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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색소폰이 좋아서 모인 좋은 사람들, '굿피플동호회'
    2018년 5월 18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였다. 혹시 공연이 취소되지 않을까 반신반의하며 도착했던 영동5교다리. 궂은 날씨 속에서도 떨리는 호흡과 손끝으로 몰입하며 오히려 내리는 비가 고마울 정도로 운치 있었던 음악회를 선사했었던 <굿피플동호회>에 대한 기억이 내게 선명하다. 무엇이 그들을 그런 진지함 속에서 색소폰을 연주하게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개포동에 자리한 <굿피플동호회>의 연습실은 그야말로 깔끔했다. 뭔가 모범생 같은 분위기라고 하면 맞을까. 실제로 연습실에 들어가서 바로 눈에 보였던 풍경은 학습의 현장이었다. 둥그렇게 정렬하여 앉은 머리 희끗희끗한 학생들이 태도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선생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 새로웠다.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자연스레 조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모습을 담고자 셔터를 눌러댔다. 간혹 플래시도 터뜨리고, 자리를 이리저리 이동하며 사진을 찍었던 터라 그들에게는 방해가 됐을 법도 하지만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고 선생님만을 응시했다. 그런 분위기가 익숙해 보이는 선생님은 그런 학생들의 기대에 하나하나 응하고, 대답해주며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모습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수업내용을 물어보니 앙상블수업 중이었다고 한다) 자칫 방해되진 않았을까 걱정하고 있던 와중에 앙상블 수업이 끝났고, 동호회 회원들은 제각기 자신의 악기를 소중하게 닦고 점검했다. 하루 이틀 그렇게 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들의 행동이 자유스러우면서도 지키는 것이 명확해 보였다. 단순히 어떤 단체나 모임에 존속되고자 사람들이 이곳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굿피플동호회는 2014년 11월에 만들어진 동호회다. 마음이 맞아서 시작한 13명의 회원이 뜻을 모아 선생님을 초빙하여 지금의 굿피플동호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은 주주회원이 22명이고, 일반회원이 13명으로 총 35명이 굿피플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굿피플이 가진 특징이라면 단연 ‘순수 동호회’라는 점을 들 수 있는데, 학원 형태가 아니다 보니 아는 지인들이나 혹은 지인의 소개로 들어온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는 동호회 회원들끼리 별다른 말썽 없이 잘 지내 왔다고 한다. 봄이 되면 강남 양재천에서 5월부터 10월까지 매년 한 달에 한 번씩 공연하고, 연말에는 동호인들과 동호인들의 가족들이 모두 참석하여 무려 백여 명이 되는 사람들이 모여 송년 연주회를 한다. 그렇게 정기적으로 공연을 거듭한 지 6년 차 정도 되니 ‘진짜 음악’에 대한 갈증을 더 느끼게 되고, 반주기에 의존하지 않고 굿피플동호회만의 음악을 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듀엣부터 트리오, 그리고 앙상블까지 공연하기에 충분한 레퍼토리와 음악성을 키워서 관객들이 보기에 지루하지 않은 무대를 구성하고, 자신들끼리도 색소폰을 가지고 흥겹게 놀 수 있는 역량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종연 동호회 회장)색소폰을 어떻게 하게 되었고, 현재까지 어떻게 해오고 있는지 말해 달라. 1998년도에 미국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을 때였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어느 유명악기점에서 색소폰을 세일한다는 포스터를 보고 언젠가 불겠지 싶어 세일 가격으로 천 불 정도에 구입했었다. 그러나 혼자 불려다 보니 좀 아니다 싶은 감이 있어 현지에 있는 색소폰 선생님을 찾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선생님 연세가 75세 정도였는데, 5살 때부터 악기를 배워 그때까지도 악단에서 활동하고 계신 베테랑이셨다. 그런 분에게 처음부터 색소폰을 배운 것은 행운이었지만, 미국인이다 보니 우리나라 가요를 배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직접 일반 가요 교재를 한국에서 사다가 색소폰 악보로 이조해서 직접 수기로 악보를 써나가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음악 이론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 좋은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98년도에는 고작해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불러보는 수준이었으니 색소폰을 열심히 했다고 볼 수 없다. 한국에 귀국했던 시점인 2000년도에는 회사 일에 매진하느라 색소폰을 불 기회조차도 만들지 못했었다. 2001년, 개인 사업을 하게 되면서 조금씩 불다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2009년부터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색소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연습해오고 있다. 그에 비해선 색소폰 실력은 아직 미흡하지만 말이다.원래에도 음악을 좋아했었나. 학교 다닐 때부터 팝송은 다 꿰고 있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었다. 특히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는데, 나는 다른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음치에 속했다.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면 음이 틀렸다는 지적을 자주 받는 편이었다. 목소리로 음악을 잘 표현하지 못했기에 악기로 그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음악과 점점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악기점에서 악기를 우연히 사서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색소폰이 눈에 더 들어온 이유가 있었나. 평소에도 색소폰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물론 있었지만, 단순히 그냥 눈에 가장 들어온 것이 색소폰이었다. 당시에 색소폰뿐만 아니라 젬베라는 악기도 같이 샀었는데, 젬베에 그려진 문양들이 너무 예뻐서 산 것이다. 그 젬베도 여기에 가져다 놓았다.젬베도 잘 연주하나. 반주기만 가지고 색소폰을 불다보니 박자에 문제가 생기더라. 박자 공부를 하기 위해드럼 선생님을 찾아가 젬베를 배웠었다. 덕분에 박자를 이제 간신히 알겠다 싶은 정도에 온 것 같기는 하다.바쁜 일상 속에서 색소폰을 하게 되는 원천이 무엇인가. 대기업에서 회사생활을 한 지는 상당히 오래됐었다. 그때는 7시에 출근해서 새벽 한 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취미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나중에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좋아하는 음악을 통해 마음속 어디엔가 잠재해 있던 것들을 표출하고, 그런 자유를 활성화하게 되는 것이 악기를 불게 하는 원동력이 되더라. 사실 색소폰을 불기 전에는 와이프와 같이 스포츠 댄스를 15년 정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이 내게 낯설지는 않았다. 지금은 댄스스포츠 파티가 열리는 날이면 색소폰으로 블루스나 룸바 장르의 곡을 연주하며 흥을 돋우는 역할을 도맡고 있다. 이렇게 색소폰과 스포츠 댄스를 같이 접목해서 하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다.색소폰을 배우는 과정에서 힘든 부분은 없었나. 생각했던 것처럼 연습이 되지 않거나, 또는 연주한 것을 녹음해서 들어보았는데 스스로 생각한 것과는 너무나 다를 때 색소폰을 과연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 정도로 좌절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레슨을 받거나, 혹은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접하여 도전함으로써 슬럼프를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목표로 하는 곡이 있나. 어떤 곡을 완성해야지 하는 것 보다는 어떤 곡을 하든지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연주를 하고 싶은 것이 꿈이자 바람이다. 과연 평생 한 번 이루어 볼 수 있을지…. 이룰 수 없는 목표가 될 수도 있는 그런 꿈을 가지고 있다. (최용인 사무총장)동호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나. 일반 학원이 아닌 동호회 회원들이 연습실을 다 같이 운영하고 있다 보니 누군가는 회비도 받고 지출도 관리해야 한다. 그래서 총무, 회계 이런 것들을 도맡아 한다. 금년에 총무가 새로 생기면서 나는 회계를 주로 하고, 동시에 동호회 운영에 있어서 상의할 부분들 혹은 연락 사항들을 관리한다. 나이가 있다 보니 총무라고 안 하고 사무총장이라고 불러준다(웃음).자신만의 색소폰을 즐기는 방법이 있다면. 가수들이 무대에 서려면 천 번 이상 연습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완성도는 높겠지만 본인에게는 고통이다. 계속 같은 것을 연습해야 하니 말이다. 나 같은 경우 그렇게 는 안 하는 편이다. 좋아하는 노래가 있으면 이것저것 따라하면서 편안하게 하는 편이다. 그래서 곡으로 따지면 아마 우리 동호회 회원들 중에 여러 가지 곡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 중의 하나로 손에 꼽힐 것 같다. 특별히 어느 한 곡을 잘하진 않지만 여러 곡을 두루두루 한다. 무대에 설 때 떨리지는 않았는가.무대에 섰던 에피소드가 있으면 말해달라. 긴장해서 그런 것인지 무대에서면 악보가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연습할 때에는 조금만 딴 생각하면 악보가 지나가 버리는데, 무대에서 연주할 때에는 집중이 더 잘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에피소드라고 한다면 한번은 공연하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 적이 있었다. 그때문에 우리도 못 가고, 관중도 못 가고 했던 일이 있었다. (이석재 동호회 회원)색소폰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회사를 정년퇴직하고 색소폰을 한번 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원래 가요와 트로트를 즐겨듣고 좋아하는데, 색소폰이 가요와 트로트 장르에 맞는 소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색소폰의 어떤 부분에 매력을 느꼈나. 색소폰을 불고있는 시간에는 색소폰에만 몰두할 수 있어서 좋다. 음악을 잘 몰랐던 사람이었는데 악보를 보게 되고, 색소폰으로 노래가 된다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했다. 색소폰을 하는 데에 있어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보통 사람들이 다 하는 만큼의 거북하지 않고 좋은 소리로 연주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처음 일 년 정도 불었을 때는 내가 제일 잘 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는데, 하면 할수록 더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음악의 깊이라는 것은 끝이 없는 것 같다.목표로 하는 곡은 따로 없나. 꼭 하나만 집어 말해 달라.<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라는 곡을 예전에 하긴 했었는데, 지금도 잘 못 한다. 그래서 더 해보고 싶고, <홍도야 울지마라> 같은 빠르고 경쾌하면서 여러 가지 애드리브가 들어가는 곡들도 해보고 싶다. 글·사진 Ι 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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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1
  • 색소폰이 좋아서 모인 좋은 사람들, '굿피플동호회'
    2018년 5월 18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였다. 혹시 공연이 취소되지 않을까 반신반의하며 도착했던 영동5교다리. 궂은 날씨 속에서도 떨리는 호흡과 손끝으로 몰입하며 오히려 내리는 비가 고마울 정도로 운치 있었던 음악회를 선사했었던 <굿피플동호회>에 대한 기억이 내게 선명하다. 무엇이 그들을 그런 진지함 속에서 색소폰을 연주하게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개포동에 자리한 <굿피플동호회>의 연습실은 그야말로 깔끔했다. 뭔가 모범생 같은 분위기라고 하면 맞을까. 실제로 연습실에 들어가서 바로 눈에 보였던 풍경은 학습의 현장이었다. 둥그렇게 정렬하여 앉은 머리 희끗희끗한 학생들이 태도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선생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 새로웠다.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자연스레 조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모습을 담고자 셔터를 눌러댔다. 간혹 플래시도 터뜨리고, 자리를 이리저리 이동하며 사진을 찍었던 터라 그들에게는 방해가 됐을 법도 하지만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고 선생님만을 응시했다. 그런 분위기가 익숙해 보이는 선생님은 그런 학생들의 기대에 하나하나 응하고, 대답해주며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모습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수업내용을 물어보니 앙상블수업 중이었다고 한다) 자칫 방해되진 않았을까 걱정하고 있던 와중에 앙상블 수업이 끝났고, 동호회 회원들은 제각기 자신의 악기를 소중하게 닦고 점검했다. 하루 이틀 그렇게 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들의 행동이 자유스러우면서도 지키는 것이 명확해 보였다. 단순히 어떤 단체나 모임에 존속되고자 사람들이 이곳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굿피플동호회는 2014년 11월에 만들어진 동호회다. 마음이 맞아서 시작한 13명의 회원이 뜻을 모아 선생님을 초빙하여 지금의 굿피플동호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은 주주회원이 22명이고, 일반회원이 13명으로 총 35명이 굿피플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굿피플이 가진 특징이라면 단연 ‘순수 동호회’라는 점을 들 수 있는데, 학원 형태가 아니다 보니 아는 지인들이나 혹은 지인의 소개로 들어온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는 동호회 회원들끼리 별다른 말썽 없이 잘 지내 왔다고 한다. 봄이 되면 강남 양재천에서 5월부터 10월까지 매년 한 달에 한 번씩 공연하고, 연말에는 동호인들과 동호인들의 가족들이 모두 참석하여 무려 백여 명이 되는 사람들이 모여 송년 연주회를 한다. 그렇게 정기적으로 공연을 거듭한 지 6년 차 정도 되니 ‘진짜 음악’에 대한 갈증을 더 느끼게 되고, 반주기에 의존하지 않고 굿피플동호회만의 음악을 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듀엣부터 트리오, 그리고 앙상블까지 공연하기에 충분한 레퍼토리와 음악성을 키워서 관객들이 보기에 지루하지 않은 무대를 구성하고, 자신들끼리도 색소폰을 가지고 흥겹게 놀 수 있는 역량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종연 동호회 회장)색소폰을 어떻게 하게 되었고, 현재까지 어떻게 해오고 있는지 말해 달라. 1998년도에 미국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을 때였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어느 유명악기점에서 색소폰을 세일한다는 포스터를 보고 언젠가 불겠지 싶어 세일 가격으로 천 불 정도에 구입했었다. 그러나 혼자 불려다 보니 좀 아니다 싶은 감이 있어 현지에 있는 색소폰 선생님을 찾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선생님 연세가 75세 정도였는데, 5살 때부터 악기를 배워 그때까지도 악단에서 활동하고 계신 베테랑이셨다. 그런 분에게 처음부터 색소폰을 배운 것은 행운이었지만, 미국인이다 보니 우리나라 가요를 배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직접 일반 가요 교재를 한국에서 사다가 색소폰 악보로 이조해서 직접 수기로 악보를 써나가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음악 이론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 좋은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98년도에는 고작해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불러보는 수준이었으니 색소폰을 열심히 했다고 볼 수 없다. 한국에 귀국했던 시점인 2000년도에는 회사 일에 매진하느라 색소폰을 불 기회조차도 만들지 못했었다. 2001년, 개인 사업을 하게 되면서 조금씩 불다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2009년부터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색소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연습해오고 있다. 그에 비해선 색소폰 실력은 아직 미흡하지만 말이다.원래에도 음악을 좋아했었나. 학교 다닐 때부터 팝송은 다 꿰고 있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었다. 특히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는데, 나는 다른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음치에 속했다.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면 음이 틀렸다는 지적을 자주 받는 편이었다. 목소리로 음악을 잘 표현하지 못했기에 악기로 그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음악과 점점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악기점에서 악기를 우연히 사서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색소폰이 눈에 더 들어온 이유가 있었나. 평소에도 색소폰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물론 있었지만, 단순히 그냥 눈에 가장 들어온 것이 색소폰이었다. 당시에 색소폰뿐만 아니라 젬베라는 악기도 같이 샀었는데, 젬베에 그려진 문양들이 너무 예뻐서 산 것이다. 그 젬베도 여기에 가져다 놓았다.젬베도 잘 연주하나. 반주기만 가지고 색소폰을 불다보니 박자에 문제가 생기더라. 박자 공부를 하기 위해드럼 선생님을 찾아가 젬베를 배웠었다. 덕분에 박자를 이제 간신히 알겠다 싶은 정도에 온 것 같기는 하다.바쁜 일상 속에서 색소폰을 하게 되는 원천이 무엇인가. 대기업에서 회사생활을 한 지는 상당히 오래됐었다. 그때는 7시에 출근해서 새벽 한 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취미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나중에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좋아하는 음악을 통해 마음속 어디엔가 잠재해 있던 것들을 표출하고, 그런 자유를 활성화하게 되는 것이 악기를 불게 하는 원동력이 되더라. 사실 색소폰을 불기 전에는 와이프와 같이 스포츠 댄스를 15년 정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이 내게 낯설지는 않았다. 지금은 댄스스포츠 파티가 열리는 날이면 색소폰으로 블루스나 룸바 장르의 곡을 연주하며 흥을 돋우는 역할을 도맡고 있다. 이렇게 색소폰과 스포츠 댄스를 같이 접목해서 하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다.색소폰을 배우는 과정에서 힘든 부분은 없었나. 생각했던 것처럼 연습이 되지 않거나, 또는 연주한 것을 녹음해서 들어보았는데 스스로 생각한 것과는 너무나 다를 때 색소폰을 과연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 정도로 좌절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레슨을 받거나, 혹은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접하여 도전함으로써 슬럼프를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목표로 하는 곡이 있나. 어떤 곡을 완성해야지 하는 것 보다는 어떤 곡을 하든지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연주를 하고 싶은 것이 꿈이자 바람이다. 과연 평생 한 번 이루어 볼 수 있을지…. 이룰 수 없는 목표가 될 수도 있는 그런 꿈을 가지고 있다. (최용인 사무총장)동호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나. 일반 학원이 아닌 동호회 회원들이 연습실을 다 같이 운영하고 있다 보니 누군가는 회비도 받고 지출도 관리해야 한다. 그래서 총무, 회계 이런 것들을 도맡아 한다. 금년에 총무가 새로 생기면서 나는 회계를 주로 하고, 동시에 동호회 운영에 있어서 상의할 부분들 혹은 연락 사항들을 관리한다. 나이가 있다 보니 총무라고 안 하고 사무총장이라고 불러준다(웃음).자신만의 색소폰을 즐기는 방법이 있다면. 가수들이 무대에 서려면 천 번 이상 연습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완성도는 높겠지만 본인에게는 고통이다. 계속 같은 것을 연습해야 하니 말이다. 나 같은 경우 그렇게 는 안 하는 편이다. 좋아하는 노래가 있으면 이것저것 따라하면서 편안하게 하는 편이다. 그래서 곡으로 따지면 아마 우리 동호회 회원들 중에 여러 가지 곡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 중의 하나로 손에 꼽힐 것 같다. 특별히 어느 한 곡을 잘하진 않지만 여러 곡을 두루두루 한다. 무대에 설 때 떨리지는 않았는가.무대에 섰던 에피소드가 있으면 말해달라. 긴장해서 그런 것인지 무대에서면 악보가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연습할 때에는 조금만 딴 생각하면 악보가 지나가 버리는데, 무대에서 연주할 때에는 집중이 더 잘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에피소드라고 한다면 한번은 공연하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 적이 있었다. 그때문에 우리도 못 가고, 관중도 못 가고 했던 일이 있었다. (이석재 동호회 회원)색소폰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회사를 정년퇴직하고 색소폰을 한번 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원래 가요와 트로트를 즐겨듣고 좋아하는데, 색소폰이 가요와 트로트 장르에 맞는 소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색소폰의 어떤 부분에 매력을 느꼈나. 색소폰을 불고있는 시간에는 색소폰에만 몰두할 수 있어서 좋다. 음악을 잘 몰랐던 사람이었는데 악보를 보게 되고, 색소폰으로 노래가 된다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했다. 색소폰을 하는 데에 있어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보통 사람들이 다 하는 만큼의 거북하지 않고 좋은 소리로 연주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처음 일 년 정도 불었을 때는 내가 제일 잘 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는데, 하면 할수록 더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음악의 깊이라는 것은 끝이 없는 것 같다.목표로 하는 곡은 따로 없나. 꼭 하나만 집어 말해 달라.<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라는 곡을 예전에 하긴 했었는데, 지금도 잘 못 한다. 그래서 더 해보고 싶고, <홍도야 울지마라> 같은 빠르고 경쾌하면서 여러 가지 애드리브가 들어가는 곡들도 해보고 싶다. 글·사진 Ι 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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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1
  • [Trace Up]한국의 재즈와 가요의 발자취를 따라가다.취재를 시작하며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재즈1세대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이따금씩 재즈 공연을 보면 드는 생각이다. 내 앞에서 연주하고 있는 저들이 저 무대에 설 수 있었던 발판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조금은 추상적이지만 과거 없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 의미 있는 과거가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다. 우리 <월간색소폰>은 그것을 찾아 취재하여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을 통해 한국의 재즈와 가요 음악사를 들여다보고, 그들을 이해함으로써 생기는 연대감이 우리 독자들을 통해 나오리라 믿는다. 가장 먼저 ‘재즈’의 정의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역시나 모두가 알다시피 재즈는 흑인 음악이고, 그들의 터였던 뉴올리언즈에서 시작했다고 정의한다. 그러면 한국 재즈는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가 취재의 관건이다. 취재를 시작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한국의 재즈1세대’라는 말이다. ‘한국’, ‘재즈’, ‘1세대’. 이 세 단어로만 보았을 때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끼리만 모아 놓은 느낌이다. ‘1세대’라는 단어에만 주목해본다면 ‘처음이라는 것을 일구어 낸 전 세대’의 뜻도 가지고 있고, 지금은 빛바랜, 혹은 오래된 세대라는 느낌을 들게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이 낯선 단어에서 느껴지는 애환은 어쩐지 설명할 수가 없다. 이렇듯 ‘재즈1세대’라는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듣게 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 의미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는 듯 하다. 사실 ‘재즈1세대’라는 말은 공식화되어 있는 말은 아니라고 한다. 대중 매체를 통해서 일반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렇게 된 지도 얼마 안 되었다 한다. 그래서 정확히 어느 시점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재즈1세대’라고 지칭하기 어렵다. 그래서 대략적으로 50~70년대에 연주 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사람들, 또는 우리나라에서 지명도가 있었던 연주자들을 통틀어 지칭한 것을 ‘재즈1세대’라고 부를 수 있겠다. 왜 이제서야 시작하냐고 꾸짖듯이, 취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서 ‘재즈1세대’라고 불렸던 이동기 선생님의 부고소식을 접했다. 시대와 역사를 품은 소중한 숨결, 즉 우리의 자산을 잃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어떤 세상에서 살았는지, 어떻게 음악을 했는지, 그리고 어떤 음악을 했는지를 거슬로 올라가 기록을 남기는 것이 부디 늦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글 | 안지인 기자 jiin@keri.or.kr도움말 | 박대식 새음악기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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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1
  • [Trace Up] 한국의 재즈와 가요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취재를 시작하며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재즈1세대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이따금씩 재즈 공연을 보면 드는 생각이다. 내 앞에서 연주하고 있는 저들이 저 무대에 설 수 있었던 발판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조금은 추상적이지만 과거 없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 의미 있는 과거가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다. 우리 <월간색소폰>은 그것을 찾아 취재하여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을 통해 한국의 재즈와 가요 음악사를 들여다보고, 그들을 이해함으로써 생기는 연대감이 우리 독자들을 통해 나오리라 믿는다. 가장 먼저 ‘재즈’의 정의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역시나 모두가 알다시피 재즈는 흑인 음악이고, 그들의 터였던 뉴올리언즈에서 시작했다고 정의한다. 그러면 한국 재즈는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가 취재의 관건이다. 취재를 시작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한국의 재즈1세대’라는 말이다. ‘한국’, ‘재즈’, ‘1세대’. 이 세 단어로만 보았을 때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끼리만 모아 놓은 느낌이다. ‘1세대’라는 단어에만 주목해본다면 ‘처음이라는 것을 일구어 낸 전 세대’의 뜻도 가지고 있고, 지금은 빛바랜, 혹은 오래된 세대라는 느낌을 들게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이 낯선 단어에서 느껴지는 애환은 어쩐지 설명할 수가 없다. 이렇듯 ‘재즈1세대’라는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듣게 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 의미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는 듯 하다. 사실 ‘재즈1세대’라는 말은 공식화되어 있는 말은 아니라고 한다. 대중 매체를 통해서 일반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렇게 된 지도 얼마 안 되었다 한다. 그래서 정확히 어느 시점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재즈1세대’라고 지칭하기 어렵다. 그래서 대략적으로 50~70년대에 연주 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사람들, 또는 우리나라에서 지명도가 있었던 연주자들을 통틀어 지칭한 것을 ‘재즈1세대’라고 부를 수 있겠다. 왜 이제서야 시작하냐고 꾸짖듯이, 취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서 ‘재즈1세대’라고 불렸던 이동기 선생님의 부고소식을 접했다. 시대와 역사를 품은 소중한 숨결, 즉 우리의 자산을 잃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어떤 세상에서 살았는지, 어떻게 음악을 했는지, 그리고 어떤 음악을 했는지를 거슬로 올라가 기록을 남기는 것이 부디 늦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글 | 안지인 기자 jiin@keri.or.kr도움말 | 박대식 새음악기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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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1
  • FUNKY BAND 제이쉐이커와 함께하는, '김정음의 孝 콘서트'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서교동 ‘孝’ 콘서트2018년 5월 12일, 케이아트 디딤 홀에서 <김정음의 孝 콘서트>가 열렸다. 서교동에 위치한 소위 말해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알려진 홍대에서 만나는 효 콘서트는 색달랐다.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풍성한 사운드와 맛깔나는 악기의 구성이 리허설부터 엉덩이가 절로 들썩이는 게 만들었다. 대한민국 최초 펑키밴드 J.Shaker공연의 시작과 끝은 펑키밴드 제이쉐이커와 김정음의 퓨전무대로 형성되었다. 드럼 김상돈, 기타 김범준, 피아노 김상민, 베이스 김정훈, 그리고 김정음과도 인연이 깊은 트롬본 이한진으로 구성된 실력파 밴드 제이쉐이커는 2006년에 결성된 한국 최초의 펑키밴드라 한다. 개성과 색깔이 짙은 밴드 제이쉐이커와 김정음의 조합이 꽤 잘 어울렸다.GUEST 케이지 김, 홍민아이날의 게스트로는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고있는 케이지 김과, 그리고 김정음의 제자로 색소폰 연주자로서의 신호탄을 알리는 홍민아의 연주도 있었다. 케이지 김의 신나는 무대 매너와, 김정음과 홍민아의 감미로운 듀엣 연주로 무대는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이날의 주인공 ‘김정음ʼ이날의 주인공 김정음의 첫 솔로곡 <열애>의 연주가 나오니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기대에 찬 반응을 보여줬다. 이같은 성원 속에서 김정음은 연달아 , <여러분>을 내리 솔로로 연주했다. 마지막에는앙코르로 <미워도 다시 한번>을 연주하며 마무리했다. 모두가 열정을 가슴에 품고 집에 돌아가게 된 뜨거운 무대였다. 글 | 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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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01
  • FUNKY BAND 제이쉐이커와 함께하는, '김정음의 孝 콘서트'
    서교동 ‘孝’ 콘서트2018년 5월 12일, 케이아트 디딤 홀에서 <김정음의 孝 콘서트>가 열렸다. 서교동에 위치한 소위 말해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알려진 홍대에서 만나는 효 콘서트는 색달랐다.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풍성한 사운드와 맛깔나는 악기의 구성이 리허설부터 엉덩이가 절로 들썩이는 게 만들었다. 대한민국 최초 펑키밴드 J.Shaker공연의 시작과 끝은 펑키밴드 제이쉐이커와 김정음의 퓨전무대로 형성되었다. 드럼 김상돈, 기타 김범준, 피아노 김상민, 베이스 김정훈, 그리고 김정음과도 인연이 깊은 트롬본 이한진으로 구성된 실력파 밴드 제이쉐이커는 2006년에 결성된 한국 최초의 펑키밴드라 한다. 개성과 색깔이 짙은 밴드 제이쉐이커와 김정음의 조합이 꽤 잘 어울렸다. GUEST 케이지 김, 홍민아이날의 게스트로는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고있는 케이지 김과, 그리고 김정음의 제자로 색소폰 연주자로서의 신호탄을 알리는 홍민아의 연주도 있었다. 케이지 김의 신나는 무대 매너와, 김정음과 홍민아의 감미로운 듀엣 연주로 무대는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이날의 주인공 ‘김정음ʼ이날의 주인공 김정음의 첫 솔로곡 <열애>의 연주가 나오니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기대에 찬 반응을 보여줬다. 이같은 성원 속에서 김정음은 연달아 , <여러분>을 내리 솔로로 연주했다. 마지막에는앙코르로 <미워도 다시 한번>을 연주하며 마무리했다. 모두가 열정을 가슴에 품고 집에 돌아가게 된 뜨거운 무대였다. 글 | 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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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01
  • [Jazz Club]푸른 달에서의 한때, 'ONCE IN A BLUE MOON'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냐는 질문에는 저마다의 대답과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대다수의 사람이 누군가와 함께할 때를 얘기하지 않을까. <원스인어블루문>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장소를 제공한다. 맛있는 음식과 퀄리티 높은 라이브 음악까지 더해진다면 이날의 기억은 언제든 떠올려도 행복한 순간으로 남을 것이다. 고요한 자유로움1998년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 횟수로 20년째 자리하고 있다. 오래 되었다라는 말보단 클래식하다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원스인어블루문> 내부의 전체적인 느낌은 푸른 빛이다. 마치 바닷속에 들어갔을 때 느껴지는 고요한 자유로움이 떠오른다. 무대 중앙에 보이는 ONCE IN A BLUE MOON이 새겨진 푸른 네온사인은 모던한 느낌과 동시에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고, 벨벳 질감으로 된 블루 빛 벽면은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식사를 할 수 있는 테이블이 중앙을 차지하고, 간단히 와인과 바를 즐길 수 있는 공간 또한 구분되어 있어 편했다. 테이블마다 초를 켜두어 자칫 차갑게 느껴질 수 있는 푸른 계열의 느낌에 따뜻함을 더했다. 파리의 연인2004년도에 방영했던 <파리의 연인>을 기억하는가. “애기야 가자”라는 유행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배우 박신양이 피아노를 치면서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를 불렀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바로 그 장면의 촬영지가 원스인어블루문인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 외 각종 TV 드라마, 영화, CF 등에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그 중 꼽으라면 드라마 <파리의 연인>, <내 이름은 김삼순>, 영화 <가문의 영광>이 있겠다. 그밖에 국내 가수들의 쇼케이스나 기업체들의 신제품 설명회 장소로도 자주 쓰이고 있는데 흥미로웠던 점은 프로포즈 이벤트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 그곳이 영원히 기억에 남을 행복한 순간으로 쓰여질 것이란 상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스크린과 라이브공연 중간에는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과거 뮤지션들의 연주 비디오가 나왔다. 스크린이 크다보니 마치 눈앞에서 공연을 보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와 닿았다. 이날 라이브 공연은 이 함께 했다. 현재 한국 재즈 씬에서 사이드맨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곽정민, 베이시스트 고재규, 드러머 최보미 세 명의 뮤지션이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날은 색소포니스트와 보컬도 함께했던 화려한 무대였는데, 각 악기의 솔로 타임을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스테이크와 와인 그리고 JAZZ원스인어블루문에서는 매일 공연을 볼 수 있는 것과 동시에,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이곳의 장점이다. 나라별로 다양하게 구비된 와인과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으며, 식욕을 돋구는 에피타이저부터 달콤한 디저트까지 풀코스로 만끽할 수 있다. 원스인어블루문은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이지만서도 음악에 목적을 둔 공간이다. 좋은 음향과 공연에 집중할 수 있는 조명이 그것을 반증한다. 가벼운 음료와 음악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라면 바를 이용해도 좋다. 글 | 안지인 기자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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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01
  • [Jazz Club]푸른 달에서의 한때, 'ONCE IN A BLUE MOON'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냐는 질문에는 저마다의 대답과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대다수의 사람이 누군가와 함께할 때를 얘기하지 않을까. <원스인어블루문>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장소를 제공한다. 맛있는 음식과 퀄리티 높은 라이브 음악까지 더해진다면 이날의 기억은 언제든 떠올려도 행복한 순간으로 남을 것이다. 고요한 자유로움1998년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 횟수로 20년째 자리하고 있다. 오래 되었다라는 말보단 클래식하다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원스인어블루문> 내부의 전체적인 느낌은 푸른 빛이다. 마치 바닷속에 들어갔을 때 느껴지는 고요한 자유로움이 떠오른다. 무대 중앙에 보이는 ONCE IN A BLUE MOON이 새겨진 푸른 네온사인은 모던한 느낌과 동시에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고, 벨벳 질감으로 된 블루 빛 벽면은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식사를 할 수 있는 테이블이 중앙을 차지하고, 간단히 와인과 바를 즐길 수 있는 공간 또한 구분되어 있어 편했다. 테이블마다 초를 켜두어 자칫 차갑게 느껴질 수 있는 푸른 계열의 느낌에 따뜻함을 더했다. 파리의 연인2004년도에 방영했던 <파리의 연인>을 기억하는가. “애기야 가자”라는 유행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배우 박신양이 피아노를 치면서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를 불렀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바로 그 장면의 촬영지가 원스인어블루문인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 외 각종 TV 드라마, 영화, CF 등에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그 중 꼽으라면 드라마 <파리의 연인>, <내 이름은 김삼순>, 영화 <가문의 영광>이 있겠다. 그밖에 국내 가수들의 쇼케이스나 기업체들의 신제품 설명회 장소로도 자주 쓰이고 있는데 흥미로웠던 점은 프로포즈 이벤트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 그곳이 영원히 기억에 남을 행복한 순간으로 쓰여질 것이란 상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스크린과 라이브공연 중간에는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과거 뮤지션들의 연주 비디오가 나왔다. 스크린이 크다보니 마치 눈앞에서 공연을 보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와 닿았다. 이날 라이브 공연은 이 함께 했다. 현재 한국 재즈 씬에서 사이드맨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곽정민, 베이시스트 고재규, 드러머 최보미 세 명의 뮤지션이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날은 색소포니스트와 보컬도 함께했던 화려한 무대였는데, 각 악기의 솔로 타임을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스테이크와 와인 그리고 JAZZ원스인어블루문에서는 매일 공연을 볼 수 있는 것과 동시에,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이곳의 장점이다. 나라별로 다양하게 구비된 와인과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으며, 식욕을 돋구는 에피타이저부터 달콤한 디저트까지 풀코스로 만끽할 수 있다. 원스인어블루문은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이지만서도 음악에 목적을 둔 공간이다. 좋은 음향과 공연에 집중할 수 있는 조명이 그것을 반증한다. 가벼운 음료와 음악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라면 바를 이용해도 좋다. 글 | 안지인 기자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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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01
  • [Seasonal Sound]'Joshua Redman'의를 들으며 함께하는 여름
    (월간색소폰)이은용 칼럼니스트= 앨범이 주는 ‘Joshua Redman’(조슈아 레드맨)의 상큼한 미소가 사람들로 하여금 기분 좋게 한다. 앨범의 음악도 그러하다. 앨범은 허비 행콕의 의 컨셉에 따라 스탠다드 곡들과 함께 스티비 원더, 밥 딜라, 죠니 미첼, 프린스 등의 팝 곡을 연주한 앨범이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조슈아 레드맨 식의 톤 컬러와 프레이징은 앨범의 기본적 안정성을 만들어 내고 있지만, 스탠다드 곡이건 팝 곡이건 곡을 해석하는 데 있어 새로움을 구조적인 측면에서 찾았다는 것, 특히 리듬의 다양성의 측면에서 찾았다는 것은 도드라지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조슈아 레드맨은 마치 존 콜트레인의 영향을 받은 마이클 브레커가 웨인 쇼터의 감성으로 연주하는 것 같은 연주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참고해서 이 앨범을 감상해도 좋다.조슈아 레드맨은 다른 동료 연주자들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스타성을 확고하게 만들어 나가고 있다. 또 고전적인 취향의 이미지가 적지만, 자기만의 스타일에 치우친 타 색소포니스트들에 비해서는 무게가 있다. 이것이 앨범에 담긴 조슈아 레드맨의 음악을 이야기한다. Joshua Redman의 또 다른 주요 작품들개인적으로 너무 아끼는 앨범인 는 처음 이 앨범을 접했을 때 정말 대단한 사이드 맨들과 연주를 했었던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마음에 품으며 듣게 된 앨범이다. 이 시기에 하버드 대학의 졸업생이자 예일대 법대 입학 허가를 받은 조슈아 레드맨은 음악인의 삶을 인정하게 되며, 곧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1993년 봄 그의 첫 번째 앨범을 발매하게 된다. 스스로 타이틀을 지은 이 앨범은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으며 그 해 가을에는 팻 메시니, 찰리 헤이든 그리고 빌리 히긴스의 모든 스타 군단과 함께 녹음한 앨범 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톱 재즈 앨범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들과의 앨범 가 그 결과물인 것이다. 팻 메스니와 함께 연주한 는 현재 뮤지션들에게도 최고의 연주였다는 평을 듣고 있는 곡이며 조슈아 레드맨은 인터뷰에서 함께 작업한 거장 뮤지션들로부터 많은 격려와 응원을 받았던 영광스러운 작업이었다고 늘 이야기했다.조슈아 레드맨 & 브래드 멜다우 _ 색소폰과 피아노의 앙상블조슈아 레드맨의 앨범 중 라는 앨범은 두 거장의 첫 듀오 앨범으로서 두 연주자는 90년대 초 젊은 유망주에서 어느덧 동시대를 대표하는 거물로 성장한 슈퍼 뮤지션들이라 할 수 있다. 조슈아 레드맨은 1998년 음반 (for Changing Times)에서 다시 한 번 브래드 멜다우를 피아니스트로 기용하면서 함께 활동했다. 하지만 이후 각자의 음악적 개성이 뚜렷해지고 서로의 바쁜 일정으로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할 수 있는 기회는 이전처럼 잦을 수 없었다. 그런데 브래드 멜다우의 와 의 이 두 음반이 녹음되던 무렵에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그들의 새로운 음악적 자극을 얻게 되고 그것은 두 사람만의 이중주 무대로 이어졌다. 2011년부터 시작된 조슈아 레드맨과 브래드 멜다우의 듀오 음악회는 두 사람의 일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되었고 공연이 거듭될수록 두 사람의 연주 안에서의 즉흥적인 대화는 더욱 끈끈함을 더하게 되었다. 재즈 신에서 잘하는 색소폰 주자와 피아니스트의 이중주는 늘 있었다. 하지만 그 연주가 재즈 클럽이 아닌 콘서트홀 무대에 오르고, 하나의 작품으로 남은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재즈가 즉흥연주의 음악이니만큼 두 사람만의 연주로 내실 있는 연주를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탁월한 색소폰과 피아노 이중주의 음반들은 간혹 있었다. 즉흥으로 연주하는 이중주란 쉽게 도전할 수 있는 녹음이 아니다. 베이스와 드럼이라는, 연주의 ‘뒤 공간’을 채워주는 악기가 없을 때 즉흥연주의 한 음, 한 음은 모두 민 낯을 드러낸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슈아 레드맨과 브래드 멜다우가 그리 많은 사람이 엄두도 내지 못했던 연주를 하려 하는 것은, 즉흥연주자로서의 확신 그리고 그들만이 갖고 있는 개성 때문이다. 탁월한 독주자로서, 즉흥연주자로서 두 사람의 기량은 새삼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그들의 젊은 시절에 재즈계가 인정한 것이었다.글 | 이은용 MCMI 음악학원 대표suyeo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6-01
  •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철학과 신념으로, '색소폰 수리 전문가 양철호'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조차도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일까?”라는 필터를 끼고 보면 그것을 투명하게 바라다보는 것이 몹시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순수하게 음악과 악기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 있다. “연주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는 색소폰 수리 전문가 양철호를 만났다. ​원래는 어떤 일을 했었나?장안대학교에서 세무회계를 전공하였고, 이후 해군 군악대에 자원입대하여 플루트로 군 복무하였다. 그 ​후에 삼영 화학주식회사라는 회사 경리부에서 2년 정도 근무하였다.어떤 계기로 음악 분야에 입문하게 되었나?회사 생활을 2년 정도 하다 보니 인생이 황폐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계산을 좋아하고, 계산을 즐기는 사람이었다면 그 일을 했을 때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음악이었기 때문에 몸은 회사에 있어도 머릿속엔 항상 음악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로지 회사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었다. 회사 일이 끝나면 교회에 있는 나만의 공간에서 연습할 수 있었다. 그 빈 공간에서 악기를 불었을 때 울리는 메아리는 나의 정신을 행복하게 만들었기에 나는 그 시간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런 생활을 2년 동안 반복하다보니 마음은 항상 연습하는 곳에 가 있고 몸은 마치 습관처럼 회계 업무를 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를 돌아봤던 이 순간이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다.하던 일을 그만두고 갑자기 음악으로 전향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것 같은데?당시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삶이 괴롭다고 얘기했을 때 돌아오는 말은 자신의 적성에 안 맞은 일을 하는 것을 누가 좋아하냐…, 다 그냥 그렇게 사는 거다… 는 말들이었다. 부모님도 나의 그런 결정에 많이 당황하시고 불편해하셨었다. “과감히 도전해라” “거기서 뭔가 찾을 수 있을 거야”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많이 낙담도 되었지만 내가 행복해하는 일을 하고자 과감히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996년 12월 31에 사표를 냈다.회사를 관둔 뒤 어떤 일을 하였나?해군 군악대에 있었을 때 플루트를 불었었다. 당시 그곳에서 연습하고, 합주하고, 연주하면서 관악기에 매료되었던 것이 내가 플루트 입시를 시작하게 된 원동력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제대로 교육을 받고, 제대로 학교에 가기 위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지만 금세 현실의 벽에 부딪혔었다. 경제적인 부분 때문이었다. 요즘은 아르바이트라는 것이 일반화되었지만, 당시에는 아르바이트를 여기저기서 하는 것이 보편적이지 않았고, 일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랬던 실정에 음악을 하는 데에 있어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은 만만치가 않았다. 모든 시간을 연습에 투자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좋은 악기를 써야 하고, 교습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부모님께 레슨비용을 받아서 교습을 받는 시간이 굉장히 고통스럽더라. 부모님이 노력하셔서 받은 페이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기 때문에 너무 감사하고 죄송하다. 연습하는 과정에서도 이게 바람직한 건 지, 현명한 건지 계속 생각하게 되더라. 그 과정에서 내 인생이 입시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단지 음악과 함께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음악에 관련 된 일을 하고 싶다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누구의 도움이 아닌 나 스스로가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이다.악기점에서는 어떻게 일하게 되었나?그 당시 대한민국에 ‘길ʼ이라고 한다면 다 종로에 있었다. 해군군악대 후배가 낙원상가의 한 악기점에서 일하고 있어 무작정 찾아갔었다. 같이 상의를 하고, 근처의 악기점에서 한 1분, 2분 정도 면접을 봤는데(사실 면접 이라기보단 대화에 가깝다), “직원을 뽑지 않겠다”라고얘기하시더라. 그렇게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바로 옆가게에 있는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어떤 악기를 보러왔나 싶어 말을 거시길래 “악기를 사러 온 것이 아니고, 악기를 판매하거나 고치는 일을 해보고 싶어서 왔다”고 얘기했더니 그분이 눈이 동그래지며 놀라시더라. 마침 직원을 찾고 있으셨던 거다. 그분이 “조건이 뭔가요?”라고 물으시길래 “이쪽 일 아무것도 모르고 경력도 없습니다. 바라는 것은 일을 할 기회를 얻고 싶을 뿐입니다. 계약조건은 사장님께서 해주시는 것으로 만족할 겁니다”라고 말하니 언제부터 일할 수 있냐고 되물으시더라. 당장 이라도 일하고 싶었지만 그 상황 자체가 내게도 워낙 갑작스러웠던지라 일주일 정도 시간을 벌었던 것 같다. 일주일 동안 고민하고 첫 출근을 했다. 종로에서의 일이 시​작된 것이다.악기점에서 일하는 동안 어땠었나?그때가 1997년도였다. 출근 시간은 9시까지였고, 집은 안양이었다. 1호선을 타고 종각역에 내려서 낙원상가 2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는 것이었다. 전철 45분에 걷는 것 15분으로 총 1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9시가 출근 시간이었지만 그 전에 출근해서 혼자 악기도 좀 만져보고, 명상도 하고 그랬다. 정말 열심히 일했었다. 그러다 프랑스 셀마에 공부하러 가게 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가?배움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내가 악기점에 입문해서 배우는 것이 충분했다면 아마 못 느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악기점에서 악기를 판매해서 십만 원의 이율을 본다 고 쳤을 때 한 오만 원 정도가 수리비로 나간다. 자체 수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수리를 의뢰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느낀 것이 판매도 중요하지만 사후관리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것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판매만 한다는 것은 좋은 상황으로 지속적이지 못하겠더라. 수리하는 방법과 기술을 내가 일하는 악기점에서는 배울 수 없었고,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어밖에 모르는데 방법이 없지 않나….셀마에서는 얼마 동안 공부했나?프랑스에 있었던 기간은 총 6개월이었고, 셀마에서 공부한 건 3개월이었다. 한국인으로선 최초였고, 그렇기에 특별한 기회를 얻었다고 하면 될 것 같다. 셀마는 학교의 개념이 아닌 순수한 회사이기 때문에 가르쳐 주시는 분 도 실무자이다. 교육을 위해서 그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작업을 지켜보면서 배우게 되는데, 작업을 하는 상황 속에서 교육생인 내가 질문을 할 때 그 질문에 답변을 줄 수 있다. 그때 나를 가르친 실무자 이름이 필립이었는데, 필립이 빠른 속도로 프랑스어로 얘기하니 하나도 못 알아듣겠더라. 언어를 준비한다고 했어도 일상적인 언어와 회사에서 쓰는 언어 그리고 회사에서 쓰는 물품과 장비, 부속에 관련된 단어들은 알아들을 길이 없었다. 그 당시에 MD라고 하는 미니 디스켓을 가지고 갔었는데, 속도가 빨라서 잘 이해를 못 하겠으니 여기 마이크에 당신이 말을 해 주면 내가 집에 가서 이해해오겠다고 얘기했다. 그것을 이해하고 그분이 마이크에 설명을 하나하나 해주더라.셀마에서 교육 이수를 하려면 불어를 했었어야 할 텐데?사실 언어에 그리 관심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셀마에 가야 했기 때문에 준비했다. 한국에서 준비했던 불어는 학원레슨 방식이었다. 맨투맨이 아닌 한 반에 열 명 정도 앉혀 놓고 지도하는 방식이어서 섬세하게 발음 교정받기가 힘들었다. 비슷하게만 하면 그냥 넘어가곤 했다. 그런 생활을 9~10개월 정도 한 것 같다.셀마 교육과정 동안 어떻게 공부했나?하숙했던 집에 딸이 있었다. 그분의 도움을 받아서 하루에 2시간씩 불어를 배우고 나는 플루트를 가르쳐 드렸다. 수업 때 필립이 한 말을 녹음해서 들려주면 그분이 번역해주었다. 그러면 내가 그 얘길 듣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서 그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들고, 문장의 구성이 괜찮은지 묻고 그것을 A4용지에 다시 적고 그 글을 자기 전까지 다 외웠다. 적어도 필립 앞에서 A4용지를 들고 말하진 않게 할 정도로 외웠다. 그러니 필립 입장에서는 어제는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던 애가 다음날엔 문장구성을 하니 꽤 놀라웠을 것이다. 이 방식으로 반복하다 보니 점점 도구, 부속, 지시사항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면서 한 달 정도 되니 프랑스 사람과 ​농담을 하고 있더라.‘노나까 보에끼ʼ에 대해 말해달라.‘노나까 보에끼ʼ는 무역회사이다. ‘셀마ʼ라는 프랑스 회사의 지분을 가진 회사이기도 하고, 체계적인 메이커를 독점하고 있는 규모가 큰 회사이다. 아시아 총판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셀마라는 브랜드가 한국에 들어오려면 노나까 보에끼를 통해서 들어와야 한다.어떻게 인연이 닿은 것인가?셀마에서 공부를 하고 독립해서 일하고 있었는데, 전에 일했던 악기점에서 다시 스카우트 제안이 왔었다. 사장님이 현악기 전문점을 내셨는데 세 달 만에 재정적 상황이 어려워져 내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렇게 진열된 현악기를 치우고 관악기, 특히 색소폰을 진열하여 그 가게를 개점하게 되었다. 임대료와 보증금이 비싼 상황이라 직원도 뽑기 어려운 실정이어서 혼자서 수리, 판매, 상담, 배달 일을 다 했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수리하고, 상담하고, 판매하고, 간혹 선생님들이 오시면 대화하고 밤 12시에 퇴근하는 일상이 반복되었었다.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는 수준까지 매출이 올라직원 한 명을 뽑아서 1년 반 정도를 집중해서 가르쳤다. 그런 상황 속에서 존 노나까가 한국에 왔고 우리 샵이 일본의 ‘노나까보에끼ʼ의 회사에서 셀마라는 악기를 수입하게 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됐다. 일종의 독점계약 같은 것을 한 거다. 일본식 수리가 배우고 싶었던 내게 존 노나까 사장님이 배움의 기회를 주셨고, 그로 인해 토루 사바노 선생님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 개인레슨 해주셨었다.토루 사바노 선생님께 개인 교습을 받을 때 과정이 어땠나?일본식 작업의 스타일을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다. 그토록 섬세하게 작업하는 모습을 처음 봤었기 때문이다. 작업의 방식은 비슷할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을 자꾸 느끼면서 그게 해결될 때까지 섬세하게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손이 많이 가더라. 미세한 스크래치 하나도 인정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그렇게 처리하시니 결과적으로 깔끔하게 나오더라. 그걸 알게 되면서 매우 감동했다. 수리하는 사람들은 섬세한 거 하나를 보고 배운다는 것이 굉장히 값진 거다. 그 섬세한거 하나 때문에 작업의 결과가 안 좋게 나오는 게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 덕분에 내가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미국에는 어떻게 가게 되었나?결혼하고 나이가 드는 과정에서 내가 40이든 60이든 교육을 받고자 한다면 받을 수 있겠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뿌리를 내리면 쉽게 움직일 수 없지 않나, 정착하고 그런 부분 때문에 두려웠다. 나는 원래 자유롭고 싶은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더 뭔가에 메이기 전에 하고 싶은걸 하고 싶었다. 플루트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을 늘 간직했었는데, 우연히 <플루트 앤 플루티스트>라는 잡지에 조나단 랜달이라는 선생님께 어떤 분이 교육을 받고 왔다는 행보를 써놓은 부분을 읽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분한테 교육을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준비하다가 잡지에 나왔던 분하고 통화가 되어 미국 가는 것을 준비하게 되었다.조나단 랜달 선생님에 대해 말해달라.조나단 랜달 선생님은 전문가용 플루트를 만드시는 분이다. 이분이 대단한 게 어디서 사다가 작업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하나 다 본인이 직접 만드신다. 말 그대로 핸드메이드인 거다. 자신이 만드는 것에 대해서 완벽을 추구하는 그런 분이셨다. 플루트의 수리 과정, 플루트의 마우스피스를 깎는 과정 등을 이수할 경우에 각각 분야별로 수료증을 주시는데, 그렇게 세 개의 과정에서 수료증을 받았다.다년간의 유학이 본인에겐 어떤 의미인가?내 인생의 철학을 만드는 기회가 됐다고 본다.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어떤 삶으로 살다 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돌아보게 하고, 구체적인 체계를 잡게 된 계기였다.색소폰 수리를 하는 데에 있어 자신만의 신념이 있나?사람은 누구나 적게 일하고 많이 받고 싶어 하는 게으른(?) 본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일에는 단계가 있는데 예를 들어 1단계, 2단계, 3단계 등을 거쳐 완성된 작업물이 만들어진다 치자. 나는 그 단계의 어느 것도 건너뛰고 싶지 않다. 단계를 건너뛴다는 것은 사실 요령을 말한다. 그 요령이 좋은 의미의 요령이 아니라 좋지 않은 의미의 요령이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악기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수 십 대의 악기를 고치면서 짧은 시간에 여러 악기를 고쳤다는 그런 만족을 얻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악기를 고쳐도 그 하나의 악기가 만족스럽게 고쳐졌다면 나는 거기에 만족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이 사회 속에 산다는 것은 어우러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도움을 주고, 또 도움을 받는 그런 관계가 바람직하지, 나만 도움받고 나는 도움 주지 않는 그런 삶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이 일을 배우기 위해서 어디에서 공부하는 게 바람직하고, 어떻게, 어떤 준비를 하는 게 좋은지 등의 조언을 받을 수 있는 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내 분야의 일을 배우기 위해 나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새롭게 이 일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서 아름다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고, 처음에 가졌던 음악을 사랑하는 그 마음 그대로 변함없이 이 일을 하고 싶다. 글 | 안지인 기자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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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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