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조차도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일까?”라는 필터를 끼고 보면 그것을 투명하게 바라다보는 것이 몹시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순수하게 음악과 악기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 있다. “연주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는 색소폰 수리 전문가 양철호를 만났다.

 

 

​원래는 어떤 일을 했었나?
장안대학교에서 세무회계를 전공하였고, 이후 해군 군악대에 자원입대하여 플루트로 군 복무하였다. 그 후에 삼영 화학주식회사라는 회사 경리부에서 2년 정도 근무하였다.
어떤 계기로 음악 분야에 입문하게 되었나?
회사 생활을 2년 정도 하다 보니 인생이 황폐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계산을 좋아하고, 계산을 즐기는 사람이었다면 그 일을 했을 때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음악이었기 때문에 몸은 회사에 있어도 머릿속엔 항상 음악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로지 회사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었다. 회사 일이 끝나면 교회에 있는 나만의 공간에서 연습할 수 있었다. 그 빈 공간에서 악기를 불었을 때 울리는 메아리는 나의 정신을 행복하게 만들었기에 나는 그 시간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런 생활을 2년 동안 반복하다보니 마음은 항상 연습하는 곳에 가 있고 몸은 마치 습관처럼 회계 업무를 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를 돌아봤던 이 순간이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갑자기 음악으로 전향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것 같은데?
당시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삶이 괴롭다고 얘기했을 때 돌아오는 말은 자신의 적성에 안 맞은 일을 하는 것을 누가 좋아하냐…, 다 그냥 그렇게 사는 거다… 는 말들이었다. 부모님도 나의 그런 결정에 많이 당황하시고 불편해하셨었다. “과감히 도전해라” “거기서 뭔가 찾을 수 있을 거야”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많이 낙담도 되었지만 내가 행복해하는 일을 하고자 과감히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996년 12월 31에 사표를 냈다.
회사를 관둔 뒤 어떤 일을 하였나?
해군 군악대에 있었을 때 플루트를 불었었다. 당시 그곳에서 연습하고, 합주하고, 연주하면서 관악기에 매료되었던 것이 내가 플루트 입시를 시작하게 된 원동력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제대로 교육을 받고, 제대로 학교에 가기 위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지만 금세 현실의 벽에 부딪혔었다. 경제적인 부분 때문이었다. 요즘은 아르바이트라는 것이 일반화되었지만, 당시에는 아르바이트를 여기저기서 하는 것이 보편적이지 않았고, 일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랬던 실정에 음악을 하는 데에 있어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은 만만치가 않았다. 모든 시간을 연습에 투자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좋은 악기를 써야 하고, 교습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부모님께 레슨비용을 받아서 교습을 받는 시간이 굉장히 고통스럽더라. 부모님이 노력하셔서 받은 페이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기 때문에 너무 감사하고 죄송하다. 연습하는 과정에서도 이게 바람직한 건 지, 현명한 건지 계속 생각하게 되더라. 그 과정에서 내 인생이 입시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단지 음악과 함께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음악에 관련 된 일을 하고 싶다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누구의 도움이 아닌 나 스스로가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이다.
악기점에서는 어떻게 일하게 되었나?
그 당시 대한민국에 ‘길ʼ이라고 한다면 다 종로에 있었다. 해군군악대 후배가 낙원상가의 한 악기점에서 일하고 있어 무작정 찾아갔었다. 같이 상의를 하고, 근처의 악기점에서 한 1분, 2분 정도 면접을 봤는데(사실 면접 이라기보단 대화에 가깝다), “직원을 뽑지 않겠다”라고
얘기하시더라. 그렇게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바로 옆가게에 있는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어떤 악기를 보러왔나 싶어 말을 거시길래 “악기를 사러 온 것이 아니고, 악기를 판매하거나 고치는 일을 해보고 싶어서 왔다”고 얘기했더니 그분이 눈이 동그래지며 놀라시더라. 마침 직원을 찾고 있으셨던 거다. 그분이 “조건이 뭔가요?”라고 물으시길래 “이쪽 일 아무것도 모르고 경력도 없습니다. 바라는 것은 일을 할 기회를 얻고 싶을 뿐입니다. 계약조건은 사장님께서 해주시는 것으로 만족할 겁니다”라고 말하니 언제부터 일할 수 있냐고 되물으시더라. 당장 이라도 일하고 싶었지만 그 상황 자체가 내게도 워낙 갑작스러웠던지라 일주일 정도 시간을 벌었던 것 같다. 일주일 동안 고민하고 첫 출근을 했다. 종로에서의 일이 시작된 것이다.
악기점에서 일하는 동안 어땠었나?
그때가 1997년도였다. 출근 시간은 9시까지였고, 집은 안양이었다. 1호선을 타고 종각역에 내려서 낙원상가 2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는 것이었다. 전철 45분에 걷는 것 15분으로 총 1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9시가 출근 시간이었지만 그 전에 출근해서 혼자 악기도 좀 만져
보고, 명상도 하고 그랬다. 정말 열심히 일했었다.

그러다 프랑스 셀마에 공부하러 가게 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가?
배움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내가 악기점에 입문해서 배우는 것이 충분했다면 아마 못 느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악기점에서 악기를 판매해서 십만 원의 이율을 본다 고 쳤을 때 한 오만 원 정도가 수리비로 나간다. 자체 수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수리를 의뢰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느낀 것이 판매도 중요하지만 사후관리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것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판매만 한다는 것은 좋은 상황으로 지속적이지 못하겠더라. 수리하는 방법과 기술을 내가 일하는 악기점에서는 배울 수 없었고,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어밖에 모르는데 방법이 없지 않나….
셀마에서는 얼마 동안 공부했나?
프랑스에 있었던 기간은 총 6개월이었고, 셀마에서 공부한 건 3개월이었다. 한국인으로선 최초였고, 그렇기에 특별한 기회를 얻었다고 하면 될 것 같다. 셀마는 학교의 개념이 아닌 순수한 회사이기 때문에 가르쳐 주시는 분 도 실무자이다. 교육을 위해서 그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작업을 지켜보면서 배우게 되는데, 작업을 하는 상황 속에서 교육생인 내가 질문을 할 때 그 질문에 답변을 줄 수 있다. 그때 나를 가르친 실무자 이름이 필립이었는데, 필립이 빠른 속도로 프랑스어로 얘기하니 하나도 못 알아듣겠더라. 언어를 준비한다고 했어도 일상적인 언어와 회사에서 쓰는 언어 그리고 회사에서 쓰는 물품과 장비, 부속에 관련된 단어들은 알아들을 길이 없었다. 그 당시에 MD
라고 하는 미니 디스켓을 가지고 갔었는데, 속도가 빨라서 잘 이해를 못 하겠으니 여기 마이크에 당신이 말을 해 주면 내가 집에 가서 이해해오겠다고 얘기했다. 그것을 이해하고 그분이 마이크에 설명을 하나하나 해주더라.
셀마에서 교육 이수를 하려면 불어를 했었어야 할 텐데?
사실 언어에 그리 관심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셀마에 가야 했기 때문에 준비했다. 한국에서 준비했던 불어는 학원레슨 방식이었다. 맨투맨이 아닌 한 반에 열 명 정도 앉혀 놓고 지도하는 방식이어서 섬세하게 발음 교정받기가 힘들었다. 비슷하게만 하면 그냥 넘어가곤 했다. 그런 생활을 9~10개월 정도 한 것 같다.
셀마 교육과정 동안 어떻게 공부했나?
하숙했던 집에 딸이 있었다. 그분의 도움을 받아서 하루에 2시간씩 불어를 배우고 나는 플루트를 가르쳐 드렸다. 수업 때 필립이 한 말을 녹음해서 들려주면 그분이 번역해주었다. 그러면 내가 그 얘길 듣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서 그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들고, 문장의 구성이 괜찮은지 묻고 그것을 A4용지에 다시 적고 그 글을 자기 전까지 다 외웠다. 적어도 필립 앞에서 A4용지를 들고 말하진 않게 할 정도로 외웠다. 그러니 필립 입장에서는 어제는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던 애가 다음날엔 문장구성을 하니 꽤 놀라웠을 것이다. 이 방식으로 반복하다 보니 점점 도구, 부속, 지시사항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면서 한 달 정도 되니 프랑스 사람과 농담을 하고 있더라.
‘노나까 보에끼ʼ에 대해 말해달라.
‘노나까 보에끼ʼ는 무역회사이다. ‘셀마ʼ라는 프랑스 회사의 지분을 가진 회사이기도 하고, 체계적인 메이커를 독점하고 있는 규모가 큰 회사이다. 아시아 총판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셀마라는 브랜드가 한국에 들어오려면 노나까 보에끼를 통해서 들어와야 한다.
어떻게 인연이 닿은 것인가?
셀마에서 공부를 하고 독립해서 일하고 있었는데, 전에 일했던 악기점에서 다시 스카우트 제안이 왔었다. 사장님이 현악기 전문점을 내셨는데 세 달 만에 재정적 상황이 어려
워져 내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렇게 진열된 현악기를 치우고 관악기, 특히 색소폰을 진열하여 그 가게를 개점하게 되었다. 임대료와 보증금이 비싼 상황이라 직원도 뽑기 어려운 실정이어서 혼자서 수리, 판매, 상담, 배달 일을 다 했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수리하고, 상담하고, 판매하고, 간혹 선생님들이 오시면 대화하고 밤 12시에 퇴근하는 일상이 반복되었었다.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는 수준까지 매출이 올라직원 한 명을 뽑아서 1년 반 정도를 집중해서 가르쳤다. 그런 상황 속에서 존 노나까가 한국에 왔고 우리 샵이 일본의 ‘노나까보에끼ʼ의 회사에서 셀마라는 악기를 수입하게 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됐다. 일종의 독점계약 같은 것을 한 거다. 일본식 수리가 배우고 싶었던 내게 존 노나까 사장님이 배움의 기회를 주셨고, 그로 인해 토루 사바노 선생님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 개인레
슨 해주셨었다.
토루 사바노 선생님께 개인 교습을 받을 때 과정이 어땠나?
일본식 작업의 스타일을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다. 그토록 섬세하게 작업하는 모습을 처음 봤었기 때문이다. 작업의 방식은 비슷할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을 자꾸 느끼면서 그게 해결될 때까지 섬세하게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손이 많이 가더라. 미세한 스크래치 하나도 인정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그렇게 처리하시니 결과적으로 깔끔하게 나오더라. 그걸 알게 되면서 매우 감동했다. 수리하는 사람들은 섬세한 거 하나를 보고 배운다는 것이 굉장히 값진 거다. 그 섬세한거 하나 때문에 작업의 결과가 안 좋게 나오는 게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 덕분에 내가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미국에는 어떻게 가게 되었나?
결혼하고 나이가 드는 과정에서 내가 40이든 60이든 교육을 받고자 한다면 받을 수 있겠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뿌리를 내리면 쉽게 움직일 수 없지 않나, 정착하고 그런 부분 때문에 두려웠다. 나는 원래 자유롭고 싶은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더 뭔가에 메이기 전에 하고 싶은걸 하고 싶었다. 플루트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을 늘 간직했었는데, 우연히 <플루트 앤 플루티스트>라는 잡지에 조나단 랜달이라는 선생님께 어떤 분이 교육을 받고 왔다는 행보를 써놓은 부분을 읽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분한테 교육을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준비하다가 잡지에 나왔던 분하고 통화가 되어 미국 가는 것을 준비하게 되었다.
조나단 랜달 선생님에 대해 말해달라.
조나단 랜달 선생님은 전문가용 플루트를 만드시는 분이다. 이분이 대단한 게 어디서 사다가 작업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하나 다 본인이 직접 만드신다. 말 그대로 핸드메이드인 거다. 자신이 만드는 것에 대해서 완벽을 추구하는 그런 분이셨다. 플루트의 수리 과정, 플루트의 마우스피스를 깎는 과정 등을 이수할 경우에 각각 분야별로 수료증을 주시는데, 그렇게 세 개의 과정에서 수료증을 받았다.
다년간의 유학이 본인에겐 어떤 의미인가?
내 인생의 철학을 만드는 기회가 됐다고 본다.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어떤 삶으로 살다 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돌아보게 하고, 구체적인 체계를 잡게 된 계기였다.
색소폰 수리를 하는 데에 있어 자신만의 신념이 있나?
사람은 누구나 적게 일하고 많이 받고 싶어 하는 게으른(?) 본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일에는 단계가 있는데 예를 들어 1단계, 2단계, 3단계 등을 거쳐 완성된 작업물이 만들어진다 치자. 나는 그 단계의 어느 것도 건너뛰고 싶지 않다. 단계를 건너뛴다는 것은 사실 요령을 말한다. 그 요령이 좋은 의미의 요령이 아니라 좋지 않은 의미의 요령이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악기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수 십 대의 악기를 고치면서 짧은 시간에 여러 악기를 고쳤다는 그런 만족을 얻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악기를 고쳐도 그 하나의 악기가 만족스럽게 고쳐졌다면 나는 거기에 만족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이 사회 속에 산다는 것은 어우러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도움을 주고, 또 도움을 받는 그런 관계가 바람직하지, 나만 도움받고 나는 도움 주지 않는 그런 삶은 옳지 않다
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이 일을 배우기 위해서 어디에서 공부하는 게 바람직하고, 어떻게, 어떤 준비를 하는 게 좋은지 등의 조언을 받을 수 있는 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내 분야의 일을 배우기 위해 나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새롭게 이 일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서 아름다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고, 처음에 가졌던 음악을 사랑하는 그 마음 그대로 변함없이 이 일을 하고 싶다.

 

글 | 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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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철학과 신념으로, '색소폰 수리 전문가 양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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