 지도하는 방법과 스스로 실력이 향상되게끔 독려하는 그의 레슨 방식이 만족스럽다. 나머지 단원들도 젊은 나이임에도 연습하는 과정이 힘들지않게 유연하게 리드한다며 입을 모았다. 손민 원장의 완곡하고 유머스러운 표현으로 1년간 단 한명의 낙오자 없이 앙상블을 연습할 수 있었다. 단원들은 정기연습일의 출석률도 거의 100%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1년간 하나의 목표를 향한 결실, 창단연주회'SM색소폰은 창단 때부터 1년 후에 갖게 될 연주회를 목표로삼았다. 공연에 예정된 레퍼토리를 선정하여 1년간 앙상블 공연 준비를 해온 것이다. 좀 더 자신감 있는 연주를 위해 창단 후7~8개월 지났을 때부터 순차적으로 수서역 SRT, 지하철 3호선 대청역과 수서역에서 버스킹을 가졌다. 연습실이 아닌,3~40여 명 관중 앞에서의 연주는 당황스러웠지만 반복적으로 연습하던 레퍼토리를 바탕으로 실력이 발휘되었고 이 경험은 정기연주회에서의 자신감으로 발현된다. 강세환 단원은 수서역에서의 버스킹부터 앙상블 실력이 늘었음을 뚜렷하게 느꼈다 '아마추어 앙상블의 1년만의 비상'김종근 단원은 생애 처음 나비 넥타이를 메고 무대에 섰던 창단연주회가 잊혀지지 않는다. 예상보다 많이 찾아온 관중 덕분에 긴장감은 더해졌고 혹여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떨림의연속이었다. 다행히 공연 시작부터 마지막 앵콜곡까지 단원들과 한마음으로 무사히 연주를 끝마칠 수 있었다.첫 번째 공연이라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추후 더 멋진 무대를 진행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겼다. 손민 지휘자의 훌륭한 지도와 단원들과의 화합 덕분에 이루어낸 결과인것이다. 김종근 단원은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라며 벌써 두 번째 무대가 기다려진다고 전했다. 그에게는 원장님의 지도 하에 동료들과 화합을 통해 이룬 이 공연이 너무도값지다.이종석 단장은 가족들과 지인들을 초청하여 그동안 공개하지않았던 색다른 매력을 선보였다. 동창회에서 색소폰 연주를 하는 친구의 모습에 악기를 시작했던 그는 이번 연주회를 통해 지인들에게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강세환 단원은 색소폰을 연주하는 동호인 3인과 전문 트롬본연주자를 이 공연에 초청했다. 이들은 SM앙상블의 수준 높은공연에 놀랐고, 트롬본 연주자는 앙상블 멤버로 활동하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창단연주회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SM앙상블에 공연 이후 원거리임에도 입단하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했다. '준비된 무대를 선보이는 열정적인 아마추어 앙상블'김장순 총무는 10년간 취미로 골프를 즐기며 시삽으로도 활동할 만큼 열정적이었지만, 영국유학을 떠난 딸의 빈자리에 허전함과 공허함이 더해져 그간 즐겨왔던 골프에도 흥미를 잃었었다 한다. 그런던 중 ‘3만불 시대 시니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ʼ에 대한 칼럼을 읽게 되었고, 길을 지나다 눈에 띈 색소폰학원에서 상담 받고 바로 악기를 구매하여 연주한 10년 세월. 당시 만난 이종석 단장은 이후 김장순 총무와 색소폰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타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색소폰 연주가 즐겁다는 김장순 총무.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며 아직도 실력이 만족스럽지 않아 기존의 연주 영상을 보면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한다. 청음능력이 향상되는 만큼 부족한 실력이 여실히느껴진다는 그는, 연주를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색소폰에 대한 열정이 뜨겁다. 단원들은 단장과 총무의 뜻에 따라 아마추어임에도 수준 높은 공연을 선보이기 위해서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중년의 멋진 취미, 색소폰'이종석 단장은 색소폰을 연주하는 것은 건전한 힐링 방법의 하나라고 말한다. 김장순 총무 역시 스트레스가 쌓일 때 연주하면 감정이 해소된다고 한다.강세환 단원에게 색소폰은 심장을 울리는 리듬으로 다가온다.신문 칼럼에서 중년남성이 색소폰, 살사댄스, 미국의 모터사이클 할리데이비슨(HarleyDavidson)에 매료되었다는 내용을보게 된다. 살사댄스의 리듬과 사이클의 시동음, 그리고 서브톤 섞인 색소폰 음색은 심장 박동과 가까운 리듬이라는 것. 인생을 돌아보게 된 시점에서 인간 본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중년의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다.강세환 단원이 특히 기억에 남는 무대는, 연주를 배운지 3년차 딸의 결혼식 연회장에서 연주한 ‘영원한 사랑’이다. 지금 들어본다면 실력의 부족함을 느끼지만, “연주를 해준 것 자체가 큰의미”라는 딸의 말이 뭉클한 기억으로 남았다. 인생의 후반부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 시작한 색소폰. 원할 때 언제든 함께 할 수 있는 색소폰은 이제 좋은 친구로 느껴진다. '앙상블의 다양한 성장 방향을 제시하는 SM색소폰'김장순 총무는 창단연주회에 객석을 채우고도 넘칠 만큼 많은 관객이 찾아와 SM색소폰에 대한 자긍심과 소속감이 더 강해졌다. 내실을 기른 후에 색소폰 음색만으로도 아름다운 화음을 보여주는 아카펠라에 도전하고 싶다는 그. 프로 연주자처럼 무선 핀마이크를 장착하고 객석에서 연주자들이 등장하는 등 이색적인 퍼포먼스와, 색소폰 선율로 관중에게 기쁨을 선사할 수있는 팀으로 이끌고 싶다.강세환 단원도 4중창의 순수한 색소폰 연주가 악기의 진정한 매력을 발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종석 단장은 SM색소폰이 지속적으로 후학을 양성하기 원하며 체계가 잡힌 교육기관으로 발전시키고 싶은 바람이 있다.손민 원장의 추진력과 기획력, 단원들과의 결속, 그리고 색소폰에 대한 꾸준한 열정으로 매년 발전하는 SM색소폰의 행보가 기대된다. 글 | 박세정 기자 suyeon@keri.or.kr
    • 월간색소폰
    • Focus
    2018-01-01
  • 중년의 화려한 색소폰 찬사, SM색소폰앙상블
    앙상블의 매력 전파하기 위해 SM색소폰앙상블을 창단한 색소포니스트 손민은, 색소폰에 대한 열정으로 결속한 중장년층 단원들과 조화로운 선율을 만들어나간다. 진심으로 색소폰을 사랑하는 그들은 연주회를 목표로 서로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1년간 하모니를 맞춰나갔다. 손민 원장과 앙상블을 처음 접한 10여 명의 단원들이 결속을 다지며 우여곡절 끝에 개최한 ‘2017년 SM색소폰앙상블창단연주회ʼ. 색소폰에 찬사를 보내는 그들 인생의 가장 값진 순간이면 언제나 색소폰이 함께했다.이번 창단연주회는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으며, 앞으로도 그들의 연주생활은 더욱 깊이 있는 찬란함으로 빛날 것이다. SM색소폰앙상블(이하 SM색소폰)을 창단하고 단원들을 지도하는 색소포니스트 손민은 몇 년 전 성남아트센터에서 윈드오케스트라 앙상블을 지도한 적이 있다. 당시 정확한 박자를 지켜 화음, 텅잉, 호흡을 맞춰갈 때 특별한 즐거움을 주는 앙상블에 흥미를 느낀 그는 색소폰앙상블 창단을 결심하고,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연습하는 회원들에게 1년간 연주회를 목표로연습을 제안하고 앙상블 창단을 추진한다. 그렇게 창단된 SM색소폰은 지난 해 12월, ‘SM색소폰앙상블 창단연주회’를 개최하여 1년간 갈고 닦은 실력을 관객에게 선보였다. '서로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발전한 앙상블'10여 년 동안 색소폰을 연주한 이종석 단장은 평소 색소폰을 연주하는 동호인에게 앙상블은 필수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SM색소폰에 입단하며 도전해보고 싶었던 앙상블 연주의 기회가 주어졌다. 독주 시에 특기를 드러내고 자기표현을 중시하는 것과 달리, 단원들의 소리와 조화를 이루고 서로 화음을 맞추는 앙상블. 처음 접한 앙상블은 수월하지 않았지만 큰 흥미를 느꼈다.강세환 단원은 앙상블이 색소폰을 진정 즐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소리로 화음을 맞춰 이해한 곡이 연주를 통해 가슴속에 완전하게 녹아들 때면, 마치 기도할 때처럼 마음이 깨끗해진다고 한다. SM색소폰 단원들은 서로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자신의 소리를 맞춰가는 앙상블 연주를 통해 서로 배려하며 실력을 발전해나갔다. '배려를 바탕으로 끈끈하게 결속된 단원들'SM색소폰 손민 원장은 단원들의 연주 방식을 존중하며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이종석 단장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단원들을 개별 맞춤형으로 지도하는 방법과 스스로 실력이 향상되게끔 독려하는 그의 레슨 방식이 만족스럽다. 나머지 단원들도 젊은 나이임에도 연습하는 과정이 힘들지않게 유연하게 리드한다며 입을 모았다. 손민 원장의 완곡하고 유머스러운 표현으로 1년간 단 한명의 낙오자 없이 앙상블을 연습할 수 있었다. 단원들은 정기연습일의 출석률도 거의 100%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1년간 하나의 목표를 향한 결실, 창단연주회'SM색소폰은 창단 때부터 1년 후에 갖게 될 연주회를 목표로삼았다. 공연에 예정된 레퍼토리를 선정하여 1년간 앙상블 공연 준비를 해온 것이다. 좀 더 자신감 있는 연주를 위해 창단 후7~8개월 지났을 때부터 순차적으로 수서역 SRT, 지하철 3호선 대청역과 수서역에서 버스킹을 가졌다. 연습실이 아닌,3~40여 명 관중 앞에서의 연주는 당황스러웠지만 반복적으로 연습하던 레퍼토리를 바탕으로 실력이 발휘되었고 이 경험은 정기연주회에서의 자신감으로 발현된다. 강세환 단원은 수서역에서의 버스킹부터 앙상블 실력이 늘었음을 뚜렷하게 느꼈다 '아마추어 앙상블의 1년만의 비상'김종근 단원은 생애 처음 나비 넥타이를 메고 무대에 섰던 창단연주회가 잊혀지지 않는다. 예상보다 많이 찾아온 관중 덕분에 긴장감은 더해졌고 혹여 실수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떨림의연속이었다. 다행히 공연 시작부터 마지막 앵콜곡까지 단원들과 한마음으로 무사히 연주를 끝마칠 수 있었다.첫 번째 공연이라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추후 더 멋진 무대를 진행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생겼다. 손민 지휘자의 훌륭한 지도와 단원들과의 화합 덕분에 이루어낸 결과인것이다. 김종근 단원은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라며 벌써 두 번째 무대가 기다려진다고 전했다. 그에게는 원장님의 지도 하에 동료들과 화합을 통해 이룬 이 공연이 너무도값지다.이종석 단장은 가족들과 지인들을 초청하여 그동안 공개하지않았던 색다른 매력을 선보였다. 동창회에서 색소폰 연주를 하는 친구의 모습에 악기를 시작했던 그는 이번 연주회를 통해 지인들에게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강세환 단원은 색소폰을 연주하는 동호인 3인과 전문 트롬본연주자를 이 공연에 초청했다. 이들은 SM앙상블의 수준 높은공연에 놀랐고, 트롬본 연주자는 앙상블 멤버로 활동하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창단연주회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SM앙상블에 공연 이후 원거리임에도 입단하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했다. '준비된 무대를 선보이는 열정적인 아마추어 앙상블'김장순 총무는 10년간 취미로 골프를 즐기며 시삽으로도 활동할 만큼 열정적이었지만, 영국유학을 떠난 딸의 빈자리에 허전함과 공허함이 더해져 그간 즐겨왔던 골프에도 흥미를 잃었었다 한다. 그런던 중 ‘3만불 시대 시니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ʼ에 대한 칼럼을 읽게 되었고, 길을 지나다 눈에 띈 색소폰학원에서 상담 받고 바로 악기를 구매하여 연주한 10년 세월. 당시 만난 이종석 단장은 이후 김장순 총무와 색소폰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타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색소폰 연주가 즐겁다는 김장순 총무.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며 아직도 실력이 만족스럽지 않아 기존의 연주 영상을 보면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한다. 청음능력이 향상되는 만큼 부족한 실력이 여실히느껴진다는 그는, 연주를 시작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색소폰에 대한 열정이 뜨겁다. 단원들은 단장과 총무의 뜻에 따라 아마추어임에도 수준 높은 공연을 선보이기 위해서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중년의 멋진 취미, 색소폰'이종석 단장은 색소폰을 연주하는 것은 건전한 힐링 방법의 하나라고 말한다. 김장순 총무 역시 스트레스가 쌓일 때 연주하면 감정이 해소된다고 한다.강세환 단원에게 색소폰은 심장을 울리는 리듬으로 다가온다.신문 칼럼에서 중년남성이 색소폰, 살사댄스, 미국의 모터사이클 할리데이비슨(HarleyDavidson)에 매료되었다는 내용을보게 된다. 살사댄스의 리듬과 사이클의 시동음, 그리고 서브톤 섞인 색소폰 음색은 심장 박동과 가까운 리듬이라는 것. 인생을 돌아보게 된 시점에서 인간 본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중년의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다.강세환 단원이 특히 기억에 남는 무대는, 연주를 배운지 3년차 딸의 결혼식 연회장에서 연주한 ‘영원한 사랑’이다. 지금 들어본다면 실력의 부족함을 느끼지만, “연주를 해준 것 자체가 큰의미”라는 딸의 말이 뭉클한 기억으로 남았다. 인생의 후반부 풍요로운 삶을 위하여 시작한 색소폰. 원할 때 언제든 함께 할 수 있는 색소폰은 이제 좋은 친구로 느껴진다. '앙상블의 다양한 성장 방향을 제시하는 SM색소폰'김장순 총무는 창단연주회에 객석을 채우고도 넘칠 만큼 많은 관객이 찾아와 SM색소폰에 대한 자긍심과 소속감이 더 강해졌다. 내실을 기른 후에 색소폰 음색만으로도 아름다운 화음을 보여주는 아카펠라에 도전하고 싶다는 그. 프로 연주자처럼 무선 핀마이크를 장착하고 객석에서 연주자들이 등장하는 등 이색적인 퍼포먼스와, 색소폰 선율로 관중에게 기쁨을 선사할 수있는 팀으로 이끌고 싶다.강세환 단원도 4중창의 순수한 색소폰 연주가 악기의 진정한 매력을 발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종석 단장은 SM색소폰이 지속적으로 후학을 양성하기 원하며 체계가 잡힌 교육기관으로 발전시키고 싶은 바람이 있다.손민 원장의 추진력과 기획력, 단원들과의 결속, 그리고 색소폰에 대한 꾸준한 열정으로 매년 발전하는 SM색소폰의 행보가 기대된다. 글 | 박세정 기자 suyeo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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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1-01
  • 연주 선율로 그려낸 감미로움, 색소포니스트 이병주
    (월간색소폰)박세정 기자= 학창시절부터 재즈를 사랑했던 이병주 색소포니스트는 드넓은 포용력으로 다양한 장르를 받아들여 그만의 자유롭고 감미로운 음악을 선사한다. 청중과 눈을 맞추고 소통하는 연주를 즐기는 소탈함, 자신의 연주 활동을 ‘여행’으로 빗대는 그는 유랑 시인이다. 부드러운 음색 저변에 짙게 내려앉는 카리스마, 색소폰 관을 통해 표출되는 그의 부드러운 선율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 감동으로 스며든다. 색소폰의 매력에 이끌린 사연을 들려주세요.고등학교 시절 드럼을 배우고 싶어 밴드부에 입단했습니다. 하지만 가입 후 찾아간 연습실에서 눈에 띈 것은 색소폰이었어요.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고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드럼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후였죠. 또한 밴드 활동을 하며 40대 이상의 고등학교 선배님들이 모여 결성한 실버재즈빅밴드(현 경남재즈오케스트라)의 연주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들은 색소폰 연주는 너무 멋져 감동적이었죠. 당시에는 선배님들의 옆자리에 악기만 들고 앉아 있어도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감격스럽게도 머지않아 그 바람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군악대 제대 후 실버재즈빅밴드와 제주도 공연에서 선배님들의 반주에 솔로 협연을 하게 되었죠. 그때의 감동은 아직까지도 생생합니다. 학창시절 주로 어떤 음반을 들으며 꿈을 키워오셨나요?실버재즈빅밴드 공연 이후 재즈에 관심이 생기기도 했고 색소폰 역사의 장르이기에 자연스럽게 재즈 음반을 많이 들었습니다. 또, 악기 모양도 Jazz의 앞 글자 ‘J’와 같잖아요?(웃음). 당시 무작정 레코드점에 방문해서 사장님께서 추천해주신 음반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 캔디 덜퍼, 데이브 코즈, 데이비드 샌본, 에릭 마리엔탈, 조슈아 레드먼, 리차드 엘리엇, 스파이로 자이라, 네이지(Najee), 빈센트 헤링(Vincent Herring)의 앨범을 일주일에 한 장씩은 꼭 구매했었습니다. 책장을 가득 메운 그 음반들은 아직도 저의 소중한 재산 1호입니다. 특히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의 앨범 ‘Winelight’를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음악이 너무 좋아 음반을 반복해서 듣다 결국 밤을 새고 학교에 갔던 적도 있습니다. 음악을 많이 듣는 것은 뮤지션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저는 제자들에게 연습하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은 습관적으로 음악을 듣기를 추천합니다. ‘와인과 기분 째지는 재즈’ 콘서트는 정기공연인지, 이 외에도 와인과 함께하는 콘서트를 다수 진행하는 이유가 있다면?개인적으로 와인을 좋아해서 와인 동호회의 모임에 참석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관계자 분들이 맛있는 제품도 추천해주시며 공연 때 와인을 지원해주시겠다는 제안을 받았어요. 이어 와인콘서트를 기획해보았는데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이후 제가 직접 와인을 구매해서 지속적으로 공연을 개최하게 되었고, 현재는 정기공연으로 자리 잡는 단계인 것 같습니다. 와인을 마시고 기분이 상기된 상태에서 음악을 감상하면 관객은 분위기와 연주에 더욱 심취할 수 있습니다. 평소 ‘파티’같은 공연을 추구하는데, 와인과 재즈는 ‘자유’라는 이미지와 느낌이 묘하게 닮았다고 생각합니다.재즈페스티벌, 재즈클럽, 오케스트라 협연 등 공연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각 공연장의 매력과 특히 좋아하는 무대가 있다면 그 이유는? 어떤 공연이든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무대마다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순위를 매기기 어렵습니다. 오케스트라 협연은 풍부하면서도 예민한 사운드에 푹 빠지게 되고, 클럽에서는 자유로운 공연을 할 수 있어 신이 납니다. 또한, 대학 선배가 운영하는 공연장 ‘골방’은 제가 1년에 2회 가량 방문하고 있습니다. 골방은 말 그대로 협소한 공연장인데, 관객 한분 한분과 모두 눈을 맞출 수 있어 좋습니다. 무대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색소폰을 부는 숨소리까지 들리죠. 모든 무대를 막론하고 여러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 행복합니다. ‘색소폰 연주자’는 복 받은 직업 같습니다.일본에서의 활동이 활발한데, 처음 공연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2004년에 부산 광안리의 작은 재즈클럽 자이언트 스텝에서 연주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나가키 타카시(Inagaki Takashi)라는 일본 기타리스트와 협연을 했습니다. 그 분은 후쿠오카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으로 일 년에 서너 번 부산을 찾곤 했었죠. 일본에서 함께 공연을 해보자는 그의 제안에 몇 달 뒤, 일본을 찾았습니다. 이후 저도 일 년에 서너 번 일본을 방문하여 공연을 통해 많은 연주자들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일본의 규슈(九州)가 서울보다 가까운 지역처럼 느껴집니다.가고시마(鹿兒島), 후쿠오카, 구마모토 등 일본의 다양한 지역에서 공연을 하시는데, 특히 인상 깊은 무대나 에피소드는? 5년 전 처음 방문한 가고시마에서의 기억이 인상 깊습니다. 그곳에서 공연을 하며 드러머 시게키 오쿠보(Shigeki Okubo)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국말을 능숙하게 구사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나라의 기타리스트 타미 킴(Tammy Kim)과 미국 유학시절 룸메이트였죠. 당시 그의 녹음실 침팬지 스튜디오(Chimpanzee Studio)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연주자들의 연주력이 정말 좋았고, 호흡도 잘 맞았습니다. 앨범을 내자는 저의 제안을 그들이 흔쾌히 받아들여 1집 앨범 ‘어쿠스틱 오션(Acoustic Ocean)’을 발매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서로 왕래하며 자주 공연, 녹음을 하고 있습니다. 음악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하는 시기가 있다면?2008년에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프랑스 유학을 하려 했으나 당장 떠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고민하던 중,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북해재즈축제(North Sea Jazz Festival)’를 관람하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CD로만 들었던 뮤지션들이 눈앞에서 연주하는 황홀한 모습을 즐겼죠. 공연 후 방문한 로테르담 호텔 근처 재즈클럽에서의 트럼피터 브라이언 린치(Brian Lynch)와 밴드의 연주 또한 대단했습니다. 그곳에서 어떤 여성분을 우연히 만났죠. 비어 있던 제 앞자리에 앉은 그녀가 무대에서 연주자들을 이끌며 색소폰을 불었습니다. 그 정도로 연주를 잘하는 여성 연주자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리로 돌아온 그녀에게 용기를 내어 말을 걸고 한참 대화를 나누었죠. 그녀는 색소폰 연주자 니콜 조(Nicole Jo)였으며, 저도 한국의 색소포니스트라고 이야기하자 악기를 가져 오지 않았냐고 물어왔습니다. 여행 중이라 악기를 챙기지 않았다는 제 말에 버럭 화를 내더군요. 니콜 조는 스위스에서 네덜란드까지 자신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데 멀리 한국에서 온 연주자가 잼 세션도 하지 않고 돌아가냐면서요. 그녀의 말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자신의 CD를 선물로 주며 다음 방문 때는 악기를 꼭 들고 오라고 했죠. 그때 받은 앨범은 아직도 즐겨 듣고 있습니다. 그 친구 덕분에 저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다시하게 되었고 방황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귀국 후 제 2의 음악인생이 펼쳐졌죠. 네덜란드 방문 후 펼쳐진 제2의 음악인생과, 자신을 알린 방법이 궁금합니다. 네덜란드 방문 전에는 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재즈만을 고집했고 연주자라면 신비스러움이 있어야한다는 생각을 했었죠. 한편으로는 연주에 자신이 없어 인터넷상에 공개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 돌아온 후에는 나를 알려야겠다는 생각과, 재즈뮤지션이 아닌 ‘뮤지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모든 음악을 연주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30대의 인생을 보냈습니다. 유튜브에 연주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고, 여러 장르를 연주하니 다양한 무대에서 저를 찾아주셨습니다. 특히 유튜브에 업로드한 ‘마이 웨이(My Way)’ 연주 영상은 저를 더 알린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SNS상에서 팬, 동호인, 학생들과 소통을 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My Way’ 연주가 주목받게 된 시점과 이 곡을 처음 다른 이에게 들려주었던 기억은?당시 학생들에게 블루스 스케일을 가르치던 시기였습니다. 조금 더 쉬운 연주 방법을 고민하다 My Way에 블루스 스케일을 접목시킨 연주를 가르치게 되었죠. 그렇게 연습해보니 스스로 재미를 느껴 녹음을 하고 영상을 업로드했었습니다. 마이 웨이는 제가 색소폰 연주를 다른 이에게 처음 들려준 곡이라 애착이 가기도 하죠. 색소폰을 연주한지 몇 개월이 지났을 때, 들렀던 슈퍼마켓 주인 아주머니께서 제가 메고 있는 색소폰을 보고 신기해하며 연주를 부탁했었습니다. 그 때 연주한 곡이 바로 마이 웨이였죠. 이 곡은 지금도 매번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즐겨 연주하고, 또 평생 연주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대구예술대학교에 출강하며 학생들에게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지요?기본을 중시하며 호흡을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재즈의 아주 쉬운 부분부터 어려운 부분을 단계적으로 알려드립니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중요한 것을 깨달아 추후 혼자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줍니다. 밥을 떠먹여주는 레슨보다 농사를 짓고 밥을 지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대구예술대학교 에는 50여 명의 색소폰 학생들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열심히 하는 5~60대의 만학도 분들이 모두 모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정적입니다. 너무 좋은 분들이 많아 벌써 5년째 학교에 출강을 하고 있습니다.부산재즈색소폰앙상블은 어떤 음악을 들려주나요?저에게 레슨 받던 학생들과 오래도록 인연을 이어나가며 좋은 음악을 들려주기 위하여 창단한 앙상블입니다. 재즈음악을 기본으로, 가요나 트로트 등 다양한 연주를 합니다. 멤버들은 제가 즉흥적으로 요구하는 애드리브를 부담스러워하고, 공연 때마다 제 눈을 피하곤 하죠(웃음). 제가 생각하는 재즈의 매력은 애드리브이기 때문에 멤버 전원이 악보에 없는 애드리브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지도합니다. 지금은 30여 명의 멤버가 일주일에 한 번씩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추구하는 장르와 음색이 있다면?선호하는 장르는 시간이 지나며 바뀌어가는 것 같습니다. 음악을 처음 접했을 때는 테크닉적이며 비트가 강한 곡, 20대 초반부터는 감미로운 음악을 즐겨들었습니다. 30대에 접어들어 힙합을 즐기고 요즘은 가요도 심취해있습니다. 아저씨가 되어서인지 가수 아이유가 정말 좋습니다(웃음). 추구하는 음색은 마음을 녹이는 부드럽고 따뜻한,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느껴지는 파워풀함입니다. 학생들에게도 항상 부드러운 음색, 나아가 부드러움 속에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소리를 낼 수 있도록 강조합니다.선생님께서 생각하는 음악인이 가져야하는 마음가짐과, 어떤 색소포니스트로 남고 싶은지요.음악인들은 열린 마음과 겸손함의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을 잘한다는 것은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장르를 가리지 않고 겸손하게 음악을 대한다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저의 바람은 청중이 제 연주를 듣고 가슴이 아파 울기도 하고, 닭살이 돋을 정도의 전율을 느끼며 때로는 즐거움을 주체 못해 몸을 들썩이게 만들고 싶습니다. 감동을 연주하는 색소포니스트 이병주가 되고 싶습니다. 글. 박세정 기자suyeo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7-12-01
  • 연주 선율로 그려낸 감미로움, 색소포니스트 이병주
    (월간색소폰)박세정 기자= 학창시절부터 재즈를 사랑했던 이병주 색소포니스트는 드넓은 포용력으로 다양한 장르를 받아들여 그만의 자유롭고 감미로운 음악을 선사한다. 청중과 눈을 맞추고 소통하는 연주를 즐기는 소탈함, 자신의 연주 활동을 ‘여행’으로 빗대는 그는 유랑 시인이다. 부드러운 음색 저변에 짙게 내려앉는 카리스마, 색소폰 관을 통해 표출되는 그의 부드러운 선율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 감동으로 스며든다. 색소폰의 매력에 이끌린 사연을 들려주세요.고등학교 시절 드럼을 배우고 싶어 밴드부에 입단했습니다. 하지만 가입 후 찾아간 연습실에서 눈에 띈 것은 색소폰이었어요.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고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드럼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후였죠. 또한 밴드 활동을 하며 40대 이상의 고등학교 선배님들이 모여 결성한 실버재즈빅밴드(현 경남재즈오케스트라)의 연주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들은 색소폰 연주는 너무 멋져 감동적이었죠. 당시에는 선배님들의 옆자리에 악기만 들고 앉아 있어도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감격스럽게도 머지않아 그 바람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군악대 제대 후 실버재즈빅밴드와 제주도 공연에서 선배님들의 반주에 솔로 협연을 하게 되었죠. 그때의 감동은 아직까지도 생생합니다. 학창시절 주로 어떤 음반을 들으며 꿈을 키워오셨나요?실버재즈빅밴드 공연 이후 재즈에 관심이 생기기도 했고 색소폰 역사의 장르이기에 자연스럽게 재즈 음반을 많이 들었습니다. 또, 악기 모양도 Jazz의 앞 글자 ‘J’와 같잖아요?(웃음). 당시 무작정 레코드점에 방문해서 사장님께서 추천해주신 음반을 열심히 들었습니다.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 캔디 덜퍼, 데이브 코즈, 데이비드 샌본, 에릭 마리엔탈, 조슈아 레드먼, 리차드 엘리엇, 스파이로 자이라, 네이지(Najee), 빈센트 헤링(Vincent Herring)의 앨범을 일주일에 한 장씩은 꼭 구매했었습니다. 책장을 가득 메운 그 음반들은 아직도 저의 소중한 재산 1호입니다. 특히 그로버 워싱턴 주니어의 앨범 ‘Winelight’를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음악이 너무 좋아 음반을 반복해서 듣다 결국 밤을 새고 학교에 갔던 적도 있습니다. 음악을 많이 듣는 것은 뮤지션의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저는 제자들에게 연습하지 않는 대부분의 시간은 습관적으로 음악을 듣기를 추천합니다. ‘와인과 기분 째지는 재즈’ 콘서트는 정기공연인지, 이 외에도 와인과 함께하는 콘서트를 다수 진행하는 이유가 있다면?개인적으로 와인을 좋아해서 와인 동호회의 모임에 참석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관계자 분들이 맛있는 제품도 추천해주시며 공연 때 와인을 지원해주시겠다는 제안을 받았어요. 이어 와인콘서트를 기획해보았는데 관객들의 반응이 좋았습니다. 이후 제가 직접 와인을 구매해서 지속적으로 공연을 개최하게 되었고, 현재는 정기공연으로 자리 잡는 단계인 것 같습니다. 와인을 마시고 기분이 상기된 상태에서 음악을 감상하면 관객은 분위기와 연주에 더욱 심취할 수 있습니다. 평소 ‘파티’같은 공연을 추구하는데, 와인과 재즈는 ‘자유’라는 이미지와 느낌이 묘하게 닮았다고 생각합니다.재즈페스티벌, 재즈클럽, 오케스트라 협연 등 공연 스펙트럼이 넓습니다. 각 공연장의 매력과 특히 좋아하는 무대가 있다면 그 이유는? 어떤 공연이든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무대마다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순위를 매기기 어렵습니다. 오케스트라 협연은 풍부하면서도 예민한 사운드에 푹 빠지게 되고, 클럽에서는 자유로운 공연을 할 수 있어 신이 납니다. 또한, 대학 선배가 운영하는 공연장 ‘골방’은 제가 1년에 2회 가량 방문하고 있습니다. 골방은 말 그대로 협소한 공연장인데, 관객 한분 한분과 모두 눈을 맞출 수 있어 좋습니다. 무대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색소폰을 부는 숨소리까지 들리죠. 모든 무대를 막론하고 여러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 행복합니다. ‘색소폰 연주자’는 복 받은 직업 같습니다.일본에서의 활동이 활발한데, 처음 공연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2004년에 부산 광안리의 작은 재즈클럽 자이언트 스텝에서 연주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이나가키 타카시(Inagaki Takashi)라는 일본 기타리스트와 협연을 했습니다. 그 분은 후쿠오카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으로 일 년에 서너 번 부산을 찾곤 했었죠. 일본에서 함께 공연을 해보자는 그의 제안에 몇 달 뒤, 일본을 찾았습니다. 이후 저도 일 년에 서너 번 일본을 방문하여 공연을 통해 많은 연주자들을 알게 되었고, 지금은 일본의 규슈(九州)가 서울보다 가까운 지역처럼 느껴집니다.가고시마(鹿兒島), 후쿠오카, 구마모토 등 일본의 다양한 지역에서 공연을 하시는데, 특히 인상 깊은 무대나 에피소드는? 5년 전 처음 방문한 가고시마에서의 기억이 인상 깊습니다. 그곳에서 공연을 하며 드러머 시게키 오쿠보(Shigeki Okubo)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국말을 능숙하게 구사했는데 알고 보니 우리나라의 기타리스트 타미 킴(Tammy Kim)과 미국 유학시절 룸메이트였죠. 당시 그의 녹음실 침팬지 스튜디오(Chimpanzee Studio)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연주자들의 연주력이 정말 좋았고, 호흡도 잘 맞았습니다. 앨범을 내자는 저의 제안을 그들이 흔쾌히 받아들여 1집 앨범 ‘어쿠스틱 오션(Acoustic Ocean)’을 발매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서로 왕래하며 자주 공연, 녹음을 하고 있습니다. 음악인생의 전환점이라고 생각하는 시기가 있다면?2008년에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프랑스 유학을 하려 했으나 당장 떠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고민하던 중,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북해재즈축제(North Sea Jazz Festival)’를 관람하러 갔습니다. 그곳에서 제가 CD로만 들었던 뮤지션들이 눈앞에서 연주하는 황홀한 모습을 즐겼죠. 공연 후 방문한 로테르담 호텔 근처 재즈클럽에서의 트럼피터 브라이언 린치(Brian Lynch)와 밴드의 연주 또한 대단했습니다. 그곳에서 어떤 여성분을 우연히 만났죠. 비어 있던 제 앞자리에 앉은 그녀가 무대에서 연주자들을 이끌며 색소폰을 불었습니다. 그 정도로 연주를 잘하는 여성 연주자는 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리로 돌아온 그녀에게 용기를 내어 말을 걸고 한참 대화를 나누었죠. 그녀는 색소폰 연주자 니콜 조(Nicole Jo)였으며, 저도 한국의 색소포니스트라고 이야기하자 악기를 가져 오지 않았냐고 물어왔습니다. 여행 중이라 악기를 챙기지 않았다는 제 말에 버럭 화를 내더군요. 니콜 조는 스위스에서 네덜란드까지 자신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는데 멀리 한국에서 온 연주자가 잼 세션도 하지 않고 돌아가냐면서요. 그녀의 말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자신의 CD를 선물로 주며 다음 방문 때는 악기를 꼭 들고 오라고 했죠. 그때 받은 앨범은 아직도 즐겨 듣고 있습니다. 그 친구 덕분에 저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을 다시하게 되었고 방황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귀국 후 제 2의 음악인생이 펼쳐졌죠. 네덜란드 방문 후 펼쳐진 제2의 음악인생과, 자신을 알린 방법이 궁금합니다. 네덜란드 방문 전에는 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재즈만을 고집했고 연주자라면 신비스러움이 있어야한다는 생각을 했었죠. 한편으로는 연주에 자신이 없어 인터넷상에 공개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서 돌아온 후에는 나를 알려야겠다는 생각과, 재즈뮤지션이 아닌 ‘뮤지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모든 음악을 연주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30대의 인생을 보냈습니다. 유튜브에 연주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고, 여러 장르를 연주하니 다양한 무대에서 저를 찾아주셨습니다. 특히 유튜브에 업로드한 ‘마이 웨이(My Way)’ 연주 영상은 저를 더 알린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SNS상에서 팬, 동호인, 학생들과 소통을 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My Way’ 연주가 주목받게 된 시점과 이 곡을 처음 다른 이에게 들려주었던 기억은?당시 학생들에게 블루스 스케일을 가르치던 시기였습니다. 조금 더 쉬운 연주 방법을 고민하다 My Way에 블루스 스케일을 접목시킨 연주를 가르치게 되었죠. 그렇게 연습해보니 스스로 재미를 느껴 녹음을 하고 영상을 업로드했었습니다. 마이 웨이는 제가 색소폰 연주를 다른 이에게 처음 들려준 곡이라 애착이 가기도 하죠. 색소폰을 연주한지 몇 개월이 지났을 때, 들렀던 슈퍼마켓 주인 아주머니께서 제가 메고 있는 색소폰을 보고 신기해하며 연주를 부탁했었습니다. 그 때 연주한 곡이 바로 마이 웨이였죠. 이 곡은 지금도 매번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즐겨 연주하고, 또 평생 연주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대구예술대학교에 출강하며 학생들에게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가르치는지요?기본을 중시하며 호흡을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재즈의 아주 쉬운 부분부터 어려운 부분을 단계적으로 알려드립니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중요한 것을 깨달아 추후 혼자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줍니다. 밥을 떠먹여주는 레슨보다 농사를 짓고 밥을 지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대구예술대학교 에는 50여 명의 색소폰 학생들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열심히 하는 5~60대의 만학도 분들이 모두 모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정적입니다. 너무 좋은 분들이 많아 벌써 5년째 학교에 출강을 하고 있습니다.부산재즈색소폰앙상블은 어떤 음악을 들려주나요?저에게 레슨 받던 학생들과 오래도록 인연을 이어나가며 좋은 음악을 들려주기 위하여 창단한 앙상블입니다. 재즈음악을 기본으로, 가요나 트로트 등 다양한 연주를 합니다. 멤버들은 제가 즉흥적으로 요구하는 애드리브를 부담스러워하고, 공연 때마다 제 눈을 피하곤 하죠(웃음). 제가 생각하는 재즈의 매력은 애드리브이기 때문에 멤버 전원이 악보에 없는 애드리브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지도합니다. 지금은 30여 명의 멤버가 일주일에 한 번씩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추구하는 장르와 음색이 있다면?선호하는 장르는 시간이 지나며 바뀌어가는 것 같습니다. 음악을 처음 접했을 때는 테크닉적이며 비트가 강한 곡, 20대 초반부터는 감미로운 음악을 즐겨들었습니다. 30대에 접어들어 힙합을 즐기고 요즘은 가요도 심취해있습니다. 아저씨가 되어서인지 가수 아이유가 정말 좋습니다(웃음). 추구하는 음색은 마음을 녹이는 부드럽고 따뜻한,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느껴지는 파워풀함입니다. 학생들에게도 항상 부드러운 음색, 나아가 부드러움 속에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소리를 낼 수 있도록 강조합니다.선생님께서 생각하는 음악인이 가져야하는 마음가짐과, 어떤 색소포니스트로 남고 싶은지요.음악인들은 열린 마음과 겸손함의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을 잘한다는 것은 어려운 과정을 겪어야합니다. 열린 마음으로 장르를 가리지 않고 겸손하게 음악을 대한다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저의 바람은 청중이 제 연주를 듣고 가슴이 아파 울기도 하고, 닭살이 돋을 정도의 전율을 느끼며 때로는 즐거움을 주체 못해 몸을 들썩이게 만들고 싶습니다. 감동을 연주하는 색소포니스트 이병주가 되고 싶습니다. 글. 박세정 기자suyeo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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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12-01
  • 해남 땅끝에서 울리는 감동의 소리, 땅끝색소폰동호회
    눈부신 해남의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색소폰 선율을 전하는 땅끝색소폰동호회. 그들은 색소폰동호회가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고민 끝에, 연주를 통해 즐거움을 전하는 공연을 선택한다. 봉사공연과 지역축제에 참여하여 예술을 통해 만인에게 행복을 전하는 땅끝색소폰동호회. 그들은 관광객들과 지역민에게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색소폰 음색으로 다양한 무대를 선보인다. 수많은 무대에서 활동하며 지역을 대표하는 동호회로 인정받은 회원들은 색소폰 연주를 통해 인생에서 가장 멋진 장면들을 장식하고 있다. 전라남도 해남군에 위치한 땅끝색소폰동호회(이하 땅끝색소폰)는 윤길용 부회장의 실용음악학원에 연습실을 두고 있다. 그의 배려로 연중무휴, 24시간 개방하여 회원들의 모임 장소로 활용된다. 개원 전에는 윤길용 부회장이 자택 옥상에 만든 개인연습실에서 옹기종기 모여 연습을 했었다. 네 평 남짓 좁은 공간에서 대여섯 명이 모여 화음을 맞춰가던 6개월. 이제 여럿이 합주도 가능한 넓은 홀이 있는 연습실에서 화음을 맞추고, 해남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감미로운 색소폰 선율을 전파한다. 아름다운 해남에 울려 퍼지는 감미로운 색소폰해남은 다른 지역보다 따뜻한 기후와 인심 좋은 주민들, 여유로운 동네 풍경이 특히 매력적이다.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 그리고 며칠 집을 비울 경우 도시와는 달리 문단속을 하지 않아도 문제없는 이곳은 윤종식 회원을 매료시켰다. 결국 그는 업무 차 오게 된 해남에 정착하여 은퇴 후에도 해남을 떠나지 않고 회원들과 함께 연주를 한다. 서울에 거주하다 귀촌한 정인열 총무는 115년 된 교회가 있는 마을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이끌렸다. 그에게 색소폰은 힘든 상황을 모두 날려버리는 ‘환희’로 다가왔다. 케니 지의 공연 관람 후 색소폰의 매력에 이끌린 정인열 총무는 해남지역에 색소폰을 가르치는 학원을 찾지 못해 독학으로 연주를 했다. 이후 이곳에서 만난 백선오 회장, 윤길용 부회장, 윤종식 회원과 합심하여 땅끝색소폰을 결성한다. 만인에게 즐거움을 전하기 위한 색소폰 연주정인열 총무는 해남지역아동센터 연합회장으로서 아이들을 보살피고 교육을 책임진다. 아동들을 밝게 성장시켜 미래 지역사회의 건실한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앞장서고 있는 그. 자택 근처에서는 노인복지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평소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위해 땅끝색소폰 회원들과 지역사회 공연과 자원봉사를 진행한다. 정인열 총무가 색소폰을 연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르신들에게 연주를 선보인 적이 있었다. 서툰 색소폰 소리에도 평소 몸이 불편해 거동을 못하시던 분들이 율동을 하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고, 눈물이 흘렀다. 김광수 회원은 숲속음악회 무대에서 임산부와 남편이 손을 잡고 땅끝색소폰의 공연이 끝날 때까지 연주를 들어준 추억이 가슴속에 깊이 남았다. 공연을 통해 다른 이에게 즐거움을 전하는 뿌듯함을 알게 된 회원들은 음악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 지역축제에 우선적으로 초청되는 땅끝색소폰동호회 기획공연을 몇 차례 진행하던 땅끝색소폰에게 지역축제 출연제의가 들어왔다. 이후 이들은 해남지역의 대표적인 축제 및 지방자치단체 행사에 다수 참여하게 된다. 2017년에는 특히 바쁜 일정을 소화했는데, 올여름 해남천에서 매주 여름밤의 낭만과 함께하는 콘서트를, 9월에는 지역축제와 동호회 자체 행사를 5차례 진행하였고 10월 마지막 주에는 일주일에 2회의 공연을 마쳤다.땅끝색소폰은 올해 해남시의 지원과 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여러 관광지에서 공연을 하였다. 공룡박물관의 공룡화석지 호수, 도솔암 정상, 녹우당, 대흥사 계곡 등 여러 관광지에서 회원 20여 명, 초청 예술인 30여 명과 함께 색소폰 선율과 국악, 다양한 퍼포먼스가 어우러진 공연을 선보였다. 관광객과 지역민의 호응으로 모두 한마음이 되어 음악을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회원들과 화합의 연장, 청중들과의 어울림 땅끝색소폰의 정기연습일은 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2회로 정해져있다. 하루 종일 개방된 연습실에는 어느 시간대에 방문해도 선배들을 만날 수 있어 회원들은 매일이 정기연습이라고 말할 정도다. 윤길용 부회장은 회원들이 모이면 합주를 지도하고 정기연습일이 아니어도 질문을 해온다면 성심성의껏 알려준다. 백선오 회장은 색소폰 연주 시 무거운 악기를 들어 올리고 복식호흡을 하는 습관 덕에 자연스레 건강을 유지한다고 전했다. 가족들의 격려 속에 즐겁게 연주 활동을 하고 있는 그. 이제 색소폰을 불지 않으면 속이 답답하고 두통이 오는 등, 건강을 해치는 느낌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주를 한다. 연주할 때 가장 행복한 그는 다른 이들도 재미있는 동호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따뜻한 마음으로 회원들을 대한다. 실제로 회원들은 색소폰 연주를 즐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생활에 활력을 느끼고 효율적인 업무 수행의 효과가 있다고 한다. 유인관 회원은 심금을 울리는 테너의 깊은 음색과 마치 성난 사자의 포효처럼 강렬한 소리에 마음을 빼앗겼다. 박찬열 회원도 마찬가지로 중저음의 소리가 울려 퍼지는 악기의 매력에 취했다. 여름밤의 음악회에서 관광객들과 어울려 춤도 추며 음악을 함께 즐겼던 무대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는 그. 매일 연주할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하다는 박찬열 회원은 앞으로도 색소폰과 함께 즐거운 인생을 누리고 많은 연주곡을 소화하고 싶다. 수많은 무대 경험으로 베테랑 연주자가 된 땅끝색소폰정인열 총무는 처음 섰던 무대에서 마네킹처럼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반주기만 쳐다보고 연주를 했는데도 긴장한 탓에 음정도 맞지 않아 그저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도했었다. 땅끝색소폰에서 활동을 하며 무대에 익숙해진 현재, 그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윤종식 회원도 처음 선 무대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어 비브라토가 절로 나왔지만 땅끝색소폰에서 수많은 공연을 통해 무대를 즐기게 되었다. 다른 회원들도 공연을 활발하게 진행하는 동호회 활동에 만족을 느낀다. 임연선 회원은 밴드 보컬로 활동하는데, 그녀의 밴드 활동은 남편인 박찬열 회원의 색소폰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결국 색소폰을 연주하기 위해 땅끝색소폰에 가입하였고, 뒤이어 임연선 회원도 동호회에 합류하여 공연 때마다 노래를 한다. 땅끝색소폰의 회원이 되어 행복하다는 그녀는 인생의 멋진 페이지가 시작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박찬열 회원이 무대 경험이 부족했을 때는 음이탈 실수에 식은땀도 났지만 지금은 지역민, 관광객과 한데 어울려 여유롭게 연주를 한다. 유인관 회원도 첫 공연 때 손이 떨려 관객에게 미안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멋진 팀워크를 자랑하는 연주자로 거듭났다.열정적인 회원들의 첫 앙상블 도전땅끝색소폰 회원들의 절반은 공연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데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무대에 서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근무지에 휴가계를 내고 공연에 참여하며, 운수업에 종사하는 유인관 회원은 공연 일정이 잡히면 동료들과 스케줄을 조정하여 반드시 무대에 선다. 2년가량 꾸준하게 공연을 해온 땅끝색소폰은 관객들에게 더 멋진 연주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올여름, 그들은 앙상블 연주를 목표로 특별한 도전을 시도하여 매일 연습했다. 편곡한 두 개의 연주곡을 앙상블로 화음을 맞춘지 한 달 뒤인 7월, 해남천의 공연에서 선을 보였다. 관광객과 지역민은 가던 길을 멈추어 땅끝색소폰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감상했고, 회원들은 이 무대를 계기로 실력이 한 차원 발전된 것을 느꼈다. 앙상블을 지도하는 윤길용 부회장은 중학생들의 방과후 밴드 활동도 지도하고 있다. 그는 학생들에게 ‘멘토’로서 다가가기 위하여, 강요하기보다 스스로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방법으로 밴드를 이끈다. 색소폰을 연주한지 어언 12년이 된 윤길용 부회장에게는 두 가지 바람이 있다. 하나는 후학을 양성하여 해남의 색소폰 문화를 주도하고, 두 번째는 땅끝색소폰의 멋진 앙상블을 각종 축제에서 가장 인기있는 팀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는 회원들의 열정 덕에 머지않아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년의 새로운 행복, 연주의 기쁨윤종식 회원은 TV에서 케니 지의 ‘고잉 홈(Going Home)’ 연주를 우연히 보게 된 후 색소폰을 배우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그가 중고로 구입한 소프라노색소폰은 아무리 불어 보아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다. 고장 여부를 확인하러 찾아간 음악학원에서 비로소 전시용 악기라는 것을 알았다. 우여곡절 끝에 색소폰에 입문한 그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악기의 매력에 푹 빠졌다. 음악과 함께하며 흡연과 음주도 끊게 되었고 해남지역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음악을 사랑하는 윤길용 부회장은 어릴 적부터 드럼을 연주했다. 40대 늦깎이 음대생으로서 피아노를 배우며 부전공으로 색소폰을 선택했다. 재학시절에는 축제에 참가하여 연주한 이은미의 ‘애인있어요’로 은상을 수상하여 소중한 추억을 쌓았다. 그는 좋은 음색을 찾기위해 3년 동안 광주에 있는 색소포니스트에게 레슨을 받을 정도로 열정이 뛰어나다. 배움을 거듭하여 무대에 서면 청중의 박수 소리가 더욱 커진다는 윤길용 부회장. 연주를 통해 기쁨과 행복을 느낀 그는 모두에게 색소폰을 권유하고 싶다고 한다.한마음으로 색소폰을 연주하는 멋진 인생땅끝색소폰은 가장 연장자인 백선오 회장의 포용력으로 창단 후 3년간 불화 없이 화목한 분위기가 지속될 수 있었다. 음악을 통해 좋은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하여 땅끝색소폰에 가입한 유인관 회원은 배려가 몸에 밴 회원들과 함께하는 것이 즐겁다. 임원들의 노력으로 의사소통이 원활하고 친근한 분위기가 유지되는 동호회 활동도 만족스럽다. 김광수 회원은 서로 양보하며 예의를 갖추는 회원들 덕분에 모임이 즐겁고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땅끝색소폰 회원들은 사익을 추구하지 않아 축제에 참여하여 받은 출연료를 모두 동호회 운영에 사용한다. 그들은 평소 재능기부 공연을 많이 하기 때문에 장비 대여, 초청 연주인과 가수의 출연료를 지불하고 모자란 경우에는 솔선수범하여 지원금을 보태곤 한다. 임연선 회원은 동호회에서만 즐기는 음악이 아닌 땅끝색소폰에서 활동하며 무대를 통해 청중에게도 행복을 전하고 싶다. 언제나 지금처럼 색소폰과 노래 소리가 끊이질 않으며, 음악이 필요한 사람들을 치유하는 멋진 동호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모든 회원들은 지역봉사와 재능기부를 지속적으로 실천하여 지역사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정인열 총무를 비롯한 임원진들은 해남의 색소폰동호회로서 꾸준히 공연을 개최한다. 땅끝색소폰은 음악을 통해 정서적인 안정과 삶의 여유로움을 즐기며 중년의 아름다운 인생을 전개하고 있다. 글. 박세정 기자 suyeo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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