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시카고(Chicago) 재즈시대

1917년 세계1차대전 발발로 뉴올리언스가 군사도시로 지정되면서 스토리빌의 많은 업소가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자, 수많은 재즈 연주자들은 미시시피 강을 거슬러 북쪽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 도시들 중의 하나가 바로 시카고이다. 당시 시카고는 산업이 발달한 대도시였으며 자연스럽게 크고 작은클럽이 발달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재즈 사에서는1925년~1930년대를 시카고(Chicago) 재즈시대라 하는데, 뉴올리언스 스타일의 집단 즉흥연주보다는 좀 더 세련된 스타일로 바꾸어 나가는 것,즉 뉴올리언스 재즈의 기본 포맷은 유지하되 화성적 사운드를 좀 더 세련되게 발전시키고 2박과 4박에 강세를 두어 스윙감(Swing Fill)을 배가시키는 특징을 가지게 된다. 또한 뛰어난 연주자인 빅스 바이더벡(Bix Beiderbecke, 트럼펫)의 영향으로 백인 연주자들의 참여 또한 변화된 특징 중의 하나였다.

 

재즈의 대중화

1920년대 미국의 경제 성장과 생활 수준의 향상은 소비사회를 만들게 된다. 소비사회와 함께 광고산업이 발달하게 되었고 대중매체였던 라디오를 통해 재즈는 전 세계적인 대중음악으로 자리 잡게 된다. 20년대 후반에는 레코드 산업이 활발해지면서 방송국이 있는 뉴욕으로 재즈의 중심지가 옮겨 가게 된다. NBC, ABC 등의 매체가 맨해튼에 본사를 두고 있고 당시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보드빌(Vaudevile, 히극 뮤지컬)이 큰 유행을 타고있었다.

 

코튼 클럽(Cotton Club)

쇼 문화와 엔터테인먼트가 뉴욕을 중심으로 유행하면서 브로드웨이와 할렘 부근에 많은 클럽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중 규모가 큰 곳이 코튼 클럽(Cotton Club)이다. 코튼 클럽은 1923년에 개장해 현재까지도 영업 중인 가장 오래된 나이트클럽이다. 재즈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백인만 입장이 가능했으나 스윙재즈의 유행으로 흑인 재즈뮤지션 출연이 가능하게 되었다. 1927년에는 듀크 엘링턴(DukeEllington) 오케스트라가 재즈와 블루스를 오랜 기간 연주하였다.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1899~1974)

재즈사를 통해 가장 많은 곡을 작곡하고(1,500~2,000여 곡 혹은5,000여 곡이 넘는다는 설도 있음) 클래식과 더불어 재즈를 예술 음악으로 격상시킨 인물이 바로 듀크 엘링턴이다. 본명은 애드워드 케네디 엘링턴이고 현재도 그의 곡들이 전 세계 재즈클럽에서 연주되고 있다. 7살에처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10살 때 이미 작곡했을 정도로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재능을 보였는데, 한 유명한 미술학교에서 장학금을 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하기도 했다. 17살 때 자신의 악단을 만들어 고향인 워싱턴에서 연주 활동을 시작하고, 1920년대뉴욕에 진출해서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했다. 1927년과 1931년에는 코튼 클럽에서 자신의 빅밴드를 지휘하며 스윙시대 전국구 스타가 된다.

듀크 엘링턴 악단은 악기력이 뛰어난 솔리스트들을 많이 배출하게 된다.트럼펫 쿠티 윌리엄스(Cootie Williams)는 당대 최고의 트럼펫 주자였고 색소폰의 자니 하지스(Johnny Hodges) 등이 듀크 악단의 솔리스트였다.듀크 엘링턴은 자신의 곡을 연주할 연주자를 연상하며 작곡하는 스타일이었다. 기량이 뛰어나고 개성이 강한 연주자가 솔로 연주를 하면 뒤에 오케스트라가 받쳐주는 스타일의 곡이 많다. 1929년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코튼 클럽의 경영이 어려워지며 코튼을 떠난 듀크 엘링턴은 잠시 유럽에 진출하기도 하였으며, 뉴딜정책(루스벨트경제개혁)으로 다시 미국 사회의 경제가 활기를 찾자 방송을 통한 활발한활동으로 더욱더 명성을 쌓아가게 된다. 경제 대공황의 우울한 시기를 보냈던 사람들은 신나고 경쾌한 음악에 열광했으며 듀크 엘링턴의 음악은 그러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대중음악이었다. 재즈 리얼북(Real book, 재즈 스탠다드 곡 모음집)에 가장 많은 곡이 실려 있으며 오늘날에도 재즈맨들이 가장 선호하고 좋아하는 곡들이기도 하다.

 

캔자스시티(Kansas City)

금주법(1920-1933)과 경제 대공황(1929-1933) 시대에도 캔자스시티는 정부의 간섭과 경제 대공황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는 곳이었다. 농업과축산업이 발달한 곡창지대라는 이점은 상업 도시로 크게 번창할 수 있는 요건을 마련해 주었고, 돈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밤 문화도 자연스레 발달 할 수 있었다. 금주법이 시행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갱스터들과 부패한 정치인들은 밀주를 만들어 부를 축적하였고, 도박과 범죄가 성행하는 무법 지대는 중앙정부의 세력권이 미치지 못하는 최고의 환락 도시를 만들어 놓게 되었다. 이러한 독특한 사회적 상황은 경제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은 뮤지션들을 캔자스로 모이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캔자스시티(Kansas City)의 재즈 뮤지션들

뉴올리언스에서 시작된 재즈는 시카고를 거쳐 뉴욕에 스윙시대를 열었고 캔자스의 재즈는 비밥(Be bop) 재즈의 시작을 알렸다. 찰리 파커(Charles Parker, 1920-1955)가 캔자스 출신이며 레스터 영(Lesteryoung, 1909–1959)이 캔자스에서 경력을 쌓았다.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1904–1984)도 캔자스에서 피아노로 데뷔하였으며 후에 카운트 베이시 악단을 이끌게 된다. 트럼펫에 클락 테리, 마일스 데이비스도 미주리 세인트루이스 출신이다. 재즈사에서 캔자스가 중요한 이유는 스윙시대와 더불어 비밥의 시대로 가는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금주법, 대공황 시대임에도 밤새도록 잼 세션을 할 수 있었으며 연주자들끼리의 배틀 형식의 연주는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연주법을 자연스럽게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캔자스시티’에서 조슈아 레드맨이 연기한 레스터 영과 제임스 카터가 연기한 콜맨 호킨스(영화에서 언급되진 않았지만 정황이 콜맨 호킨스라 생각된다)의 잼 세션 씬에서처럼 캔자스의 재즈 스타일은 나이트클럽 음악을 벗어나 예술적인 영역으로 올라서는 시발점으로 보인다.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 1904–1984)

카운트 베이시 악단은 캔자스시티를 대표하는 빅밴드이다. 듀크 엘링턴이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면, 카운트 베이시는 캔자스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최고의 연주자들이 그의 밴드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본래 카운트 베이시는 월터 페이지 밴드인 ‘블루 데블즈’(Blue Devils)의 피아노 주자였다. 블루 데블즈는 당시 캔자스시티에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밴드였고 탁월한 연주 기량을 가진 멤버들이 많았다. 후에 베니 모턴이 이끄는 악단으로 흡수되며 캔자스 최고의 악단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베니 모턴의 급작스러운 죽음으로 카운트베이시가 악단을 이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카운트 베이시 악단이 만들어지게 된다. 카운트 베이시 악단은 듀크 엘링턴 빅밴드와 비교가 되곤 했다. 곡 전면에 짜임새 있는 편곡으로 다소 복잡해 보일 수 있는 듀크 엘링턴의 밴드와는 다르게 간결한 편곡과 리프(Riff) 스타일(한 악절을 반복적으로 연주하며주고받는 형식의 편곡, Call&Response 스타일)이 뉴욕의 스타일과는 다른 점이었다.

1937년 뉴욕으로 입성한 베이시 악단은 쇼 비즈니스의 도시인 뉴욕에서의 성공으로 ‘스윙의왕’이라는 애칭을 얻으며 캔자스 출신 연주자로서의 첫 성공을 거두게 된다. 아직 베니 굿맨, 레스터 영 등에 대한 이야기도 풀어내지 못할 만큼 30년대 스윙시대에는많은 뮤지션들이 즐비하다. 재즈가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얻으며 황금기를 맞이하던시대가 이때였으며 예술적인 범주에 속하는 시작점도 이때라 생각한다. 재즈가 어려워지기 시작하는 시점도 여기서부터일까? 다음 회에 베니 굿맨과 다른 연주자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글 | 이종우 경성대 동주대 외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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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ZZ AGE] 세계 재즈의 역사 본격적인 스윙시대의 개막, 193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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