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01(월)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의 적막을 깨우며 색소폰을 든 사람들이 하나둘씩 연습실로 모이기 시작했다. 방음시설이 갖추어진 녹음실과 연습공간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스튜디오였다. 아직 다 시들지도 않은 꽃을 버려놓았다며 한 송이씩 꽃병에 꽃을 꽂는 정미정 단원의 마음처럼 내부는 조용하고 깨끗했다. 색소폰을 통해 화합과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그들과의 인터뷰가 더욱 기대되었다.




동호회? NO! 아카데미? YES!
코리아색소폰하모니는 2004년에 창단한 코리아색소폰필하모니(KSP)에서부터 시작했다. 2013년에 단명을 코리아색소폰하모니로 변경하면서 한국종합예술학교 석좌교수인 ‘박경삼’ 초대단장과 새 출발을 했다. 이곳만의 특이점이라면 단연 수석 단원제를 도입하였다는 것인데, 수석 단원들로부터 파트별로 지도를 받고 난 다음에 전체 합주 연습을 하여 전체적인 밸런스를 밀도 있게 끌어 올렸다. 또한 그밖에 스케일 연습, 화성학, 스윙과 블루스 리듬 같은 재즈 이론도 같이 공부를 한다. 이런 부분으로 미루어 볼 때 코리아색소폰하모니는 동호회라기보다는 색소폰 스쿨 혹은 색소폰 아카데미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KSH만의 색소폰앙상블 연주곡집
어떤 음악 단체든 자신들만의 음악적 색깔을 잘 보여줄 수 있는 레퍼토리가 아주 중요하다. 특히 유니크한 구성의 합주단 같은 경우는 레퍼토리 확보에 더 많은 공이 들어가기도 하는데, 코리아색소폰하모니같은 경우는 이런 부분이 아주 잘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편곡료를 따로 지불하여 코리아색소폰하모니만의 색소폰앙상블 연주곡집을 발간한 것.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연주는 이들에게서만 들을 수 있다는 독자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조화
코리아색소폰하모니는 프로와 아마추어로 구성되어 있다. 음악을 하는 데에 있어 프로와 아마추어의 세계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양쪽 모두의 발전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지휘자와 단원들의 생각이다. 아마추어의 저변이 넓어져야 프로들이 설 자리도 많아지고, 서로 적극적으로 다가가 도움을 주고 받아야 상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실제로 프로색소포니스트로 구성된 서울색소폰앙상블과 교류하고 있다. 이들이 수석 단원으로 합주연습 때 각 파트를 지도하고 필요시에 개인레슨을 진행하기도 한다. 

 

다채로운 연령대
어떤 단체에서 다양한 연령대가 이토록 조화롭게 갈 수 있는지 묻고 싶을 정도로 이곳의 연령대는 꽤 차이가 난다. 20대 초반부터 80세가 넘은 단원까지 세대 스펙트럼이 넓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음악이나 연습하는 과정을 볼 때 세대차이의 갭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음악이라는 하나의 매개체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팀의 모범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성연욱 단장)

많은 악기중에 색소폰이라는 악기에 유독 매력을 느꼈던 이유가 있는가.

색소폰은 연주하는 사람의 감정이나 연주환경에 따라 소리가 다르게 난다. 그래서 감정표현이 자유롭다. 관악기는 연주자의 호흡기관과 연결되어 소리가 나기 때문에, 연주하는 동안에는 사람의 몸통도 악기가 된다. 그래서 색소폰을 연주할 때는 악기의 소리가 곧 나의 소리라는 생각이 들고, 나를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욱 매력이 있다.
일본의 <미베몰색소폰앙상블>과의 협연을 한 적이 있다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무식해서 용감했었다는 생각만 든다. 2003년도에 오사카 교민 행사에 초청되어서 미베몰색소폰앙상블과 협연을 했는데, 미베몰앙상블이 얼마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앙상블인지도 모르고 갔었다.
어떤 계기로 진행되었는가.

2002년도부터 여기저기서 색소폰을 배우던 사람들이 모여서 아마추어 색소폰 앙상블을 창단했는데 아마 국내 최초일 것이다. 실력보다는 의욕이 대단했었다. 정기연주회뿐만 아니라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된 관악축제에도 참여했고, 부산 MBC에도 초청되었다. 실력이 받쳐줘서 초청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색소폰 앙상블이었고 또 단원 중에는 사회 각 처에 발이 넓은 분이 많았다.

일본 공연은 어땠었나.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미베몰앙상블의 소리는 아름답고 깨끗했으며, 속삭이듯 잔잔하다가도 격정적인 울림을 주기도 하는 환상적인 화음이었는데 반해, 우리는 그저 크게만 불면 되는 줄 알고 거친 소리를 마구 불어댄 것이다. 우리 가요를 연주했기 때문에 교민들에게 박수는 더 받았지만, 공연을 마치고 귀국한 뒤 그 충격과 회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앙상블이 해체되고 말았다. 그 후 2004년에 단원 중의 서울대 ‘성굉모’ 교수님이 서울음대에서 색소폰을 전공하신 분들을 지휘자로 모셔왔고, 클래식을 연주하는 코리아색소폰필하모니(KSP)를 창단했다. 그때부터 비로소 기초부터 체계적으로 배워가면서 제대로 된 앙상블을 하게 되었다. 단명은 2013년도에 코리아색소폰하모니(KSH)로 변경하였다.
자신만의 음악 철학이 있나.

처음에는 음악이든 악기연주든 혼자 즐기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연습도 혼자 했고 스스로 즐기는 수준까지만 하면 만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기초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 나쁜 습관이 들었고 그게 아직도 고쳐지질 않아서 애를 먹고 있다.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혼자 연주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느끼는 즐거움도 있지만, 남에게 들려주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는 기쁨과 여럿이 같이 연주하면서 화음을 통해서 하나가 되는 기쁨과 행복, 이런 것들이 훨씬 보람이 있다.

색소폰과 관련된 자신만의 에피소드가 있나.
10여 년 전에 ‘정인채’ 회원과 둘이서 토요일 저녁마다 양재천에서 공연한 적이 있다. 가로등이 켜진 양재천의 가을밤, 밤안개 하얗게 낀 봄날 저녁, 물소리 풀벌레 소리 합창하던 여름밤, 심지어 흰 눈 내린 겨울밤에도 언 손을 녹여가며 토요일마다 다리 밑에서 연주했다. 지금은 너무 흔하지만 그때만 해도 길거리에서 연주하는 문화가 없었다. 그때 양재천에서의 연주는 우리나라 길거리 연주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시끄럽다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긴 했지만 산책하던 사람들이 가로등 밑에 둘러앉아 조용히 듣고 가기도 하고, 우리 연주를 듣고 색소폰을 사서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근처에 살던 전문연주자들도 가끔 나와서 듣곤 했는데, 연주가 끝나면 다가와서 참 잘 들었다며 연주하는 모습이 너무 행복해 보인다고 했다. 본인들은 직업의식을 갖고 연주하기 때문에 항상 긴장의 연속이지 행복하게 연주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런 점이 바로 아마추어 연주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자 행복이 아닌가 싶다. 

 

(정미정 단원)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린다.

37년 동안 고등학교에서 한문 교사로 교직에 있다가 작년에 명예퇴직했다. 지금은 외손자 보는 일을 가장 우선으로 하고 있고, 행복한 마음으로 하고 있다. 색소폰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색소폰은 12, 13년 전에 둔촌고등학교에 있었을 때 체육 선생님으로 계셨던 분을 만나 시작하게 되었다. 그분이 독실한 크리스천이기도 하고 전부터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굉장히 잘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교를 목적으로 색소폰을 배워두면 앞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도 노후에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야마하 색소폰을 구입하여 배우기 시작했다.
색소폰은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어느 날 교회에서 캄보디아로 선교를 간 적이 있었다. 캄보디아의 어느 조그만 마을에 가서 색소폰으로 복음성가를 연주했었고, 마지막 돌아오기 전날은 프놈펜 광장에서 현지 교인들의 워십과 함께 복음성가를 연주했었다. 그게 지금까지도 스스로 의미가 컸고 은혜로웠다. 색소폰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있고, 그 은혜를 음악을 통해 나눈다는 부분에서 의미가 있다.
KSH 단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KSH 여러분과 함께해서 감사드린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한번은 아프리카 여행 때 어느 공항에서 이런 글귀를 봤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천천히 멀리 가고 싶으면 친구와 함께 가라.” 아프리카 속담인데, 그 말이 매우 와 닿았었다. KSH도 함께라서 오랫동안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종택 단원 교향곡을 주로 많이 연습할 텐데 연습하는 과정이 어렵지는 않았나. 상대방 소리를 듣고 음의 폭이 큰지 작은지를 잘 봐가면서 조절을 해야 하는데 연습 부족이나 어떤 한계로 인해서 제대로 조화를 못 이루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나름대로 개인 연습을 더 하고 노력하다 보니 조금씩 맞춰지는데, 그래도 차이는 있다.
앞으로 KSH가 가야 할 방향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그 단체가 오래도록 지속되기 위해서는 대개 그 구성원들 모두가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연습, 혹은 규정을 잘 따르는 것 등이다. 그래야 그 조직이 오래 유지되고 또 함께하는 즐거움을 느낀다. 즐겁지 않으면 나오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기본인 그런 자세를 가져야 오래갈 수 있고, 스스로 더 잘하려는 생각이 들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우리의 하모니가 계속 유지되고 발전되어 갈 것으로 생각한다. 개인적인 목표가 있다면. 현재 알토색소폰 파트를 맡고 있는데, 소프라노도 해보고 싶다. 그리고 우리 KSH 단원들 각자 모두가 건강해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잘 이루어 갔으면 좋겠고, 나 또한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다.

(정인채 단원)

색소폰을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말해달라. 38세 때이다. 일도 많이 하고 여유도 좀 생기고 그러다 보니 이른 나이에 일찍 안정을 찾았었다. 그러다 보면 술을 마신다든지 담배를 핀다든지 조금 엇나가게 되는 부분이 있지 않나. 그런 것보다는 건전하고 좋은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을까 고민을 하게 되었었다. 한번은 아내에게 농담으로 “내가 나이도 40도 다 돼가고 색소폰이나 좀 배워볼까?”하며 색소폰 이야기를 한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러고는 곧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내 말을 기억했던 아내가 감사하게도 미국여행 길에 색소폰을 사 온 거다. 그래서 색소폰 배울 만한 곳을 찾다 마침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색소폰 강좌가 있어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단장님을 처음 만났다.
색소폰을 하면서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나.

단장님하고 둘이서 매주 토요일마다 학여울역 다리 밑에서 8시부터 10시, 어떤 때에는 1시까지도 연습을 했었다. 거기가 12차선이라 다리가 굉장히 넓고, 아치형으로 되어 있다 보니 밑에서 색소폰을 불면 소리가 올라가 공명이 생기면서 맑은소리가 나온다. 아는 교수님이 우리 얘기를 듣고 오셔서 소리를 들어보시더니 그 다리에 대해 칼럼을 쓸 정도로 소리가 좋았다. 아무튼 그렇게 연습을 하는 와중에 갑자기 VJ특공대가 찾아와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지역별로 여름을 어떻게 보내는가에 관한 내용으로 나왔는데, 우리는 서울 편에서 다리 밑에서 색소폰을 불며 여름을 나는 것으로 나갔다. 

 

(차은경 단원)

 KSH의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어떤 점이 좋은가.

일단 배워간다는 즐거움이 크다. 사실 클래식이라는 것은 일상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지 않나. 그러나 집중해서 들으려고 하면 잘 안 듣게 되고 그랬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클래식을 연주하면서 클래식에 관심이 많이 생겼고, 또 더 잘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이전에는 전체적인 멜로디만 들었다면, 여기서 앙상블을 하면서 다른 파트의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다. 한 달에 한 번씩 꼭 직접 음악당에 가서 교향곡을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런 면에서 참 좋은 취미를 또 하나 얻었다는 생각이 든다.
KSH에서 오케스트라 합주를 하면서 음악적으로 어떤 부분이 증진되었는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화음을 맞추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내 소리만 더 크게 들리고 혹은 내 소리만 들렸었다. 그러나 타인의 소리를 들어가면서 음악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하게 되는 부분이 있고, 남에 대한 배려심도 절로 생기게 된 것 같다.

 

글Ι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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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색소폰 오케스트라 명가(名家) '코리아색소폰하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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