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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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슴 깊이 울리는 재즈 색소폰 A, B, C - Take the 'a' train
    이번 곡은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를 작곡한 알토 색소폰 연주자 폴 데스먼드(Paul Desmond)의 버전으로 를 소개한다. 폴 데스먼드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자면, 그는 데이브 브루벡 퀄텟(Dave Brubeck Quartet) 에서 알토 색소폰을 연주하였고, 재즈 음악 사상 처음으로 4분의 5박자의 곡인 를 작곡, 연주하여 당시 밀리언셀러를 기록하고, 재즈 사에 길이남을 전설이 되었다(1959). 폴 데스먼드의 연주 스타일은 아주 조용하며, 간단하고 아름다운 즉흥 연주로 관객을 매료시키는 연주자다. 테크닉으로 승부를 거는 연주자와는 달리 차분하면서도 개성이 뚜렷하다. 이제 그가 연주한 데이브 브루벡(Dave Brubeck) 밴드의 을 살펴보자. (2)번은 A장조의 스케일. (3)F음은 B7(b5)의 b5음입니다(B, D♯, F, A). (4)역시 B7(b)5의 음인 F. (11)D음은 B(7b5)의 ♯9도. 유투브에서 폴 데스먼드의 solo transcription 을 클릭하면 (A)부분의 솔로 애드리브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의 차분한 연주를 들어봅시다. 개성이 뚜렷한 연주입니다. (월간색소폰)정창균 칼럼니스트= suyeo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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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즈
    2018-06-04
  • 트로트와 함께하는 색소폰 연주 – 홍콩의 왼손잡이
    이번 호에는 트로트 마니아들이 좋아하는 S미디어의 [강승용 명작 색소폰] 16번째 곡 <홍콩의 왼손잡이>(한산도 작사, 백영호 작곡, 이미자 노래) Tenor Saxophone 연주를 설명합니다. 다음 페이지의 악보는 제가 레코딩 때 사용한 그 악보입니다. 가수 이미자의 노래를 들어보신 후 연주하시기 바랍니다. 이 곡은 전형적인 못 가춤 마디의 트로트로 가수 이미자의 노래와 비교해서 보면 그 차이점을 쉽게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곡의 연주에 중요한 것은 경과음과 장식음의 사용입니다. 첫 번째 소절의 B음과 G♯음의 사이에는 B♭, A를 경과음으로 추가하여 부드러움을 주었습니다. 물론 이 경우는 추가하는 음엔 텅잉하지 않습니다. 둘째 소절의 넷째 박자에도 똑같이 경과음을 추가하고 8번째 소절의 넷째 박자 C♯음과 G♯음 사이에는 C, B, A음을 경과음으로 사용하여 부드러움을 주었습니다. 홈페이지의 기사내용은 일부 내용만 보여지며 전체기사(내용과 사진, 악보)는 월간색소폰에 실려있습니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월간색소폰)강승용 KSA대한민국색소폰연주자협회 명예회장= suyeo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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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01
  • FUNKY BAND 제이쉐이커와 함께하는, '김정음의 孝 콘서트'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서교동 ‘孝’ 콘서트2018년 5월 12일, 케이아트 디딤 홀에서 <김정음의 孝 콘서트>가 열렸다. 서교동에 위치한 소위 말해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알려진 홍대에서 만나는 효 콘서트는 색달랐다.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풍성한 사운드와 맛깔나는 악기의 구성이 리허설부터 엉덩이가 절로 들썩이는 게 만들었다. 대한민국 최초 펑키밴드 J.Shaker공연의 시작과 끝은 펑키밴드 제이쉐이커와 김정음의 퓨전무대로 형성되었다. 드럼 김상돈, 기타 김범준, 피아노 김상민, 베이스 김정훈, 그리고 김정음과도 인연이 깊은 트롬본 이한진으로 구성된 실력파 밴드 제이쉐이커는 2006년에 결성된 한국 최초의 펑키밴드라 한다. 개성과 색깔이 짙은 밴드 제이쉐이커와 김정음의 조합이 꽤 잘 어울렸다.GUEST 케이지 김, 홍민아이날의 게스트로는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고있는 케이지 김과, 그리고 김정음의 제자로 색소폰 연주자로서의 신호탄을 알리는 홍민아의 연주도 있었다. 케이지 김의 신나는 무대 매너와, 김정음과 홍민아의 감미로운 듀엣 연주로 무대는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이날의 주인공 ‘김정음ʼ이날의 주인공 김정음의 첫 솔로곡 <열애>의 연주가 나오니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기대에 찬 반응을 보여줬다. 이같은 성원 속에서 김정음은 연달아 , <여러분>을 내리 솔로로 연주했다. 마지막에는앙코르로 <미워도 다시 한번>을 연주하며 마무리했다. 모두가 열정을 가슴에 품고 집에 돌아가게 된 뜨거운 무대였다. 글 | 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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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01
  • FUNKY BAND 제이쉐이커와 함께하는, '김정음의 孝 콘서트'
    서교동 ‘孝’ 콘서트2018년 5월 12일, 케이아트 디딤 홀에서 <김정음의 孝 콘서트>가 열렸다. 서교동에 위치한 소위 말해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알려진 홍대에서 만나는 효 콘서트는 색달랐다. 공연장을 가득 채우는 풍성한 사운드와 맛깔나는 악기의 구성이 리허설부터 엉덩이가 절로 들썩이는 게 만들었다. 대한민국 최초 펑키밴드 J.Shaker공연의 시작과 끝은 펑키밴드 제이쉐이커와 김정음의 퓨전무대로 형성되었다. 드럼 김상돈, 기타 김범준, 피아노 김상민, 베이스 김정훈, 그리고 김정음과도 인연이 깊은 트롬본 이한진으로 구성된 실력파 밴드 제이쉐이커는 2006년에 결성된 한국 최초의 펑키밴드라 한다. 개성과 색깔이 짙은 밴드 제이쉐이커와 김정음의 조합이 꽤 잘 어울렸다. GUEST 케이지 김, 홍민아이날의 게스트로는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고있는 케이지 김과, 그리고 김정음의 제자로 색소폰 연주자로서의 신호탄을 알리는 홍민아의 연주도 있었다. 케이지 김의 신나는 무대 매너와, 김정음과 홍민아의 감미로운 듀엣 연주로 무대는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이날의 주인공 ‘김정음ʼ이날의 주인공 김정음의 첫 솔로곡 <열애>의 연주가 나오니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기대에 찬 반응을 보여줬다. 이같은 성원 속에서 김정음은 연달아 , <여러분>을 내리 솔로로 연주했다. 마지막에는앙코르로 <미워도 다시 한번>을 연주하며 마무리했다. 모두가 열정을 가슴에 품고 집에 돌아가게 된 뜨거운 무대였다. 글 | 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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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01
  • [Jazz Club]푸른 달에서의 한때, 'ONCE IN A BLUE MOON'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냐는 질문에는 저마다의 대답과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대다수의 사람이 누군가와 함께할 때를 얘기하지 않을까. <원스인어블루문>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장소를 제공한다. 맛있는 음식과 퀄리티 높은 라이브 음악까지 더해진다면 이날의 기억은 언제든 떠올려도 행복한 순간으로 남을 것이다. 고요한 자유로움1998년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 횟수로 20년째 자리하고 있다. 오래 되었다라는 말보단 클래식하다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원스인어블루문> 내부의 전체적인 느낌은 푸른 빛이다. 마치 바닷속에 들어갔을 때 느껴지는 고요한 자유로움이 떠오른다. 무대 중앙에 보이는 ONCE IN A BLUE MOON이 새겨진 푸른 네온사인은 모던한 느낌과 동시에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고, 벨벳 질감으로 된 블루 빛 벽면은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식사를 할 수 있는 테이블이 중앙을 차지하고, 간단히 와인과 바를 즐길 수 있는 공간 또한 구분되어 있어 편했다. 테이블마다 초를 켜두어 자칫 차갑게 느껴질 수 있는 푸른 계열의 느낌에 따뜻함을 더했다. 파리의 연인2004년도에 방영했던 <파리의 연인>을 기억하는가. “애기야 가자”라는 유행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배우 박신양이 피아노를 치면서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를 불렀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바로 그 장면의 촬영지가 원스인어블루문인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 외 각종 TV 드라마, 영화, CF 등에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그 중 꼽으라면 드라마 <파리의 연인>, <내 이름은 김삼순>, 영화 <가문의 영광>이 있겠다. 그밖에 국내 가수들의 쇼케이스나 기업체들의 신제품 설명회 장소로도 자주 쓰이고 있는데 흥미로웠던 점은 프로포즈 이벤트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 그곳이 영원히 기억에 남을 행복한 순간으로 쓰여질 것이란 상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스크린과 라이브공연 중간에는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과거 뮤지션들의 연주 비디오가 나왔다. 스크린이 크다보니 마치 눈앞에서 공연을 보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와 닿았다. 이날 라이브 공연은 이 함께 했다. 현재 한국 재즈 씬에서 사이드맨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곽정민, 베이시스트 고재규, 드러머 최보미 세 명의 뮤지션이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날은 색소포니스트와 보컬도 함께했던 화려한 무대였는데, 각 악기의 솔로 타임을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스테이크와 와인 그리고 JAZZ원스인어블루문에서는 매일 공연을 볼 수 있는 것과 동시에,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이곳의 장점이다. 나라별로 다양하게 구비된 와인과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으며, 식욕을 돋구는 에피타이저부터 달콤한 디저트까지 풀코스로 만끽할 수 있다. 원스인어블루문은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이지만서도 음악에 목적을 둔 공간이다. 좋은 음향과 공연에 집중할 수 있는 조명이 그것을 반증한다. 가벼운 음료와 음악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라면 바를 이용해도 좋다. 글 | 안지인 기자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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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01
  • [Jazz Club]푸른 달에서의 한때, 'ONCE IN A BLUE MOON'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냐는 질문에는 저마다의 대답과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대다수의 사람이 누군가와 함께할 때를 얘기하지 않을까. <원스인어블루문>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하기에 더할 나위없이 좋은 장소를 제공한다. 맛있는 음식과 퀄리티 높은 라이브 음악까지 더해진다면 이날의 기억은 언제든 떠올려도 행복한 순간으로 남을 것이다. 고요한 자유로움1998년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 횟수로 20년째 자리하고 있다. 오래 되었다라는 말보단 클래식하다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원스인어블루문> 내부의 전체적인 느낌은 푸른 빛이다. 마치 바닷속에 들어갔을 때 느껴지는 고요한 자유로움이 떠오른다. 무대 중앙에 보이는 ONCE IN A BLUE MOON이 새겨진 푸른 네온사인은 모던한 느낌과 동시에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고, 벨벳 질감으로 된 블루 빛 벽면은 부드럽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식사를 할 수 있는 테이블이 중앙을 차지하고, 간단히 와인과 바를 즐길 수 있는 공간 또한 구분되어 있어 편했다. 테이블마다 초를 켜두어 자칫 차갑게 느껴질 수 있는 푸른 계열의 느낌에 따뜻함을 더했다. 파리의 연인2004년도에 방영했던 <파리의 연인>을 기억하는가. “애기야 가자”라는 유행어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었다. 배우 박신양이 피아노를 치면서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를 불렀던 장면은 지금도 생생하다. 바로 그 장면의 촬영지가 원스인어블루문인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 외 각종 TV 드라마, 영화, CF 등에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그 중 꼽으라면 드라마 <파리의 연인>, <내 이름은 김삼순>, 영화 <가문의 영광>이 있겠다. 그밖에 국내 가수들의 쇼케이스나 기업체들의 신제품 설명회 장소로도 자주 쓰이고 있는데 흥미로웠던 점은 프로포즈 이벤트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에게 그곳이 영원히 기억에 남을 행복한 순간으로 쓰여질 것이란 상상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스크린과 라이브공연 중간에는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과거 뮤지션들의 연주 비디오가 나왔다. 스크린이 크다보니 마치 눈앞에서 공연을 보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와 닿았다. 이날 라이브 공연은 이 함께 했다. 현재 한국 재즈 씬에서 사이드맨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곽정민, 베이시스트 고재규, 드러머 최보미 세 명의 뮤지션이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날은 색소포니스트와 보컬도 함께했던 화려한 무대였는데, 각 악기의 솔로 타임을 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스테이크와 와인 그리고 JAZZ원스인어블루문에서는 매일 공연을 볼 수 있는 것과 동시에,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이곳의 장점이다. 나라별로 다양하게 구비된 와인과 스테이크를 맛볼 수 있으며, 식욕을 돋구는 에피타이저부터 달콤한 디저트까지 풀코스로 만끽할 수 있다. 원스인어블루문은 식사를 할 수 있는 레스토랑이지만서도 음악에 목적을 둔 공간이다. 좋은 음향과 공연에 집중할 수 있는 조명이 그것을 반증한다. 가벼운 음료와 음악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라면 바를 이용해도 좋다. 글 | 안지인 기자jii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6-01
  • [Seasonal Sound]'Joshua Redman'의를 들으며 함께하는 여름
    (월간색소폰)이은용 칼럼니스트= 앨범이 주는 ‘Joshua Redman’(조슈아 레드맨)의 상큼한 미소가 사람들로 하여금 기분 좋게 한다. 앨범의 음악도 그러하다. 앨범은 허비 행콕의 의 컨셉에 따라 스탠다드 곡들과 함께 스티비 원더, 밥 딜라, 죠니 미첼, 프린스 등의 팝 곡을 연주한 앨범이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조슈아 레드맨 식의 톤 컬러와 프레이징은 앨범의 기본적 안정성을 만들어 내고 있지만, 스탠다드 곡이건 팝 곡이건 곡을 해석하는 데 있어 새로움을 구조적인 측면에서 찾았다는 것, 특히 리듬의 다양성의 측면에서 찾았다는 것은 도드라지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조슈아 레드맨은 마치 존 콜트레인의 영향을 받은 마이클 브레커가 웨인 쇼터의 감성으로 연주하는 것 같은 연주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참고해서 이 앨범을 감상해도 좋다.조슈아 레드맨은 다른 동료 연주자들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스타성을 확고하게 만들어 나가고 있다. 또 고전적인 취향의 이미지가 적지만, 자기만의 스타일에 치우친 타 색소포니스트들에 비해서는 무게가 있다. 이것이 앨범에 담긴 조슈아 레드맨의 음악을 이야기한다. Joshua Redman의 또 다른 주요 작품들개인적으로 너무 아끼는 앨범인 는 처음 이 앨범을 접했을 때 정말 대단한 사이드 맨들과 연주를 했었던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마음에 품으며 듣게 된 앨범이다. 이 시기에 하버드 대학의 졸업생이자 예일대 법대 입학 허가를 받은 조슈아 레드맨은 음악인의 삶을 인정하게 되며, 곧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1993년 봄 그의 첫 번째 앨범을 발매하게 된다. 스스로 타이틀을 지은 이 앨범은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으며 그 해 가을에는 팻 메시니, 찰리 헤이든 그리고 빌리 히긴스의 모든 스타 군단과 함께 녹음한 앨범 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톱 재즈 앨범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들과의 앨범 가 그 결과물인 것이다. 팻 메스니와 함께 연주한 는 현재 뮤지션들에게도 최고의 연주였다는 평을 듣고 있는 곡이며 조슈아 레드맨은 인터뷰에서 함께 작업한 거장 뮤지션들로부터 많은 격려와 응원을 받았던 영광스러운 작업이었다고 늘 이야기했다.조슈아 레드맨 & 브래드 멜다우 _ 색소폰과 피아노의 앙상블조슈아 레드맨의 앨범 중 라는 앨범은 두 거장의 첫 듀오 앨범으로서 두 연주자는 90년대 초 젊은 유망주에서 어느덧 동시대를 대표하는 거물로 성장한 슈퍼 뮤지션들이라 할 수 있다. 조슈아 레드맨은 1998년 음반 (for Changing Times)에서 다시 한 번 브래드 멜다우를 피아니스트로 기용하면서 함께 활동했다. 하지만 이후 각자의 음악적 개성이 뚜렷해지고 서로의 바쁜 일정으로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할 수 있는 기회는 이전처럼 잦을 수 없었다. 그런데 브래드 멜다우의 와 의 이 두 음반이 녹음되던 무렵에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그들의 새로운 음악적 자극을 얻게 되고 그것은 두 사람만의 이중주 무대로 이어졌다. 2011년부터 시작된 조슈아 레드맨과 브래드 멜다우의 듀오 음악회는 두 사람의 일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되었고 공연이 거듭될수록 두 사람의 연주 안에서의 즉흥적인 대화는 더욱 끈끈함을 더하게 되었다. 재즈 신에서 잘하는 색소폰 주자와 피아니스트의 이중주는 늘 있었다. 하지만 그 연주가 재즈 클럽이 아닌 콘서트홀 무대에 오르고, 하나의 작품으로 남은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재즈가 즉흥연주의 음악이니만큼 두 사람만의 연주로 내실 있는 연주를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탁월한 색소폰과 피아노 이중주의 음반들은 간혹 있었다. 즉흥으로 연주하는 이중주란 쉽게 도전할 수 있는 녹음이 아니다. 베이스와 드럼이라는, 연주의 ‘뒤 공간’을 채워주는 악기가 없을 때 즉흥연주의 한 음, 한 음은 모두 민 낯을 드러낸다. 그러한 상황에서 조슈아 레드맨과 브래드 멜다우가 그리 많은 사람이 엄두도 내지 못했던 연주를 하려 하는 것은, 즉흥연주자로서의 확신 그리고 그들만이 갖고 있는 개성 때문이다. 탁월한 독주자로서, 즉흥연주자로서 두 사람의 기량은 새삼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그들의 젊은 시절에 재즈계가 인정한 것이었다.글 | 이은용 MCMI 음악학원 대표suyeo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6-01
  •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철학과 신념으로, '색소폰 수리 전문가 양철호'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조차도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일까?”라는 필터를 끼고 보면 그것을 투명하게 바라다보는 것이 몹시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순수하게 음악과 악기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 있다. “연주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는 색소폰 수리 전문가 양철호를 만났다. ​원래는 어떤 일을 했었나?장안대학교에서 세무회계를 전공하였고, 이후 해군 군악대에 자원입대하여 플루트로 군 복무하였다. 그 ​후에 삼영 화학주식회사라는 회사 경리부에서 2년 정도 근무하였다.어떤 계기로 음악 분야에 입문하게 되었나?회사 생활을 2년 정도 하다 보니 인생이 황폐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계산을 좋아하고, 계산을 즐기는 사람이었다면 그 일을 했을 때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음악이었기 때문에 몸은 회사에 있어도 머릿속엔 항상 음악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로지 회사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었다. 회사 일이 끝나면 교회에 있는 나만의 공간에서 연습할 수 있었다. 그 빈 공간에서 악기를 불었을 때 울리는 메아리는 나의 정신을 행복하게 만들었기에 나는 그 시간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런 생활을 2년 동안 반복하다보니 마음은 항상 연습하는 곳에 가 있고 몸은 마치 습관처럼 회계 업무를 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를 돌아봤던 이 순간이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다.하던 일을 그만두고 갑자기 음악으로 전향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것 같은데?당시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삶이 괴롭다고 얘기했을 때 돌아오는 말은 자신의 적성에 안 맞은 일을 하는 것을 누가 좋아하냐…, 다 그냥 그렇게 사는 거다… 는 말들이었다. 부모님도 나의 그런 결정에 많이 당황하시고 불편해하셨었다. “과감히 도전해라” “거기서 뭔가 찾을 수 있을 거야”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많이 낙담도 되었지만 내가 행복해하는 일을 하고자 과감히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996년 12월 31에 사표를 냈다.회사를 관둔 뒤 어떤 일을 하였나?해군 군악대에 있었을 때 플루트를 불었었다. 당시 그곳에서 연습하고, 합주하고, 연주하면서 관악기에 매료되었던 것이 내가 플루트 입시를 시작하게 된 원동력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제대로 교육을 받고, 제대로 학교에 가기 위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지만 금세 현실의 벽에 부딪혔었다. 경제적인 부분 때문이었다. 요즘은 아르바이트라는 것이 일반화되었지만, 당시에는 아르바이트를 여기저기서 하는 것이 보편적이지 않았고, 일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랬던 실정에 음악을 하는 데에 있어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은 만만치가 않았다. 모든 시간을 연습에 투자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좋은 악기를 써야 하고, 교습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부모님께 레슨비용을 받아서 교습을 받는 시간이 굉장히 고통스럽더라. 부모님이 노력하셔서 받은 페이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기 때문에 너무 감사하고 죄송하다. 연습하는 과정에서도 이게 바람직한 건 지, 현명한 건지 계속 생각하게 되더라. 그 과정에서 내 인생이 입시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단지 음악과 함께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음악에 관련 된 일을 하고 싶다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누구의 도움이 아닌 나 스스로가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이다.악기점에서는 어떻게 일하게 되었나?그 당시 대한민국에 ‘길ʼ이라고 한다면 다 종로에 있었다. 해군군악대 후배가 낙원상가의 한 악기점에서 일하고 있어 무작정 찾아갔었다. 같이 상의를 하고, 근처의 악기점에서 한 1분, 2분 정도 면접을 봤는데(사실 면접 이라기보단 대화에 가깝다), “직원을 뽑지 않겠다”라고얘기하시더라. 그렇게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바로 옆가게에 있는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어떤 악기를 보러왔나 싶어 말을 거시길래 “악기를 사러 온 것이 아니고, 악기를 판매하거나 고치는 일을 해보고 싶어서 왔다”고 얘기했더니 그분이 눈이 동그래지며 놀라시더라. 마침 직원을 찾고 있으셨던 거다. 그분이 “조건이 뭔가요?”라고 물으시길래 “이쪽 일 아무것도 모르고 경력도 없습니다. 바라는 것은 일을 할 기회를 얻고 싶을 뿐입니다. 계약조건은 사장님께서 해주시는 것으로 만족할 겁니다”라고 말하니 언제부터 일할 수 있냐고 되물으시더라. 당장 이라도 일하고 싶었지만 그 상황 자체가 내게도 워낙 갑작스러웠던지라 일주일 정도 시간을 벌었던 것 같다. 일주일 동안 고민하고 첫 출근을 했다. 종로에서의 일이 시​작된 것이다.악기점에서 일하는 동안 어땠었나?그때가 1997년도였다. 출근 시간은 9시까지였고, 집은 안양이었다. 1호선을 타고 종각역에 내려서 낙원상가 2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는 것이었다. 전철 45분에 걷는 것 15분으로 총 1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9시가 출근 시간이었지만 그 전에 출근해서 혼자 악기도 좀 만져보고, 명상도 하고 그랬다. 정말 열심히 일했었다. 그러다 프랑스 셀마에 공부하러 가게 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가?배움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내가 악기점에 입문해서 배우는 것이 충분했다면 아마 못 느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악기점에서 악기를 판매해서 십만 원의 이율을 본다 고 쳤을 때 한 오만 원 정도가 수리비로 나간다. 자체 수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수리를 의뢰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느낀 것이 판매도 중요하지만 사후관리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것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판매만 한다는 것은 좋은 상황으로 지속적이지 못하겠더라. 수리하는 방법과 기술을 내가 일하는 악기점에서는 배울 수 없었고,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어밖에 모르는데 방법이 없지 않나….셀마에서는 얼마 동안 공부했나?프랑스에 있었던 기간은 총 6개월이었고, 셀마에서 공부한 건 3개월이었다. 한국인으로선 최초였고, 그렇기에 특별한 기회를 얻었다고 하면 될 것 같다. 셀마는 학교의 개념이 아닌 순수한 회사이기 때문에 가르쳐 주시는 분 도 실무자이다. 교육을 위해서 그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작업을 지켜보면서 배우게 되는데, 작업을 하는 상황 속에서 교육생인 내가 질문을 할 때 그 질문에 답변을 줄 수 있다. 그때 나를 가르친 실무자 이름이 필립이었는데, 필립이 빠른 속도로 프랑스어로 얘기하니 하나도 못 알아듣겠더라. 언어를 준비한다고 했어도 일상적인 언어와 회사에서 쓰는 언어 그리고 회사에서 쓰는 물품과 장비, 부속에 관련된 단어들은 알아들을 길이 없었다. 그 당시에 MD라고 하는 미니 디스켓을 가지고 갔었는데, 속도가 빨라서 잘 이해를 못 하겠으니 여기 마이크에 당신이 말을 해 주면 내가 집에 가서 이해해오겠다고 얘기했다. 그것을 이해하고 그분이 마이크에 설명을 하나하나 해주더라.셀마에서 교육 이수를 하려면 불어를 했었어야 할 텐데?사실 언어에 그리 관심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셀마에 가야 했기 때문에 준비했다. 한국에서 준비했던 불어는 학원레슨 방식이었다. 맨투맨이 아닌 한 반에 열 명 정도 앉혀 놓고 지도하는 방식이어서 섬세하게 발음 교정받기가 힘들었다. 비슷하게만 하면 그냥 넘어가곤 했다. 그런 생활을 9~10개월 정도 한 것 같다.셀마 교육과정 동안 어떻게 공부했나?하숙했던 집에 딸이 있었다. 그분의 도움을 받아서 하루에 2시간씩 불어를 배우고 나는 플루트를 가르쳐 드렸다. 수업 때 필립이 한 말을 녹음해서 들려주면 그분이 번역해주었다. 그러면 내가 그 얘길 듣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서 그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들고, 문장의 구성이 괜찮은지 묻고 그것을 A4용지에 다시 적고 그 글을 자기 전까지 다 외웠다. 적어도 필립 앞에서 A4용지를 들고 말하진 않게 할 정도로 외웠다. 그러니 필립 입장에서는 어제는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던 애가 다음날엔 문장구성을 하니 꽤 놀라웠을 것이다. 이 방식으로 반복하다 보니 점점 도구, 부속, 지시사항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면서 한 달 정도 되니 프랑스 사람과 ​농담을 하고 있더라.‘노나까 보에끼ʼ에 대해 말해달라.‘노나까 보에끼ʼ는 무역회사이다. ‘셀마ʼ라는 프랑스 회사의 지분을 가진 회사이기도 하고, 체계적인 메이커를 독점하고 있는 규모가 큰 회사이다. 아시아 총판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셀마라는 브랜드가 한국에 들어오려면 노나까 보에끼를 통해서 들어와야 한다.어떻게 인연이 닿은 것인가?셀마에서 공부를 하고 독립해서 일하고 있었는데, 전에 일했던 악기점에서 다시 스카우트 제안이 왔었다. 사장님이 현악기 전문점을 내셨는데 세 달 만에 재정적 상황이 어려워져 내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렇게 진열된 현악기를 치우고 관악기, 특히 색소폰을 진열하여 그 가게를 개점하게 되었다. 임대료와 보증금이 비싼 상황이라 직원도 뽑기 어려운 실정이어서 혼자서 수리, 판매, 상담, 배달 일을 다 했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수리하고, 상담하고, 판매하고, 간혹 선생님들이 오시면 대화하고 밤 12시에 퇴근하는 일상이 반복되었었다.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는 수준까지 매출이 올라직원 한 명을 뽑아서 1년 반 정도를 집중해서 가르쳤다. 그런 상황 속에서 존 노나까가 한국에 왔고 우리 샵이 일본의 ‘노나까보에끼ʼ의 회사에서 셀마라는 악기를 수입하게 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됐다. 일종의 독점계약 같은 것을 한 거다. 일본식 수리가 배우고 싶었던 내게 존 노나까 사장님이 배움의 기회를 주셨고, 그로 인해 토루 사바노 선생님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 개인레슨 해주셨었다.토루 사바노 선생님께 개인 교습을 받을 때 과정이 어땠나?일본식 작업의 스타일을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다. 그토록 섬세하게 작업하는 모습을 처음 봤었기 때문이다. 작업의 방식은 비슷할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을 자꾸 느끼면서 그게 해결될 때까지 섬세하게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손이 많이 가더라. 미세한 스크래치 하나도 인정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그렇게 처리하시니 결과적으로 깔끔하게 나오더라. 그걸 알게 되면서 매우 감동했다. 수리하는 사람들은 섬세한 거 하나를 보고 배운다는 것이 굉장히 값진 거다. 그 섬세한거 하나 때문에 작업의 결과가 안 좋게 나오는 게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 덕분에 내가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미국에는 어떻게 가게 되었나?결혼하고 나이가 드는 과정에서 내가 40이든 60이든 교육을 받고자 한다면 받을 수 있겠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뿌리를 내리면 쉽게 움직일 수 없지 않나, 정착하고 그런 부분 때문에 두려웠다. 나는 원래 자유롭고 싶은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더 뭔가에 메이기 전에 하고 싶은걸 하고 싶었다. 플루트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을 늘 간직했었는데, 우연히 <플루트 앤 플루티스트>라는 잡지에 조나단 랜달이라는 선생님께 어떤 분이 교육을 받고 왔다는 행보를 써놓은 부분을 읽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분한테 교육을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준비하다가 잡지에 나왔던 분하고 통화가 되어 미국 가는 것을 준비하게 되었다.조나단 랜달 선생님에 대해 말해달라.조나단 랜달 선생님은 전문가용 플루트를 만드시는 분이다. 이분이 대단한 게 어디서 사다가 작업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하나 다 본인이 직접 만드신다. 말 그대로 핸드메이드인 거다. 자신이 만드는 것에 대해서 완벽을 추구하는 그런 분이셨다. 플루트의 수리 과정, 플루트의 마우스피스를 깎는 과정 등을 이수할 경우에 각각 분야별로 수료증을 주시는데, 그렇게 세 개의 과정에서 수료증을 받았다.다년간의 유학이 본인에겐 어떤 의미인가?내 인생의 철학을 만드는 기회가 됐다고 본다.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어떤 삶으로 살다 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돌아보게 하고, 구체적인 체계를 잡게 된 계기였다.색소폰 수리를 하는 데에 있어 자신만의 신념이 있나?사람은 누구나 적게 일하고 많이 받고 싶어 하는 게으른(?) 본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일에는 단계가 있는데 예를 들어 1단계, 2단계, 3단계 등을 거쳐 완성된 작업물이 만들어진다 치자. 나는 그 단계의 어느 것도 건너뛰고 싶지 않다. 단계를 건너뛴다는 것은 사실 요령을 말한다. 그 요령이 좋은 의미의 요령이 아니라 좋지 않은 의미의 요령이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악기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수 십 대의 악기를 고치면서 짧은 시간에 여러 악기를 고쳤다는 그런 만족을 얻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악기를 고쳐도 그 하나의 악기가 만족스럽게 고쳐졌다면 나는 거기에 만족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이 사회 속에 산다는 것은 어우러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도움을 주고, 또 도움을 받는 그런 관계가 바람직하지, 나만 도움받고 나는 도움 주지 않는 그런 삶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이 일을 배우기 위해서 어디에서 공부하는 게 바람직하고, 어떻게, 어떤 준비를 하는 게 좋은지 등의 조언을 받을 수 있는 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내 분야의 일을 배우기 위해 나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새롭게 이 일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서 아름다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고, 처음에 가졌던 음악을 사랑하는 그 마음 그대로 변함없이 이 일을 하고 싶다. 글 | 안지인 기자jii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6-01
  •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철학과 신념으로, '색소폰 수리 전문가 양철호'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조차도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일까?”라는 필터를 끼고 보면 그것을 투명하게 바라다보는 것이 몹시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순수하게 음악과 악기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 있다. “연주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는 색소폰 수리 전문가 양철호를 만났다. ​원래는 어떤 일을 했었나?장안대학교에서 세무회계를 전공하였고, 이후 해군 군악대에 자원입대하여 플루트로 군 복무하였다. 그 ​후에 삼영 화학주식회사라는 회사 경리부에서 2년 정도 근무하였다.어떤 계기로 음악 분야에 입문하게 되었나?회사 생활을 2년 정도 하다 보니 인생이 황폐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계산을 좋아하고, 계산을 즐기는 사람이었다면 그 일을 했을 때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음악이었기 때문에 몸은 회사에 있어도 머릿속엔 항상 음악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로지 회사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었다. 회사 일이 끝나면 교회에 있는 나만의 공간에서 연습할 수 있었다. 그 빈 공간에서 악기를 불었을 때 울리는 메아리는 나의 정신을 행복하게 만들었기에 나는 그 시간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런 생활을 2년 동안 반복하다보니 마음은 항상 연습하는 곳에 가 있고 몸은 마치 습관처럼 회계 업무를 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를 돌아봤던 이 순간이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다.하던 일을 그만두고 갑자기 음악으로 전향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것 같은데?당시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삶이 괴롭다고 얘기했을 때 돌아오는 말은 자신의 적성에 안 맞은 일을 하는 것을 누가 좋아하냐…, 다 그냥 그렇게 사는 거다… 는 말들이었다. 부모님도 나의 그런 결정에 많이 당황하시고 불편해하셨었다. “과감히 도전해라” “거기서 뭔가 찾을 수 있을 거야”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많이 낙담도 되었지만 내가 행복해하는 일을 하고자 과감히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996년 12월 31에 사표를 냈다.회사를 관둔 뒤 어떤 일을 하였나?해군 군악대에 있었을 때 플루트를 불었었다. 당시 그곳에서 연습하고, 합주하고, 연주하면서 관악기에 매료되었던 것이 내가 플루트 입시를 시작하게 된 원동력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제대로 교육을 받고, 제대로 학교에 가기 위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지만 금세 현실의 벽에 부딪혔었다. 경제적인 부분 때문이었다. 요즘은 아르바이트라는 것이 일반화되었지만, 당시에는 아르바이트를 여기저기서 하는 것이 보편적이지 않았고, 일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랬던 실정에 음악을 하는 데에 있어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은 만만치가 않았다. 모든 시간을 연습에 투자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좋은 악기를 써야 하고, 교습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부모님께 레슨비용을 받아서 교습을 받는 시간이 굉장히 고통스럽더라. 부모님이 노력하셔서 받은 페이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기 때문에 너무 감사하고 죄송하다. 연습하는 과정에서도 이게 바람직한 건 지, 현명한 건지 계속 생각하게 되더라. 그 과정에서 내 인생이 입시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단지 음악과 함께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음악에 관련 된 일을 하고 싶다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누구의 도움이 아닌 나 스스로가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이다.악기점에서는 어떻게 일하게 되었나?그 당시 대한민국에 ‘길ʼ이라고 한다면 다 종로에 있었다. 해군군악대 후배가 낙원상가의 한 악기점에서 일하고 있어 무작정 찾아갔었다. 같이 상의를 하고, 근처의 악기점에서 한 1분, 2분 정도 면접을 봤는데(사실 면접 이라기보단 대화에 가깝다), “직원을 뽑지 않겠다”라고얘기하시더라. 그렇게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바로 옆가게에 있는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어떤 악기를 보러왔나 싶어 말을 거시길래 “악기를 사러 온 것이 아니고, 악기를 판매하거나 고치는 일을 해보고 싶어서 왔다”고 얘기했더니 그분이 눈이 동그래지며 놀라시더라. 마침 직원을 찾고 있으셨던 거다. 그분이 “조건이 뭔가요?”라고 물으시길래 “이쪽 일 아무것도 모르고 경력도 없습니다. 바라는 것은 일을 할 기회를 얻고 싶을 뿐입니다. 계약조건은 사장님께서 해주시는 것으로 만족할 겁니다”라고 말하니 언제부터 일할 수 있냐고 되물으시더라. 당장 이라도 일하고 싶었지만 그 상황 자체가 내게도 워낙 갑작스러웠던지라 일주일 정도 시간을 벌었던 것 같다. 일주일 동안 고민하고 첫 출근을 했다. 종로에서의 일이 시​작된 것이다.악기점에서 일하는 동안 어땠었나?그때가 1997년도였다. 출근 시간은 9시까지였고, 집은 안양이었다. 1호선을 타고 종각역에 내려서 낙원상가 2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는 것이었다. 전철 45분에 걷는 것 15분으로 총 1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9시가 출근 시간이었지만 그 전에 출근해서 혼자 악기도 좀 만져보고, 명상도 하고 그랬다. 정말 열심히 일했었다. 그러다 프랑스 셀마에 공부하러 가게 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가?배움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내가 악기점에 입문해서 배우는 것이 충분했다면 아마 못 느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악기점에서 악기를 판매해서 십만 원의 이율을 본다 고 쳤을 때 한 오만 원 정도가 수리비로 나간다. 자체 수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수리를 의뢰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느낀 것이 판매도 중요하지만 사후관리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것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판매만 한다는 것은 좋은 상황으로 지속적이지 못하겠더라. 수리하는 방법과 기술을 내가 일하는 악기점에서는 배울 수 없었고,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어밖에 모르는데 방법이 없지 않나….셀마에서는 얼마 동안 공부했나?프랑스에 있었던 기간은 총 6개월이었고, 셀마에서 공부한 건 3개월이었다. 한국인으로선 최초였고, 그렇기에 특별한 기회를 얻었다고 하면 될 것 같다. 셀마는 학교의 개념이 아닌 순수한 회사이기 때문에 가르쳐 주시는 분 도 실무자이다. 교육을 위해서 그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작업을 지켜보면서 배우게 되는데, 작업을 하는 상황 속에서 교육생인 내가 질문을 할 때 그 질문에 답변을 줄 수 있다. 그때 나를 가르친 실무자 이름이 필립이었는데, 필립이 빠른 속도로 프랑스어로 얘기하니 하나도 못 알아듣겠더라. 언어를 준비한다고 했어도 일상적인 언어와 회사에서 쓰는 언어 그리고 회사에서 쓰는 물품과 장비, 부속에 관련된 단어들은 알아들을 길이 없었다. 그 당시에 MD라고 하는 미니 디스켓을 가지고 갔었는데, 속도가 빨라서 잘 이해를 못 하겠으니 여기 마이크에 당신이 말을 해 주면 내가 집에 가서 이해해오겠다고 얘기했다. 그것을 이해하고 그분이 마이크에 설명을 하나하나 해주더라.셀마에서 교육 이수를 하려면 불어를 했었어야 할 텐데?사실 언어에 그리 관심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셀마에 가야 했기 때문에 준비했다. 한국에서 준비했던 불어는 학원레슨 방식이었다. 맨투맨이 아닌 한 반에 열 명 정도 앉혀 놓고 지도하는 방식이어서 섬세하게 발음 교정받기가 힘들었다. 비슷하게만 하면 그냥 넘어가곤 했다. 그런 생활을 9~10개월 정도 한 것 같다.셀마 교육과정 동안 어떻게 공부했나?하숙했던 집에 딸이 있었다. 그분의 도움을 받아서 하루에 2시간씩 불어를 배우고 나는 플루트를 가르쳐 드렸다. 수업 때 필립이 한 말을 녹음해서 들려주면 그분이 번역해주었다. 그러면 내가 그 얘길 듣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서 그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들고, 문장의 구성이 괜찮은지 묻고 그것을 A4용지에 다시 적고 그 글을 자기 전까지 다 외웠다. 적어도 필립 앞에서 A4용지를 들고 말하진 않게 할 정도로 외웠다. 그러니 필립 입장에서는 어제는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던 애가 다음날엔 문장구성을 하니 꽤 놀라웠을 것이다. 이 방식으로 반복하다 보니 점점 도구, 부속, 지시사항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면서 한 달 정도 되니 프랑스 사람과 ​농담을 하고 있더라.‘노나까 보에끼ʼ에 대해 말해달라.‘노나까 보에끼ʼ는 무역회사이다. ‘셀마ʼ라는 프랑스 회사의 지분을 가진 회사이기도 하고, 체계적인 메이커를 독점하고 있는 규모가 큰 회사이다. 아시아 총판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셀마라는 브랜드가 한국에 들어오려면 노나까 보에끼를 통해서 들어와야 한다.어떻게 인연이 닿은 것인가?셀마에서 공부를 하고 독립해서 일하고 있었는데, 전에 일했던 악기점에서 다시 스카우트 제안이 왔었다. 사장님이 현악기 전문점을 내셨는데 세 달 만에 재정적 상황이 어려워져 내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렇게 진열된 현악기를 치우고 관악기, 특히 색소폰을 진열하여 그 가게를 개점하게 되었다. 임대료와 보증금이 비싼 상황이라 직원도 뽑기 어려운 실정이어서 혼자서 수리, 판매, 상담, 배달 일을 다 했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수리하고, 상담하고, 판매하고, 간혹 선생님들이 오시면 대화하고 밤 12시에 퇴근하는 일상이 반복되었었다.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는 수준까지 매출이 올라직원 한 명을 뽑아서 1년 반 정도를 집중해서 가르쳤다. 그런 상황 속에서 존 노나까가 한국에 왔고 우리 샵이 일본의 ‘노나까보에끼ʼ의 회사에서 셀마라는 악기를 수입하게 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됐다. 일종의 독점계약 같은 것을 한 거다. 일본식 수리가 배우고 싶었던 내게 존 노나까 사장님이 배움의 기회를 주셨고, 그로 인해 토루 사바노 선생님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 개인레슨 해주셨었다.토루 사바노 선생님께 개인 교습을 받을 때 과정이 어땠나?일본식 작업의 스타일을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다. 그토록 섬세하게 작업하는 모습을 처음 봤었기 때문이다. 작업의 방식은 비슷할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을 자꾸 느끼면서 그게 해결될 때까지 섬세하게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손이 많이 가더라. 미세한 스크래치 하나도 인정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그렇게 처리하시니 결과적으로 깔끔하게 나오더라. 그걸 알게 되면서 매우 감동했다. 수리하는 사람들은 섬세한 거 하나를 보고 배운다는 것이 굉장히 값진 거다. 그 섬세한거 하나 때문에 작업의 결과가 안 좋게 나오는 게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 덕분에 내가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미국에는 어떻게 가게 되었나?결혼하고 나이가 드는 과정에서 내가 40이든 60이든 교육을 받고자 한다면 받을 수 있겠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뿌리를 내리면 쉽게 움직일 수 없지 않나, 정착하고 그런 부분 때문에 두려웠다. 나는 원래 자유롭고 싶은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더 뭔가에 메이기 전에 하고 싶은걸 하고 싶었다. 플루트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을 늘 간직했었는데, 우연히 <플루트 앤 플루티스트>라는 잡지에 조나단 랜달이라는 선생님께 어떤 분이 교육을 받고 왔다는 행보를 써놓은 부분을 읽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분한테 교육을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준비하다가 잡지에 나왔던 분하고 통화가 되어 미국 가는 것을 준비하게 되었다.조나단 랜달 선생님에 대해 말해달라.조나단 랜달 선생님은 전문가용 플루트를 만드시는 분이다. 이분이 대단한 게 어디서 사다가 작업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하나 다 본인이 직접 만드신다. 말 그대로 핸드메이드인 거다. 자신이 만드는 것에 대해서 완벽을 추구하는 그런 분이셨다. 플루트의 수리 과정, 플루트의 마우스피스를 깎는 과정 등을 이수할 경우에 각각 분야별로 수료증을 주시는데, 그렇게 세 개의 과정에서 수료증을 받았다.다년간의 유학이 본인에겐 어떤 의미인가?내 인생의 철학을 만드는 기회가 됐다고 본다.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어떤 삶으로 살다 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돌아보게 하고, 구체적인 체계를 잡게 된 계기였다.색소폰 수리를 하는 데에 있어 자신만의 신념이 있나?사람은 누구나 적게 일하고 많이 받고 싶어 하는 게으른(?) 본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일에는 단계가 있는데 예를 들어 1단계, 2단계, 3단계 등을 거쳐 완성된 작업물이 만들어진다 치자. 나는 그 단계의 어느 것도 건너뛰고 싶지 않다. 단계를 건너뛴다는 것은 사실 요령을 말한다. 그 요령이 좋은 의미의 요령이 아니라 좋지 않은 의미의 요령이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악기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수 십 대의 악기를 고치면서 짧은 시간에 여러 악기를 고쳤다는 그런 만족을 얻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악기를 고쳐도 그 하나의 악기가 만족스럽게 고쳐졌다면 나는 거기에 만족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이 사회 속에 산다는 것은 어우러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도움을 주고, 또 도움을 받는 그런 관계가 바람직하지, 나만 도움받고 나는 도움 주지 않는 그런 삶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이 일을 배우기 위해서 어디에서 공부하는 게 바람직하고, 어떻게, 어떤 준비를 하는 게 좋은지 등의 조언을 받을 수 있는 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내 분야의 일을 배우기 위해 나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새롭게 이 일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서 아름다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고, 처음에 가졌던 음악을 사랑하는 그 마음 그대로 변함없이 이 일을 하고 싶다. 글 | 안지인 기자jii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6-01
  • 색소폰과 함께 두 번째 인생을 사는 사람들,'안양어울림동호회'
    누구에게나 도전이라는 것은 어렵고도 낯설게 그리고 멀게 다가온다. 그러나 어느 누군가에게는 설렘으로 느껴지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화려하고 찬란했던 제1의 인생을 뒤로하고, 이제는 색소폰과 함께 인생 제2막을 써내려가는, 또 다른 삶의 무대에 뛰어든 사람들이 모인 어울림 동호회를 만났다. (박 정 호 동호회 원장)어울림동호회에서는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 이곳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원장이다. 학원이 아닌 동호회 형식을 띤 이 공간의 전체 운영을 맡고 있다.어울림동호회를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 원래는 개인 음악실을 가지고 있었다. 4명이 같이 운영을 했고, 취지는 은퇴한 사람들끼리 뭉쳐서 음악을 한 번 해보자였다. 당시에는 기타나 드럼, 색소폰 여러종류의 악기를 구상했었는데, 색소폰만 10년 넘게 불다 보니 색소폰 동호회를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동호회가 만들어진 지 5년 정도 되었다.아무리 취미라지만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색소폰을 불었다면 취미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원래 음악에 대해 잘 몰랐었다. 그러다 보니 악기를 통해서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크게 와 닿더라. 색소폰을 불면 불수록 점점 더 열심히 하고 싶어졌다. 기초를 튼튼하게 하자는 주의라 레슨도 많이 받고, 전공생들이 하는 스케일 연습도 했다. 이론이 부족하다 느껴질 때는 서점에서 작곡 관련 책을 뒤적거리기도 했다. 그저 어려울 것만 같던 이론도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는 책들이 더러 있더라. 그렇게 하면서 시간이 지나 반주기에도 맞춰서 하다 보니 더 재미있게 느껴지고, 깊이 빠져들더라. 그런 것들이 여태까지 색소폰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동호회 회원 수는 몇명인가, 회원 규모가 늘어나게 된 계기가 있나.회원은 대략 45~50여 명 된다. 어울림 동호회에는 기본적으로 연습실은 오로지 음악만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자는 원칙이 있다. 알코올 섭취시 연습실 출입금지는 당연하고, 간혹 다과 같은 것을 먹는 것도 되도록이면 금지하고 있다. 그저 놀고먹기 위한 동호회가 아닌 서로 기초를 다져가며 커가는 온전한 동호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이런 방향성을 띠고 가다 보니 4년 정도 후엔 지역사회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더라. 실제로 우리 동호회에 계신 많은 분이 그런 원칙에 부합하고 또 존중해주는 분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인원 변동이 별로 없는 편이다.연습실이 많아 보이던데. 그렇다. 개인 공간을 대기 시간 없이 연습할 수 있게 했다.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연습을 하는 분위기가 많이 형성되어 있어 연습실이 많아야 한다. 낮에는 직장 혹은 집안일이 있어 주로 저녁에 연습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녁에 와도 연습실이 겹치는 경우가 없다. 기본기 연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였는데, 아무래도 단체이다 보니 다 같이 해나가기에 힘든 부분이 있지 않나. 그래서 프로그램을 짰다. 레슨하는 프로그램, 전체적인 강의, 그리고 앙상블. 이렇게 세 개로 구분 지었다. 레슨 프로그램은 개인별로 신청을 받아 실용음악과 출신의 전공자분들에게 체계적으로 레슨받을 수 있다. 전체강의는 일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1시간 정도 기초적인 강의를 한다. 초급, 중급, 고급을 나누어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알려주려고 한다. 그러면서 늘 회원들에게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체계적으로 연습하고, 이론을 아는 뮤지션이 되자”이다. 반주기에만 그저 도취되는 것이 아닌, 알고 음악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특별히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나. 아마추어가 뮤지션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처음 음악을 접할 때 기초가 없으면 3년~5년 정도 되면 권태기가 와서 중간에 포기하더라. 기초가 튼튼하면 그걸 넘어설 수 있다. 그래서 간혹 권태기가 온 회원님들이 있다고 하면 레슨을 좀 받았으면 좋겠다고 권유를 한다. 색소폰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누구나 색소폰을 부는 모습에 대한 동경이 있지 않나. 그런 분들에게 무조건 도전하라고 말한다. 우리 동호회에 여든 되신 분이 두 분이나 계신다. 두 분 모두 굉장히 잘 부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나.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처럼 주저하지 말고 도전하라고 얘기하고 싶다. (김 양 수 동호회 회장)어울림동호회와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나. 원장님과 직접적인 인연이 있어서 오게 된 것은 아니다. 8년 전에는 다른 동호회에 있었다. 지금 실장님이 어울림동호회에 한 번 와주십사 하여 와봤는데, 동호회의 취지가 나와 아주 잘 맞기도 해서 과감히 바꿨다.동호회 회장직을 맡고 있으신데 어울림동호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동호회 회장직을 올해로 4년째 맡고 있다. 3년 정도 하고 회장 자리를 내어놓겠다 했는데, 원장님과 회원들이 1년만 더 해줬으면 좋겠다 해서 일단 올해까지는 회장직을 유지할 예정이다. 나보다 훌륭한 분들도 많이 계시고, 다양한 분들이 한 번씩 경험을 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이다. 4년이나 하면 장기집권 아닌가. 아시다시피 조직에 10명만 모여도 말썽이 많다. 이 주변에 색소폰동호회만해도 10개가 넘는다. 그런데 유일하게 우리 어울림동호회만 말썽이 없다. 내가 주장하는 부분도 일단은 사람 관계 중심으로 이끌려고 노력한다. 관계가 중요하다 보니 늘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편이다. 얼굴 찌푸리는 일 없고, 좋은 말 많이 하고, 칭찬 많이 하고, 서로에 대한 배려심이 아주 높다. 그런 것들의 밑바탕이 아마도, 우리 동호회 41명의 인성이 훌륭하시고 오시는 분들 대부분이 훌륭한 분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 분들도 한 번씩 회장직을 맡아서 직접 다른 분위기로 조성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일하면서 색소폰을 겸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일주일에 두 세 번은 꼭 연습실에 온다. 사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낸다는 것이 어렵지만 그래도 동호회에서 맡은 직책도 있고, 동호회 돌아가는 것도 잘 살펴야 하기 때문에 자주 나오려 하는 편이다.연습은 보통 어떤 방법으로 하나. 기본기를 많이 연습하는 편이다. 소화하는 곡들이 그래도 많은 편인데, 그걸 계속하다 보니 연주에 치중하는 것보다는 원장님께서 주시는 악보, 멜로디, 리듬, 코드 등을 머릿속에 담으려고 노력한다.색소폰 음악을 듣는 것도 좋아하나. 나는 주로 듣는 쪽이다. 부는 것보다는 듣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듣는 귀가 열려야 내가 불 수 있는 환경이 맞춰지는 것이지 나만 즐거우면 안 되지 않나. 노래를 듣는 사람이 즐거워야지 나만 만족해서는 음악이라고 보기 힘들다. 우리가 전문가도 아니고, 전공자도 아니지만 음악활동을 통해서 내 행복을 먼저 찾고, 무대가 마련된 연주 초청이 오면 기꺼이 나가서 봉사해야 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도 많이 듣는다.기억에 남았던 동호회 연주가 있나.3년 전에 갔던 맹아학교가 기억에 남는다. 앞을 보지 못하는 학생들의 강당에서 연주한 적이 있었다. 그게 우리 회원 중에 여교수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이 가르치는 학생과 인연이 닿아 가게 되었다. 그전에는 맹아학교가 서울에 몇 군데 있었는지도 몰랐었다. 연주를 한 두번 나가다보니 주변에 맹아학교가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감동적이었던 것이 일단 연주를 하면 대부분 관객의 반응이라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냥 박수 정도에서 끝나는게 아니고, 가슴으로 감동이 느껴지게끔 표현을 해주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았다. 너무나 맑게 같이 동참해 주었던 그 모습이 너무나 남더라. (김 윤 분 회원)색소폰을 하게 된 계기는. 댄스 스포츠 강사로 18년 이상을 수업했었는데, 어느 날 한 어르신이 색소폰을 배워서 어디 가서 연주도 하고, 뭐도 하고 그런다고 굉장히 자랑하시더라. 마침 일전에 아들이 색소폰을 배운다고 사다 놓은 악기가 있었던 터라 흥미를 갖고 어르신들 동호회에 구경을 갔었다. 거기 계신 분들 연령대가 70대 이상이셨다. 그 중에 한 분이 멋지게 자랑할 요량으로 열정적으로 세 곡을 내리 연주하셨는데, 그때 든 생각이 ‘저분 나이 75세에 저렇게 할 정도면, 내가 지금 배워서 저 나이가 되면 훨씬 낫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일을 그만두게 되고 이어서 색소폰으로 봉사활동을 하며 이제는 제2의 인생을 즐겁게 사는 기분이다. 이걸 안 배웠으면 내가 뭘 했을까 할 정도로 굉장히 잘했다고 생각한다. 무대에 선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3, 4년 전에 동호회에서 연주를 나갔는데, 그때 솔로 연주 할 기회가 있었다. 남 앞에 서서 연주한다는 것이 긴장도 많이 되고 어려웠던 터라 무대에서 달달 떨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삑삑” 소리만 나다가 끝났었다. 그게 내 첫 무대였다. 그때 당시 ‘이걸 계속 해야 하나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게는 잊지 못할 창피한 순간이었다. 그러던 중에 그때 같이 하던 회원이 무대에 다시 올라가서 한 번 더 해보라더라. 한 번 더 하다가는 숨이 멎겠다고 얘기했더니, 그 친구 하는 말이 지금 한 번 더 안하면 영영 사람들 앞에서 못 설 것이니 괜찮으니까 한 번 더 해보라고 했다. 그 말에 용기를 내 쌌던 가방을 풀고 무대에 다시 올라가서 하니 그때는 괜찮더라. 아마 그때 한 번만 하고 안했더라면, 지금까지도 사람들 앞에 서는게 굉장히 두려웠을 거다. 동호회 회원 덕분에 지금은 자신감을 갖고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어울림동호회는 어떤 동호회인가. 이곳은 한마디로 얘기하면 공부하는 분위기를 가진 동호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습하다 잘 안 되는 부분이 있거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서로 물어보고, 또 서로 알려주고 그런다. 그렇게 서로 공부하며 잘 어울리는 부분이 이곳의 큰 장점인 것 같다. (정 인 숙 회원)개인적인 일이 많을 텐데 어떻게 시간을 쪼개서 동호회 활동을 하나. 자투리시간을 이용하는 편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 보니 몸이 피곤해도 심지어 아침이어도 꼭 와서 한다. 만약 아침에 일이 있을 때는 일 끝난 후 저녁에 잠깐이라도 와서 연습하고 간다. 그렇게 중간중간이라도 들러 연습하지 않았으면 아마 포기했을 거다. 그렇게 바빠도 짬을 내어서 오다 보니 부족하지만, 연주도 하고, 이렇게 인터뷰까지 하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어울림동호회 활동을 하며 재미있었던 에피소드가 있나. 한 번은 원장님이 색소폰을 부는데 “깨굴깨굴깨굴” 소리가 나더라. 그 소리는 어떻게 내는 거냐고 물었더니 원장님이 내가 표현하는 게 너무 웃기다며 엄청 웃으시더라. 알고 보니 그게 주법이더라. 저 “깨굴깨굴깨굴” 소리를 나는 언제 내나 싶더라.어울림동호회 회원으로서 이런 건 참 좋다 하는 부분이 있나. 일단 원장님이 동호회를 위해 항상 열심히 하신다. 색소폰에 입문한 사람들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하신다. 그리고 회원들도 어울림 동호회라는 이름처럼 서로 잘 어우러진다. 서로가 이해하고, 배려하고, 모르는 부분은 알려주고,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잘 된다. 이동호회에 들어 온 지 1년도 채 안 되었는데, 그런 부분이 굉장히 잘 되어 더 열심히 하게 된다. 서로 알려주고 도와주고 하는 부분이 정말 좋다. 이런 걸 보면 동호회가 이름 따라가나보다 싶다. (조 승 환 회원)색소폰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인생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전성기와 황금기로 구별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 돈을 벌었던 시기를 전성기로 친다면, 퇴직 후부터 76세까지는 황금기라고 말하고 싶다.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 놓았던 것들을 가지고 취미 생활도 즐기고, 평소에 못 했던 것들도 하고 싶고, 좀 더 보람되게 살고 싶다. 이제는 백세 시대 아닌가. 그저 무의미하게 사는 것보다는 이렇게 색소폰과 함께한다면 앞으로의 노후가 더 즐겁지 아니하겠는가.동호회 활동을 가족들이 많이 응원해주는 편인가. 그렇다. 교회에서 간혹 연주라도 하면 아주 좋아하더라. 올해 10월에 딸이 결혼하는데,결혼할 때 축가로 색소폰 연주를 해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던 중에 상견례를 했는데, 사돈어른 되실 분도 색소폰을 하신다는 게 아닌가. 그래서 아이들 결혼식 할 때 같이 색소폰 연주를 하는 게 어떻겠냐 제안을 하니 흔쾌히 수락하셨다. 그래서 요즘 종종 같이 만나 연습하고있다. 아이들도 좋아하고, 개인적으로도 보람된다.어울림동호회에 또 어떤 사람들이 있나. 우리 동호회에 스님도 계시고, 목사님도 계신다. 두 분 모두 아주 연주를 잘하신다. 특히 스님같은 경우 승려복에 색소폰을 멘 모습이 굉장히 특별했다. 두 분의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는데, 두 분 모두 트로트 연주를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노 재 홍, 권 현 숙 부부)어떻게 부부가 같이 색소폰을 불게 되었나. 여기 어울림동호회에도 두, 세팀 정도 있다. 나같은 경우는 1년 정도 드럼을 하다가 우연히 연습실에서 아주머니들이 색소폰을 부는 모습을 보고 그게 멋져 보여 입문하게 되었다. 악보 보는 것에 자신이 없었던 터라 고민을 했는데, 3개월 정도 하니 악보가 조금씩 보이더라. 악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니 무섭게 재미가 붙어 그때부터 정말 즐기면서 열심히 하게 된 것 같다.어울림동호회에는 남편의 추천으로 들어오게 된 것인가. 처음 색소폰을 배웠을 때는 학원을 먼저 다녔었다. 학원 같은 경우는 정해진 레슨 시간이 있기 때문에 직장을 다니는 나에겐 시간을 맞추는 일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한참동안 차에 악기를 싣고 다녔었다. 그러다 남편의 추천과 이 동호회에서 먼저 활동하고 있었던 언니의 추천으로 오게 되었는데, 들어와 보니 연습시간을 조절하는 것이 학원보다 훨씬 수월하더라. 못할 것 같았던 마음도 언니와 남편이 힘을 실어줘서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재미가 많이 붙어 직장도 관두고 색소폰만 불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것이 어느새 8개월째다.부부가 취미가 같아서 어떤 부분이 좋은가. 색소폰에 관해서 대화가 잘 통하다 보니 얘깃거리가 많다. 유튜브에서 음악도 같이 찾아서듣고, 녹음도 해보고, 서로의 연주를 들려주면서 틀린 부분이 있으면 가르쳐 주고, 의견을 나누며 하다 보니 지루하지도 않고 같이 성장할 수 있어서 좋다. 글 | 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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