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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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AZZ AGE]세계 재즈의 역사,1930년대의 재즈를 넘어1940년대의 비밥 재즈로
    (월간색소폰)이종우 칼럼니스트= 경제대공황의 고난을 이긴 재즈는 즐거울 필요가 있었다. 열심히 일한 후에 달달한 믹스커피가 더욱 끌리듯이 음악도 감미로운 스윙재즈로 활력을 얻고 싶은 마음이 대중들에게 더욱 와 닿았을 시기였다. 스윙의 왕, 베니 굿맨(Benny Goodmen 1909-1986)베니 굿맨은 1909년 데이비드 벤자민(David Benjamin)이라는 본명으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열 살 때부터 클라리넷 연주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에 학교를 자퇴한 후 ‘벤 폴락 밴드’의 일원으로 프로로 데뷔하게 된다. 4년간의 밴드 생활을 마치고 뉴욕에 정착하여 라디오 방송과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프리랜서로 악사 생활을 하게 된다. 1931년 자신의 첫 앨범 를 히트시키며 1934년에는 자신의 빅밴드를 만들었고, NBC라디오 프로그램 ‘Let`s Dance’에 고정출연을 계기로 대중적인 관심을 얻으며 자신의 입지를 굳혀 가게 된다. 이듬해 1935년부터 자신의 밴드와 함께 미국 대륙을 횡단하며 연주 활동을 하게 되는데 1935년 8월21일 로스앤젤레스 팔로마 볼룸홀 공연을 계기로 베니 굿맨이란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게 된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스윙재즈는 전국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재즈사에서는 본격적인 스윙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기도 한다. 당시 흑인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재즈를 미국 주류 백인층에 파급시키며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당시 흑인과 백인의 갈등이 심했던 시대 (클럽에 들어가는 입구가 백인과 흑인으로 따로 있기도 했다)에 베니 굿맨 밴드에는 라이오넬 햄프턴(Rionel Hampton,비브라폰), 테디 윌슨(Teddy Wilson,피아노) 같은 흑인 연주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흑인과 백인이 섞인 밴드의 구성은 음악을 흑과 백의 차별이 아닌 순수 예술의 영역으로 바라본 베니 굿맨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단순히 그가 백인 재즈 아티스트여서 얻은 어드벤테이지(Advantage)가 아닌 그의 출중한 연주력에 더해진 빛나는 그의 인간미가 진정한 굿맨을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1940년대 모던재즈(Modern Jazz)1930년에 이르러 재즈는 그 중심을 뉴욕으로 이동하였다. 스윙재즈가 관중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재즈였다면 연주자들 또한 연주를 통해 즐거워야 했다. 그렇기에 예술가들은 새로운 창작에 대한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충족이 희열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새로운 창작의 욕구로 이어졌다. 바야흐로 재즈는 스윙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관중을 즐겁게 하는 연주에서 연주자 자신을 위한 연주로 가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그 시작은 크고 화려한 대규모 공연장이 아닌 뉴욕의 작은 재즈클럽에서 시작되었다.비밥(Be Bop)의 탄생빅밴드 스윙 스타일을 나이트클럽의 댄스음악이라 한다면 모던재즈는 좀 더 연주자 중심으로의 예술성을 부각시키는 재즈라 할 수 있다. 스윙은 흥겨운 리듬감에 달달한 멜로디로 가득 차야 했고 박자는 춤을 추기에 좋아야 했다. 베니 굿맨이나 글렌 밀러의 음악은 이러한 스타일에 매우 부합하는 음악이었고, 그렇기에 대중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백인들의 춤 곡으로 변해가고 있는 스윙에 대한 불편함을 느낀 몇몇 연주자들은 새로운 시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빅밴드 연주가 끝나면 연주자들은 삼삼오오 자신들만의 잼 세션(After Hours Jam Sessions)을 하기 위해 뉴욕 뒷골목에 있는 작은 클럽으로 모였다. 그곳에서 연주자들은 빠르고 현란한 독주로 자신의 연주를 뽐내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스타일이 바로 비밥(Be Bop)재즈이다. 1943년 뉴욕 할렘 118번가 민턴즈 플레이하우스(Minton's Playhouse)에서 찰리 파커(Charlie Parker)를 중심으로 시작한 잼 세션은 재즈사에서 비밥 재즈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비밥은 1940년대에 들어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찰리 파커, 버드 파웰, 디지 길레스피 등을 필두로 재즈는 비밥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얻게 되며, 스윙의 매너리즘을 벗어나는 듯했다. 그와 함께 대중적인 인기도 조금씩 벗어나게 되었지만, 비밥에 열광하는 마니아층이 생겨나며 비밥은 더욱더 발전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대중들로선 재즈를 듣는 선택의 폭이 넓어지게 된 계기이기도 하지만 비밥을 들으면서 춤을 출 수 없는 대중들에겐 많은 부분 아쉬움이 남았을 것이다. 후에 로키빌리(Rockabilly, 로큰롤의 초창기 스타일)의 유행으로 재즈와 대중은 더욱 거리를 두게 되지만 재즈는 그 자체로 예술적인 가치가 더욱 상승하여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질 수 있게 된다.비밥(Be Bop)재즈의 음악적 특징스윙재즈보다 복잡한 화성진행과 빠른 템포, 주 멜로디와는 새로운 개연성을 가지는 격렬하고 역동적인 즉흥연주는 비밥재즈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블루 노트(Blue Note)를 사용하는 즉흥연주이다. 기존의 메이저 스케일에(Major Scale) 3, 5, 7 음에 반음을 추가하는 음계인데 이 반음을 각각 이끔음(Leading Tone)으로 사용하여 멜로디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때 반음으로 내린 3b, 5b, 7b음을 블루 노트라 하고 이를 이용해 상위 4개 음을 반음계로(Chromatic Scale) 하위 4개 음을 장음계로(Major Scale)로 사용하여 비밥 음계(Be Bop Scale)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이 스케일을 사용하여 기존의 스윙재즈 곡들을 2배속 이상으로 연주하는 것이 바로 비밥재즈이다. 쉽게 말하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2~3배로 빠르게 연주하며 거기에 즉흥연주를 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악보에 의존하여 연주하는 스윙 스타일과는 다르게 각각의 파트의 즉흥성이 더욱 강조되는 연주를 지향하므로 연주자의 연주력이 중요한 감상 포인트이다. 그렇기에 악기 구성은 피아노, 드럼, 베이스를 기본으로 혼 세션이 가미되는 캄보(Combo Band) 형태가 보통이었다. 캄포 밴드가 주를 이루게 되는 데에는 세계2차대전으로인한 재정상태의 어려움을 겪게 된 빅밴드들의 해체 이유도 있지만, 비밥이란 새로운 장르에 적응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사진출처 | 구글이미지글 Ι 이종우 경성대 동주대 외래 교수suyeo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7-01
  • [JAZZ AGE] 세계 재즈의 역사,1930년대의 재즈를 넘어 1940년대의 비밥 재즈로
    경제대공황의 고난을 이긴 재즈는 즐거울 필요가 있었다. 열심히 일한 후에 달달한 믹스커피가 더욱 끌리듯이 음악도 감미로운 스윙재즈로 활력을 얻고 싶은 마음이 대중들에게 더욱 와 닿았을 시기였다. 스윙의 왕, 베니 굿맨(Benny Goodmen 1909-1986) 베니 굿맨은 1909년 데이비드 벤자민(David Benjamin)이라는 본명으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열 살 때부터 클라리넷 연주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에 학교를 자퇴한 후 ‘벤 폴락 밴드’의 일원으로 프로로 데뷔하게 된다. 4년간의 밴드 생활을 마치고 뉴욕에 정착하여 라디오 방송과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프리랜서로 악사 생활을 하게 된다. 1931년 자신의 첫 앨범 를 히트시키며 1934년에는 자신의 빅밴드를 만들었고, NBC라디오 프로그램 ‘Let`s Dance’에 고정출연을 계기로 대중적인 관심을 얻으며 자신의 입지를 굳혀 가게 된다. 이듬해 1935년부터 자신의 밴드와 함께 미국 대륙을 횡단하며 연주 활동을 하게 되는데 1935년 8월21일 로스앤젤레스 팔로마 볼룸홀 공연을 계기로 베니 굿맨이란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게 된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스윙재즈는 전국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재즈사에서는 본격적인 스윙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기도 한다. 당시 흑인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재즈를 미국 주류 백인층에 파급시키며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당시 흑인과 백인의 갈등이 심했던 시대 (클럽에 들어가는 입구가 백인과 흑인으로 따로 있기도 했다)에 베니 굿맨 밴드에는 라이오넬 햄프턴(Rionel Hampton,비브라폰), 테디 윌슨(Teddy Wilson,피아노) 같은 흑인 연주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흑인과 백인이 섞인 밴드의 구성은 음악을 흑과 백의 차별이 아닌 순수 예술의 영역으로 바라본 베니 굿맨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단순히 그가 백인 재즈 아티스트여서 얻은 어드벤테이지(Advantage)가 아닌 그의 출중한 연주력에 더해진 빛나는 그의 인간미가 진정한 굿맨을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1940년대 모던재즈(Modern Jazz) 1930년에 이르러 재즈는 그 중심을 뉴욕으로 이동하였다. 스윙재즈가 관중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재즈였다면 연주자들 또한 연주를 통해 즐거워야 했다. 그렇기에 예술가들은 새로운 창작에 대한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충족이 희열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새로운 창작의 욕구로 이어졌다. 바야흐로 재즈는 스윙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관중을 즐겁게 하는 연주에서 연주자 자신을 위한 연주로 가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그 시작은 크고 화려한 대규모 공연장이 아닌 뉴욕의 작은 재즈클럽에서 시작되었다. 비밥(Be Bop)의 탄생 빅밴드 스윙 스타일을 나이트클럽의 댄스음악이라 한다면 모던재즈는 좀 더 연주자 중심으로의 예술성을 부각시키는 재즈라 할 수 있다. 스윙은 흥겨운 리듬감에 달달한 멜로디로 가득 차야 했고 박자는 춤을 추기에 좋아야 했다. 베니 굿맨이나 글렌 밀러의 음악은 이러한 스타일에 매우 부합하는 음악이었고, 그렇기에 대중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백인들의 춤 곡으로 변해가고 있는 스윙에 대한 불편함을 느낀 몇몇 연주자들은 새로운 시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빅밴드 연주가 끝나면 연주자들은 삼삼오오 자신들만의 잼 세션(After Hours Jam Sessions)을 하기 위해 뉴욕 뒷골목에 있는 작은 클럽으로 모였다. 그곳에서 연주자들은 빠르고 현란한 독주로 자신의 연주를 뽐내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스타일이 바로 비밥(Be Bop)재즈이다. 1943년 뉴욕 할렘 118번가 민턴즈 플레이하우스(Minton's Playhouse)에서 찰리 파커(Charlie Parker)를 중심으로 시작한 잼 세션은 재즈사에서 비밥 재즈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비밥은 1940년대에 들어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찰리 파커, 버드 파웰, 디지 길레스피 등을 필두로 재즈는 비밥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얻게 되며, 스윙의 매너리즘을 벗어나는 듯했다. 그와 함께 대중적인 인기도 조금씩 벗어나게 되었지만, 비밥에 열광하는 마니아층이 생겨나며 비밥은 더욱더 발전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대중들로선 재즈를 듣는 선택의 폭이 넓어지게 된 계기이기도 하지만 비밥을 들으면서 춤을 출 수 없는 대중들에겐 많은 부분 아쉬움이 남았을 것이다. 후에 로키빌리(Rockabilly, 로큰롤의 초창기 스타일)의 유행으로 재즈와 대중은 더욱 거리를 두게 되지만 재즈는 그 자체로 예술적인 가치가 더욱 상승하여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비밥(Be Bop)재즈의 음악적 특징 스윙재즈보다 복잡한 화성진행과 빠른 템포, 주 멜로디와는 새로운 개연성을 가지는 격렬하고 역동적인 즉흥연주는 비밥재즈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블루 노트(Blue Note)를 사용하는 즉흥연주이다. 기존의 메이저 스케일에(Major Scale) 3, 5, 7 음에 반음을 추가하는 음계인데 이 반음을 각각 이끔음(Leading Tone)으로 사용하여 멜로디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때 반음으로 내린 3b, 5b, 7b음을 블루 노트라 하고 이를 이용해 상위 4개 음을 반음계로(Chromatic Scale) 하위 4개 음을 장음계로(Major Scale)로 사용하여 비밥 음계(Be Bop Scale)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이 스케일을 사용하여 기존의 스윙재즈 곡들을 2배속 이상으로 연주하는 것이 바로 비밥재즈이다. 쉽게 말하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2~3배로 빠르게 연주하며 거기에 즉흥연주를 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악보에 의존하여 연주하는 스윙 스타일과는 다르게 각각의 파트의 즉흥성이 더욱 강조되는 연주를 지향하므로 연주자의 연주력이 중요한 감상 포인트이다. 그렇기에 악기 구성은 피아노, 드럼, 베이스를 기본으로 혼 세션이 가미되는 캄보(Combo Band) 형태가 보통이었다. 캄포 밴드가 주를 이루게 되는 데에는 세계2차대전으로 인한 재정상태의 어려움을 겪게 된 빅밴드들의 해체 이유도 있지만, 비밥이란 새로운 장르에 적응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글 Ι 이종우 경성대 동주대 외래 교수
    • 월간색소폰
    2018-07-01
  • ‘한(恨)’의 정서를 자신만의 색으로 풀어내는 '색소포니스트 허철행'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고속버스를 타고 두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전주의 하늘은 쾌청했다. 쾌청한 하늘만큼 푸른 정장을 차려입은 색소포니스트 허철행이 인사를 건네왔다. 전라도 사투리와 꾸밈없는 모습 속에서 나타나는 그의 소탈한 매력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구슬픈 찔레꽃 연주는 그런 순수함 속에서도 자신의 것을 지키며 걸어 왔을 그의 고독한 여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색소폰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전북 임실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임실하면 고추와 치즈의 고장으로 많이 알려진 곳이다. 고등학교도 그곳에서 나왔고. 그 고등학교에 밴드부가 있어 그곳에 들어가게 된 것이 계기라고 할 수 있다.밴드부에 들어가서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한 것 인가.처음부터 색소폰을 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트럼펫을 하다가 유포니엄(Euphonium)이라는 악기를 했다(3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내가 원하는 악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밴드부 음악발표회가 있었는데 나보다 한 학년 위의 선배가 음악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영화 ‘밤안개 속의 데이트’ 주제가인 를 색소폰 솔로로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 그 소리가 너무나 좋았다. 그 소리를 마음속에 간직하다 3학년 때 비로소 색소폰을 잡을 수 있었다.밴드부에서 색소폰을 배우는 과정이 어땠었나.3학년이 되자마자 색소폰을 잡았지만 이미 색소폰을 한 지 3년이 넘어가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던 만큼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열정만큼은 그 어디에도 비할 데가 없었다. 레슨을 해주는 선생님이 따로 없었던 터라 당시 3만원을 주고 샀던 카세트 플레이어와 버스에서 흘러 나오는 라디오 음악이 나의 선생님이었다. 재즈, 가요 등 다양한 음반을 듣고 내 소리를 녹음하여 비교하면서 공부하고, 생각하며 색소폰에 대한 갈망이 커져나갔었다.어린 시절의 허철행에 대해 더 얘기해 달라.학창시절의 나는 여학생 얼굴만 봐도 얼굴이 빨개지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고집과 주관이 뚜렷하고 해야 할 일은 꼭 해내는 성격이었다. 지금은 음악을 하면서 외향적으로 변한 부분이 아주 많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은 잘 바뀌지 않았다.내향적인 성격 때문에 처음에는 무대에서 연주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무대에서 색소폰을 잡으면 눈빛이 달라진다는 얘길 많이 듣는다. 그만큼 무대에 서면 자신감이 생기고 감정을 이입(조​절)하면서 연주에 몰입하기 때문인 것 같다.연주하는 방식은 대략 어떤 편인가.어떤 곡이든 기승전결이 있다. 그래서 인생의 기승전결을 풀어내는 것처럼 진지하게 연주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만큼 정말 힘들다. 절제를 할 때 더 많은 호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영향을 받은 아티스트가 있나.외국 연주자로는 ‘찰리 파커’(Charlie Parker)와 ‘데이비드 샌본’(David Sanborn)이 있고, 국내 연주자로는 ‘이봉조’, ‘길옥윤’, ‘최석재’, ‘황천수’ 등 여러 선생님들의 영향을 받았다.어떤 영향을 받았나.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르듯이 노래하는 방법이나 감성, 색깔도 각기 다르다. ‘데이비드 샌본’은 강렬하게 쏘는 칼톤, ‘찰리 파커’는 소리가 작으면서도 32비트, 24비트로 연주한다. 그러면서도 소리와 비트가 깨지지 않는다. ‘이봉조’ 선생님으로부터는 맑은 음색을, ‘길옥윤’ 선생님에게서는 특유의 색깔있는 음색을 모방하였고, ‘황천수’ 선생님의 경우에는 반음 스케일이나 밴딩을 써서 음이 넘어가는 흐름에 대해 배웠다. 이렇듯 다양한 연주자들의 감성 속에서 내 음색을 찾기까지는 무던히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음에는 분명히 선이 있고, 색깔이 있다. 자신의 톤이 완성이 되고, 호흡이 완성 되었을 때 선이 살아 있고 자신만의 색깔이 있는 연주를 할 수 있다.색소폰을 잘 불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잘 하고 싶다면 첫째 ‘좋은 선생님에게 정식으로 배워라’, 둘째 ‘선생님이 주문하는 대로 연습해라’이다. 셋째 ‘음악을 많이 들어라’인데 어떻게 보면 최고의 선생님은 음악을 많이 듣는 것이지만 그저 듣는 것만으로는 내 음악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레슨을 통해 깊이 있게 접근하는 것이 좋다.음반에서 소프라노 색소폰 연주가 인상적이었다. 소프라노 색소폰을 잘 부는 비법이 있나.롱톤과 텅잉같은 기본적인 주법을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이다. 소프라노 색소폰은 악기의 공간(관의 내경)이 좁기 때문에 순간의 압력을 필요로 하므로 색소폰 중에서 가장 연주하기 힘들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쎈 소리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크고 세게 부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그래야 압력이 강해지고 소리를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2014년도에 발표한 1집과 앨범 발매 공연이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1집 앨범 ‘봄’에 대한 설명 부탁드린다.이 음반이 내 인생에서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를 담아 타이틀을 ‘봄’이라고 정하고 타이틀 곡도 <찔레꽃>을 택했다. ‘장사익’ 선생님의 노래 <찔레꽃>을 색소폰으로 풀어내기 위많은 노력을 했는데, 특히 ‘한(恨)’을 표현하기 위한 음색과 색깔을 찾는 데에 오랜 시간을 할애 했다.말씀하시는 ‘한(恨)’은 어떤 것에 대한 ‘한(恨)’인가.우리 민족의 ‘한(恨)’이 될 수도 있고, 어린 시절의 좋고 나빴던 기억을 되살리는 추억의 ‘한(恨)’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 겪었던 우울했던 ‘한(恨)’을 음악으로 풀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나.1집 앨범 발매기념 첫 번째 콘서트 때이다. 공연하기 전에 가수 ‘현당’ 씨랑 같이 밥을 먹는데 밥이 입으로 안 들어가더라. 그만큼 긴장도 많이 하고 기대도 컸던 연주였다. 늘 염원했던 대로 그 자리에 어머님을 모시고 당신이 좋아하시는 가수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혼신을 다해 연주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감정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진다.만약 2집을 낸다면 어떤 컨셉으로 가고 싶나.고민이 된다. 오래 남을 수 있는 깊이 있고 예술적인 음악을 하고 싶으면서도 대중적인부분을 간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집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 듣기에 조금 어려웠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의 음악적 욕심도 채울 수 있는 곡을 준비하려고 한다.2004년부터 5년 동안 퓨전재즈그룹 ‘J.ZEN’에서 활동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J.ZEN에 대해 말해달라.J.ZEN이라는 그룹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선배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그 선배가 국악 판소리를 피아노 악보로 채보하면 그것을 토대로 나를 포함한 드럼, 기타, 베이스 주자들이 퓨전재즈로 풀어냈다. 국악곡을 편곡해 색소폰을 주 멜로디로 한 연주로 풀어내고 리베르 탱고와 같은 탱고음악부터, 가요(한오백년), 스페인의 플라멩코까지 여러 장르를 시도했다.음악적 영감은 어디서 받나.생활 속에서 이다. 누군가를 만나면서 영감이 떠오르기도 하고, 산에 올라 자연을 보면서 혹은 낚시를 가서 이기도 하다. 라디오를 들으면서도 영감을 많이 받는데, 다른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 많다.자신이 생각하는 연주자로서의 마인드는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나.연주자는 음악적인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한걸음씩 꾸준히 갈 수 있는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연주자들이 자신의 색깔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므로 어려운 일이다. 연주자가 되려면 자신만의 소리와 음악을 찾는 일에 몰두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트로트를 연주하더라도 클래식에 기초해서 연주할 수 있는 학구적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연주한다면 트로트도 그냥 트로트가 아닌 고급스러운 곡이 된다.인간 허철행과 색소포니스트 허철행으로서의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연주할 때는 가급적 격식을 갖추고자 하는 편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메이크업도 하고, 의상도 제대로 갖춰 입는다. 이런 것을 관객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연주가 끝나면 평소의 소탈한 나로 돌아간다. 막걸리와 산을 좋아하는 자유로운 나로 말이다. 꼭 프로의 마인드라기보다는 나만의 스타일 이라고 생각한다. 간혹 주변에서 사투리가 심하다는 얘길 들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게 내 모습이고, 그런 나의 모습을 숨기고 싶지 않다. 방송을 하던 무대에서 연주를 하던 내 앞에 있는 사람 혹은 청중들에게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 원곡에 충실하면서 나만의 색깔을 담담하게 표현하는 내공 있는 색소포니스트로 살고 싶다. 글 Ι 안지인 기자jii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7-01
  • ‘한(恨)’의 정서를 자신만의 색으로 풀어내는 '색소포니스트 허철행'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고속버스를 타고 두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전주의 하늘은 쾌청했다. 쾌청한 하늘만큼 푸른 정장을 차려입은 색소포니스트 허철행이 인사를 건네왔다. 전라도 사투리와 꾸밈없는 모습 속에서 나타나는 그의 소탈한 매력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구슬픈 찔레꽃 연주는 그런 순수함 속에서도 자신의 것을 지키며 걸어 왔을 그의 고독한 여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색소폰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전북 임실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임실하면 고추와 치즈의 고장으로 많이 알려진 곳이다. 고등학교도 그곳에서 나왔고. 그 고등학교에 밴드부가 있어 그곳에 들어가게 된 것이 계기라고 할 수 있다.밴드부에 들어가서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한 것 인가.처음부터 색소폰을 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트럼펫을 하다가 유포니엄(Euphonium)이라는 악기를 했다(3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내가 원하는 악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밴드부 음악발표회가 있었는데 나보다 한 학년 위의 선배가 음악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영화 ‘밤안개 속의 데이트’ 주제가인 를 색소폰 솔로로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 그 소리가 너무나 좋았다. 그 소리를 마음속에 간직하다 3학년 때 비로소 색소폰을 잡을 수 있었다.밴드부에서 색소폰을 배우는 과정이 어땠었나.3학년이 되자마자 색소폰을 잡았지만 이미 색소폰을 한 지 3년이 넘어가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던 만큼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열정만큼은 그 어디에도 비할 데가 없었다. 레슨을 해주는 선생님이 따로 없었던 터라 당시 3만원을 주고 샀던 카세트 플레이어와 버스에서 흘러 나오는 라디오 음악이 나의 선생님이었다. 재즈, 가요 등 다양한 음반을 듣고 내 소리를 녹음하여 비교하면서 공부하고, 생각하며 색소폰에 대한 갈망이 커져나갔었다.어린 시절의 허철행에 대해 더 얘기해 달라.학창시절의 나는 여학생 얼굴만 봐도 얼굴이 빨개지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고집과 주관이 뚜렷하고 해야 할 일은 꼭 해내는 성격이었다. 지금은 음악을 하면서 외향적으로 변한 부분이 아주 많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은 잘 바뀌지 않았다.내향적인 성격 때문에 처음에는 무대에서 연주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무대에서 색소폰을 잡으면 눈빛이 달라진다는 얘길 많이 듣는다. 그만큼 무대에 서면 자신감이 생기고 감정을 이입(조​절)하면서 연주에 몰입하기 때문인 것 같다.연주하는 방식은 대략 어떤 편인가.어떤 곡이든 기승전결이 있다. 그래서 인생의 기승전결을 풀어내는 것처럼 진지하게 연주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만큼 정말 힘들다. 절제를 할 때 더 많은 호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영향을 받은 아티스트가 있나.외국 연주자로는 ‘찰리 파커’(Charlie Parker)와 ‘데이비드 샌본’(David Sanborn)이 있고, 국내 연주자로는 ‘이봉조’, ‘길옥윤’, ‘최석재’, ‘황천수’ 등 여러 선생님들의 영향을 받았다.어떤 영향을 받았나.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르듯이 노래하는 방법이나 감성, 색깔도 각기 다르다. ‘데이비드 샌본’은 강렬하게 쏘는 칼톤, ‘찰리 파커’는 소리가 작으면서도 32비트, 24비트로 연주한다. 그러면서도 소리와 비트가 깨지지 않는다. ‘이봉조’ 선생님으로부터는 맑은 음색을, ‘길옥윤’ 선생님에게서는 특유의 색깔있는 음색을 모방하였고, ‘황천수’ 선생님의 경우에는 반음 스케일이나 밴딩을 써서 음이 넘어가는 흐름에 대해 배웠다. 이렇듯 다양한 연주자들의 감성 속에서 내 음색을 찾기까지는 무던히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음에는 분명히 선이 있고, 색깔이 있다. 자신의 톤이 완성이 되고, 호흡이 완성 되었을 때 선이 살아 있고 자신만의 색깔이 있는 연주를 할 수 있다.색소폰을 잘 불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잘 하고 싶다면 첫째 ‘좋은 선생님에게 정식으로 배워라’, 둘째 ‘선생님이 주문하는 대로 연습해라’이다. 셋째 ‘음악을 많이 들어라’인데 어떻게 보면 최고의 선생님은 음악을 많이 듣는 것이지만 그저 듣는 것만으로는 내 음악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레슨을 통해 깊이 있게 접근하는 것이 좋다.음반에서 소프라노 색소폰 연주가 인상적이었다. 소프라노 색소폰을 잘 부는 비법이 있나.롱톤과 텅잉같은 기본적인 주법을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이다. 소프라노 색소폰은 악기의 공간(관의 내경)이 좁기 때문에 순간의 압력을 필요로 하므로 색소폰 중에서 가장 연주하기 힘들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쎈 소리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크고 세게 부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그래야 압력이 강해지고 소리를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2014년도에 발표한 1집과 앨범 발매 공연이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1집 앨범 ‘봄’에 대한 설명 부탁드린다.이 음반이 내 인생에서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를 담아 타이틀을 ‘봄’이라고 정하고 타이틀 곡도 <찔레꽃>을 택했다. ‘장사익’ 선생님의 노래 <찔레꽃>을 색소폰으로 풀어내기 위많은 노력을 했는데, 특히 ‘한(恨)’을 표현하기 위한 음색과 색깔을 찾는 데에 오랜 시간을 할애 했다.말씀하시는 ‘한(恨)’은 어떤 것에 대한 ‘한(恨)’인가.우리 민족의 ‘한(恨)’이 될 수도 있고, 어린 시절의 좋고 나빴던 기억을 되살리는 추억의 ‘한(恨)’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 겪었던 우울했던 ‘한(恨)’을 음악으로 풀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나.1집 앨범 발매기념 첫 번째 콘서트 때이다. 공연하기 전에 가수 ‘현당’ 씨랑 같이 밥을 먹는데 밥이 입으로 안 들어가더라. 그만큼 긴장도 많이 하고 기대도 컸던 연주였다. 늘 염원했던 대로 그 자리에 어머님을 모시고 당신이 좋아하시는 가수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혼신을 다해 연주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감정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진다.만약 2집을 낸다면 어떤 컨셉으로 가고 싶나.고민이 된다. 오래 남을 수 있는 깊이 있고 예술적인 음악을 하고 싶으면서도 대중적인부분을 간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집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 듣기에 조금 어려웠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의 음악적 욕심도 채울 수 있는 곡을 준비하려고 한다.2004년부터 5년 동안 퓨전재즈그룹 ‘J.ZEN’에서 활동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J.ZEN에 대해 말해달라.J.ZEN이라는 그룹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선배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그 선배가 국악 판소리를 피아노 악보로 채보하면 그것을 토대로 나를 포함한 드럼, 기타, 베이스 주자들이 퓨전재즈로 풀어냈다. 국악곡을 편곡해 색소폰을 주 멜로디로 한 연주로 풀어내고 리베르 탱고와 같은 탱고음악부터, 가요(한오백년), 스페인의 플라멩코까지 여러 장르를 시도했다.음악적 영감은 어디서 받나.생활 속에서 이다. 누군가를 만나면서 영감이 떠오르기도 하고, 산에 올라 자연을 보면서 혹은 낚시를 가서 이기도 하다. 라디오를 들으면서도 영감을 많이 받는데, 다른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 많다.자신이 생각하는 연주자로서의 마인드는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나.연주자는 음악적인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한걸음씩 꾸준히 갈 수 있는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연주자들이 자신의 색깔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므로 어려운 일이다. 연주자가 되려면 자신만의 소리와 음악을 찾는 일에 몰두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트로트를 연주하더라도 클래식에 기초해서 연주할 수 있는 학구적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연주한다면 트로트도 그냥 트로트가 아닌 고급스러운 곡이 된다.인간 허철행과 색소포니스트 허철행으로서의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연주할 때는 가급적 격식을 갖추고자 하는 편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메이크업도 하고, 의상도 제대로 갖춰 입는다. 이런 것을 관객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연주가 끝나면 평소의 소탈한 나로 돌아간다. 막걸리와 산을 좋아하는 자유로운 나로 말이다. 꼭 프로의 마인드라기보다는 나만의 스타일 이라고 생각한다. 간혹 주변에서 사투리가 심하다는 얘길 들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게 내 모습이고, 그런 나의 모습을 숨기고 싶지 않다. 방송을 하던 무대에서 연주를 하던 내 앞에 있는 사람 혹은 청중들에게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 원곡에 충실하면서 나만의 색깔을 담담하게 표현하는 내공 있는 색소포니스트로 살고 싶다. 글 Ι 안지인 기자jii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7-01
  • 색소폰이 좋아서 모인 좋은 사람들, '굿피플동호회'
    2018년 5월 18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였다. 혹시 공연이 취소되지 않을까 반신반의하며 도착했던 영동5교다리. 궂은 날씨 속에서도 떨리는 호흡과 손끝으로 몰입하며 오히려 내리는 비가 고마울 정도로 운치 있었던 음악회를 선사했었던 <굿피플동호회>에 대한 기억이 내게 선명하다. 무엇이 그들을 그런 진지함 속에서 색소폰을 연주하게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개포동에 자리한 <굿피플동호회>의 연습실은 그야말로 깔끔했다. 뭔가 모범생 같은 분위기라고 하면 맞을까. 실제로 연습실에 들어가서 바로 눈에 보였던 풍경은 학습의 현장이었다. 둥그렇게 정렬하여 앉은 머리 희끗희끗한 학생들이 태도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선생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 새로웠다.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자연스레 조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모습을 담고자 셔터를 눌러댔다. 간혹 플래시도 터뜨리고, 자리를 이리저리 이동하며 사진을 찍었던 터라 그들에게는 방해가 됐을 법도 하지만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고 선생님만을 응시했다. 그런 분위기가 익숙해 보이는 선생님은 그런 학생들의 기대에 하나하나 응하고, 대답해주며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모습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수업내용을 물어보니 앙상블수업 중이었다고 한다) 자칫 방해되진 않았을까 걱정하고 있던 와중에 앙상블 수업이 끝났고, 동호회 회원들은 제각기 자신의 악기를 소중하게 닦고 점검했다. 하루 이틀 그렇게 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들의 행동이 자유스러우면서도 지키는 것이 명확해 보였다. 단순히 어떤 단체나 모임에 존속되고자 사람들이 이곳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굿피플동호회는 2014년 11월에 만들어진 동호회다. 마음이 맞아서 시작한 13명의 회원이 뜻을 모아 선생님을 초빙하여 지금의 굿피플동호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은 주주회원이 22명이고, 일반회원이 13명으로 총 35명이 굿피플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굿피플이 가진 특징이라면 단연 ‘순수 동호회’라는 점을 들 수 있는데, 학원 형태가 아니다 보니 아는 지인들이나 혹은 지인의 소개로 들어온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는 동호회 회원들끼리 별다른 말썽 없이 잘 지내 왔다고 한다. 봄이 되면 강남 양재천에서 5월부터 10월까지 매년 한 달에 한 번씩 공연하고, 연말에는 동호인들과 동호인들의 가족들이 모두 참석하여 무려 백여 명이 되는 사람들이 모여 송년 연주회를 한다. 그렇게 정기적으로 공연을 거듭한 지 6년 차 정도 되니 ‘진짜 음악’에 대한 갈증을 더 느끼게 되고, 반주기에 의존하지 않고 굿피플동호회만의 음악을 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듀엣부터 트리오, 그리고 앙상블까지 공연하기에 충분한 레퍼토리와 음악성을 키워서 관객들이 보기에 지루하지 않은 무대를 구성하고, 자신들끼리도 색소폰을 가지고 흥겹게 놀 수 있는 역량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종연 동호회 회장)색소폰을 어떻게 하게 되었고, 현재까지 어떻게 해오고 있는지 말해 달라. 1998년도에 미국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을 때였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어느 유명악기점에서 색소폰을 세일한다는 포스터를 보고 언젠가 불겠지 싶어 세일 가격으로 천 불 정도에 구입했었다. 그러나 혼자 불려다 보니 좀 아니다 싶은 감이 있어 현지에 있는 색소폰 선생님을 찾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선생님 연세가 75세 정도였는데, 5살 때부터 악기를 배워 그때까지도 악단에서 활동하고 계신 베테랑이셨다. 그런 분에게 처음부터 색소폰을 배운 것은 행운이었지만, 미국인이다 보니 우리나라 가요를 배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직접 일반 가요 교재를 한국에서 사다가 색소폰 악보로 이조해서 직접 수기로 악보를 써나가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음악 이론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 좋은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98년도에는 고작해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불러보는 수준이었으니 색소폰을 열심히 했다고 볼 수 없다. 한국에 귀국했던 시점인 2000년도에는 회사 일에 매진하느라 색소폰을 불 기회조차도 만들지 못했었다. 2001년, 개인 사업을 하게 되면서 조금씩 불다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2009년부터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색소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연습해오고 있다. 그에 비해선 색소폰 실력은 아직 미흡하지만 말이다.원래에도 음악을 좋아했었나. 학교 다닐 때부터 팝송은 다 꿰고 있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었다. 특히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는데, 나는 다른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음치에 속했다.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면 음이 틀렸다는 지적을 자주 받는 편이었다. 목소리로 음악을 잘 표현하지 못했기에 악기로 그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음악과 점점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악기점에서 악기를 우연히 사서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색소폰이 눈에 더 들어온 이유가 있었나. 평소에도 색소폰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물론 있었지만, 단순히 그냥 눈에 가장 들어온 것이 색소폰이었다. 당시에 색소폰뿐만 아니라 젬베라는 악기도 같이 샀었는데, 젬베에 그려진 문양들이 너무 예뻐서 산 것이다. 그 젬베도 여기에 가져다 놓았다.젬베도 잘 연주하나. 반주기만 가지고 색소폰을 불다보니 박자에 문제가 생기더라. 박자 공부를 하기 위해드럼 선생님을 찾아가 젬베를 배웠었다. 덕분에 박자를 이제 간신히 알겠다 싶은 정도에 온 것 같기는 하다.바쁜 일상 속에서 색소폰을 하게 되는 원천이 무엇인가. 대기업에서 회사생활을 한 지는 상당히 오래됐었다. 그때는 7시에 출근해서 새벽 한 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취미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나중에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좋아하는 음악을 통해 마음속 어디엔가 잠재해 있던 것들을 표출하고, 그런 자유를 활성화하게 되는 것이 악기를 불게 하는 원동력이 되더라. 사실 색소폰을 불기 전에는 와이프와 같이 스포츠 댄스를 15년 정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이 내게 낯설지는 않았다. 지금은 댄스스포츠 파티가 열리는 날이면 색소폰으로 블루스나 룸바 장르의 곡을 연주하며 흥을 돋우는 역할을 도맡고 있다. 이렇게 색소폰과 스포츠 댄스를 같이 접목해서 하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다.색소폰을 배우는 과정에서 힘든 부분은 없었나. 생각했던 것처럼 연습이 되지 않거나, 또는 연주한 것을 녹음해서 들어보았는데 스스로 생각한 것과는 너무나 다를 때 색소폰을 과연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 정도로 좌절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레슨을 받거나, 혹은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접하여 도전함으로써 슬럼프를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목표로 하는 곡이 있나. 어떤 곡을 완성해야지 하는 것 보다는 어떤 곡을 하든지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연주를 하고 싶은 것이 꿈이자 바람이다. 과연 평생 한 번 이루어 볼 수 있을지…. 이룰 수 없는 목표가 될 수도 있는 그런 꿈을 가지고 있다. (최용인 사무총장)동호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나. 일반 학원이 아닌 동호회 회원들이 연습실을 다 같이 운영하고 있다 보니 누군가는 회비도 받고 지출도 관리해야 한다. 그래서 총무, 회계 이런 것들을 도맡아 한다. 금년에 총무가 새로 생기면서 나는 회계를 주로 하고, 동시에 동호회 운영에 있어서 상의할 부분들 혹은 연락 사항들을 관리한다. 나이가 있다 보니 총무라고 안 하고 사무총장이라고 불러준다(웃음).자신만의 색소폰을 즐기는 방법이 있다면. 가수들이 무대에 서려면 천 번 이상 연습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완성도는 높겠지만 본인에게는 고통이다. 계속 같은 것을 연습해야 하니 말이다. 나 같은 경우 그렇게 는 안 하는 편이다. 좋아하는 노래가 있으면 이것저것 따라하면서 편안하게 하는 편이다. 그래서 곡으로 따지면 아마 우리 동호회 회원들 중에 여러 가지 곡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 중의 하나로 손에 꼽힐 것 같다. 특별히 어느 한 곡을 잘하진 않지만 여러 곡을 두루두루 한다. 무대에 설 때 떨리지는 않았는가.무대에 섰던 에피소드가 있으면 말해달라. 긴장해서 그런 것인지 무대에서면 악보가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연습할 때에는 조금만 딴 생각하면 악보가 지나가 버리는데, 무대에서 연주할 때에는 집중이 더 잘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에피소드라고 한다면 한번은 공연하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 적이 있었다. 그때문에 우리도 못 가고, 관중도 못 가고 했던 일이 있었다. (이석재 동호회 회원)색소폰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회사를 정년퇴직하고 색소폰을 한번 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원래 가요와 트로트를 즐겨듣고 좋아하는데, 색소폰이 가요와 트로트 장르에 맞는 소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색소폰의 어떤 부분에 매력을 느꼈나. 색소폰을 불고있는 시간에는 색소폰에만 몰두할 수 있어서 좋다. 음악을 잘 몰랐던 사람이었는데 악보를 보게 되고, 색소폰으로 노래가 된다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했다. 색소폰을 하는 데에 있어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보통 사람들이 다 하는 만큼의 거북하지 않고 좋은 소리로 연주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처음 일 년 정도 불었을 때는 내가 제일 잘 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는데, 하면 할수록 더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음악의 깊이라는 것은 끝이 없는 것 같다.목표로 하는 곡은 따로 없나. 꼭 하나만 집어 말해 달라.<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라는 곡을 예전에 하긴 했었는데, 지금도 잘 못 한다. 그래서 더 해보고 싶고, <홍도야 울지마라> 같은 빠르고 경쾌하면서 여러 가지 애드리브가 들어가는 곡들도 해보고 싶다. 글·사진 Ι 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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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1
  • 색소폰이 좋아서 모인 좋은 사람들, '굿피플동호회'
    2018년 5월 18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였다. 혹시 공연이 취소되지 않을까 반신반의하며 도착했던 영동5교다리. 궂은 날씨 속에서도 떨리는 호흡과 손끝으로 몰입하며 오히려 내리는 비가 고마울 정도로 운치 있었던 음악회를 선사했었던 <굿피플동호회>에 대한 기억이 내게 선명하다. 무엇이 그들을 그런 진지함 속에서 색소폰을 연주하게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개포동에 자리한 <굿피플동호회>의 연습실은 그야말로 깔끔했다. 뭔가 모범생 같은 분위기라고 하면 맞을까. 실제로 연습실에 들어가서 바로 눈에 보였던 풍경은 학습의 현장이었다. 둥그렇게 정렬하여 앉은 머리 희끗희끗한 학생들이 태도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선생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모습이 새로웠다. 그 분위기에 압도되어 자연스레 조심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모습을 담고자 셔터를 눌러댔다. 간혹 플래시도 터뜨리고, 자리를 이리저리 이동하며 사진을 찍었던 터라 그들에게는 방해가 됐을 법도 하지만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고 선생님만을 응시했다. 그런 분위기가 익숙해 보이는 선생님은 그런 학생들의 기대에 하나하나 응하고, 대답해주며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모습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수업내용을 물어보니 앙상블수업 중이었다고 한다) 자칫 방해되진 않았을까 걱정하고 있던 와중에 앙상블 수업이 끝났고, 동호회 회원들은 제각기 자신의 악기를 소중하게 닦고 점검했다. 하루 이틀 그렇게 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들의 행동이 자유스러우면서도 지키는 것이 명확해 보였다. 단순히 어떤 단체나 모임에 존속되고자 사람들이 이곳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느껴졌다. 굿피플동호회는 2014년 11월에 만들어진 동호회다. 마음이 맞아서 시작한 13명의 회원이 뜻을 모아 선생님을 초빙하여 지금의 굿피플동호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은 주주회원이 22명이고, 일반회원이 13명으로 총 35명이 굿피플동호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굿피플이 가진 특징이라면 단연 ‘순수 동호회’라는 점을 들 수 있는데, 학원 형태가 아니다 보니 아는 지인들이나 혹은 지인의 소개로 들어온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는 동호회 회원들끼리 별다른 말썽 없이 잘 지내 왔다고 한다. 봄이 되면 강남 양재천에서 5월부터 10월까지 매년 한 달에 한 번씩 공연하고, 연말에는 동호인들과 동호인들의 가족들이 모두 참석하여 무려 백여 명이 되는 사람들이 모여 송년 연주회를 한다. 그렇게 정기적으로 공연을 거듭한 지 6년 차 정도 되니 ‘진짜 음악’에 대한 갈증을 더 느끼게 되고, 반주기에 의존하지 않고 굿피플동호회만의 음악을 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듀엣부터 트리오, 그리고 앙상블까지 공연하기에 충분한 레퍼토리와 음악성을 키워서 관객들이 보기에 지루하지 않은 무대를 구성하고, 자신들끼리도 색소폰을 가지고 흥겹게 놀 수 있는 역량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김종연 동호회 회장)색소폰을 어떻게 하게 되었고, 현재까지 어떻게 해오고 있는지 말해 달라. 1998년도에 미국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을 때였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어느 유명악기점에서 색소폰을 세일한다는 포스터를 보고 언젠가 불겠지 싶어 세일 가격으로 천 불 정도에 구입했었다. 그러나 혼자 불려다 보니 좀 아니다 싶은 감이 있어 현지에 있는 색소폰 선생님을 찾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선생님 연세가 75세 정도였는데, 5살 때부터 악기를 배워 그때까지도 악단에서 활동하고 계신 베테랑이셨다. 그런 분에게 처음부터 색소폰을 배운 것은 행운이었지만, 미국인이다 보니 우리나라 가요를 배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직접 일반 가요 교재를 한국에서 사다가 색소폰 악보로 이조해서 직접 수기로 악보를 써나가는 작업을 하게 되었다. 음악 이론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 좋은 계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98년도에는 고작해야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불러보는 수준이었으니 색소폰을 열심히 했다고 볼 수 없다. 한국에 귀국했던 시점인 2000년도에는 회사 일에 매진하느라 색소폰을 불 기회조차도 만들지 못했었다. 2001년, 개인 사업을 하게 되면서 조금씩 불다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2009년부터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색소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연습해오고 있다. 그에 비해선 색소폰 실력은 아직 미흡하지만 말이다.원래에도 음악을 좋아했었나. 학교 다닐 때부터 팝송은 다 꿰고 있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었다. 특히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는데, 나는 다른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음치에 속했다.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면 음이 틀렸다는 지적을 자주 받는 편이었다. 목소리로 음악을 잘 표현하지 못했기에 악기로 그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음악과 점점 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악기점에서 악기를 우연히 사서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색소폰이 눈에 더 들어온 이유가 있었나. 평소에도 색소폰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물론 있었지만, 단순히 그냥 눈에 가장 들어온 것이 색소폰이었다. 당시에 색소폰뿐만 아니라 젬베라는 악기도 같이 샀었는데, 젬베에 그려진 문양들이 너무 예뻐서 산 것이다. 그 젬베도 여기에 가져다 놓았다.젬베도 잘 연주하나. 반주기만 가지고 색소폰을 불다보니 박자에 문제가 생기더라. 박자 공부를 하기 위해드럼 선생님을 찾아가 젬베를 배웠었다. 덕분에 박자를 이제 간신히 알겠다 싶은 정도에 온 것 같기는 하다.바쁜 일상 속에서 색소폰을 하게 되는 원천이 무엇인가. 대기업에서 회사생활을 한 지는 상당히 오래됐었다. 그때는 7시에 출근해서 새벽 한 시에 퇴근하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취미생활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나중에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좋아하는 음악을 통해 마음속 어디엔가 잠재해 있던 것들을 표출하고, 그런 자유를 활성화하게 되는 것이 악기를 불게 하는 원동력이 되더라. 사실 색소폰을 불기 전에는 와이프와 같이 스포츠 댄스를 15년 정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음악이 내게 낯설지는 않았다. 지금은 댄스스포츠 파티가 열리는 날이면 색소폰으로 블루스나 룸바 장르의 곡을 연주하며 흥을 돋우는 역할을 도맡고 있다. 이렇게 색소폰과 스포츠 댄스를 같이 접목해서 하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다.색소폰을 배우는 과정에서 힘든 부분은 없었나. 생각했던 것처럼 연습이 되지 않거나, 또는 연주한 것을 녹음해서 들어보았는데 스스로 생각한 것과는 너무나 다를 때 색소폰을 과연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 정도로 좌절한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레슨을 받거나, 혹은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접하여 도전함으로써 슬럼프를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목표로 하는 곡이 있나. 어떤 곡을 완성해야지 하는 것 보다는 어떤 곡을 하든지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연주를 하고 싶은 것이 꿈이자 바람이다. 과연 평생 한 번 이루어 볼 수 있을지…. 이룰 수 없는 목표가 될 수도 있는 그런 꿈을 가지고 있다. (최용인 사무총장)동호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나. 일반 학원이 아닌 동호회 회원들이 연습실을 다 같이 운영하고 있다 보니 누군가는 회비도 받고 지출도 관리해야 한다. 그래서 총무, 회계 이런 것들을 도맡아 한다. 금년에 총무가 새로 생기면서 나는 회계를 주로 하고, 동시에 동호회 운영에 있어서 상의할 부분들 혹은 연락 사항들을 관리한다. 나이가 있다 보니 총무라고 안 하고 사무총장이라고 불러준다(웃음).자신만의 색소폰을 즐기는 방법이 있다면. 가수들이 무대에 서려면 천 번 이상 연습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완성도는 높겠지만 본인에게는 고통이다. 계속 같은 것을 연습해야 하니 말이다. 나 같은 경우 그렇게 는 안 하는 편이다. 좋아하는 노래가 있으면 이것저것 따라하면서 편안하게 하는 편이다. 그래서 곡으로 따지면 아마 우리 동호회 회원들 중에 여러 가지 곡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 중의 하나로 손에 꼽힐 것 같다. 특별히 어느 한 곡을 잘하진 않지만 여러 곡을 두루두루 한다. 무대에 설 때 떨리지는 않았는가.무대에 섰던 에피소드가 있으면 말해달라. 긴장해서 그런 것인지 무대에서면 악보가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연습할 때에는 조금만 딴 생각하면 악보가 지나가 버리는데, 무대에서 연주할 때에는 집중이 더 잘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에피소드라고 한다면 한번은 공연하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 적이 있었다. 그때문에 우리도 못 가고, 관중도 못 가고 했던 일이 있었다. (이석재 동호회 회원)색소폰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회사를 정년퇴직하고 색소폰을 한번 해보자 해서 시작하게 되었다. 원래 가요와 트로트를 즐겨듣고 좋아하는데, 색소폰이 가요와 트로트 장르에 맞는 소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색소폰의 어떤 부분에 매력을 느꼈나. 색소폰을 불고있는 시간에는 색소폰에만 몰두할 수 있어서 좋다. 음악을 잘 몰랐던 사람이었는데 악보를 보게 되고, 색소폰으로 노래가 된다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했다. 색소폰을 하는 데에 있어 앞으로의 목표가 있다면. 보통 사람들이 다 하는 만큼의 거북하지 않고 좋은 소리로 연주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처음 일 년 정도 불었을 때는 내가 제일 잘 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었는데, 하면 할수록 더 어렵다는 것을 느낀다. 음악의 깊이라는 것은 끝이 없는 것 같다.목표로 하는 곡은 따로 없나. 꼭 하나만 집어 말해 달라.<이별의 부산 정거장>이라는 곡을 예전에 하긴 했었는데, 지금도 잘 못 한다. 그래서 더 해보고 싶고, <홍도야 울지마라> 같은 빠르고 경쾌하면서 여러 가지 애드리브가 들어가는 곡들도 해보고 싶다. 글·사진 Ι 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 월간색소폰
    • Focus
    2018-07-01
  • [Trace Up]한국의 재즈와 가요의 발자취를 따라가다.취재를 시작하며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재즈1세대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이따금씩 재즈 공연을 보면 드는 생각이다. 내 앞에서 연주하고 있는 저들이 저 무대에 설 수 있었던 발판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조금은 추상적이지만 과거 없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 의미 있는 과거가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다. 우리 <월간색소폰>은 그것을 찾아 취재하여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을 통해 한국의 재즈와 가요 음악사를 들여다보고, 그들을 이해함으로써 생기는 연대감이 우리 독자들을 통해 나오리라 믿는다. 가장 먼저 ‘재즈’의 정의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역시나 모두가 알다시피 재즈는 흑인 음악이고, 그들의 터였던 뉴올리언즈에서 시작했다고 정의한다. 그러면 한국 재즈는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가 취재의 관건이다. 취재를 시작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한국의 재즈1세대’라는 말이다. ‘한국’, ‘재즈’, ‘1세대’. 이 세 단어로만 보았을 때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끼리만 모아 놓은 느낌이다. ‘1세대’라는 단어에만 주목해본다면 ‘처음이라는 것을 일구어 낸 전 세대’의 뜻도 가지고 있고, 지금은 빛바랜, 혹은 오래된 세대라는 느낌을 들게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이 낯선 단어에서 느껴지는 애환은 어쩐지 설명할 수가 없다. 이렇듯 ‘재즈1세대’라는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듣게 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 의미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는 듯 하다. 사실 ‘재즈1세대’라는 말은 공식화되어 있는 말은 아니라고 한다. 대중 매체를 통해서 일반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렇게 된 지도 얼마 안 되었다 한다. 그래서 정확히 어느 시점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재즈1세대’라고 지칭하기 어렵다. 그래서 대략적으로 50~70년대에 연주 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사람들, 또는 우리나라에서 지명도가 있었던 연주자들을 통틀어 지칭한 것을 ‘재즈1세대’라고 부를 수 있겠다. 왜 이제서야 시작하냐고 꾸짖듯이, 취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서 ‘재즈1세대’라고 불렸던 이동기 선생님의 부고소식을 접했다. 시대와 역사를 품은 소중한 숨결, 즉 우리의 자산을 잃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어떤 세상에서 살았는지, 어떻게 음악을 했는지, 그리고 어떤 음악을 했는지를 거슬로 올라가 기록을 남기는 것이 부디 늦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글 | 안지인 기자 jiin@keri.or.kr도움말 | 박대식 새음악기사 대표
    • 월간색소폰
    2018-07-01
  • [Trace Up] 한국의 재즈와 가요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취재를 시작하며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재즈1세대는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이따금씩 재즈 공연을 보면 드는 생각이다. 내 앞에서 연주하고 있는 저들이 저 무대에 설 수 있었던 발판은 과연 어디서 온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조금은 추상적이지만 과거 없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 의미 있는 과거가 우리에게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다. 우리 <월간색소폰>은 그것을 찾아 취재하여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을 통해 한국의 재즈와 가요 음악사를 들여다보고, 그들을 이해함으로써 생기는 연대감이 우리 독자들을 통해 나오리라 믿는다. 가장 먼저 ‘재즈’의 정의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역시나 모두가 알다시피 재즈는 흑인 음악이고, 그들의 터였던 뉴올리언즈에서 시작했다고 정의한다. 그러면 한국 재즈는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가 취재의 관건이다. 취재를 시작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한국의 재즈1세대’라는 말이다. ‘한국’, ‘재즈’, ‘1세대’. 이 세 단어로만 보았을 때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끼리만 모아 놓은 느낌이다. ‘1세대’라는 단어에만 주목해본다면 ‘처음이라는 것을 일구어 낸 전 세대’의 뜻도 가지고 있고, 지금은 빛바랜, 혹은 오래된 세대라는 느낌을 들게 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이 낯선 단어에서 느껴지는 애환은 어쩐지 설명할 수가 없다. 이렇듯 ‘재즈1세대’라는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많이 듣게 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 의미를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는 듯 하다. 사실 ‘재즈1세대’라는 말은 공식화되어 있는 말은 아니라고 한다. 대중 매체를 통해서 일반화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렇게 된 지도 얼마 안 되었다 한다. 그래서 정확히 어느 시점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재즈1세대’라고 지칭하기 어렵다. 그래서 대략적으로 50~70년대에 연주 활동을 활발하게 했던 사람들, 또는 우리나라에서 지명도가 있었던 연주자들을 통틀어 지칭한 것을 ‘재즈1세대’라고 부를 수 있겠다. 왜 이제서야 시작하냐고 꾸짖듯이, 취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서 ‘재즈1세대’라고 불렸던 이동기 선생님의 부고소식을 접했다. 시대와 역사를 품은 소중한 숨결, 즉 우리의 자산을 잃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어떤 세상에서 살았는지, 어떻게 음악을 했는지, 그리고 어떤 음악을 했는지를 거슬로 올라가 기록을 남기는 것이 부디 늦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글 | 안지인 기자 jiin@keri.or.kr도움말 | 박대식 새음악기사 대표
    • 월간색소폰
    2018-07-01
  • 2018년 07월(25호)
    - [Trace Up] 한국의 재즈와 가요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취재를 시작하며 - 색소폰이 좋아서 모인 좋은 사람들, '굿피플동호회' - ‘한(恨)’의 정서를 자신만의 색으로 풀어내는 '색소포니스트 허철행' - [JAZZ AGE] 세계 재즈의 역사, 1930년대의 재즈를 넘어 1940년대의 비밥 재즈로 - [MUSIC ESSAY] 포르투갈의 파두와 아줄레주 속의 색소폰 선율 - 소중한 인연, 행복한 만남!'제2회 김미영(밍밍) 색소폰라인 전국모임' - [SAXOPHONE COLUMN] 알고 연주하는 색소폰 암부슈어(Embouchure) - ‘마리오 가토’와 ‘파브리지오 말레르바’가 함께하는 아코디언 초청연주회 - [창간2주년기념 특집] 사회 역사적 배경으로 보는 색소폰 열풍, 성취감 회복의 악기 ‘색소폰’ - [창간2주년기념 특집] 색소포니스트로 재조명하는 한국색소폰 역사의 발자취 - 색소폰으로 새 삶을 사는 기분 "안양 호계동 신바람색소폰 동호회" - 색소폰 문화를 개척하는 '색소폰랜드' 대표, 색소포니스트 강기만 - [SAXOPHONE Q&A] 리드의 품질 개선방법 - [PEOPLE INSIDE] 색소폰 연주로 감사함을 전합니다. '신진 E&I, 대광산전 김승룡 대표이사' - [PEOPLE INSIDE] 음악애호가의 특별한 색소폰 사랑44년 연기경력의 베테랑 배우 송경철 - [SPECIAL] 엘프와 함께하는 제 7회 CBS 아마추어 색소폰 콘테스트 - 색소폰 음악의 '진수(眞髓)' <윤여민 색소폰 독주회> - [SAXOPHONE COLUMN] 훌륭한 색소폰 연주를 위한 방법 - [SAXOPHONE Q&A] 마우스피스와 리드의 조합찾기 - [MATCHING PARTNER] 바람이 낳은 악기, 삶의 무게로 누르는 손풍금 아코디언과 반도네온 - [JAZZ CLUB] ‘트렌디’하고 ‘글로벌’하다!,' ERICʼS PUB' - [CULTURE](BOOK) 역사학자 홉스봄이 바라본 재즈의 삶과 죽음 - [MOVIE] 삶의 고됨에 Jazzy한 위로를…, 영화 Mo’ Better Blues - [CULTURE] (ALBUM) Beyond The Missouri Sky by Pat Metheny&Charlie Haden - [CULTURE] (ALBUM) Stan Getz, Joao Gilberto Getz/Gilberto - [TRACE UP] 한국의 재즈와 가요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194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 - [JAZZ ON CINEMA] 불모지에 피어난 백발의 열정 '브라보! 재즈라이프' - [CLOSE UP] 색소폰과 와인의 공통분모, 천천히 익어가는 와인의 시간 - [SONG STORY] 배호의 '안개낀 장충단공원' - [LEGEND ICON] 현대재즈의 정신을 창조한 혁명가 ‘오넷 콜맨’ - [BOOK] My favorite Jazz, 쉽게 읽는 재즈 입문서 ‘언제나 재즈처럼’ - [CLOSE UP] 색소폰 연주가 우리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 - [SPECIAL] 학생과 시민이 함께 즐긴 따뜻한 시간 '인천대학교 송년의 밤' - [JAZZ AGE] 세계 재즈의 역사 본격적인 스윙시대의 개막, 1930년대 - [SONG STORY]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 [SEASONAL SOUND] Michael Brecker의 'Nearness of You'를 들으며 함께하는 따뜻한 봄 - [JAZZ CLUB] 재즈 향 가득한 비밀공간 '라 끌레(La cle)' - [SPECIAL] 세계 재즈 페스티벌 - [HOT ISSUE] 마음을 치유하는 뮤직 테라피 ‘건강한 색소폰’ - [LEGEND ICON] 소울풀한 연주의 퓨전재즈 낭만가 ‘스탠리 터렌타인’ - [MUSIC ESSAY] 색소폰, 스페인 안달루시아에 반하다
    • 지난 호
    • 2018년
    • 07월
    2018-07-01
  • 다함께 연주하는 앙상블 색소폰 - 담다디
    [A]부분 - 이 곡의 인트로이자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시그니처 부분입니다 <담다디>만의 특유의 발랄함을 살려서 가볍고 통통 튀는 느낌으로 연주합니다. - Alto 1st를 제외한 나머지 파트들은 스타카토 주법에 가깝게 연주하도록 합니다. [B]부분 - 처음에 나오는 sf.(스포르찬도)는 그 음을 특히 세게 연주하라는 뜻이므로 유의하도록 합니다. - 처음 8마디(Tenor가 멜로디를 하는 부분)보다 그 다음 8마디(Alto 2nd이 멜로디를 하는 부분)에서 나머지 파트들을 조금 더 크게 연주합니다. [C]부분 - 모든 파트가 mf로 앞 부분에 비해 조금 힘차게 연주합니다. [D]부분 - 전체적으로 똑같은 반주 형태가 계속 지속되다 보면 곡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서정적으로 편곡을 한 부분입니다. - Alto 2nd와 Tenor는 멜로디, Alto 1st는 대선율, Baritone은 베이스를 연주하게 되는데 각각의 선율을 살려주어 전체적으로 유려하게 들리도록 연주합니다 [E]부분 - 시그니처 부분이 다시 한번 등장합니다. 인트로와 같이 발랄하게 연주하도록 합니다. - 마지막 2마디 전에 rit.(리타르단도)가 있으므로 점점 느려지면서 곡을 마무리 하도록 합니다. (월간색소폰)김동현 뉴아더스 작곡가= suyeon@keri.or.kr
    • Lesson
    • 앙상블
    2018-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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