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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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간2주년기념 특집] 색소포니스트로 재조명하는 한국색소폰 역사의 발자취
    운명의 장난인가, 시대의 불운인가. 색소폰이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힘겹게 자라온 성장 과정은 우리의 아픈 역사와 나란하게 맥을 잇는다. 미국 흑인 특유의 한이 담긴 재즈, 그 감성은 일제강점기 식민의 한을 품은 우리의 정서와도 많이 닮았다. 시대의 운명과 함께 성장해온 한국색소폰은 그 시대가 낳은 보석과 같은 뮤지션들에 의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재즈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재즈의 근간을 마련하고 대중음악계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한 엄토미. 그가 발굴한 문하생인 이봉조는 한국 대중음악으로 세계무대에 진출하였고, 길옥윤은 불행했던 시대에 대중가요의 부흥을 일으켰다. 이들을 비롯하여 한국색소폰의 과거를 차근차근 되짚어 재즈와 가요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색소폰 연주자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기사는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색소폰의 장르를 재즈와 대중가요 부분으로 편의상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 도움주신 색소포니스트 강승용 선생님과 그 외 연주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한국 재즈와 대중가요, 그리고 색소폰의 초석 엄토미색소폰이 한국에 상륙할 당시로 거슬러 오르면 재즈 뮤지션이자 우리나라 대중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엄토미(1922~ 2002, 본명 엄재욱)를 반드시 거론해야 한다. 한국색소폰 역사의 뿌리를 논할 때 이를 생략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가 남긴 굵직한 족적 때문일 것이다.함경북도 출신의 테너 색소폰주자 엄토미는 미8군에서 토미 엄(Tommy Ohm)이라는 예명으로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연주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경성음악전문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 일본의 우에노 악단에서 전속단원으로 활동하며 재즈와 대중음악을 모두 넘나든 보기 드문 수재다. 1962년에는 영화 ‘월급쟁이’의 음악감독으로, TBC동양방송 악단의 전속 연주자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1950년 ‘엄토미 악단’을 결성하여, 걸출한 색소포니스트 길옥윤과 이봉조를 발굴한 것은 지금까지도 뮤지션들 사이에서 전설로 회자된다. Jazz정통 재즈를 고수하며 많은 수제자를 배출한 이정식테너 색소폰주자 이정식(1932~1971, 현재 활동중인 재즈 뮤지션 이정식과 동명이인)은 KBS교향악단 창단 초기의 비올라 연주자이자 서울음대 교수였던 이재옥의 아들이다. 그는 존 콜트레인, 스탄 게츠와 소니 롤린스를 연구한 정통 재즈뮤지션이다. 군악대 시절 재즈를 접하여 미군 클럽에서 재즈 음반과 악보를 구해 독학하였고 미 8군 스프링버라이어티쇼에서 활동하였다. 1970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아트 블래키’ 내한 공연의 사회를 맡았던 일본 재즈평론가는 이정식이 활동하던 뉴서울호텔 나이트클럽에 찾아와 연주를 들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스윙저널’에 이정식의 재즈 연주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한국에도 이런 연주자가 있다니!’라는 감격과 함께. 연주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것에 비하여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여 수제자 최성준을 비롯하여 색소폰계의 대부라 불리는 김수열, 트럼피터 강대관 등 많은 뮤지션이 그의 연주에 영향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그에게 영향을 받은 ‘재즈계의 거목’이라 불리는 이판근(1934~)은, 첫 제자 황천수에 이어 기자촌에 학당을 설립한 후 김수열과 강태환을 양성하게 된다. 암울했던 시대, 재즈 음악의 부흥을 일으킨 길옥윤길옥윤(1927~1995, 본명 최치정)은 1949년 부친의 권유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고교시절부터 악기연주를 즐겨하던 음악인의 피는 그를 재즈의 길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 시기는 우리의 역사상 손에 꼽을 만큼 암울했던 시대였다. 해방 직후 일제의 잔재가 채 가시기 전에 발발한 6·25전쟁, 강대국들의 세력 다툼에 온 국민이 희생양이던 시대. 절망의 그림자로 어두워진 세상에서 하루하루 실낱같은 생명의 끈을 붙잡고 살아오던, 그 시대가 바로 길옥윤이 음악을 시작한 시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는 오명을 안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부족했던 시절이었기에 음악에 대한 저변은 전무했다. 그렇기에 치과의사가 되기를 강권하던 선친의 뜻을 꺾고 음악을 선택한 순간은 그의 인생에, 나아가 우리 음악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장면인 것이다. “인생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자신의 앨범 서문에 남긴 글처럼.고교 때부터 트럼펫, 피아노, 기타 등을 즐겼던 길옥윤은 대학 재학시절 미8군 악단장이자 학교 선배인 김영순을 만나 본격적인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높게 평가한 김영순이 그를 악단의 멤버로 영입한 것이다. 길옥윤은 해방 직후 당시 음악인들에게 ‘꿈의 무대’였던 미8군에서 재즈에 매료되었고, 그곳에서 프로 연주자에게 색소폰을 배우게 된다. 그 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10년 동안 재즈 음악과 색소폰을 배우고, ‘동경 스윙 오케스트라 악단’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온다. 1966년 작곡한 ‘서울의 찬가’가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며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고, ‘사랑하는 마리아’, ‘사랑이란 두 글자’, ‘구월의 노래’ 등이 연이어 히트하면서 1960년대부터 1980년대의 대중가요 역사에도 큰 획을 긋게 된다. 해방 직후 암흑기나 다름없던 1950년대, 맥이 끊겨 깜깜했던 한국 대중음악계에 부흥을 다시금 끌어올렸으며, 대중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격상시킨 인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았다. 즉흥연주로 한국 색소폰의 새 지평을 연 김수열 재즈를 연주할 수 있는 무대라곤 미8군 쇼단이 거의 유일하던 1958년, 김수열(1941~)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첫 무대에서 그의 색소폰 인생은 시작되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연습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웠던 시절, 인적이 드문 산과 무대 뒤에서 소리를 죽여 짬짬이 하던 연습이 전부였으니 그야말로 ‘형설지공’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그는 독학으로 국내 재즈 뮤지션의 길을 개척해 온 인물이다.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 뮤지션은 존 콜트레인, 찰리 파커, 덱스터 고든, 레스터 영, 듀크 엘링턴, 소니 롤린스 등의 외국 뮤지션과 이정식, 김강섭, 이판근 등 국내 뮤지션을 들 수 있다.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연주자로서의 꿈을 키우고, 연주를 따라하던 시절을 거친 그는 현재 재즈 색소폰계의 ‘대부’라 불린다.재즈의 매력은 ‘즉흥연주’에 있다는 김수열의 음악 철학은 무대 위의 열정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후배 연주자들도 그의 즉흥연주에 매료되어 뮤지션의 꿈을 키워왔다. 거친 토양에 뿌리를 내린 한국 재즈 역사의 자양분은 김수열의 열정과 영감이 있었다. 아트 블래키와 협연한 최성준, 음악선교 목사 정창균, 그리고 세계적인 프리재즈 연주자 강태환최성준(1942~)은 이정식의 수제자로, 나이트클럽에서 오랜 기간 밴드마스터 활동을 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1970년 아트 블래키가 내한을 했을 때 뉴서울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아트 블래키, 이정식과 함께 색소폰을 연주한 실력파다. 강태환(1944~)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세계 5대 프리재즈 뮤지션’이란 명성을 얻었다. 안소니 브랙스톤(Anthony Braxton)의 레코드를 듣고 무작정 연습하며 실력을 쌓았고 1968년 국내 최연소로 재즈 밴드의 리더가 되었다. 1978년에는 타악주자 김대환, 트럼피터 최선배와 함께 국내 최초 프리재즈 그룹 ‘강태환 트리오’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현재까지도 연습에 집중하며 재즈 마니아층이 두터운 일본에서 정기 공연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정찬균(1946~)은 현재 미국 LA에서 찬양 사역을 하는 음악선교 목사다. 그는 학창 시절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색소폰 소리에 감명을 받아 매료되었으며, 동시대에 활동하던 사람들 중 유일하게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했다고 한다. 3대의 색소폰을 동시에 연주하는 기법으로 한국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다. 실용음악과 창설, 색소폰 교육 체계화에 앞장 선 정성조정성조(1946~2014)는 서울대학교 작곡과 졸업 후, 미국 버클리 음악대학교를 한국인 최초로 졸업했다.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 LA에 있는 한국 클럽에서 일을 하며 학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 색소폰의 매력에 빠져 음악인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이후 패티김, 길옥윤 등과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일본에서 유학을 마친 길옥윤이 귀국하자마자 그를 찾아 함께 연주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정성조의 나이는 10대 후반이었다. 두 사람은 아스토리아 호텔, 국제호텔에서 7년 가량 연주를 하였다. 1974년에는 영화 음악감독으로 데뷔하여 재즈 외에 대중음악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당시 가수 윤형주에게 써준 영화 ‘어제 내린 비’의 OST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영자의 전성시대’, ‘겨울여자’, ‘이장호의 외인구단’ 등 영화 음악을 40편 이상 작곡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그는 서울예술대학, 서울종합예술학교 전임교수를 지냈으며 1988년에 서울예술대학에 국내 최초로 실용음악과를 창설하여 한국 대중음악을 교육할 수 있는 체계를 정립한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94년에는 KBS 관현악단 단장을 맡아 10년간 이끌며 ‘열린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활동으로 이름을 알렸다. 콜라보레이션으로 새로운 재즈를 개척하는 이정식“제가 추구하는 것은 프리스타일 재즈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제멋대로는 아닙니다. 규격화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자유롭게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프리스타일 재즈지요.” 항상 다양한 시도로 색소폰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나가는 이정식(1961~). 재즈의 본고장인 미국보다 더욱 재즈를 사랑하는 일본 무대에서 팬들과 연주자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재즈 마니아층이 두텁기로 유명한 일본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만큼 색소폰 실력은 세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외 유명 아티스트들과의 활발한 협연의 장인, 그 무대에 선다는 자체만으로도 뮤지션으로서의 이정식의 입지를 증명한 셈이다.재즈에 비트박스 리듬을 채우고, 바이올린, 피아노, 디제잉이 어우러진 새로운 시도를 하며 현재의 연주 방식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는 이정식. 그의 개방된 마인드는 대중들에게 색소폰의 새로운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큰 무기다. 그의 마인드는 결국 국악과 양악의 콜라보레이션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전자바이올리니스트 김권식, 국악계의 조갑용, 장구 명인 이부산과 함께 프리 재즈 스타일의 색소폰 연주와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였다. 그가 재즈 명문 레이블인 블루노트에서 처음 녹음할 당시에는 적지 않은 부담을 안고 있었다. 카세트테이프에 본인의 연주곡을 담아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청할 때만 해도, 그들은 “한국에도 재즈가 있느냐” 물을 정도로 한국의 재즈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재즈 피아니스트 케니 배런(Kenny Barron), 트럼피터 히노 테루마사(日野皓正) 등 뉴욕의 거장들과 한국인 최초로 ‘이정식 in New York’을 녹음하게 된다. 당시를 소회하면 ‘내가 역사적인 분들과 함께 했구나’하는 벅찬 감동이 느껴진다. Pop & Trot재즈를 입힌 대중가요를 세계에 알린 이봉조색소폰이라는 다소 생소하던 악기를 들고 대중 속으로 성큼 다가간 인물. 한국 가요사에 굵직한 선 하나를 그으며 지금까지도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공전의 히트곡을 써낸 인물. 한국 가요에 재즈를 입히며, 대중음악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 수많은 수식어를 남기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그 인물은 바로 이봉조(1931~1987)다.천재적인 뮤지션 이봉조에게는 엄토미와 작곡가 이재호 두 명의 스승이 있었다. 이재호는 이봉조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여 그를 색소폰의 세계로 이끌었고, 엄토미는 그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여 프로 색소포니스트로서의 기량과 자질을 갖추도록 전수하였다. 이재호가 천재성을 지닌 이봉조의 재능을 발견했다면 엄토미는 그 재능을 완성시킨 스승인 셈이다. 1959년에는 김광수 악단에 입단하여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하였다. 1967년에 이봉조 악단을 결성하고 그해 MBC 전국경음악단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다. 이를 계기로 TBC 경음악단장을 맡으며 대중 앞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현미, 김추자, 정훈희 세 명의 여가수를 발굴하여 스타로 발돋움하게 했고, 최희준, 차중락, 남일해, 펄 시스터즈, 조영남 등 ‘이봉조 사단’이라 불리는 톱스타 군단을 이끌게 되었다. 1960년대 트로트, 1970년대 록과 포크로 대변되던 단조로운 한국 가요에 재즈를 도입하고 접목시킨 인물이 바로 이봉조다. 또한 1970년 39개국 총580편의 곡이 출품된 제1회 동경국제가요제에서 이봉조가 작곡하고 정훈희가 부른 ‘안개’는 월드 베스트10에 입상, 세계 속에 당당히 국내 가요를 알리는 계기도 마련하였다. 이어서 정훈희의 ‘너’, 현미의 ‘나의 별’로 그리스 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였으며, 정훈희의 ‘좋아서 만났지요’, ‘꽃밭에서’와 김추자의 ‘부인도’로 남미 칠레가요제에서 입상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그는 한국 가요를 당당히 세계무대에 진출시켰고, 이는 현재 K-POP 열풍의 초석을 마련한 셈이다. 트로트 연주로 강렬한 음악적 영감을 남긴 최석재이봉조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함경도 출신의 테너 색소폰주자 최석재(1934~, 본명 최인재). 그는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강승용을 비롯한 많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 인물이다. KBS 김광섭 악단에서 활동하였고 나훈아의 ‘머나먼 고향’, 배호의 ‘마지막 잎새’를 비롯 국내를 대표하는 대중음악가들의 앨범 연주에 참여하였다. 그의 거구에서 분출되는 파워풀한 소리와 독특한 톤은 대중가요 연주자로서 대단한 강점을 지녀, 연주자들 사이에서 “그의 톤은 따라올 자가 없다”고 회자되는 색소폰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현대적 대중가요의 기반이 된 안건마와 홍원표한국 대중음악의 현대적 초석을 마련한 주요 인물인 안건마(1947~). 연주자 김광수, 김광빈, 가수 배호는 그와 친인척 관계다. 음악인의 운명을 타고난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밴드활동을 하고 중학교 3학년 때 일찍이 음악가의 길을 걷는다. 20살에는 6인조 밴드 ‘캄보’에 입단하여 아스토리아 호텔 등에서 연주하였고 20대 초반에는 본인의 악단을 창단하는 저력을 보였으며, MBC라디오 악단과 정성조와 함께 길옥윤 악단에서도 연주하였다. 그는 음반 녹음과 영화 ‘마음은 푸른 하늘’, ‘내가 버린 여자’ 등의 음악 작업을 하는 등 대중음악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정성조, 안건마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홍원표는 장익환 악단장이 이끌었던 MBC악단 가수 세션으로 활동을 하였다. 이후 MBC관현악단의 단장을 역임했고,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막식, 폐회식 음악의 편곡과 연주를 했다. 이후 그는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토론토 한인회 문화강좌 색소폰 교실을 여는 등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50년간의 세션활동, 한국 대중음악의 산증인 강승용“색소포니스트는 멜로디 메이커가 돼야 한다. 그리고 기록을 남겨야 한다” 색소포니스트로서의 예술철학이 확고한 강승용(1946~). 그는 음반이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던 시절, 1961년 백판으로 감상했던 샘 테일러의 일본 공연 실황을 담은 음반에 큰 감동을 받고 색소포니스트의 길로 들어선다. 고교시절 ‘강토벤’이라 불린 만큼 음악적 재능이 다분했던 그는 프로 입문 후 지방극단 ‘중앙쇼’에 입단하여 악단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968년부터 가수 세션에 참여하여, KBS 김강섭 악단장, 길옥윤, 패티김 등 유명 뮤지션들의 공연장소로 대표되는 명동의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김희갑 악단 단원으로 연주하게 된다. 김희갑과의 연을 통해 ‘마장동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세션을 시작하고, 그 후로도 수많은 가수들의 세션에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신촌블루스, 김희갑 악단 음반의 세션 활동으로 대중들에게 색소폰의 진한 감동과 여운을 선사하였고, 나훈아, 주현미, 설운도, 이지연 등의 세션을 맡으며 현재까지도 대중음악 감성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연주자들에게 귀감이 된 황천수황천수(1946-2010)는 한국재즈 거목 이판근의 첫 번째 제자이며, 미국 흑인 색소포니스트 실 오스틴의 영향을 받아 흑인 특유의 정서와 감성을 표현한 색소폰주자다. 중학교 시절 학교 밴드부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다 색소폰 파트에 결원이 생기면서 색소폰을 불기 시작하였다. 이후 공군 군악대를 거쳐 미8군 밴드에서 활동하였고, 1976년을 전후로 약 2년간 TBC 방송국의 밴드에서 색소폰을 연주하였다. 재즈와 가요, 샹숑, 칸초네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연주하며 알토 색소폰 특유의 섬세하고 로맨틱한 매력을 세련되게 표현하는 황천수. 그가 30대 초반에 발매한 ‘고향의 봄’은 크게 히트하여 약 백만 장이 팔리는, 대중음악계에 전무후무한 판매고를 기록했다. 또한 재즈에 우리나라의 한이 담긴 전통 리듬을 접목하여 한국적 재즈 색소폰 음악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하였고, 특히 황천수의 ‘아리랑’은 젊은 연주자들에게 아직까지도 감동적인 연주로 각인되었다. 시대를 대표하는 대중음악 그 중심에 서 있는 김원용 김원용(1954~)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미 미8군 하우스밴드에서 활동했다. 당시 미8군 밴드 리더였던 서봉석은 추후 KBS관현악단 단장으로 33년간 열정적인 트롬본 연주, 편곡, 지휘를 맡아 활약한 인물이다. 서봉석이 1970년대 초, 지인의 소개로 고등학교 1학년의 김원용을 소개받았다. 어린 그의 모습이 미심쩍었지만 그가 연주한 ‘Forever with you’를 듣곤 저음의 서브톤과 감정들이 나무랄 데가 없어 급기야 악단 멤버로 영입하였다. 그는 ‘타양살이’로 유명한 가수 고복수의 세션을 시작으로 MBC관현악단에서 활동하며 남진, 이미자, 나훈아, 심수봉, 조용필, 조성모, 핑클 등 시대를 대표하는 유명 가수들의 세션을 맡았다. 그는 1978년부터 20년간 MBC관현악단 수석 단원으로 활동하며 드라마 ‘전원일기’ 음반 작업에 참여하였고 1991년에 방송대상 공로상, 2011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색소포니스트로서 대중음악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족적을 인정받은 김원용은 색소폰이 우리나라의 국악, 특히 트로트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대중음악 작곡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김원용은 활발한 연주 활동 외에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단체인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이하 음실련)’과 ‘한국색소폰협회(KSA)’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KSA를 이끌며 색소폰 교육 자료를 제공하고 세미나 및 워크샵 개최, 아마추어와 프로연주자의 원활한 교류, 신인 연주자 발굴 등 색소폰 저변 확대와 바람직한 문화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음실련 회장으로서는 실연자의 열악한 지위와 처우를 개선하기 위하여 막중한 책임감으로 정책 개발에 힘쓰고 있다.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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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1
  • [창간2주년기념 특집] 색소포니스트로 재조명하는 한국색소폰 역사의 발자취
    운명의 장난인가, 시대의 불운인가. 색소폰이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힘겹게 자라온 성장 과정은 우리의 아픈 역사와 나란하게 맥을 잇는다. 미국 흑인 특유의 한이 담긴 재즈, 그 감성은 일제강점기 식민의 한을 품은 우리의 정서와도 많이 닮았다. 시대의 운명과 함께 성장해온 한국색소폰은 그 시대가 낳은 보석과 같은 뮤지션들에 의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왔다. 재즈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재즈의 근간을 마련하고 대중음악계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한 엄토미. 그가 발굴한 문하생인 이봉조는 한국 대중음악으로 세계무대에 진출하였고, 길옥윤은 불행했던 시대에 대중가요의 부흥을 일으켰다. 이들을 비롯하여 한국색소폰의 과거를 차근차근 되짚어 재즈와 가요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색소폰 연주자들을 다시 돌아보았다. ※기사는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색소폰의 장르를 재즈와 대중가요 부분으로 편의상 나누어 작성하였습니다. 도움주신 색소포니스트 강승용 선생님과 그 외 연주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한국 재즈와 대중가요, 그리고 색소폰의 초석 엄토미색소폰이 한국에 상륙할 당시로 거슬러 오르면 재즈 뮤지션이자 우리나라 대중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엄토미(1922~ 2002, 본명 엄재욱)를 반드시 거론해야 한다. 한국색소폰 역사의 뿌리를 논할 때 이를 생략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그가 남긴 굵직한 족적 때문일 것이다.함경북도 출신의 테너 색소폰주자 엄토미는 미8군에서 토미 엄(Tommy Ohm)이라는 예명으로 색소폰과 클라리넷을 연주하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경성음악전문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 일본의 우에노 악단에서 전속단원으로 활동하며 재즈와 대중음악을 모두 넘나든 보기 드문 수재다. 1962년에는 영화 ‘월급쟁이’의 음악감독으로, TBC동양방송 악단의 전속 연주자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1950년 ‘엄토미 악단’을 결성하여, 걸출한 색소포니스트 길옥윤과 이봉조를 발굴한 것은 지금까지도 뮤지션들 사이에서 전설로 회자된다. Jazz정통 재즈를 고수하며 많은 수제자를 배출한 이정식테너 색소폰주자 이정식(1932~1971, 현재 활동중인 재즈 뮤지션 이정식과 동명이인)은 KBS교향악단 창단 초기의 비올라 연주자이자 서울음대 교수였던 이재옥의 아들이다. 그는 존 콜트레인, 스탄 게츠와 소니 롤린스를 연구한 정통 재즈뮤지션이다. 군악대 시절 재즈를 접하여 미군 클럽에서 재즈 음반과 악보를 구해 독학하였고 미 8군 스프링버라이어티쇼에서 활동하였다. 1970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아트 블래키’ 내한 공연의 사회를 맡았던 일본 재즈평론가는 이정식이 활동하던 뉴서울호텔 나이트클럽에 찾아와 연주를 들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스윙저널’에 이정식의 재즈 연주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한국에도 이런 연주자가 있다니!’라는 감격과 함께. 연주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것에 비하여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여 수제자 최성준을 비롯하여 색소폰계의 대부라 불리는 김수열, 트럼피터 강대관 등 많은 뮤지션이 그의 연주에 영향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그에게 영향을 받은 ‘재즈계의 거목’이라 불리는 이판근(1934~)은, 첫 제자 황천수에 이어 기자촌에 학당을 설립한 후 김수열과 강태환을 양성하게 된다. 암울했던 시대, 재즈 음악의 부흥을 일으킨 길옥윤길옥윤(1927~1995, 본명 최치정)은 1949년 부친의 권유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고교시절부터 악기연주를 즐겨하던 음악인의 피는 그를 재즈의 길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 시기는 우리의 역사상 손에 꼽을 만큼 암울했던 시대였다. 해방 직후 일제의 잔재가 채 가시기 전에 발발한 6·25전쟁, 강대국들의 세력 다툼에 온 국민이 희생양이던 시대. 절망의 그림자로 어두워진 세상에서 하루하루 실낱같은 생명의 끈을 붙잡고 살아오던, 그 시대가 바로 길옥윤이 음악을 시작한 시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는 오명을 안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부족했던 시절이었기에 음악에 대한 저변은 전무했다. 그렇기에 치과의사가 되기를 강권하던 선친의 뜻을 꺾고 음악을 선택한 순간은 그의 인생에, 나아가 우리 음악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장면인 것이다. “인생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자신의 앨범 서문에 남긴 글처럼.고교 때부터 트럼펫, 피아노, 기타 등을 즐겼던 길옥윤은 대학 재학시절 미8군 악단장이자 학교 선배인 김영순을 만나 본격적인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높게 평가한 김영순이 그를 악단의 멤버로 영입한 것이다. 길옥윤은 해방 직후 당시 음악인들에게 ‘꿈의 무대’였던 미8군에서 재즈에 매료되었고, 그곳에서 프로 연주자에게 색소폰을 배우게 된다. 그 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10년 동안 재즈 음악과 색소폰을 배우고, ‘동경 스윙 오케스트라 악단’을 이끌고 서울로 돌아온다. 1966년 작곡한 ‘서울의 찬가’가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며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고, ‘사랑하는 마리아’, ‘사랑이란 두 글자’, ‘구월의 노래’ 등이 연이어 히트하면서 1960년대부터 1980년대의 대중가요 역사에도 큰 획을 긋게 된다. 해방 직후 암흑기나 다름없던 1950년대, 맥이 끊겨 깜깜했던 한국 대중음악계에 부흥을 다시금 끌어올렸으며, 대중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격상시킨 인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았다. 즉흥연주로 한국 색소폰의 새 지평을 연 김수열 재즈를 연주할 수 있는 무대라곤 미8군 쇼단이 거의 유일하던 1958년, 김수열(1941~)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첫 무대에서 그의 색소폰 인생은 시작되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연습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웠던 시절, 인적이 드문 산과 무대 뒤에서 소리를 죽여 짬짬이 하던 연습이 전부였으니 그야말로 ‘형설지공’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그는 독학으로 국내 재즈 뮤지션의 길을 개척해 온 인물이다.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 뮤지션은 존 콜트레인, 찰리 파커, 덱스터 고든, 레스터 영, 듀크 엘링턴, 소니 롤린스 등의 외국 뮤지션과 이정식, 김강섭, 이판근 등 국내 뮤지션을 들 수 있다.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연주자로서의 꿈을 키우고, 연주를 따라하던 시절을 거친 그는 현재 재즈 색소폰계의 ‘대부’라 불린다.재즈의 매력은 ‘즉흥연주’에 있다는 김수열의 음악 철학은 무대 위의 열정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후배 연주자들도 그의 즉흥연주에 매료되어 뮤지션의 꿈을 키워왔다. 거친 토양에 뿌리를 내린 한국 재즈 역사의 자양분은 김수열의 열정과 영감이 있었다. 아트 블래키와 협연한 최성준, 음악선교 목사 정창균, 그리고 세계적인 프리재즈 연주자 강태환최성준(1942~)은 이정식의 수제자로, 나이트클럽에서 오랜 기간 밴드마스터 활동을 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1970년 아트 블래키가 내한을 했을 때 뉴서울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아트 블래키, 이정식과 함께 색소폰을 연주한 실력파다. 강태환(1944~)은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세계 5대 프리재즈 뮤지션’이란 명성을 얻었다. 안소니 브랙스톤(Anthony Braxton)의 레코드를 듣고 무작정 연습하며 실력을 쌓았고 1968년 국내 최연소로 재즈 밴드의 리더가 되었다. 1978년에는 타악주자 김대환, 트럼피터 최선배와 함께 국내 최초 프리재즈 그룹 ‘강태환 트리오’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현재까지도 연습에 집중하며 재즈 마니아층이 두터운 일본에서 정기 공연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정찬균(1946~)은 현재 미국 LA에서 찬양 사역을 하는 음악선교 목사다. 그는 학창 시절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색소폰 소리에 감명을 받아 매료되었으며, 동시대에 활동하던 사람들 중 유일하게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했다고 한다. 3대의 색소폰을 동시에 연주하는 기법으로 한국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다. 실용음악과 창설, 색소폰 교육 체계화에 앞장 선 정성조정성조(1946~2014)는 서울대학교 작곡과 졸업 후, 미국 버클리 음악대학교를 한국인 최초로 졸업했다.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 LA에 있는 한국 클럽에서 일을 하며 학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중학교 시절 색소폰의 매력에 빠져 음악인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이후 패티김, 길옥윤 등과 함께 무대에 서기도 했다. 일본에서 유학을 마친 길옥윤이 귀국하자마자 그를 찾아 함께 연주를 하게 되었는데, 당시 정성조의 나이는 10대 후반이었다. 두 사람은 아스토리아 호텔, 국제호텔에서 7년 가량 연주를 하였다. 1974년에는 영화 음악감독으로 데뷔하여 재즈 외에 대중음악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당시 가수 윤형주에게 써준 영화 ‘어제 내린 비’의 OST로 주목을 받았다. 이후 ‘영자의 전성시대’, ‘겨울여자’, ‘이장호의 외인구단’ 등 영화 음악을 40편 이상 작곡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그는 서울예술대학, 서울종합예술학교 전임교수를 지냈으며 1988년에 서울예술대학에 국내 최초로 실용음악과를 창설하여 한국 대중음악을 교육할 수 있는 체계를 정립한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94년에는 KBS 관현악단 단장을 맡아 10년간 이끌며 ‘열린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활동으로 이름을 알렸다. 콜라보레이션으로 새로운 재즈를 개척하는 이정식“제가 추구하는 것은 프리스타일 재즈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제멋대로는 아닙니다. 규격화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자유롭게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프리스타일 재즈지요.” 항상 다양한 시도로 색소폰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나가는 이정식(1961~). 재즈의 본고장인 미국보다 더욱 재즈를 사랑하는 일본 무대에서 팬들과 연주자들로부터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재즈 마니아층이 두텁기로 유명한 일본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만큼 색소폰 실력은 세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외 유명 아티스트들과의 활발한 협연의 장인, 그 무대에 선다는 자체만으로도 뮤지션으로서의 이정식의 입지를 증명한 셈이다.재즈에 비트박스 리듬을 채우고, 바이올린, 피아노, 디제잉이 어우러진 새로운 시도를 하며 현재의 연주 방식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는 이정식. 그의 개방된 마인드는 대중들에게 색소폰의 새로운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큰 무기다. 그의 마인드는 결국 국악과 양악의 콜라보레이션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전자바이올리니스트 김권식, 국악계의 조갑용, 장구 명인 이부산과 함께 프리 재즈 스타일의 색소폰 연주와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였다. 그가 재즈 명문 레이블인 블루노트에서 처음 녹음할 당시에는 적지 않은 부담을 안고 있었다. 카세트테이프에 본인의 연주곡을 담아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청할 때만 해도, 그들은 “한국에도 재즈가 있느냐” 물을 정도로 한국의 재즈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재즈 피아니스트 케니 배런(Kenny Barron), 트럼피터 히노 테루마사(日野皓正) 등 뉴욕의 거장들과 한국인 최초로 ‘이정식 in New York’을 녹음하게 된다. 당시를 소회하면 ‘내가 역사적인 분들과 함께 했구나’하는 벅찬 감동이 느껴진다. Pop & Trot재즈를 입힌 대중가요를 세계에 알린 이봉조색소폰이라는 다소 생소하던 악기를 들고 대중 속으로 성큼 다가간 인물. 한국 가요사에 굵직한 선 하나를 그으며 지금까지도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공전의 히트곡을 써낸 인물. 한국 가요에 재즈를 입히며, 대중음악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인물. 수많은 수식어를 남기고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난 그 인물은 바로 이봉조(1931~1987)다.천재적인 뮤지션 이봉조에게는 엄토미와 작곡가 이재호 두 명의 스승이 있었다. 이재호는 이봉조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여 그를 색소폰의 세계로 이끌었고, 엄토미는 그를 문하생으로 받아들여 프로 색소포니스트로서의 기량과 자질을 갖추도록 전수하였다. 이재호가 천재성을 지닌 이봉조의 재능을 발견했다면 엄토미는 그 재능을 완성시킨 스승인 셈이다. 1959년에는 김광수 악단에 입단하여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하였다. 1967년에 이봉조 악단을 결성하고 그해 MBC 전국경음악단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다. 이를 계기로 TBC 경음악단장을 맡으며 대중 앞에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현미, 김추자, 정훈희 세 명의 여가수를 발굴하여 스타로 발돋움하게 했고, 최희준, 차중락, 남일해, 펄 시스터즈, 조영남 등 ‘이봉조 사단’이라 불리는 톱스타 군단을 이끌게 되었다. 1960년대 트로트, 1970년대 록과 포크로 대변되던 단조로운 한국 가요에 재즈를 도입하고 접목시킨 인물이 바로 이봉조다. 또한 1970년 39개국 총580편의 곡이 출품된 제1회 동경국제가요제에서 이봉조가 작곡하고 정훈희가 부른 ‘안개’는 월드 베스트10에 입상, 세계 속에 당당히 국내 가요를 알리는 계기도 마련하였다. 이어서 정훈희의 ‘너’, 현미의 ‘나의 별’로 그리스 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였으며, 정훈희의 ‘좋아서 만났지요’, ‘꽃밭에서’와 김추자의 ‘부인도’로 남미 칠레가요제에서 입상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그는 한국 가요를 당당히 세계무대에 진출시켰고, 이는 현재 K-POP 열풍의 초석을 마련한 셈이다. 트로트 연주로 강렬한 음악적 영감을 남긴 최석재이봉조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함경도 출신의 테너 색소폰주자 최석재(1934~, 본명 최인재). 그는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강승용을 비롯한 많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 인물이다. KBS 김광섭 악단에서 활동하였고 나훈아의 ‘머나먼 고향’, 배호의 ‘마지막 잎새’를 비롯 국내를 대표하는 대중음악가들의 앨범 연주에 참여하였다. 그의 거구에서 분출되는 파워풀한 소리와 독특한 톤은 대중가요 연주자로서 대단한 강점을 지녀, 연주자들 사이에서 “그의 톤은 따라올 자가 없다”고 회자되는 색소폰계의 전설적인 인물이다. 현대적 대중가요의 기반이 된 안건마와 홍원표한국 대중음악의 현대적 초석을 마련한 주요 인물인 안건마(1947~). 연주자 김광수, 김광빈, 가수 배호는 그와 친인척 관계다. 음악인의 운명을 타고난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밴드활동을 하고 중학교 3학년 때 일찍이 음악가의 길을 걷는다. 20살에는 6인조 밴드 ‘캄보’에 입단하여 아스토리아 호텔 등에서 연주하였고 20대 초반에는 본인의 악단을 창단하는 저력을 보였으며, MBC라디오 악단과 정성조와 함께 길옥윤 악단에서도 연주하였다. 그는 음반 녹음과 영화 ‘마음은 푸른 하늘’, ‘내가 버린 여자’ 등의 음악 작업을 하는 등 대중음악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정성조, 안건마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홍원표는 장익환 악단장이 이끌었던 MBC악단 가수 세션으로 활동을 하였다. 이후 MBC관현악단의 단장을 역임했고,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개막식, 폐회식 음악의 편곡과 연주를 했다. 이후 그는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 토론토 한인회 문화강좌 색소폰 교실을 여는 등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50년간의 세션활동, 한국 대중음악의 산증인 강승용“색소포니스트는 멜로디 메이커가 돼야 한다. 그리고 기록을 남겨야 한다” 색소포니스트로서의 예술철학이 확고한 강승용(1946~). 그는 음반이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던 시절, 1961년 백판으로 감상했던 샘 테일러의 일본 공연 실황을 담은 음반에 큰 감동을 받고 색소포니스트의 길로 들어선다. 고교시절 ‘강토벤’이라 불린 만큼 음악적 재능이 다분했던 그는 프로 입문 후 지방극단 ‘중앙쇼’에 입단하여 악단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968년부터 가수 세션에 참여하여, KBS 김강섭 악단장, 길옥윤, 패티김 등 유명 뮤지션들의 공연장소로 대표되는 명동의 ‘아스토리아 호텔’에서 김희갑 악단 단원으로 연주하게 된다. 김희갑과의 연을 통해 ‘마장동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세션을 시작하고, 그 후로도 수많은 가수들의 세션에 참여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신촌블루스, 김희갑 악단 음반의 세션 활동으로 대중들에게 색소폰의 진한 감동과 여운을 선사하였고, 나훈아, 주현미, 설운도, 이지연 등의 세션을 맡으며 현재까지도 대중음악 감성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연주자들에게 귀감이 된 황천수황천수(1946-2010)는 한국재즈 거목 이판근의 첫 번째 제자이며, 미국 흑인 색소포니스트 실 오스틴의 영향을 받아 흑인 특유의 정서와 감성을 표현한 색소폰주자다. 중학교 시절 학교 밴드부에서 클라리넷을 연주하다 색소폰 파트에 결원이 생기면서 색소폰을 불기 시작하였다. 이후 공군 군악대를 거쳐 미8군 밴드에서 활동하였고, 1976년을 전후로 약 2년간 TBC 방송국의 밴드에서 색소폰을 연주하였다. 재즈와 가요, 샹숑, 칸초네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연주하며 알토 색소폰 특유의 섬세하고 로맨틱한 매력을 세련되게 표현하는 황천수. 그가 30대 초반에 발매한 ‘고향의 봄’은 크게 히트하여 약 백만 장이 팔리는, 대중음악계에 전무후무한 판매고를 기록했다. 또한 재즈에 우리나라의 한이 담긴 전통 리듬을 접목하여 한국적 재즈 색소폰 음악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하였고, 특히 황천수의 ‘아리랑’은 젊은 연주자들에게 아직까지도 감동적인 연주로 각인되었다. 시대를 대표하는 대중음악 그 중심에 서 있는 김원용 김원용(1954~)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미 미8군 하우스밴드에서 활동했다. 당시 미8군 밴드 리더였던 서봉석은 추후 KBS관현악단 단장으로 33년간 열정적인 트롬본 연주, 편곡, 지휘를 맡아 활약한 인물이다. 서봉석이 1970년대 초, 지인의 소개로 고등학교 1학년의 김원용을 소개받았다. 어린 그의 모습이 미심쩍었지만 그가 연주한 ‘Forever with you’를 듣곤 저음의 서브톤과 감정들이 나무랄 데가 없어 급기야 악단 멤버로 영입하였다. 그는 ‘타양살이’로 유명한 가수 고복수의 세션을 시작으로 MBC관현악단에서 활동하며 남진, 이미자, 나훈아, 심수봉, 조용필, 조성모, 핑클 등 시대를 대표하는 유명 가수들의 세션을 맡았다. 그는 1978년부터 20년간 MBC관현악단 수석 단원으로 활동하며 드라마 ‘전원일기’ 음반 작업에 참여하였고 1991년에 방송대상 공로상, 2011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색소포니스트로서 대중음악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족적을 인정받은 김원용은 색소폰이 우리나라의 국악, 특히 트로트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에 대중음악 작곡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김원용은 활발한 연주 활동 외에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단체인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이하 음실련)’과 ‘한국색소폰협회(KSA)’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KSA를 이끌며 색소폰 교육 자료를 제공하고 세미나 및 워크샵 개최, 아마추어와 프로연주자의 원활한 교류, 신인 연주자 발굴 등 색소폰 저변 확대와 바람직한 문화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음실련 회장으로서는 실연자의 열악한 지위와 처우를 개선하기 위하여 막중한 책임감으로 정책 개발에 힘쓰고 있다.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7-01
  • [창간2주년기념 특집] 사회 역사적 배경으로 보는 색소폰 열풍, 성취감 회복의 악기 ‘색소폰’
    색소폰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50년대 생은 보릿고개 시절을 겪은 세대이며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일으킨 주역이기도 합니다. ‘트라우마 한국사회’의 저자 김태형 심리학자 는 50년대 생을 한국의 5.16 군사정변과 유신 독재의 역사적 배경과 맞물려 유년기 시 절부터 좌절을 겪어온 ‘좌절세대’라고 일컫습니다. 그들은 현재 좌절의 극복 방법으로 색소폰을 택하여 연주 활동과 음악 봉사로 건강한 노후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색소폰 열풍이 불어 온 이유를 한국의 사회적 배경과 관련하여 짐작해보려 합니다. 색소폰 열풍과 경제발전의 주역 베이비 붐 세대현재 우리나라의 색소폰 열풍이 부는 연령대는 베이비 붐(Baby Boom) 세대가 압도적입니다. 베이비 붐 세대란 6.25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부터 가족계획정책이 시행된 1963년 내에 태어난 세대를 말하지만 그 기준이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1970~80년대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베이비 붐 세대들은 경제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주역들입니다. 이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불철주야 일에만 매달린 세대였습니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하여 야근, 특근, 잔업으로 청춘을 바친 성과는 나라의 경제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결과 한국은 1996년 12월 12일 29번째 OECD회원국으로 가입합니다. 경제성장으로 겪은 급격한 사회 변화급격히 맞은 경제성장으로 인하여 사회전반에 있어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한창 추진될 당시 외친 ‘마이 홈’, ‘마이 카’ 시대가 온다는 구호가 2000년대에 들어서는 현실화되었습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시대의 도래와 모든 생활상의 변화는 놀라웠습니다. 단군 이래 역사에서 가장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은 세대가 바로 베이비 붐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베이비 붐 세대들은 어릴 때 굶던 기억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는 밥을 먹고 난 다음 뛰어 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배가 금방 고파지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간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그 당시는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기라 물로 허기를 달랬던 기억이 많이 납니다. 여가문화의 춘추전국시대 도래경제 성장의 혜택으로 마이 홈, 마이 카를 소유하고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베이비 붐 세대는 그동안 고생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각종 여가활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이 세대는 노후의 취미나 여가생활을 누린 경험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은 고가의 악기로 분류되는 피아노, 기타를 배웠지만 절대다수의 베이비 붐 세대는 노후를 위한 여가생활을 고려해본 적도 전혀 없었습니다. 베이비 붐 세대의 어린 시절에서는 무엇 하나 풍족하지 않았고 오늘과 같은 놀이문화도 없었습니다. 반면에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룬 지금은 개인의 취향, 개성에 따라 취미생활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여가문화, 놀이문화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면의 성찰과 성취감 회복의 방법, 색소폰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으로 인하여 얻은 여유는 사회 전반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중 많이 선택되는 여가활동은 음악 활동이며, 음악 중에서도 색소폰 인구가 가장 많습니다. 중장년층에게 색소폰 배우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베이비 붐 세대들이 여가 욕구와 자아성취감 고취를 위한 도구로 색소폰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주역을 담당했던 지금 중년층들의 젊은 시절은 일에만 쫓겨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와 내면을 성찰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경제적 안정, 사회적 변화와 문화적 욕구의 상승세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색소폰’이라는 악기를 선택합니다. 색소폰은 한 세대 이전만 하더라도 고급악기이며 사치로 여겨져 쉽게 접근 할 수 없는 고가의 악기였지만, 값싼 중국제와 대만제의 보급과 어느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생기며 많은 중년들이 색소폰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색소폰은 일단 배우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초보자도 6개월 정도 배우면 웬만한 곡을 연주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또한 중년의 위기라 할까요. 중년의 텅 빈 마음을, 문화적 욕구와 성취감을 채워 줄 도구로, 그리고 봉사의 도구로, 교회에서는 찬양으로 활용할 수 있는 도구로 색소폰 만한 악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민족(韓民族)의 정서 ‘한(恨)’을 표현하는 색소폰우리나라에 색소폰이 도입된 것은 6.25전쟁 때 미군이 주둔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물론 일본 식민지 시대에도 있었다고 하지만 색소폰이 대중들의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전쟁 후에 미군이 주둔하며 위문공연이 시작된 시점입니다. 색소폰은 그때부터 대중가요나 팝에서 빠지지 않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즐겨 연주하는 색소폰 열풍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선 선조들의 풍류(風流)의 도(道)가 부활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민족(韓民族)은 예로부터 풍류를 즐겼으며, 한(恨)의 정서가 있는 민족입니다. 색소폰 음색은 인간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어, 이처럼 한민족의 정서와 절묘하게 교감하고 마음을 달래어 근심과 시름을 없애고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는 악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베이비 붐 세대의 대표적 악기가 색소폰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반도 역사상 이렇게 한 종류의 악기로 정서적인 교감을 하고 또래집단을 형성하여 즐기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색소폰은 정통 트로트와도 잘 어울리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와 부합하는 특징으로 열풍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또한 필자는 색소폰 열풍의 근원을 김태형 심리학자의 저서 ‘한국사회 트라우마’에서 찾았습니다. 색소폰 열풍의 근원, 50년대 생 ‘좌절세대’의 트라우마IMF경제위기 이후 생존을 위협당하는 한국사회의 불안한 현실을 사회심리학적 관점으로 냉철히 분석한 ‘불안증폭사회’, ‘트라우마 한국사회’의 저자인 김태형 심리학자가 오늘날 온갖 마음의 병으로 신음하며 힐링을 찾아 나선 한국인들의 심리를, 사회와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세대별로 겪는 ‘트라우마’를 분석하였습니다. 베이비 붐 세대들은 동일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는 왜곡된 역사와 사회 구조적 비리, 부패로 인해 생겨난 ‘집단 트라우마’와 대다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관련된 ‘개인적 트라우마’가 복합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50년대 생을 ‘좌절세대’라고 칭합니다. 색소폰 열풍의 주역인 현재 중장년층들은 이 땅의 1950년대에 태어났습니다. 이들은 좌절에 대한 보상으로 사회적 힐링 열풍에 편승하여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갖게 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책을 통해 열풍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세대가 50년대 생임을 간주하여 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해보겠습니다. 유년기 5.16 군사정변, 청소년기 박정희 독재정권을 겪은 세대좌절세대는 유년기 또는 청소년기에 4.19 혁명을 잠깐 목격하였으나, 그것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기도 전에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으로 좌절되는 장면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공책 표지에는 군사혁명에 관한 홍보 글이 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동안 부모 세대뿐 아니라 공교육기관으로부터도 강제적인 반공교육을 받아야 했고, 끊임없이 권위주의적인 압력에 노출되었습니다.청소년기는 한마디로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에 짓눌려 있던 시기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중 .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강도 높은 군사훈련, 즉 교련을 실시하는 등 학교를 ‘병영화’했고 반공 . 반북 교육을 지속적으로 강화했습니다. 좌절세대는 이런 암울한 청소년기를 보내며 지속적인 욕구 좌절을 경험하였고, 유년기부터 자라나기 시작한 권위에 대한 공포감과 복종, 동시에 반항심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유신 독재의 폭압이 절정에 이르렀던 1970년대에 대학생이 된 좌절세대 중 일부는 반 유신 학생운동에 뛰어들기도 했지만, 당시 학생운동은 학생 수가 워낙 소수인 데다 참여자 역시 많지 않아 결국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좌절세대는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좌절을 경험하여 유년기 심리가 건강하지 못한 세대여서 1980년대 학생들처럼 다양한 사상에 과감하게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와 권위주의 사회에서 억눌린 좌절세대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나는 1966년 무렵부터 한국인들 사이에는 서서히 성취동기, 상향이동의 열망, 성공지향의 가치관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1987년 이후의 3저 호황기 그리고 민주화운동과 노동자대투쟁으로 기업의 인건비 비중이 가장 높았던 시절에 직장생활을 했기에 소득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인기의 경제적 안정은 좌절세대가 1987년 6월 민중항쟁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조건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며 동구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세계화의 파도가 밀려오자 다시 비관주의와 회의주의로 빠져 들었고, 세계인들과 경쟁하기 위해 개인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당시의 사회적 요구에 굴복했습니다. 50년대 생은 돈을 벌기 위해 직업 활동을 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취미생활을 할 수 없는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대부분 청소년기 이전에 가난과 배고픔을 경험하다 청소년기에는 권위적인 사회와 부모에 의해 자신의 동기와 감정을 억누르도록 강요당했습니다. 이들은 빈곤에 대한 불안감과 동시에 권위주의에 대한 공포와 복종심,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와 반발심을 간직하고 있는 세대입니다. 보릿고개에서 웰빙을 넘어 힐링(Healing)의 시대로불과 한 세대 이전인 1950년대에는 보릿고개, 즉 먹고 살기 급급했던 춘궁기에는 절대적인 배고픔의 시기라 무엇이든 먹을거리가 되었습니다. 베이비 붐 세대가 중장년이 되고 나서는 절대적 배고픔이 아니라 이제는 ‘무엇을 얼마나 맛있게 먹을까?’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제는 음식을 양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몸에 좋은 음식을 찾는 이른바 ‘웰빙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현시대는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급변하고 있습니다. 몸에 좋다면 아무리 비싸더라도 먹으려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웰빙 열풍이 불었습니다. 각박한 삶에서 지친 현대인들에게 이제 웰빙을 넘어 ‘치유’라는 키워드가 가슴에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불교에서는 템플스테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법정스님, 법륜스님, 혜민스님 등의 에세이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힐링’ 열풍의 영향이 큽니다. 좌절세대의 트라우마를 여가 활동으로 극복 좌절세대의 유년기에는 부모와 사회의 권위주의, 청소년기에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에 의해 좌절을 강요받았습니다. 청년기에는 유신독재에 도전했으나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좌절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세대입니다. IMF 경제위기가 시작되기 전인 1996년 하반기부터 명예퇴직 등 광범위한 구조조정 바람을 타고, 가장 우선적인 정리해고의 대상으로 부상합니다. 이들은 또 다시 시대적인 아픔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대부분 가장이었던 좌절세대 남성들은 당시 자녀양육 및 교육비 부담이 가장 큰 생애주기 단계였기에, 경제적 위기는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커다란 정신적 충격과 피해를 주었습니다. 좌절세대는 80년대 생인 자식들에게 시대적 아픔과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게 됩니다. 부모님을 모시면서도 자녀를 부양하는 이중고의 세대이며, 또한 부모님을 모시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으로부터는 부양을 받지 못하는 세대라고 자학합니다.좌절세대의 트라우마는 조국근대화의 불행한 역사적 경험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즉 한국인들은 동일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는 왜곡된 역사와 잘못된 구조적 비리, 부패 사회로 인해 생겨난 집단 트라우마와 대다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관련된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복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좌절세대에게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사회적인 힐링 열풍에 편승하여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원하게 됩니다. 좌절세대의 자아 성취와 트라우마의 회복 방법, 색소폰 50년대 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좌절’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야 합니다. 벗어나지 못할 경우 앞으로의 정신건강이 악화될 수 있습니다. ‘100세 시대’인 고령화 사회에서 좌절 세대가 앞으로 남은 인생에 좌절을 반복하며 산다는 것은 지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탈출구는 늦게나마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색소폰 연주 활동은 쌓인 트라우마의 회복을 도와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자기혐오감에서부터 자유로워지고, 본인의 삶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을 회복 시켜 주기도 합니다. 과거의 아픔을 공유한 동년배들과 진솔하게 대화하면서 색소폰을 취미로 삼는다면 청년기의 아름다운 꿈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좌절세대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색소폰은 이제 외국 악기라기보다 국민 악기로 인식되는 친근한 생활 악기로 정착되었습니다. 색소폰 인구의 대부분은 좌절세대인 50년대 생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색소폰 선율로 지난 세월에서 상처받은 트라우마를 회복하고 음악봉사를 하며 느끼는 행복은 어쩌면 역사적인 아픔의 치유로 볼 수 있습니다. (월간색소폰)최종운 기자= suyeo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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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1
  • [창간2주년기념 특집] 사회 역사적 배경으로 보는 색소폰 열풍, 성취감 회복의 악기 ‘색소폰’
    색소폰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50년대 생은 보릿고개 시절을 겪은 세대이며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일으킨 주역이기도 합니다. ‘트라우마 한국사회’의 저자 김태형 심리학자 는 50년대 생을 한국의 5.16 군사정변과 유신 독재의 역사적 배경과 맞물려 유년기 시 절부터 좌절을 겪어온 ‘좌절세대’라고 일컫습니다. 그들은 현재 좌절의 극복 방법으로 색소폰을 택하여 연주 활동과 음악 봉사로 건강한 노후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색소폰 열풍이 불어 온 이유를 한국의 사회적 배경과 관련하여 짐작해보려 합니다. 색소폰 열풍과 경제발전의 주역 베이비 붐 세대현재 우리나라의 색소폰 열풍이 부는 연령대는 베이비 붐(Baby Boom) 세대가 압도적입니다. 베이비 붐 세대란 6.25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부터 가족계획정책이 시행된 1963년 내에 태어난 세대를 말하지만 그 기준이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1970~80년대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베이비 붐 세대들은 경제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주역들입니다. 이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불철주야 일에만 매달린 세대였습니다.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하여 야근, 특근, 잔업으로 청춘을 바친 성과는 나라의 경제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결과 한국은 1996년 12월 12일 29번째 OECD회원국으로 가입합니다. 경제성장으로 겪은 급격한 사회 변화급격히 맞은 경제성장으로 인하여 사회전반에 있어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한창 추진될 당시 외친 ‘마이 홈’, ‘마이 카’ 시대가 온다는 구호가 2000년대에 들어서는 현실화되었습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시대의 도래와 모든 생활상의 변화는 놀라웠습니다. 단군 이래 역사에서 가장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은 세대가 바로 베이비 붐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베이비 붐 세대들은 어릴 때 굶던 기억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는 밥을 먹고 난 다음 뛰어 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배가 금방 고파지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간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지만 그 당시는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기라 물로 허기를 달랬던 기억이 많이 납니다. 여가문화의 춘추전국시대 도래경제 성장의 혜택으로 마이 홈, 마이 카를 소유하고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베이비 붐 세대는 그동안 고생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받기 위해 각종 여가활동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이 세대는 노후의 취미나 여가생활을 누린 경험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은 고가의 악기로 분류되는 피아노, 기타를 배웠지만 절대다수의 베이비 붐 세대는 노후를 위한 여가생활을 고려해본 적도 전혀 없었습니다. 베이비 붐 세대의 어린 시절에서는 무엇 하나 풍족하지 않았고 오늘과 같은 놀이문화도 없었습니다. 반면에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룬 지금은 개인의 취향, 개성에 따라 취미생활을 다양하게 할 수 있는 여가문화, 놀이문화의 춘추전국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면의 성찰과 성취감 회복의 방법, 색소폰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으로 인하여 얻은 여유는 사회 전반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그중 많이 선택되는 여가활동은 음악 활동이며, 음악 중에서도 색소폰 인구가 가장 많습니다. 중장년층에게 색소폰 배우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베이비 붐 세대들이 여가 욕구와 자아성취감 고취를 위한 도구로 색소폰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주역을 담당했던 지금 중년층들의 젊은 시절은 일에만 쫓겨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와 내면을 성찰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경제적 안정, 사회적 변화와 문화적 욕구의 상승세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색소폰’이라는 악기를 선택합니다. 색소폰은 한 세대 이전만 하더라도 고급악기이며 사치로 여겨져 쉽게 접근 할 수 없는 고가의 악기였지만, 값싼 중국제와 대만제의 보급과 어느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생기며 많은 중년들이 색소폰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색소폰은 일단 배우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초보자도 6개월 정도 배우면 웬만한 곡을 연주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또한 중년의 위기라 할까요. 중년의 텅 빈 마음을, 문화적 욕구와 성취감을 채워 줄 도구로, 그리고 봉사의 도구로, 교회에서는 찬양으로 활용할 수 있는 도구로 색소폰 만한 악기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민족(韓民族)의 정서 ‘한(恨)’을 표현하는 색소폰우리나라에 색소폰이 도입된 것은 6.25전쟁 때 미군이 주둔하면서부터라고 합니다. 물론 일본 식민지 시대에도 있었다고 하지만 색소폰이 대중들의 눈에 띄기 시작한 것은 전쟁 후에 미군이 주둔하며 위문공연이 시작된 시점입니다. 색소폰은 그때부터 대중가요나 팝에서 빠지지 않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즐겨 연주하는 색소폰 열풍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우선 선조들의 풍류(風流)의 도(道)가 부활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민족(韓民族)은 예로부터 풍류를 즐겼으며, 한(恨)의 정서가 있는 민족입니다. 색소폰 음색은 인간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어, 이처럼 한민족의 정서와 절묘하게 교감하고 마음을 달래어 근심과 시름을 없애고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는 악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베이비 붐 세대의 대표적 악기가 색소폰임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반도 역사상 이렇게 한 종류의 악기로 정서적인 교감을 하고 또래집단을 형성하여 즐기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색소폰은 정통 트로트와도 잘 어울리며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와 부합하는 특징으로 열풍을 일으켰다고 봅니다. 또한 필자는 색소폰 열풍의 근원을 김태형 심리학자의 저서 ‘한국사회 트라우마’에서 찾았습니다. 색소폰 열풍의 근원, 50년대 생 ‘좌절세대’의 트라우마IMF경제위기 이후 생존을 위협당하는 한국사회의 불안한 현실을 사회심리학적 관점으로 냉철히 분석한 ‘불안증폭사회’, ‘트라우마 한국사회’의 저자인 김태형 심리학자가 오늘날 온갖 마음의 병으로 신음하며 힐링을 찾아 나선 한국인들의 심리를, 사회와 역사적 배경으로 인하여 세대별로 겪는 ‘트라우마’를 분석하였습니다. 베이비 붐 세대들은 동일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는 왜곡된 역사와 사회 구조적 비리, 부패로 인해 생겨난 ‘집단 트라우마’와 대다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관련된 ‘개인적 트라우마’가 복합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50년대 생을 ‘좌절세대’라고 칭합니다. 색소폰 열풍의 주역인 현재 중장년층들은 이 땅의 1950년대에 태어났습니다. 이들은 좌절에 대한 보상으로 사회적 힐링 열풍에 편승하여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갖게 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책을 통해 열풍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세대가 50년대 생임을 간주하여 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해보겠습니다. 유년기 5.16 군사정변, 청소년기 박정희 독재정권을 겪은 세대좌절세대는 유년기 또는 청소년기에 4.19 혁명을 잠깐 목격하였으나, 그것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기도 전에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으로 좌절되는 장면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공책 표지에는 군사혁명에 관한 홍보 글이 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동안 부모 세대뿐 아니라 공교육기관으로부터도 강제적인 반공교육을 받아야 했고, 끊임없이 권위주의적인 압력에 노출되었습니다.청소년기는 한마디로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에 짓눌려 있던 시기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중 .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강도 높은 군사훈련, 즉 교련을 실시하는 등 학교를 ‘병영화’했고 반공 . 반북 교육을 지속적으로 강화했습니다. 좌절세대는 이런 암울한 청소년기를 보내며 지속적인 욕구 좌절을 경험하였고, 유년기부터 자라나기 시작한 권위에 대한 공포감과 복종, 동시에 반항심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유신 독재의 폭압이 절정에 이르렀던 1970년대에 대학생이 된 좌절세대 중 일부는 반 유신 학생운동에 뛰어들기도 했지만, 당시 학생운동은 학생 수가 워낙 소수인 데다 참여자 역시 많지 않아 결국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좌절세대는 어린 시절부터 반복적으로 좌절을 경험하여 유년기 심리가 건강하지 못한 세대여서 1980년대 학생들처럼 다양한 사상에 과감하게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가난에 대한 트라우마와 권위주의 사회에서 억눌린 좌절세대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나는 1966년 무렵부터 한국인들 사이에는 서서히 성취동기, 상향이동의 열망, 성공지향의 가치관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1987년 이후의 3저 호황기 그리고 민주화운동과 노동자대투쟁으로 기업의 인건비 비중이 가장 높았던 시절에 직장생활을 했기에 소득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었습니다. 이러한 성인기의 경제적 안정은 좌절세대가 1987년 6월 민중항쟁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조건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며 동구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세계화의 파도가 밀려오자 다시 비관주의와 회의주의로 빠져 들었고, 세계인들과 경쟁하기 위해 개인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당시의 사회적 요구에 굴복했습니다. 50년대 생은 돈을 벌기 위해 직업 활동을 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취미생활을 할 수 없는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대부분 청소년기 이전에 가난과 배고픔을 경험하다 청소년기에는 권위적인 사회와 부모에 의해 자신의 동기와 감정을 억누르도록 강요당했습니다. 이들은 빈곤에 대한 불안감과 동시에 권위주의에 대한 공포와 복종심, 다른 한편으로는 분노와 반발심을 간직하고 있는 세대입니다. 보릿고개에서 웰빙을 넘어 힐링(Healing)의 시대로불과 한 세대 이전인 1950년대에는 보릿고개, 즉 먹고 살기 급급했던 춘궁기에는 절대적인 배고픔의 시기라 무엇이든 먹을거리가 되었습니다. 베이비 붐 세대가 중장년이 되고 나서는 절대적 배고픔이 아니라 이제는 ‘무엇을 얼마나 맛있게 먹을까?’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제는 음식을 양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몸에 좋은 음식을 찾는 이른바 ‘웰빙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현시대는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급변하고 있습니다. 몸에 좋다면 아무리 비싸더라도 먹으려고 합니다. 이로 인해서 웰빙 열풍이 불었습니다. 각박한 삶에서 지친 현대인들에게 이제 웰빙을 넘어 ‘치유’라는 키워드가 가슴에 와 닿기 시작했습니다. 불교에서는 템플스테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법정스님, 법륜스님, 혜민스님 등의 에세이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힐링’ 열풍의 영향이 큽니다. 좌절세대의 트라우마를 여가 활동으로 극복 좌절세대의 유년기에는 부모와 사회의 권위주의, 청소년기에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정치에 의해 좌절을 강요받았습니다. 청년기에는 유신독재에 도전했으나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좌절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세대입니다. IMF 경제위기가 시작되기 전인 1996년 하반기부터 명예퇴직 등 광범위한 구조조정 바람을 타고, 가장 우선적인 정리해고의 대상으로 부상합니다. 이들은 또 다시 시대적인 아픔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더욱이 대부분 가장이었던 좌절세대 남성들은 당시 자녀양육 및 교육비 부담이 가장 큰 생애주기 단계였기에, 경제적 위기는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커다란 정신적 충격과 피해를 주었습니다. 좌절세대는 80년대 생인 자식들에게 시대적 아픔과 가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게 됩니다. 부모님을 모시면서도 자녀를 부양하는 이중고의 세대이며, 또한 부모님을 모시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으로부터는 부양을 받지 못하는 세대라고 자학합니다.좌절세대의 트라우마는 조국근대화의 불행한 역사적 경험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즉 한국인들은 동일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데 이는 왜곡된 역사와 잘못된 구조적 비리, 부패 사회로 인해 생겨난 집단 트라우마와 대다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의 경험과 관련된 개인적인 트라우마가 복합되어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좌절세대에게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사회적인 힐링 열풍에 편승하여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원하게 됩니다. 좌절세대의 자아 성취와 트라우마의 회복 방법, 색소폰 50년대 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좌절’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야 합니다. 벗어나지 못할 경우 앞으로의 정신건강이 악화될 수 있습니다. ‘100세 시대’인 고령화 사회에서 좌절 세대가 앞으로 남은 인생에 좌절을 반복하며 산다는 것은 지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따라서 탈출구는 늦게나마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 생활을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색소폰 연주 활동은 쌓인 트라우마의 회복을 도와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자기혐오감에서부터 자유로워지고, 본인의 삶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을 회복 시켜 주기도 합니다. 과거의 아픔을 공유한 동년배들과 진솔하게 대화하면서 색소폰을 취미로 삼는다면 청년기의 아름다운 꿈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좌절세대의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는 색소폰은 이제 외국 악기라기보다 국민 악기로 인식되는 친근한 생활 악기로 정착되었습니다. 색소폰 인구의 대부분은 좌절세대인 50년대 생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색소폰 선율로 지난 세월에서 상처받은 트라우마를 회복하고 음악봉사를 하며 느끼는 행복은 어쩌면 역사적인 아픔의 치유로 볼 수 있습니다. (월간색소폰)최종운 기자= suyeo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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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1
  • ‘마리오 가토’와‘파브리지오 말레르바’가 함께하는
    (마리오 가토와 파브리지오 말레르바 듀오)따사로운 햇살에 눈이 부셨던 5월 26일, 동묘앞역에는 아코디언 연주를 보기위한 발걸음들로 가득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모두가 한마음으로 연주자들의 등장을 고대하고 있는 와중에 첫 연주자들이 등장했다.아코디언과 기타의 조화자유로운 복장과 덥수룩한 턱수염을 하고 등장한 아코디언 아티스트 ‘마리오 가토’와 기타리스트 ‘파브리지오 말레르바’의 등장에 모두들 신기해하는 듯했다. 총 열 한 곡으로 구성된 무대의 처음과 끝은 이 두 사람이 맡았다. 영화음악,팝, 재즈, 심지어 한국의 가요인 <그 겨울의 찻집>과 <낭만에 대하여>를 연주하는 이 둘의 호흡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잘 맞았다. 악기를 자유분방하게 다루는 테크닉은 물론이고(마리오 가토가 첫 곡으로 연주한 <왕벌의 비행>은 테크닉적으로 매우 훌륭했다), 음악적으로도 이미 완성된 그들의 연주는 보는 내내 최고의 찬사가 터져 나왔다.계속되는 아코디언의 향연이탈리안 듀오의 뜨거운 무대 뒤로 국내 연주자들의 연주가 계속 이어졌다. ‘최복희’의 심금을 울리는 가요 연주와 청주 아코디언 교실을 운영하는 ‘김인성’ 원장과회원들의 조화로운합주 무대, 그리고 <뻐꾹 왈츠>를 발랄하게 연주했던 ‘이상희’와 프로페셔널한 아코디언 연주로 앙코르 요청까지 받은 ‘공병희’까지 그렇게 무대는 점점 더 뜨겁게 중반부로 향했다. (연변대학 아코디언을 전공한 최덕범) 능수능란한 아코디언 연주자들인터미션 없이 2시간 동안 진행되는 공연이었기에 1시간 정도 지난 시점에는 사람들의 엉덩이가 조금씩 들썩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그때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무대 의상 차림의 가수 ‘원정숙’이 등장했다. 여유로운 모습과 곱고낭랑한 목소리로 1집 타이틀곡 <낙원동 사람들>과 <사랑의시계>를 불러 다소 경직되어 있었던 청중들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 주었다. ‘김성란’, ‘김다은’의 훈훈했던 모녀 아코디언 합주를 지나 중국의 연변대학 졸업생 출신인 아코디언 연주자 ‘최덕범’이 등장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모습에 사람들도 숨죽여 그의 음악을 경청했다. TV채널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했던 탈북강사 ‘윤설미’의기가 막히도록 능숙한 무대 퍼포먼스와 이 연주회의 주최 측이기도 했던 ㈜중앙악기 과장인 ‘주문길’의 무대까지 지루할틈 없이 빠르게 2시간이 지나갔다.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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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1
  • ‘마리오 가토’와‘파브리지오 말레르바’가 함께하는 아코디언 초청연주회
    따사로운 햇살에 눈이 부셨던 5월 26일, 동묘앞역에는 아코디언 연주를 보기 위한 발걸음들로 가득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모두가 한마음으로 연주자들의 등장을 고대하고 있는 와중에 첫 연주자들이 등장했다. 아코디언과 기타의 조화자유로운 복장과 덥수룩한 턱수염을 하고 등장한 아코디언 아티스트 ‘마리오 가토’와 기타리스트 ‘파브리지오 말레르바’의 등장에 모두들 신기해하는 듯했다. 총 열 한 곡으로 구성된 무대의 처음과 끝은 이 두 사람이 맡았다. 영화음악,팝, 재즈, 심지어 한국의 가요인 <그 겨울의 찻집>과 <낭만에 대하여>를 연주하는 이 둘의 호흡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잘 맞았다. 악기를 자유분방하게 다루는 테크닉은 물론이고(마리오 가토가 첫 곡으로 연주한 <왕벌의 비행>은 테크닉적으로 매우 훌륭했다), 음악적으로도 이미 완성된 그들의 연주는 보는 내내 최고의 찬사가 터져 나왔다. 계속되는 아코디언의 향연이탈리안 듀오의 뜨거운 무대 뒤로 국내 연주자들의 연주가 계속 이어졌다. ‘최복희’의 심금을 울리는 가요 연주와 청주 아코디언 교실을 운영하는 ‘김인성’ 원장과회원들의 조화로운합주 무대, 그리고 <뻐꾹 왈츠>를 발랄하게 연주했던 ‘이상희’와 프로페셔널한 아코디언 연주로 앙코르 요청까지 받은 ‘공병희’까지 그렇게 무대는 점점 더 뜨겁게 중반부로 향했다. 능수능란한 아코디언 연주자들인터미션 없이 2시간 동안 진행되는 공연이었기에 1시간 정도 지난 시점에는 사람들의 엉덩이가 조금씩 들썩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그때 한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무대 의상 차림의 가수 ‘원정숙’이 등장했다. 여유로운 모습과 곱고낭랑한 목소리로 1집 타이틀곡 <낙원동 사람들>과 <사랑의시계>를 불러 다소 경직되어 있었던 청중들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 주었다. ‘김성란’, ‘김다은’의 훈훈했던 모녀 아코디언 합주를 지나 중국의 연변대학 졸업생 출신인 아코디언 연주자 ‘최덕범’이 등장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모습에 사람들도 숨죽여 그의 음악을 경청했다. TV채널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 출연했던 탈북강사 ‘윤설미’의기가 막히도록 능숙한 무대 퍼포먼스와 이 연주회의 주최 측이기도 했던 ㈜중앙악기 과장인 ‘주문길’의 무대까지 지루할틈 없이 빠르게 2시간이 지나갔다.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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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1
  • [SAXOPHONE COLUMN] 알고 연주하는 색소폰 암부슈어(Embouchure)
    색소폰을 연주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말. “모차르트(Mozart)의 곡은 연주만 가능하다면 완성도가 매우 높다.”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환상적인 레시피(recipe)는 누구나 끓이기만 하면 완성할 수 있는 라면처럼 오히려 쉽다. 색소폰을 훌륭하게 연주를 하기위한 레시피. 바로 암부슈어이다. Step by Step: 훌륭한 레시피를 위한 단계레시피, 즉 조리법 또는 비법이라고 말하는 것이 색소폰에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편곡이 좋아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실력 있는 편곡자의곡을 합주하면 만족도가 높은 연주를 기대할 수 있다.필자가 이제 겨우 편곡을 배우는 사람의 곡을 연주하느라 고생을 해보았기에, 천재가 만든 곡의 완성도에 동의한다. 반면, 유명 셰프는 아니지만 다양함으로 공감을불러오는 레시피로 유명해진 명사가 있다. 요리하는 사람들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많은 사람의 입맛을 사로 잡는다는 점에서 그의 레시피는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는 한다.색소폰 입문자에게 있어서 좋은 레시피는 빠르고 쉬운완성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독학으로 고생을 해보았다면 레시피의 중요성을 조금은 알 것이다. 누군가 나를이끌어 주었다면 조금 덜 고생을 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이것저것 해보고 다양한 방법을 주워듣고 시도했지만, 오히려 온 산을 파고도 금은 커녕작은 돌도 줍지 못하는 모습이다. 새해를 시작하고 작심삼일을 잘 넘긴 사람들에게 월간색소폰이 전해줄 수 있는 선물이 있다면 알고 연주할 수 있도록 레시피를 알려주는 것이다.가장 좋은 레시피는 순차적인 단계만 거치면 완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레시피를 위해서 전문 강사들은 많은 노력을 한다. 서로 지닌 비법이 다를 수 있지만, 결국 공통적인 레시피는 바로 가장 쉽고 편안한 연주를 하기 위한 순서는 같다는 것이다. 엄청난 것이 숨어 있다기보다는 편안하게 소리를 낼 방법을 잘 설명하는 것. 즉 누가 끓여도 망치는 일이 거의 없는 라면의 레시피처럼 말이다.이달의 ‘알고 연주하는 색소폰’ 레시피는 이 단계의 중요성을 중심으로 시작한다. 그 순서만 잘 따라서 연습한다면 간단하게 맛있는 라면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나도 완성할 수 있다는 성취감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연주감각을 만나게 될 것이다.색소폰 연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단 한 가지로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호흡, 주법, 기교, 감성 그리고 악보 습득력 정도에 동의할 것이다. 알고 연주한다는 표현에서 무엇을 알고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쉽게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색소폰을 연주하는 사람들에게 ‘텅잉(tonguing)’을 물어보면 쉽고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이를 통해서 어떤 단어를 분명히 아는것이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데에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예를 들어서. 텅잉은 음과 음을 명확히 구분하기 위함이고, 아이가 말을 배우면서 “엄마” “아빠”를 하듯 단어를 구분해서 발음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때로는 흐르는 물을 손으로 가르는 것과텅잉을 비교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설명에 앞서 ‘명확한 소리의 구분을 위한 혀 사용’ 정도로 정의를 내릴 수 있어야 하겠다.색소폰과 입술의 상관관계: 암부슈어(Embouchure)암부슈어(Embouchure)라는 용어를 정의해 보라고 한다면 가능한가?‘주법’이라는 대답이 가장 먼저 나올 것 같다. 그리고 ‘입모양’이라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암부슈어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리드의 진동을 호흡으로 다스리는 색소폰은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고 연주하기에 그적정한 힘의 조절이 연주 능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악기와 마우스피스 심지어 리드까지 같다고 하더라도 연주자에 따라서 서로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는 이유는 호흡의 다스림도 원인이지만, 마우스피스를 무는 암부슈어의 차이에서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입문자에게 첫 주법, 입모양은 클래식 전공자의 ‘싱글 립(SingleLip)’, 그러니까 아랫입술로 아랫니를 말아서 소리 내는 방식의 암부슈어가 가장 일반적이다. 하지만 통증에 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보니 ‘팻 립(Fat Lip)’처럼 아랫입술에 크게 힘을 주지 않는 형태의 주법에 대한 선호도 높다. 하지만 클래식과 팝, 재즈 등 장르로만 주법을 구분하기에 앞서서 ‘안정감’에 대한 분명한 감각을 먼저 알고 연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때에 따라서는 클래식 연주자도 팻 립에 가까운 싱글 립을 사용하기도 한다.호흡의 통로에서 진동체 역할을 하는 마우스피스와 리드를 다스리는 감각은 매우 섬세하다. 작은 원인에서 크게 달라지는 소리로 나타난다. 앞서 이야기했던 ‘안정감’의 차이를 ‘내공의 힘’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이유이다. 연주자는 한결같은 소리를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원하는 감성을 조절하는 능력을 지닐 때 연주의 완성과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 장소와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안정적인 연주를 만드는 감각이 바로 마우스피스를 무는 적정한 힘이며, 그것이 암부슈어이다.배의 노를 어떻게 저어야 하는지에 앞서서 노를 견고하게 잡는 것이 기본이다. 야구선수가 홈런을 치기에 앞서 적정한 손목의 힘으로 배트를 잡는 것은 매우 기본적인 부분이다. 골프 선수의 그립잡는 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색소폰을 배우는 사람들을 관찰하면 마우스피스를 무는 적정한 힘에 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게 물어야 하는지, 가볍게 물어야 하는지가 아니다. 적정함이란 상당히 중요한 감각이다. 때로는그 훈련을 시간이 해결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처음 배움의 단계에 이상적인 마우스피스 물기를 배울 경우 가장 쉬운 레시피 한 가지를 얻을 수 있다.편안한 나의 모습: 암부슈어(Embouchure)의 시작보이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는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지 않기 위함이다.암부슈어의 첫 레시피는 거울을 보는 것이다. 거울 속 마우스피스를 무는 입이 편안하다는 것은 힘의 적정한 나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가끔 아래턱을 당기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싱글 립이라고 하더라도 통증이 덜 생긴다는 점과 음정의 변화에 있어서 아랫입술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알기 때문이다. 또한, 턱의 당김으로 호흡 사용의 원활함을 지도하는 강사는 잘 알고있다.거울 속, 보기 좋은 모습처럼 평소 자신이 편안하게 입을 다물고 있을 때와 같은 마우스피스 물기를 만들자. 볼이 나오는 경우도 예방할 수 있다. 순환 호흡 때문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도 있지만 입문자의 볼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다. 양쪽 볼이 나온 상태에서는 늘어지는 소리가 도드라지게 나타나기도 한다. 입문 과정에서 가능하다면 평소 편안한 표정이 암부슈어에도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잊지 말자.편안한 모습을 거울을 통해서 완성했다면, 느껴지는 통증을 줄이는 법에 집중해야 한다. 대부분의 성인은 치열의 고르지 못함과 날카롭게 변해버린 아랫니라고 말한다. 일부는 사실이다. 하지만 리드와 피스의 적절한 사이즈를 선택하지 못함에서 오는 누르는 현상도 원인이다.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야구 배트를 너무 세게 잡아서 손에서 피가 나는 것이다. 이 무서운 상황이 입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색소폰을 연주하는 순간은 즐거움이 아닐 수 있다. 그래서 암부슈어의 가장 중요한 기본을 ‘보기 좋고, 편안하게’라고 하는 것이다.색소폰의 아름다운 소리는 편안한 암부슈어에서 시작된다. 몸에힘을 빼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어깨를 낮추는 것만으로도 호흡에 좋은 영향을 준다는 사실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우스피스를 무는 적정한 힘을 모르고 있다면 쉽게 힘을 빼는 것과 호흡의 안정감도 기대하기 어렵다.안다는 것: 곧 생각하는 것알고 연습하는 것은 ‘생각하면서 연습하기’라는 말과도 통한다. 항상 ‘나의 암부슈어는 적절한 모습과 적정한 힘의 안배를 알고 있는가’ 생각하면서 호흡의 다스림으로 이어가려고 한다면 좋은 소리의완성을 위한 좋은 레시피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분명한내 것이 될 수 있도록 알아가려고 노력하기를 바란다. 또한 마우스피스와 리드의 조합이 잘 맞아야 편안한 암부슈어를 끌어낼 수 있다. 그 부분에 관해서도 곧 다루기로 한다. (월간색소폰)송인권 칼럼니스트= suyeo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7-01
  • [SAXOPHONE COLUMN] 알고 연주하는 색소폰 암부슈어(Embouchure)
    색소폰을 연주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말. “모차르트(Mozart)의 곡은 연주만 가능하다면 완성도가 매우 높다.”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환상적인 레시피(recipe)는 누구나 끓이기만 하면 완성할 수 있는 라면처럼 오히려 쉽다. 색소폰을 훌륭하게 연주를 하기위한 레시피. 바로 암부슈어이다. Step by Step: 훌륭한 레시피를 위한 단계레시피, 즉 조리법 또는 비법이라고 말하는 것이 색소폰에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편곡이 좋아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실력 있는 편곡자의곡을 합주하면 만족도가 높은 연주를 기대할 수 있다.필자가 이제 겨우 편곡을 배우는 사람의 곡을 연주하느라 고생을 해보았기에, 천재가 만든 곡의 완성도에 동의한다. 반면, 유명 셰프는 아니지만 다양함으로 공감을불러오는 레시피로 유명해진 명사가 있다. 요리하는 사람들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많은 사람의 입맛을 사로 잡는다는 점에서 그의 레시피는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는 한다.색소폰 입문자에게 있어서 좋은 레시피는 빠르고 쉬운완성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독학으로 고생을 해보았다면 레시피의 중요성을 조금은 알 것이다. 누군가 나를이끌어 주었다면 조금 덜 고생을 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이것저것 해보고 다양한 방법을 주워듣고 시도했지만, 오히려 온 산을 파고도 금은 커녕작은 돌도 줍지 못하는 모습이다. 새해를 시작하고 작심삼일을 잘 넘긴 사람들에게 월간색소폰이 전해줄 수 있는 선물이 있다면 알고 연주할 수 있도록 레시피를 알려주는 것이다.가장 좋은 레시피는 순차적인 단계만 거치면 완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레시피를 위해서 전문 강사들은 많은 노력을 한다. 서로 지닌 비법이 다를 수 있지만, 결국 공통적인 레시피는 바로 가장 쉽고 편안한 연주를 하기 위한 순서는 같다는 것이다. 엄청난 것이 숨어 있다기보다는 편안하게 소리를 낼 방법을 잘 설명하는 것. 즉 누가 끓여도 망치는 일이 거의 없는 라면의 레시피처럼 말이다.이달의 ‘알고 연주하는 색소폰’ 레시피는 이 단계의 중요성을 중심으로 시작한다. 그 순서만 잘 따라서 연습한다면 간단하게 맛있는 라면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나도 완성할 수 있다는 성취감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연주감각을 만나게 될 것이다.색소폰 연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단 한 가지로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호흡, 주법, 기교, 감성 그리고 악보 습득력 정도에 동의할 것이다. 알고 연주한다는 표현에서 무엇을 알고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쉽게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색소폰을 연주하는 사람들에게 ‘텅잉(tonguing)’을 물어보면 쉽고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이를 통해서 어떤 단어를 분명히 아는것이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데에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예를 들어서. 텅잉은 음과 음을 명확히 구분하기 위함이고, 아이가 말을 배우면서 “엄마” “아빠”를 하듯 단어를 구분해서 발음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때로는 흐르는 물을 손으로 가르는 것과텅잉을 비교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설명에 앞서 ‘명확한 소리의 구분을 위한 혀 사용’ 정도로 정의를 내릴 수 있어야 하겠다.색소폰과 입술의 상관관계: 암부슈어(Embouchure)암부슈어(Embouchure)라는 용어를 정의해 보라고 한다면 가능한가?‘주법’이라는 대답이 가장 먼저 나올 것 같다. 그리고 ‘입모양’이라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암부슈어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리드의 진동을 호흡으로 다스리는 색소폰은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고 연주하기에 그적정한 힘의 조절이 연주 능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악기와 마우스피스 심지어 리드까지 같다고 하더라도 연주자에 따라서 서로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는 이유는 호흡의 다스림도 원인이지만, 마우스피스를 무는 암부슈어의 차이에서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입문자에게 첫 주법, 입모양은 클래식 전공자의 ‘싱글 립(SingleLip)’, 그러니까 아랫입술로 아랫니를 말아서 소리 내는 방식의 암부슈어가 가장 일반적이다. 하지만 통증에 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보니 ‘팻 립(Fat Lip)’처럼 아랫입술에 크게 힘을 주지 않는 형태의 주법에 대한 선호도 높다. 하지만 클래식과 팝, 재즈 등 장르로만 주법을 구분하기에 앞서서 ‘안정감’에 대한 분명한 감각을 먼저 알고 연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때에 따라서는 클래식 연주자도 팻 립에 가까운 싱글 립을 사용하기도 한다.호흡의 통로에서 진동체 역할을 하는 마우스피스와 리드를 다스리는 감각은 매우 섬세하다. 작은 원인에서 크게 달라지는 소리로 나타난다. 앞서 이야기했던 ‘안정감’의 차이를 ‘내공의 힘’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이유이다. 연주자는 한결같은 소리를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원하는 감성을 조절하는 능력을 지닐 때 연주의 완성과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 장소와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안정적인 연주를 만드는 감각이 바로 마우스피스를 무는 적정한 힘이며, 그것이 암부슈어이다.배의 노를 어떻게 저어야 하는지에 앞서서 노를 견고하게 잡는 것이 기본이다. 야구선수가 홈런을 치기에 앞서 적정한 손목의 힘으로 배트를 잡는 것은 매우 기본적인 부분이다. 골프 선수의 그립잡는 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색소폰을 배우는 사람들을 관찰하면 마우스피스를 무는 적정한 힘에 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게 물어야 하는지, 가볍게 물어야 하는지가 아니다. 적정함이란 상당히 중요한 감각이다. 때로는그 훈련을 시간이 해결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처음 배움의 단계에 이상적인 마우스피스 물기를 배울 경우 가장 쉬운 레시피 한 가지를 얻을 수 있다.편안한 나의 모습: 암부슈어(Embouchure)의 시작보이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는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지 않기 위함이다.암부슈어의 첫 레시피는 거울을 보는 것이다. 거울 속 마우스피스를 무는 입이 편안하다는 것은 힘의 적정한 나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가끔 아래턱을 당기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싱글 립이라고 하더라도 통증이 덜 생긴다는 점과 음정의 변화에 있어서 아랫입술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알기 때문이다. 또한, 턱의 당김으로 호흡 사용의 원활함을 지도하는 강사는 잘 알고있다.거울 속, 보기 좋은 모습처럼 평소 자신이 편안하게 입을 다물고 있을 때와 같은 마우스피스 물기를 만들자. 볼이 나오는 경우도 예방할 수 있다. 순환 호흡 때문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도 있지만 입문자의 볼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다. 양쪽 볼이 나온 상태에서는 늘어지는 소리가 도드라지게 나타나기도 한다. 입문 과정에서 가능하다면 평소 편안한 표정이 암부슈어에도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잊지 말자.편안한 모습을 거울을 통해서 완성했다면, 느껴지는 통증을 줄이는 법에 집중해야 한다. 대부분의 성인은 치열의 고르지 못함과 날카롭게 변해버린 아랫니라고 말한다. 일부는 사실이다. 하지만 리드와 피스의 적절한 사이즈를 선택하지 못함에서 오는 누르는 현상도 원인이다.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야구 배트를 너무 세게 잡아서 손에서 피가 나는 것이다. 이 무서운 상황이 입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색소폰을 연주하는 순간은 즐거움이 아닐 수 있다. 그래서 암부슈어의 가장 중요한 기본을 ‘보기 좋고, 편안하게’라고 하는 것이다.색소폰의 아름다운 소리는 편안한 암부슈어에서 시작된다. 몸에힘을 빼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어깨를 낮추는 것만으로도 호흡에 좋은 영향을 준다는 사실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우스피스를 무는 적정한 힘을 모르고 있다면 쉽게 힘을 빼는 것과 호흡의 안정감도 기대하기 어렵다.안다는 것: 곧 생각하는 것알고 연습하는 것은 ‘생각하면서 연습하기’라는 말과도 통한다. 항상 ‘나의 암부슈어는 적절한 모습과 적정한 힘의 안배를 알고 있는가’ 생각하면서 호흡의 다스림으로 이어가려고 한다면 좋은 소리의완성을 위한 좋은 레시피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분명한내 것이 될 수 있도록 알아가려고 노력하기를 바란다. 또한 마우스피스와 리드의 조합이 잘 맞아야 편안한 암부슈어를 끌어낼 수 있다. 그 부분에 관해서도 곧 다루기로 한다. (월간색소폰)송인권 칼럼니스트= suyeo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7-01
  • 소중한 인연, 행복한 만남!'제2회 김미영(밍밍) 색소폰라인 전국모임'
    (월간색소폰)지현숙 기자= 2018년 6월 16일(토) 충남 공주에서 <제2회 김미영(밍밍) 색소폰라인 전국모임>이 있었다. ‘김미영(밍밍) 색소폰라인ʼ은 여성 색소폰 연주자인 ‘김미영’ 프로와 드럼 연주자인 ‘박민수’ 프로가 운영하는 밴드로서,아마추어 연주자 2,400여 명과 유명 프로 연주자들이 다수 가입되어 있고, 2017년 6월 밴드 회원 및 팬들의 요청으로 1차 전국모임을 개최한 데 이어 올해에도 역시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임광빈’ 회원이 운영하는 이화가든에서 2차 전국모임을 개최하게 되었다. 음악을 통해 만난 우정전국 각지에서 모인 90여 명의 회원은 공주 갑사 주변의 청정한 공기와 푸르름이 가득한 야외에서 신선한 송어회 무침과 시원한 음료로 더위를 식히며 삼삼오오 서로 인사하고 반갑게 정을 나누었으며, 일찍 도착한 회원들은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돌아보며 온라인으로만 교류하던 회원들과도 금세 친해지고 환담이 끊이지 않았다. 모두가 함께 한 무대오후 3시에 ‘리라밴드ʼ의 오프닝 연주로 시작을 알리며, ‘강문구’ 회원의 재치 있는 진행으로 ‘김미영’, ‘박민수’ 밴드 운영자와 ‘신홍배’ 공동리더의 소개와 함께 이어진 연주시간은 많은 아마추어 회원들의 데뷔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사전에 1곡씩 신청을 받아 가능한 많은 회원들에게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노력한 ‘김미영’ 프로의 마음 씀씀이가 엿보이는 무대이기도 하였다. 함께 참여한 유명 프로 연주자 ‘최정환’, ‘김유승’, ‘박정호’, ‘석성노’, ‘박동준’의 리드미컬하고 품격 있는 연주는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감탄과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특히 인천에서 온 ‘전종열’ 회원은 가장 낮은 음역대인 바리톤 솔로 연주를 멋지게 하여 눈길을 끌었으며, 작고 귀여운 곡관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소리를 느낄 수 있는 연주로 흥을 더했다. 저녁 9시까지 계속된 연주의 중간중간에는 후원을 통한 다양한 경품들로 사람들에게 설렘과 기쁨을 주었으며, 마지막 연주자인 ‘김미영’ 프로는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뜨거운 무대로 대미를 장식하였다. 청중들의 열띤 반응에 ‘김미영’ 프로는 연이은 앙코르 연주로 화답하였고, 무대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아쉬움에 발걸음을 쉽사리 떼지 못하였다. 배려와 포용속에 다져진 끈끈함모임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수고한 ‘이미경’ 총무를 비롯한 스텝들은 ‘김미영’, ‘박민수’ 프로의 6학년 딸이 직접 디자인한 색소폰라인 로고가 그려진 흰색 티와 모자를 착용하고 각자 맡은 역할을 묵묵히 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김미영’ 프로는 각 테이블을 돌아보며 참여한 회원 및 회원 가족, 프로 연주자를 소중한 인연으로 생각하며 열외되거나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수시로 주변을 살피며 배려하고 포용하였는데, 그런 모습에서 ‘김미영(밍밍) 색소폰라인ʼ의 끈끈하고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김미영 프로는 끝까지 자리를 함께하며 행복한 표정으로 헤어지기를 아쉬워했고, 그런 모습을 통하여 ‘색소폰라인 밴드ʼ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글Ι지현숙 객원기자 suyeon@keri.or.kr사진Ι전종열 색소폰라인 회원
    • 월간색소폰
    • Review
    2018-07-01
  • 소중한 인연, 행복한 만남!'제2회 김미영(밍밍) 색소폰라인 전국모임'
    2018년 6월 16일(토) 충남 공주에서 <제2회 김미영(밍밍) 색소폰라인 전국모임>이 있었다. ‘김미영(밍밍) 색소폰라인ʼ은 여성 색소폰 연주자인 ‘김미영’ 프로와 드럼 연주자인 ‘박민수’ 프로가 운영하는 밴드로서,아마추어 연주자 2,400여 명과 유명 프로 연주자들이 다수 가입되어 있고, 2017년 6월 밴드 회원 및 팬들의 요청으로 1차 전국모임을 개최한 데 이어 올해에도 역시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임광빈’ 회원이 운영하는 이화가든에서 2차 전국모임을 개최하게 되었다. 음악을 통해 만난 우정전국 각지에서 모인 90여 명의 회원은 공주 갑사 주변의 청정한 공기와 푸르름이 가득한 야외에서 신선한 송어회 무침과 시원한 음료로 더위를 식히며 삼삼오오 서로 인사하고 반갑게 정을 나누었으며, 일찍 도착한 회원들은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돌아보며 온라인으로만 교류하던 회원들과도 금세 친해지고 환담이 끊이지 않았다. 모두가 함께 한 무대오후 3시에 ‘리라밴드ʼ의 오프닝 연주로 시작을 알리며, ‘강문구’ 회원의 재치 있는 진행으로 ‘김미영’, ‘박민수’ 밴드 운영자와 ‘신홍배’ 공동리더의 소개와 함께 이어진 연주시간은 많은 아마추어 회원들의 데뷔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사전에 1곡씩 신청을 받아 가능한 많은 회원들에게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노력한 ‘김미영’ 프로의 마음 씀씀이가 엿보이는 무대이기도 하였다. 함께 참여한 유명 프로 연주자 ‘최정환’, ‘김유승’, ‘박정호’, ‘석성노’, ‘박동준’의 리드미컬하고 품격 있는 연주는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감탄과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특히 인천에서 온 ‘전종열’ 회원은 가장 낮은 음역대인 바리톤 솔로 연주를 멋지게 하여 눈길을 끌었으며, 작고 귀여운 곡관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소리를 느낄 수 있는 연주로 흥을 더했다. 저녁 9시까지 계속된 연주의 중간중간에는 후원을 통한 다양한 경품들로 사람들에게 설렘과 기쁨을 주었으며, 마지막 연주자인 ‘김미영’ 프로는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뜨거운 무대로 대미를 장식하였다. 청중들의 열띤 반응에 ‘김미영’ 프로는 연이은 앙코르 연주로 화답하였고, 무대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아쉬움에 발걸음을 쉽사리 떼지 못하였다. 배려와 포용속에 다져진 끈끈함모임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수고한 ‘이미경’ 총무를 비롯한 스텝들은 ‘김미영’, ‘박민수’ 프로의 6학년 딸이 직접 디자인한 색소폰라인 로고가 그려진 흰색 티와 모자를 착용하고 각자 맡은 역할을 묵묵히 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김미영’ 프로는 각 테이블을 돌아보며 참여한 회원 및 회원 가족, 프로 연주자를 소중한 인연으로 생각하며 열외되거나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수시로 주변을 살피며 배려하고 포용하였는데, 그런 모습에서 ‘김미영(밍밍) 색소폰라인ʼ의 끈끈하고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김미영 프로는 끝까지 자리를 함께하며 행복한 표정으로 헤어지기를 아쉬워했고, 그런 모습을 통하여 ‘색소폰라인 밴드ʼ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글Ι지현숙 객원기자= suyeon@keri.or.kr사진Ι전종열 색소폰라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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