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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철학과 신념으로, '색소폰 수리 전문가 양철호'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조차도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무엇일까?”라는 필터를 끼고 보면 그것을 투명하게 바라다보는 것이 몹시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순수하게 음악과 악기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 있다. “연주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이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는 색소폰 수리 전문가 양철호를 만났다. ​원래는 어떤 일을 했었나?장안대학교에서 세무회계를 전공하였고, 이후 해군 군악대에 자원입대하여 플루트로 군 복무하였다. 그 ​후에 삼영 화학주식회사라는 회사 경리부에서 2년 정도 근무하였다.어떤 계기로 음악 분야에 입문하게 되었나?회사 생활을 2년 정도 하다 보니 인생이 황폐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계산을 좋아하고, 계산을 즐기는 사람이었다면 그 일을 했을 때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겠지만,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음악이었기 때문에 몸은 회사에 있어도 머릿속엔 항상 음악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로지 회사 일이 끝나기만을 기다렸었다. 회사 일이 끝나면 교회에 있는 나만의 공간에서 연습할 수 있었다. 그 빈 공간에서 악기를 불었을 때 울리는 메아리는 나의 정신을 행복하게 만들었기에 나는 그 시간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런 생활을 2년 동안 반복하다보니 마음은 항상 연습하는 곳에 가 있고 몸은 마치 습관처럼 회계 업무를 하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를 돌아봤던 이 순간이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변화의 시작점이 되었다.하던 일을 그만두고 갑자기 음악으로 전향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것 같은데?당시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 삶이 괴롭다고 얘기했을 때 돌아오는 말은 자신의 적성에 안 맞은 일을 하는 것을 누가 좋아하냐…, 다 그냥 그렇게 사는 거다… 는 말들이었다. 부모님도 나의 그런 결정에 많이 당황하시고 불편해하셨었다. “과감히 도전해라” “거기서 뭔가 찾을 수 있을 거야”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많이 낙담도 되었지만 내가 행복해하는 일을 하고자 과감히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996년 12월 31에 사표를 냈다.회사를 관둔 뒤 어떤 일을 하였나?해군 군악대에 있었을 때 플루트를 불었었다. 당시 그곳에서 연습하고, 합주하고, 연주하면서 관악기에 매료되었던 것이 내가 플루트 입시를 시작하게 된 원동력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제대로 교육을 받고, 제대로 학교에 가기 위해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지만 금세 현실의 벽에 부딪혔었다. 경제적인 부분 때문이었다. 요즘은 아르바이트라는 것이 일반화되었지만, 당시에는 아르바이트를 여기저기서 하는 것이 보편적이지 않았고, 일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그랬던 실정에 음악을 하는 데에 있어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은 만만치가 않았다. 모든 시간을 연습에 투자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좋은 악기를 써야 하고, 교습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부모님께 레슨비용을 받아서 교습을 받는 시간이 굉장히 고통스럽더라. 부모님이 노력하셔서 받은 페이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기 때문에 너무 감사하고 죄송하다. 연습하는 과정에서도 이게 바람직한 건 지, 현명한 건지 계속 생각하게 되더라. 그 과정에서 내 인생이 입시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단지 음악과 함께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때부터 ‘음악에 관련 된 일을 하고 싶다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누구의 도움이 아닌 나 스스로가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이다.악기점에서는 어떻게 일하게 되었나?그 당시 대한민국에 ‘길ʼ이라고 한다면 다 종로에 있었다. 해군군악대 후배가 낙원상가의 한 악기점에서 일하고 있어 무작정 찾아갔었다. 같이 상의를 하고, 근처의 악기점에서 한 1분, 2분 정도 면접을 봤는데(사실 면접 이라기보단 대화에 가깝다), “직원을 뽑지 않겠다”라고얘기하시더라. 그렇게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바로 옆가게에 있는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다. 어떤 악기를 보러왔나 싶어 말을 거시길래 “악기를 사러 온 것이 아니고, 악기를 판매하거나 고치는 일을 해보고 싶어서 왔다”고 얘기했더니 그분이 눈이 동그래지며 놀라시더라. 마침 직원을 찾고 있으셨던 거다. 그분이 “조건이 뭔가요?”라고 물으시길래 “이쪽 일 아무것도 모르고 경력도 없습니다. 바라는 것은 일을 할 기회를 얻고 싶을 뿐입니다. 계약조건은 사장님께서 해주시는 것으로 만족할 겁니다”라고 말하니 언제부터 일할 수 있냐고 되물으시더라. 당장 이라도 일하고 싶었지만 그 상황 자체가 내게도 워낙 갑작스러웠던지라 일주일 정도 시간을 벌었던 것 같다. 일주일 동안 고민하고 첫 출근을 했다. 종로에서의 일이 시​작된 것이다.악기점에서 일하는 동안 어땠었나?그때가 1997년도였다. 출근 시간은 9시까지였고, 집은 안양이었다. 1호선을 타고 종각역에 내려서 낙원상가 2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는 것이었다. 전철 45분에 걷는 것 15분으로 총 1시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9시가 출근 시간이었지만 그 전에 출근해서 혼자 악기도 좀 만져보고, 명상도 하고 그랬다. 정말 열심히 일했었다. 그러다 프랑스 셀마에 공부하러 가게 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가?배움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내가 악기점에 입문해서 배우는 것이 충분했다면 아마 못 느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악기점에서 악기를 판매해서 십만 원의 이율을 본다 고 쳤을 때 한 오만 원 정도가 수리비로 나간다. 자체 수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수리를 의뢰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느낀 것이 판매도 중요하지만 사후관리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것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판매만 한다는 것은 좋은 상황으로 지속적이지 못하겠더라. 수리하는 방법과 기술을 내가 일하는 악기점에서는 배울 수 없었고,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어밖에 모르는데 방법이 없지 않나….셀마에서는 얼마 동안 공부했나?프랑스에 있었던 기간은 총 6개월이었고, 셀마에서 공부한 건 3개월이었다. 한국인으로선 최초였고, 그렇기에 특별한 기회를 얻었다고 하면 될 것 같다. 셀마는 학교의 개념이 아닌 순수한 회사이기 때문에 가르쳐 주시는 분 도 실무자이다. 교육을 위해서 그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작업을 지켜보면서 배우게 되는데, 작업을 하는 상황 속에서 교육생인 내가 질문을 할 때 그 질문에 답변을 줄 수 있다. 그때 나를 가르친 실무자 이름이 필립이었는데, 필립이 빠른 속도로 프랑스어로 얘기하니 하나도 못 알아듣겠더라. 언어를 준비한다고 했어도 일상적인 언어와 회사에서 쓰는 언어 그리고 회사에서 쓰는 물품과 장비, 부속에 관련된 단어들은 알아들을 길이 없었다. 그 당시에 MD라고 하는 미니 디스켓을 가지고 갔었는데, 속도가 빨라서 잘 이해를 못 하겠으니 여기 마이크에 당신이 말을 해 주면 내가 집에 가서 이해해오겠다고 얘기했다. 그것을 이해하고 그분이 마이크에 설명을 하나하나 해주더라.셀마에서 교육 이수를 하려면 불어를 했었어야 할 텐데?사실 언어에 그리 관심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셀마에 가야 했기 때문에 준비했다. 한국에서 준비했던 불어는 학원레슨 방식이었다. 맨투맨이 아닌 한 반에 열 명 정도 앉혀 놓고 지도하는 방식이어서 섬세하게 발음 교정받기가 힘들었다. 비슷하게만 하면 그냥 넘어가곤 했다. 그런 생활을 9~10개월 정도 한 것 같다.셀마 교육과정 동안 어떻게 공부했나?하숙했던 집에 딸이 있었다. 그분의 도움을 받아서 하루에 2시간씩 불어를 배우고 나는 플루트를 가르쳐 드렸다. 수업 때 필립이 한 말을 녹음해서 들려주면 그분이 번역해주었다. 그러면 내가 그 얘길 듣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서 그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만들고, 문장의 구성이 괜찮은지 묻고 그것을 A4용지에 다시 적고 그 글을 자기 전까지 다 외웠다. 적어도 필립 앞에서 A4용지를 들고 말하진 않게 할 정도로 외웠다. 그러니 필립 입장에서는 어제는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했던 애가 다음날엔 문장구성을 하니 꽤 놀라웠을 것이다. 이 방식으로 반복하다 보니 점점 도구, 부속, 지시사항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면서 한 달 정도 되니 프랑스 사람과 ​농담을 하고 있더라.‘노나까 보에끼ʼ에 대해 말해달라.‘노나까 보에끼ʼ는 무역회사이다. ‘셀마ʼ라는 프랑스 회사의 지분을 가진 회사이기도 하고, 체계적인 메이커를 독점하고 있는 규모가 큰 회사이다. 아시아 총판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셀마라는 브랜드가 한국에 들어오려면 노나까 보에끼를 통해서 들어와야 한다.어떻게 인연이 닿은 것인가?셀마에서 공부를 하고 독립해서 일하고 있었는데, 전에 일했던 악기점에서 다시 스카우트 제안이 왔었다. 사장님이 현악기 전문점을 내셨는데 세 달 만에 재정적 상황이 어려워져 내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렇게 진열된 현악기를 치우고 관악기, 특히 색소폰을 진열하여 그 가게를 개점하게 되었다. 임대료와 보증금이 비싼 상황이라 직원도 뽑기 어려운 실정이어서 혼자서 수리, 판매, 상담, 배달 일을 다 했었다. 아침에 출근해서 수리하고, 상담하고, 판매하고, 간혹 선생님들이 오시면 대화하고 밤 12시에 퇴근하는 일상이 반복되었었다.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는 수준까지 매출이 올라직원 한 명을 뽑아서 1년 반 정도를 집중해서 가르쳤다. 그런 상황 속에서 존 노나까가 한국에 왔고 우리 샵이 일본의 ‘노나까보에끼ʼ의 회사에서 셀마라는 악기를 수입하게 되는 관계를 형성하게 됐다. 일종의 독점계약 같은 것을 한 거다. 일본식 수리가 배우고 싶었던 내게 존 노나까 사장님이 배움의 기회를 주셨고, 그로 인해 토루 사바노 선생님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 개인레슨 해주셨었다.토루 사바노 선생님께 개인 교습을 받을 때 과정이 어땠나?일본식 작업의 스타일을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다. 그토록 섬세하게 작업하는 모습을 처음 봤었기 때문이다. 작업의 방식은 비슷할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것을 자꾸 느끼면서 그게 해결될 때까지 섬세하게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손이 많이 가더라. 미세한 스크래치 하나도 인정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그렇게 처리하시니 결과적으로 깔끔하게 나오더라. 그걸 알게 되면서 매우 감동했다. 수리하는 사람들은 섬세한 거 하나를 보고 배운다는 것이 굉장히 값진 거다. 그 섬세한거 하나 때문에 작업의 결과가 안 좋게 나오는 게 한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 덕분에 내가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미국에는 어떻게 가게 되었나?결혼하고 나이가 드는 과정에서 내가 40이든 60이든 교육을 받고자 한다면 받을 수 있겠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뿌리를 내리면 쉽게 움직일 수 없지 않나, 정착하고 그런 부분 때문에 두려웠다. 나는 원래 자유롭고 싶은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더 뭔가에 메이기 전에 하고 싶은걸 하고 싶었다. 플루트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을 늘 간직했었는데, 우연히 <플루트 앤 플루티스트>라는 잡지에 조나단 랜달이라는 선생님께 어떤 분이 교육을 받고 왔다는 행보를 써놓은 부분을 읽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이분한테 교육을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준비하다가 잡지에 나왔던 분하고 통화가 되어 미국 가는 것을 준비하게 되었다.조나단 랜달 선생님에 대해 말해달라.조나단 랜달 선생님은 전문가용 플루트를 만드시는 분이다. 이분이 대단한 게 어디서 사다가 작업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하나 다 본인이 직접 만드신다. 말 그대로 핸드메이드인 거다. 자신이 만드는 것에 대해서 완벽을 추구하는 그런 분이셨다. 플루트의 수리 과정, 플루트의 마우스피스를 깎는 과정 등을 이수할 경우에 각각 분야별로 수료증을 주시는데, 그렇게 세 개의 과정에서 수료증을 받았다.다년간의 유학이 본인에겐 어떤 의미인가?내 인생의 철학을 만드는 기회가 됐다고 본다. 태어나서 죽는 그 순간까지 어떤 삶으로 살다 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돌아보게 하고, 구체적인 체계를 잡게 된 계기였다.색소폰 수리를 하는 데에 있어 자신만의 신념이 있나?사람은 누구나 적게 일하고 많이 받고 싶어 하는 게으른(?) 본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일에는 단계가 있는데 예를 들어 1단계, 2단계, 3단계 등을 거쳐 완성된 작업물이 만들어진다 치자. 나는 그 단계의 어느 것도 건너뛰고 싶지 않다. 단계를 건너뛴다는 것은 사실 요령을 말한다. 그 요령이 좋은 의미의 요령이 아니라 좋지 않은 의미의 요령이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악기의 완성도를 떨어뜨린다. 수 십 대의 악기를 고치면서 짧은 시간에 여러 악기를 고쳤다는 그런 만족을 얻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악기를 고쳐도 그 하나의 악기가 만족스럽게 고쳐졌다면 나는 거기에 만족하는 사람이고 싶다.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이 사회 속에 산다는 것은 어우러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도움을 주고, 또 도움을 받는 그런 관계가 바람직하지, 나만 도움받고 나는 도움 주지 않는 그런 삶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이 일을 배우기 위해서 어디에서 공부하는 게 바람직하고, 어떻게, 어떤 준비를 하는 게 좋은지 등의 조언을 받을 수 있는 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내 분야의 일을 배우기 위해 나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새롭게 이 일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방향을 제시해 줄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을 통해서 아름다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고, 처음에 가졌던 음악을 사랑하는 그 마음 그대로 변함없이 이 일을 하고 싶다. 글 | 안지인 기자jii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6-01
  • 색소폰과 함께 두 번째 인생을 사는 사람들,'안양어울림동호회'
    누구에게나 도전이라는 것은 어렵고도 낯설게 그리고 멀게 다가온다. 그러나 어느 누군가에게는 설렘으로 느껴지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화려하고 찬란했던 제1의 인생을 뒤로하고, 이제는 색소폰과 함께 인생 제2막을 써내려가는, 또 다른 삶의 무대에 뛰어든 사람들이 모인 어울림 동호회를 만났다. (박 정 호 동호회 원장)어울림동호회에서는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 이곳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원장이다. 학원이 아닌 동호회 형식을 띤 이 공간의 전체 운영을 맡고 있다.어울림동호회를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 원래는 개인 음악실을 가지고 있었다. 4명이 같이 운영을 했고, 취지는 은퇴한 사람들끼리 뭉쳐서 음악을 한 번 해보자였다. 당시에는 기타나 드럼, 색소폰 여러종류의 악기를 구상했었는데, 색소폰만 10년 넘게 불다 보니 색소폰 동호회를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동호회가 만들어진 지 5년 정도 되었다.아무리 취미라지만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색소폰을 불었다면 취미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원래 음악에 대해 잘 몰랐었다. 그러다 보니 악기를 통해서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크게 와 닿더라. 색소폰을 불면 불수록 점점 더 열심히 하고 싶어졌다. 기초를 튼튼하게 하자는 주의라 레슨도 많이 받고, 전공생들이 하는 스케일 연습도 했다. 이론이 부족하다 느껴질 때는 서점에서 작곡 관련 책을 뒤적거리기도 했다. 그저 어려울 것만 같던 이론도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는 책들이 더러 있더라. 그렇게 하면서 시간이 지나 반주기에도 맞춰서 하다 보니 더 재미있게 느껴지고, 깊이 빠져들더라. 그런 것들이 여태까지 색소폰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동호회 회원 수는 몇명인가, 회원 규모가 늘어나게 된 계기가 있나.회원은 대략 45~50여 명 된다. 어울림 동호회에는 기본적으로 연습실은 오로지 음악만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자는 원칙이 있다. 알코올 섭취시 연습실 출입금지는 당연하고, 간혹 다과 같은 것을 먹는 것도 되도록이면 금지하고 있다. 그저 놀고먹기 위한 동호회가 아닌 서로 기초를 다져가며 커가는 온전한 동호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이런 방향성을 띠고 가다 보니 4년 정도 후엔 지역사회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더라. 실제로 우리 동호회에 계신 많은 분이 그런 원칙에 부합하고 또 존중해주는 분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인원 변동이 별로 없는 편이다.연습실이 많아 보이던데. 그렇다. 개인 공간을 대기 시간 없이 연습할 수 있게 했다.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연습을 하는 분위기가 많이 형성되어 있어 연습실이 많아야 한다. 낮에는 직장 혹은 집안일이 있어 주로 저녁에 연습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녁에 와도 연습실이 겹치는 경우가 없다. 기본기 연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였는데, 아무래도 단체이다 보니 다 같이 해나가기에 힘든 부분이 있지 않나. 그래서 프로그램을 짰다. 레슨하는 프로그램, 전체적인 강의, 그리고 앙상블. 이렇게 세 개로 구분 지었다. 레슨 프로그램은 개인별로 신청을 받아 실용음악과 출신의 전공자분들에게 체계적으로 레슨받을 수 있다. 전체강의는 일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1시간 정도 기초적인 강의를 한다. 초급, 중급, 고급을 나누어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알려주려고 한다. 그러면서 늘 회원들에게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체계적으로 연습하고, 이론을 아는 뮤지션이 되자”이다. 반주기에만 그저 도취되는 것이 아닌, 알고 음악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특별히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나. 아마추어가 뮤지션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처음 음악을 접할 때 기초가 없으면 3년~5년 정도 되면 권태기가 와서 중간에 포기하더라. 기초가 튼튼하면 그걸 넘어설 수 있다. 그래서 간혹 권태기가 온 회원님들이 있다고 하면 레슨을 좀 받았으면 좋겠다고 권유를 한다. 색소폰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누구나 색소폰을 부는 모습에 대한 동경이 있지 않나. 그런 분들에게 무조건 도전하라고 말한다. 우리 동호회에 여든 되신 분이 두 분이나 계신다. 두 분 모두 굉장히 잘 부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나.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처럼 주저하지 말고 도전하라고 얘기하고 싶다. (김 양 수 동호회 회장)어울림동호회와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나. 원장님과 직접적인 인연이 있어서 오게 된 것은 아니다. 8년 전에는 다른 동호회에 있었다. 지금 실장님이 어울림동호회에 한 번 와주십사 하여 와봤는데, 동호회의 취지가 나와 아주 잘 맞기도 해서 과감히 바꿨다.동호회 회장직을 맡고 있으신데 어울림동호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동호회 회장직을 올해로 4년째 맡고 있다. 3년 정도 하고 회장 자리를 내어놓겠다 했는데, 원장님과 회원들이 1년만 더 해줬으면 좋겠다 해서 일단 올해까지는 회장직을 유지할 예정이다. 나보다 훌륭한 분들도 많이 계시고, 다양한 분들이 한 번씩 경험을 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이다. 4년이나 하면 장기집권 아닌가. 아시다시피 조직에 10명만 모여도 말썽이 많다. 이 주변에 색소폰동호회만해도 10개가 넘는다. 그런데 유일하게 우리 어울림동호회만 말썽이 없다. 내가 주장하는 부분도 일단은 사람 관계 중심으로 이끌려고 노력한다. 관계가 중요하다 보니 늘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편이다. 얼굴 찌푸리는 일 없고, 좋은 말 많이 하고, 칭찬 많이 하고, 서로에 대한 배려심이 아주 높다. 그런 것들의 밑바탕이 아마도, 우리 동호회 41명의 인성이 훌륭하시고 오시는 분들 대부분이 훌륭한 분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 분들도 한 번씩 회장직을 맡아서 직접 다른 분위기로 조성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일하면서 색소폰을 겸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일주일에 두 세 번은 꼭 연습실에 온다. 사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낸다는 것이 어렵지만 그래도 동호회에서 맡은 직책도 있고, 동호회 돌아가는 것도 잘 살펴야 하기 때문에 자주 나오려 하는 편이다.연습은 보통 어떤 방법으로 하나. 기본기를 많이 연습하는 편이다. 소화하는 곡들이 그래도 많은 편인데, 그걸 계속하다 보니 연주에 치중하는 것보다는 원장님께서 주시는 악보, 멜로디, 리듬, 코드 등을 머릿속에 담으려고 노력한다.색소폰 음악을 듣는 것도 좋아하나. 나는 주로 듣는 쪽이다. 부는 것보다는 듣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듣는 귀가 열려야 내가 불 수 있는 환경이 맞춰지는 것이지 나만 즐거우면 안 되지 않나. 노래를 듣는 사람이 즐거워야지 나만 만족해서는 음악이라고 보기 힘들다. 우리가 전문가도 아니고, 전공자도 아니지만 음악활동을 통해서 내 행복을 먼저 찾고, 무대가 마련된 연주 초청이 오면 기꺼이 나가서 봉사해야 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도 많이 듣는다.기억에 남았던 동호회 연주가 있나.3년 전에 갔던 맹아학교가 기억에 남는다. 앞을 보지 못하는 학생들의 강당에서 연주한 적이 있었다. 그게 우리 회원 중에 여교수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이 가르치는 학생과 인연이 닿아 가게 되었다. 그전에는 맹아학교가 서울에 몇 군데 있었는지도 몰랐었다. 연주를 한 두번 나가다보니 주변에 맹아학교가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감동적이었던 것이 일단 연주를 하면 대부분 관객의 반응이라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냥 박수 정도에서 끝나는게 아니고, 가슴으로 감동이 느껴지게끔 표현을 해주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았다. 너무나 맑게 같이 동참해 주었던 그 모습이 너무나 남더라. (김 윤 분 회원)색소폰을 하게 된 계기는. 댄스 스포츠 강사로 18년 이상을 수업했었는데, 어느 날 한 어르신이 색소폰을 배워서 어디 가서 연주도 하고, 뭐도 하고 그런다고 굉장히 자랑하시더라. 마침 일전에 아들이 색소폰을 배운다고 사다 놓은 악기가 있었던 터라 흥미를 갖고 어르신들 동호회에 구경을 갔었다. 거기 계신 분들 연령대가 70대 이상이셨다. 그 중에 한 분이 멋지게 자랑할 요량으로 열정적으로 세 곡을 내리 연주하셨는데, 그때 든 생각이 ‘저분 나이 75세에 저렇게 할 정도면, 내가 지금 배워서 저 나이가 되면 훨씬 낫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일을 그만두게 되고 이어서 색소폰으로 봉사활동을 하며 이제는 제2의 인생을 즐겁게 사는 기분이다. 이걸 안 배웠으면 내가 뭘 했을까 할 정도로 굉장히 잘했다고 생각한다. 무대에 선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3, 4년 전에 동호회에서 연주를 나갔는데, 그때 솔로 연주 할 기회가 있었다. 남 앞에 서서 연주한다는 것이 긴장도 많이 되고 어려웠던 터라 무대에서 달달 떨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삑삑” 소리만 나다가 끝났었다. 그게 내 첫 무대였다. 그때 당시 ‘이걸 계속 해야 하나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게는 잊지 못할 창피한 순간이었다. 그러던 중에 그때 같이 하던 회원이 무대에 다시 올라가서 한 번 더 해보라더라. 한 번 더 하다가는 숨이 멎겠다고 얘기했더니, 그 친구 하는 말이 지금 한 번 더 안하면 영영 사람들 앞에서 못 설 것이니 괜찮으니까 한 번 더 해보라고 했다. 그 말에 용기를 내 쌌던 가방을 풀고 무대에 다시 올라가서 하니 그때는 괜찮더라. 아마 그때 한 번만 하고 안했더라면, 지금까지도 사람들 앞에 서는게 굉장히 두려웠을 거다. 동호회 회원 덕분에 지금은 자신감을 갖고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어울림동호회는 어떤 동호회인가. 이곳은 한마디로 얘기하면 공부하는 분위기를 가진 동호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습하다 잘 안 되는 부분이 있거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서로 물어보고, 또 서로 알려주고 그런다. 그렇게 서로 공부하며 잘 어울리는 부분이 이곳의 큰 장점인 것 같다. (정 인 숙 회원)개인적인 일이 많을 텐데 어떻게 시간을 쪼개서 동호회 활동을 하나. 자투리시간을 이용하는 편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 보니 몸이 피곤해도 심지어 아침이어도 꼭 와서 한다. 만약 아침에 일이 있을 때는 일 끝난 후 저녁에 잠깐이라도 와서 연습하고 간다. 그렇게 중간중간이라도 들러 연습하지 않았으면 아마 포기했을 거다. 그렇게 바빠도 짬을 내어서 오다 보니 부족하지만, 연주도 하고, 이렇게 인터뷰까지 하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어울림동호회 활동을 하며 재미있었던 에피소드가 있나. 한 번은 원장님이 색소폰을 부는데 “깨굴깨굴깨굴” 소리가 나더라. 그 소리는 어떻게 내는 거냐고 물었더니 원장님이 내가 표현하는 게 너무 웃기다며 엄청 웃으시더라. 알고 보니 그게 주법이더라. 저 “깨굴깨굴깨굴” 소리를 나는 언제 내나 싶더라.어울림동호회 회원으로서 이런 건 참 좋다 하는 부분이 있나. 일단 원장님이 동호회를 위해 항상 열심히 하신다. 색소폰에 입문한 사람들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하신다. 그리고 회원들도 어울림 동호회라는 이름처럼 서로 잘 어우러진다. 서로가 이해하고, 배려하고, 모르는 부분은 알려주고,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잘 된다. 이동호회에 들어 온 지 1년도 채 안 되었는데, 그런 부분이 굉장히 잘 되어 더 열심히 하게 된다. 서로 알려주고 도와주고 하는 부분이 정말 좋다. 이런 걸 보면 동호회가 이름 따라가나보다 싶다. (조 승 환 회원)색소폰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인생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전성기와 황금기로 구별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 돈을 벌었던 시기를 전성기로 친다면, 퇴직 후부터 76세까지는 황금기라고 말하고 싶다.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 놓았던 것들을 가지고 취미 생활도 즐기고, 평소에 못 했던 것들도 하고 싶고, 좀 더 보람되게 살고 싶다. 이제는 백세 시대 아닌가. 그저 무의미하게 사는 것보다는 이렇게 색소폰과 함께한다면 앞으로의 노후가 더 즐겁지 아니하겠는가.동호회 활동을 가족들이 많이 응원해주는 편인가. 그렇다. 교회에서 간혹 연주라도 하면 아주 좋아하더라. 올해 10월에 딸이 결혼하는데,결혼할 때 축가로 색소폰 연주를 해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던 중에 상견례를 했는데, 사돈어른 되실 분도 색소폰을 하신다는 게 아닌가. 그래서 아이들 결혼식 할 때 같이 색소폰 연주를 하는 게 어떻겠냐 제안을 하니 흔쾌히 수락하셨다. 그래서 요즘 종종 같이 만나 연습하고있다. 아이들도 좋아하고, 개인적으로도 보람된다.어울림동호회에 또 어떤 사람들이 있나. 우리 동호회에 스님도 계시고, 목사님도 계신다. 두 분 모두 아주 연주를 잘하신다. 특히 스님같은 경우 승려복에 색소폰을 멘 모습이 굉장히 특별했다. 두 분의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는데, 두 분 모두 트로트 연주를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노 재 홍, 권 현 숙 부부)어떻게 부부가 같이 색소폰을 불게 되었나. 여기 어울림동호회에도 두, 세팀 정도 있다. 나같은 경우는 1년 정도 드럼을 하다가 우연히 연습실에서 아주머니들이 색소폰을 부는 모습을 보고 그게 멋져 보여 입문하게 되었다. 악보 보는 것에 자신이 없었던 터라 고민을 했는데, 3개월 정도 하니 악보가 조금씩 보이더라. 악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니 무섭게 재미가 붙어 그때부터 정말 즐기면서 열심히 하게 된 것 같다.어울림동호회에는 남편의 추천으로 들어오게 된 것인가. 처음 색소폰을 배웠을 때는 학원을 먼저 다녔었다. 학원 같은 경우는 정해진 레슨 시간이 있기 때문에 직장을 다니는 나에겐 시간을 맞추는 일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한참동안 차에 악기를 싣고 다녔었다. 그러다 남편의 추천과 이 동호회에서 먼저 활동하고 있었던 언니의 추천으로 오게 되었는데, 들어와 보니 연습시간을 조절하는 것이 학원보다 훨씬 수월하더라. 못할 것 같았던 마음도 언니와 남편이 힘을 실어줘서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재미가 많이 붙어 직장도 관두고 색소폰만 불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것이 어느새 8개월째다.부부가 취미가 같아서 어떤 부분이 좋은가. 색소폰에 관해서 대화가 잘 통하다 보니 얘깃거리가 많다. 유튜브에서 음악도 같이 찾아서듣고, 녹음도 해보고, 서로의 연주를 들려주면서 틀린 부분이 있으면 가르쳐 주고, 의견을 나누며 하다 보니 지루하지도 않고 같이 성장할 수 있어서 좋다. 글 | 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 월간색소폰
    • Focus
    2018-06-01
  • 색소폰과 함께 두 번째 인생을 사는 사람들,'안양어울림동호회'
    누구에게나 도전이라는 것은 어렵고도 낯설게 그리고 멀게 다가온다. 그러나 어느 누군가에게는 설렘으로 느껴지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화려하고 찬란했던 제1의 인생을 뒤로하고, 이제는 색소폰과 함께 인생 제2막을 써내려가는, 또 다른 삶의 무대에 뛰어든 사람들이 모인 어울림 동호회를 만났다. (박 정 호 동호회 원장)어울림동호회에서는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가. 이곳 전체를 책임지고 있는 원장이다. 학원이 아닌 동호회 형식을 띤 이 공간의 전체 운영을 맡고 있다.어울림동호회를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 원래는 개인 음악실을 가지고 있었다. 4명이 같이 운영을 했고, 취지는 은퇴한 사람들끼리 뭉쳐서 음악을 한 번 해보자였다. 당시에는 기타나 드럼, 색소폰 여러종류의 악기를 구상했었는데, 색소폰만 10년 넘게 불다 보니 색소폰 동호회를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동호회가 만들어진 지 5년 정도 되었다.아무리 취미라지만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색소폰을 불었다면 취미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원래 음악에 대해 잘 몰랐었다. 그러다 보니 악기를 통해서 소리를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크게 와 닿더라. 색소폰을 불면 불수록 점점 더 열심히 하고 싶어졌다. 기초를 튼튼하게 하자는 주의라 레슨도 많이 받고, 전공생들이 하는 스케일 연습도 했다. 이론이 부족하다 느껴질 때는 서점에서 작곡 관련 책을 뒤적거리기도 했다. 그저 어려울 것만 같던 이론도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는 책들이 더러 있더라. 그렇게 하면서 시간이 지나 반주기에도 맞춰서 하다 보니 더 재미있게 느껴지고, 깊이 빠져들더라. 그런 것들이 여태까지 색소폰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동호회 회원 수는 몇명인가, 회원 규모가 늘어나게 된 계기가 있나.회원은 대략 45~50여 명 된다. 어울림 동호회에는 기본적으로 연습실은 오로지 음악만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자는 원칙이 있다. 알코올 섭취시 연습실 출입금지는 당연하고, 간혹 다과 같은 것을 먹는 것도 되도록이면 금지하고 있다. 그저 놀고먹기 위한 동호회가 아닌 서로 기초를 다져가며 커가는 온전한 동호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이런 방향성을 띠고 가다 보니 4년 정도 후엔 지역사회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더라. 실제로 우리 동호회에 계신 많은 분이 그런 원칙에 부합하고 또 존중해주는 분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인원 변동이 별로 없는 편이다.연습실이 많아 보이던데. 그렇다. 개인 공간을 대기 시간 없이 연습할 수 있게 했다. 사람들이 전체적으로 연습을 하는 분위기가 많이 형성되어 있어 연습실이 많아야 한다. 낮에는 직장 혹은 집안일이 있어 주로 저녁에 연습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녁에 와도 연습실이 겹치는 경우가 없다. 기본기 연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였는데, 아무래도 단체이다 보니 다 같이 해나가기에 힘든 부분이 있지 않나. 그래서 프로그램을 짰다. 레슨하는 프로그램, 전체적인 강의, 그리고 앙상블. 이렇게 세 개로 구분 지었다. 레슨 프로그램은 개인별로 신청을 받아 실용음악과 출신의 전공자분들에게 체계적으로 레슨받을 수 있다. 전체강의는 일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1시간 정도 기초적인 강의를 한다. 초급, 중급, 고급을 나누어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알려주려고 한다. 그러면서 늘 회원들에게 강조하는 부분이 있다. “체계적으로 연습하고, 이론을 아는 뮤지션이 되자”이다. 반주기에만 그저 도취되는 것이 아닌, 알고 음악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특별히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가 있나. 아마추어가 뮤지션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처음 음악을 접할 때 기초가 없으면 3년~5년 정도 되면 권태기가 와서 중간에 포기하더라. 기초가 튼튼하면 그걸 넘어설 수 있다. 그래서 간혹 권태기가 온 회원님들이 있다고 하면 레슨을 좀 받았으면 좋겠다고 권유를 한다. 색소폰을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누구나 색소폰을 부는 모습에 대한 동경이 있지 않나. 그런 분들에게 무조건 도전하라고 말한다. 우리 동호회에 여든 되신 분이 두 분이나 계신다. 두 분 모두 굉장히 잘 부신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지 않나.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처럼 주저하지 말고 도전하라고 얘기하고 싶다. (김 양 수 동호회 회장)어울림동호회와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나. 원장님과 직접적인 인연이 있어서 오게 된 것은 아니다. 8년 전에는 다른 동호회에 있었다. 지금 실장님이 어울림동호회에 한 번 와주십사 하여 와봤는데, 동호회의 취지가 나와 아주 잘 맞기도 해서 과감히 바꿨다.동호회 회장직을 맡고 있으신데 어울림동호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나.동호회 회장직을 올해로 4년째 맡고 있다. 3년 정도 하고 회장 자리를 내어놓겠다 했는데, 원장님과 회원들이 1년만 더 해줬으면 좋겠다 해서 일단 올해까지는 회장직을 유지할 예정이다. 나보다 훌륭한 분들도 많이 계시고, 다양한 분들이 한 번씩 경험을 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이다. 4년이나 하면 장기집권 아닌가. 아시다시피 조직에 10명만 모여도 말썽이 많다. 이 주변에 색소폰동호회만해도 10개가 넘는다. 그런데 유일하게 우리 어울림동호회만 말썽이 없다. 내가 주장하는 부분도 일단은 사람 관계 중심으로 이끌려고 노력한다. 관계가 중요하다 보니 늘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편이다. 얼굴 찌푸리는 일 없고, 좋은 말 많이 하고, 칭찬 많이 하고, 서로에 대한 배려심이 아주 높다. 그런 것들의 밑바탕이 아마도, 우리 동호회 41명의 인성이 훌륭하시고 오시는 분들 대부분이 훌륭한 분이 많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그런 분들도 한 번씩 회장직을 맡아서 직접 다른 분위기로 조성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일하면서 색소폰을 겸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일주일에 두 세 번은 꼭 연습실에 온다. 사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낸다는 것이 어렵지만 그래도 동호회에서 맡은 직책도 있고, 동호회 돌아가는 것도 잘 살펴야 하기 때문에 자주 나오려 하는 편이다.연습은 보통 어떤 방법으로 하나. 기본기를 많이 연습하는 편이다. 소화하는 곡들이 그래도 많은 편인데, 그걸 계속하다 보니 연주에 치중하는 것보다는 원장님께서 주시는 악보, 멜로디, 리듬, 코드 등을 머릿속에 담으려고 노력한다.색소폰 음악을 듣는 것도 좋아하나. 나는 주로 듣는 쪽이다. 부는 것보다는 듣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듣는 귀가 열려야 내가 불 수 있는 환경이 맞춰지는 것이지 나만 즐거우면 안 되지 않나. 노래를 듣는 사람이 즐거워야지 나만 만족해서는 음악이라고 보기 힘들다. 우리가 전문가도 아니고, 전공자도 아니지만 음악활동을 통해서 내 행복을 먼저 찾고, 무대가 마련된 연주 초청이 오면 기꺼이 나가서 봉사해야 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도 많이 듣는다.기억에 남았던 동호회 연주가 있나.3년 전에 갔던 맹아학교가 기억에 남는다. 앞을 보지 못하는 학생들의 강당에서 연주한 적이 있었다. 그게 우리 회원 중에 여교수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이 가르치는 학생과 인연이 닿아 가게 되었다. 그전에는 맹아학교가 서울에 몇 군데 있었는지도 몰랐었다. 연주를 한 두번 나가다보니 주변에 맹아학교가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감동적이었던 것이 일단 연주를 하면 대부분 관객의 반응이라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냥 박수 정도에서 끝나는게 아니고, 가슴으로 감동이 느껴지게끔 표현을 해주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았다. 너무나 맑게 같이 동참해 주었던 그 모습이 너무나 남더라. (김 윤 분 회원)색소폰을 하게 된 계기는. 댄스 스포츠 강사로 18년 이상을 수업했었는데, 어느 날 한 어르신이 색소폰을 배워서 어디 가서 연주도 하고, 뭐도 하고 그런다고 굉장히 자랑하시더라. 마침 일전에 아들이 색소폰을 배운다고 사다 놓은 악기가 있었던 터라 흥미를 갖고 어르신들 동호회에 구경을 갔었다. 거기 계신 분들 연령대가 70대 이상이셨다. 그 중에 한 분이 멋지게 자랑할 요량으로 열정적으로 세 곡을 내리 연주하셨는데, 그때 든 생각이 ‘저분 나이 75세에 저렇게 할 정도면, 내가 지금 배워서 저 나이가 되면 훨씬 낫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더라. 일을 그만두게 되고 이어서 색소폰으로 봉사활동을 하며 이제는 제2의 인생을 즐겁게 사는 기분이다. 이걸 안 배웠으면 내가 뭘 했을까 할 정도로 굉장히 잘했다고 생각한다. 무대에 선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3, 4년 전에 동호회에서 연주를 나갔는데, 그때 솔로 연주 할 기회가 있었다. 남 앞에 서서 연주한다는 것이 긴장도 많이 되고 어려웠던 터라 무대에서 달달 떨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삑삑” 소리만 나다가 끝났었다. 그게 내 첫 무대였다. 그때 당시 ‘이걸 계속 해야 하나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게는 잊지 못할 창피한 순간이었다. 그러던 중에 그때 같이 하던 회원이 무대에 다시 올라가서 한 번 더 해보라더라. 한 번 더 하다가는 숨이 멎겠다고 얘기했더니, 그 친구 하는 말이 지금 한 번 더 안하면 영영 사람들 앞에서 못 설 것이니 괜찮으니까 한 번 더 해보라고 했다. 그 말에 용기를 내 쌌던 가방을 풀고 무대에 다시 올라가서 하니 그때는 괜찮더라. 아마 그때 한 번만 하고 안했더라면, 지금까지도 사람들 앞에 서는게 굉장히 두려웠을 거다. 동호회 회원 덕분에 지금은 자신감을 갖고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어울림동호회는 어떤 동호회인가. 이곳은 한마디로 얘기하면 공부하는 분위기를 가진 동호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습하다 잘 안 되는 부분이 있거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서로 물어보고, 또 서로 알려주고 그런다. 그렇게 서로 공부하며 잘 어울리는 부분이 이곳의 큰 장점인 것 같다. (정 인 숙 회원)개인적인 일이 많을 텐데 어떻게 시간을 쪼개서 동호회 활동을 하나. 자투리시간을 이용하는 편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다 보니 몸이 피곤해도 심지어 아침이어도 꼭 와서 한다. 만약 아침에 일이 있을 때는 일 끝난 후 저녁에 잠깐이라도 와서 연습하고 간다. 그렇게 중간중간이라도 들러 연습하지 않았으면 아마 포기했을 거다. 그렇게 바빠도 짬을 내어서 오다 보니 부족하지만, 연주도 하고, 이렇게 인터뷰까지 하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어울림동호회 활동을 하며 재미있었던 에피소드가 있나. 한 번은 원장님이 색소폰을 부는데 “깨굴깨굴깨굴” 소리가 나더라. 그 소리는 어떻게 내는 거냐고 물었더니 원장님이 내가 표현하는 게 너무 웃기다며 엄청 웃으시더라. 알고 보니 그게 주법이더라. 저 “깨굴깨굴깨굴” 소리를 나는 언제 내나 싶더라.어울림동호회 회원으로서 이런 건 참 좋다 하는 부분이 있나. 일단 원장님이 동호회를 위해 항상 열심히 하신다. 색소폰에 입문한 사람들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주고 싶어하신다. 그리고 회원들도 어울림 동호회라는 이름처럼 서로 잘 어우러진다. 서로가 이해하고, 배려하고, 모르는 부분은 알려주고,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잘 된다. 이동호회에 들어 온 지 1년도 채 안 되었는데, 그런 부분이 굉장히 잘 되어 더 열심히 하게 된다. 서로 알려주고 도와주고 하는 부분이 정말 좋다. 이런 걸 보면 동호회가 이름 따라가나보다 싶다. (조 승 환 회원)색소폰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가. 인생을 두 가지로 나눈다면 전성기와 황금기로 구별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일해 돈을 벌었던 시기를 전성기로 친다면, 퇴직 후부터 76세까지는 황금기라고 말하고 싶다. 오랜 세월 동안 만들어 놓았던 것들을 가지고 취미 생활도 즐기고, 평소에 못 했던 것들도 하고 싶고, 좀 더 보람되게 살고 싶다. 이제는 백세 시대 아닌가. 그저 무의미하게 사는 것보다는 이렇게 색소폰과 함께한다면 앞으로의 노후가 더 즐겁지 아니하겠는가.동호회 활동을 가족들이 많이 응원해주는 편인가. 그렇다. 교회에서 간혹 연주라도 하면 아주 좋아하더라. 올해 10월에 딸이 결혼하는데,결혼할 때 축가로 색소폰 연주를 해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던 중에 상견례를 했는데, 사돈어른 되실 분도 색소폰을 하신다는 게 아닌가. 그래서 아이들 결혼식 할 때 같이 색소폰 연주를 하는 게 어떻겠냐 제안을 하니 흔쾌히 수락하셨다. 그래서 요즘 종종 같이 만나 연습하고있다. 아이들도 좋아하고, 개인적으로도 보람된다.어울림동호회에 또 어떤 사람들이 있나. 우리 동호회에 스님도 계시고, 목사님도 계신다. 두 분 모두 아주 연주를 잘하신다. 특히 스님같은 경우 승려복에 색소폰을 멘 모습이 굉장히 특별했다. 두 분의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는데, 두 분 모두 트로트 연주를 좋아하신다는 것이다. (노 재 홍, 권 현 숙 부부)어떻게 부부가 같이 색소폰을 불게 되었나. 여기 어울림동호회에도 두, 세팀 정도 있다. 나같은 경우는 1년 정도 드럼을 하다가 우연히 연습실에서 아주머니들이 색소폰을 부는 모습을 보고 그게 멋져 보여 입문하게 되었다. 악보 보는 것에 자신이 없었던 터라 고민을 했는데, 3개월 정도 하니 악보가 조금씩 보이더라. 악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니 무섭게 재미가 붙어 그때부터 정말 즐기면서 열심히 하게 된 것 같다.어울림동호회에는 남편의 추천으로 들어오게 된 것인가. 처음 색소폰을 배웠을 때는 학원을 먼저 다녔었다. 학원 같은 경우는 정해진 레슨 시간이 있기 때문에 직장을 다니는 나에겐 시간을 맞추는 일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한참동안 차에 악기를 싣고 다녔었다. 그러다 남편의 추천과 이 동호회에서 먼저 활동하고 있었던 언니의 추천으로 오게 되었는데, 들어와 보니 연습시간을 조절하는 것이 학원보다 훨씬 수월하더라. 못할 것 같았던 마음도 언니와 남편이 힘을 실어줘서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재미가 많이 붙어 직장도 관두고 색소폰만 불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것이 어느새 8개월째다.부부가 취미가 같아서 어떤 부분이 좋은가. 색소폰에 관해서 대화가 잘 통하다 보니 얘깃거리가 많다. 유튜브에서 음악도 같이 찾아서듣고, 녹음도 해보고, 서로의 연주를 들려주면서 틀린 부분이 있으면 가르쳐 주고, 의견을 나누며 하다 보니 지루하지도 않고 같이 성장할 수 있어서 좋다. 글 | 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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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01
  • 셋째 주 수요일에 만날 수 있는 브로드웨이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어떤 일을 꾸준히 행하는 일은 단지 신념을 가지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여기 13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KOREAN JAZZ ORCHESTRA 팀을 만났다.​기대하는 마음4월 셋째 주 수요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서 코리안 재즈오케스트라의 콘서트가 열렸다. 2005년에 창단되어 현재까지 꾸준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국내 몇 안 되는 프로페셔널 빅밴드이다. 우리나라에서 빅밴드 공연을 찾아보기가 쉽다고는 할 수 없는데, 매달 셋째 주 수요일마다 공연을 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싶다. 2009년 11월에 서울시 전문 예술단체로 지정됨으로써 코리안 재즈오케스트라는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증명한 실력 있는 팀이라 더욱 기대가 컸다. 연예인의 색소폰 소리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기에 앞서 어디서 본 것 같은 낯이 익은 한 사람이 무대 위에 섰다. 바로 탤런트 송경철이었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관객들 한 명 한 명에게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그의 유쾌한 인사말에 관객들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센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색소폰 연주는 더욱 그랬다. 우리가 TV에서 보던 왠지 무서울 것만 같았던 사람이 (악역 전문배우라는 타이틀도 있다) 저렇게 감미로운 소리를 내다니… 좀전의 유쾌하고 장난끼있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색소폰에만 모든 것을 집중해 깊은 선율을 뽑아냈다. 그렇게 그의 연주로 코리안 재즈오케스트라의 서막이 올랐다. 화려함 그 자체이날 콘서트에는 팝, 스윙재즈, 가요 등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곡들을 위주로 들을 수 있었다. 무대는 객석과 아주 가까워서 연주자들의 표정과 동작들을 자세하고 생동감 있게 볼 수있었다. 빅밴드의 전체 구성이 워낙 화려한지라 보는 것만으로도 브로드웨이의 어느 뮤지컬 극장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조금 무료하다 싶으면 적재적소에 등장한 보컬은 무대를 더욱 구성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곡 중간중간에 솔로 주자들의 개성 있는 애드리브(왕의 정원에 피어있는꽃처럼 화려하고 자신 있게 자신에 대해 말했다)를 듣는 것도 재미있게 무대를 즐길 수 있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조명에 반사된 금관악기의 잘빠진 몸매가 화려한 조명에 지지 않고 더욱 고급스럽게 빛났던 무대. 엄지용 단장의 가벼운 손끝에 맞춰 깔끔하게 떨어지는 사운드는 그들의 땀과 노력을 반증했다. 연주의 퀄리티가 높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공연비는 저렴한 편이다. 심지어 이날은 관객 전부가 유기농 커피 한 상자씩을 받아간 행운의 날이기도 했다. 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내달리는 신나는 리듬에 관객들은 시종일관 몸을 가만두지 못했다. 글 | 안지인 기자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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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01
  • 셋째 주 수요일에 만날 수 있는 브로드웨이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어떤 일을 꾸준히 행하는 일은 단지 신념을 가지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여기 13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는 KOREAN JAZZ ORCHESTRA 팀을 만났다.​기대하는 마음4월 셋째 주 수요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서 코리안 재즈오케스트라의 콘서트가 열렸다. 2005년에 창단되어 현재까지 꾸준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국내 몇 안 되는 프로페셔널 빅밴드이다. 우리나라에서 빅밴드 공연을 찾아보기가 쉽다고는 할 수 없는데, 매달 셋째 주 수요일마다 공연을 한다고 하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싶다. 2009년 11월에 서울시 전문 예술단체로 지정됨으로써 코리안 재즈오케스트라는 자신들의 존재가치를 증명한 실력 있는 팀이라 더욱 기대가 컸다. 연예인의 색소폰 소리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기에 앞서 어디서 본 것 같은 낯이 익은 한 사람이 무대 위에 섰다. 바로 탤런트 송경철이었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관객들 한 명 한 명에게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그의 유쾌한 인사말에 관객들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센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색소폰 연주는 더욱 그랬다. 우리가 TV에서 보던 왠지 무서울 것만 같았던 사람이 (악역 전문배우라는 타이틀도 있다) 저렇게 감미로운 소리를 내다니… 좀전의 유쾌하고 장난끼있는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색소폰에만 모든 것을 집중해 깊은 선율을 뽑아냈다. 그렇게 그의 연주로 코리안 재즈오케스트라의 서막이 올랐다. 화려함 그 자체이날 콘서트에는 팝, 스윙재즈, 가요 등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곡들을 위주로 들을 수 있었다. 무대는 객석과 아주 가까워서 연주자들의 표정과 동작들을 자세하고 생동감 있게 볼 수있었다. 빅밴드의 전체 구성이 워낙 화려한지라 보는 것만으로도 브로드웨이의 어느 뮤지컬 극장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조금 무료하다 싶으면 적재적소에 등장한 보컬은 무대를 더욱 구성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곡 중간중간에 솔로 주자들의 개성 있는 애드리브(왕의 정원에 피어있는꽃처럼 화려하고 자신 있게 자신에 대해 말했다)를 듣는 것도 재미있게 무대를 즐길 수 있는 요소 중의 하나였다.조명에 반사된 금관악기의 잘빠진 몸매가 화려한 조명에 지지 않고 더욱 고급스럽게 빛났던 무대. 엄지용 단장의 가벼운 손끝에 맞춰 깔끔하게 떨어지는 사운드는 그들의 땀과 노력을 반증했다. 연주의 퀄리티가 높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공연비는 저렴한 편이다. 심지어 이날은 관객 전부가 유기농 커피 한 상자씩을 받아간 행운의 날이기도 했다. 공연의 처음부터 끝까지 내달리는 신나는 리듬에 관객들은 시종일관 몸을 가만두지 못했다. 글 | 안지인 기자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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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01
  • 기본에 충실한 뿌리깊은 나무 색소포니스트 '엄지용'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우리가 아는 수많은 음악가들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의 삶이 곧 음악이었다는 것. 여기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색소포니스트가있다. 그는 프로 색소포니스트로서의 삶에 책임을 진다고 말한다. 음악과 삶으로만 말하는 ‘진짜 프로’ 색소포니스트 엄지용을 만났다.​색소폰은 어떻게 처음 시작하게 되었나?어렸을 적에 TV 광고에 나오는 색소폰에 매료되었었다. 당시에는 그 악기의 이름이 색소폰인지도 몰랐다. 아버지께 그 광고에 나오는 악기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저거 사주세요.”라고 말했더니 아버지께서 악기를 사 오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다 주신 악기는 색소폰이 아닌 클라리넷이었다. 그 당시 음대엔 색소폰 전공이 없었기 때문에 혹 음대에 갈 가능성을 두고 그렇게 판단하신 것 같다. 그렇게 맨 처음에는 클라리넷으로 먼저 시작하게 되었다. 해군 군악대를 제대할 때까지 클라리넷을 불다가 제대 후 색소폰으로 전향했다.클라리넷을 불다가 색소폰으로 전향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나?클라리넷과 색소폰은 연관성이 많이 있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분이 도움이 더 많이 되었다. 어떤 음악이든 클래식을 기초로 하므로, 재즈나 가요를 습득하는 데 있어 훨씬 수월했었다. 주법 같은 경우 나의 계열은 O로 하는데, 이 O모양의 주법 같은 경우 독일 유학파 출신인 선생님에게 클라리넷 레슨을 받으며 배웠던 주법이었고 이것을 색소폰에 많이 응용했다.영향을 받은 아티스트가 있나?재즈 애드리브에 있어서는 맨해튼 재즈 퀸텟의 조지 영이라는 아티스트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고, 가요를 연주하는 데에 있어서는 김원용 색소폰실연자협회 회장님께 많이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이분의 연주를 많이 들었는데,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예전 우리나라 가요에 들어가는 색소폰 연주는 거의 이분이 하셨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도 저렇게 연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부분을 생각하면 리코딩을 할때 더 신중히 연주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김원용 님의 리코딩음반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처럼 앞으로 내 후배들이나 제자들도 그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자신만의 특별한 연습법 같은 것이 있나?음정을 맞추는 것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편이기 때문에, 나와 내 제자들은 꼭 악기에 진동 튜너를 껴 놓는다. 튜너를 악기에 늘 끼워 놓으면 음정에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다.음정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이유가 있나?음악을 간단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종종 만나는데, 정말 가장 기본적인 것을 생각해야 한다. 기본적인 것으로는 음정과 박자를 꼽을 수 있는데, 음정과 박자를 안 지키고서는 음악을 할 수가 없다. 색소폰은 솔 포지션을 잡는다고 솔이, 라 포지션을 잡는다고 라가 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부분 때문에 밴딩이라는 매력적인 효과가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그냥 솔을 잡고 솔 맞겠지 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솔을 잡고 라를 낼 수도 있고, 라를 잡고 솔을 낼 수 있는 게 색소폰이라는 악기다. 그러므로 음정이 아주 예민하게 살아야 한다. 어렸을 적 일화로 24살 때 닥터레게라는 팀을 했었다. 당시에 지금 유명가수인 바비킴도 그 팀에 속해 있을 때다. 인생의 첫 리코딩 작업이었는데, 녹음실에 들어가서 엄청나게 고전했었다. 경험도 많이 없는 데다가 음정을 맞추면 박자가 안 맞고, 박자를 맞추면 음정이 안 맞았다. 그때는 너무 창피해서 녹음실에서 빨리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경험 때문에 내가 뭐가 부족한지, 무엇을 어떻게 연습해야 할지를 알았다. 그때부터는 늘 메트로놈을 달고 살았다.기본기 연습 중에 호흡법에 관한 얘기도 나왔었다. 호흡법을 위한 연습방법은 어떤 것이 있나?누운 상태에서 고개를 들고 아랫배 배꼽 밑에 두껍고 빳빳한 책을 올려 놓는다. 그 상태로 숨을 들이 마시면 책이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바람을 내쉬었을 때 책이 밑으로 떨어지지 않게 힘을 받쳐주는 게 이 호흡법의 핵심이다. 많이들 잘못 알고 있는 사실 중에 바람이 나가면서 배가 들어가는 게 아니냐는 얘기도 들었는데 잘못된 방법이다.호흡법에 관한 연구를 따로 했었나?그렇다. 학생일 때부터 호흡법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다. 성악을 하는사람이나 색소폰이 아닌 다른 관악기를 부는 사람들을 찾아가 호흡을 어떻게 하는지, 색소폰의 호흡법과는 어떻게 다른지, 그것을 어떻게 응용하면 좋을지를 쫓아다니면서 연구했다.테크닉연습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메트로놈을 틀어놓고 반음계 스케일을 하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된다. 기본적으로 손가락이 돌아가야 테크닉을 구현할 수 있는데 손가락이 잘 돌아가려면 손에 힘이 빠져야 한다. 보통 프로들이 150-160 정도에 4연음을 한다면, 아마추어들은 120 정도까지 4연음이 나오게 만들면 될 것같다. 처음부터 빠르게 하면 절대 안 되고 메트로놈 60에 8분음표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16분음표로 점점 더 속도를 올리는 쪽으로 해야 한다.색소폰을 잘 불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도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색소폰을 분지 2년 차에서 3년 차 정도 된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많이한다. 색소폰을 분지 2년, 3년이 됐는데 왜 색소폰이 더 늘지를 않는지에 대한 고민도 많이들 토로하신다. 주로 그런 분들은 기본기가 안 되어있거나 혹은 기본기에 관한 얘기를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음계를 배운 다음에 바로 곡을 연주한다든지 혹은 반주기에 커서만 따라서 부는 바람에 색소폰을 10년이나 불었는데 악보를 못 보는 사람도 더러 있더라. 처음 색소폰을 배우는 분들은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좋은레슨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레슨이라는 것은 혼자서 연습하는 방법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앞서 말한 기본기와도 직결된다.그렇다면 초보자가 실력 증진을 위해서는 어떤 곡을 연습하는 게 좋은가?사실 초보자 같은 경우 3개월 동안은 곡을 하면 안 된다. 그 3개월 동안에는 롱톤, 기본발음, 스케일 같은 기초적인 것을 탄탄히 다져놓아야 하는 시기다. 롱톤 같은 경우만 해도 피아니시모 롱톤, 포르테 롱톤,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테로 가는 롱톤 등 종류가 많다. 이런 것들을 어느 정도 만들어놓고 난 후에는 아주 쉬운 가곡을 연주하는 것이 좋다. 1옥타브에서 1옥타브 반까지만 나올 수 있는 음역대의 느린 곡이 좋겠다.악기는 어떤 것을 쓰나?줄리어스 칼베스의 SX90R 빈티지 모델을 쓴다. 이 모델은 세게 불었을때 내 호흡을 백 퍼센트 받쳐주는 것을 느낀다. 볼륨도 큰 편이고, 이 모델만이 가진 독특하고 개성 있는 소리가 난다. 셀마가 아리따운 숙녀 같은 소리를 낸다면 줄리어스는 상남자의 소리가 난다.마우스피스와 리드는 어떤 것을 쓰나?재즈할 때는 부드럽고 깊은 소리를 내는 Vandoren v16을 쓰고 가요나 까랑까랑한 음악을 할 때에는 Blue jumbo java T97을 쓴다. 리드 같은 경우는 Jazz Select 투하드나 3S 중에서 골라 쓴다. 투하드에서는 두꺼운 것을 고르는 편이고, 3S에서는 얇은 걸 고르는 편이다.그 중간이 있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그 중간이 없더라.트리오나 콰르텟이 아닌 재즈 오케스트라를 만들게 된 이유가 있나? 그리고 그것으로 구현하고 싶은 음악은 어떤 음악인가?군대에 제대하자마자 지금 코리안 재즈 오케스트라의 모체인 코리안 팝스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었다. 말이 팝스 오케스트라였지, 하는 음악은 다 빅밴드 음악이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때부터 빅밴드 음악을 많이 들어 와서 그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데 막상해보니 너무 재미있었다. 그렇게 팝스 오케스트라를 계속하다가 IMF즈음에 운영문제로 팀이 해체되었었는데, 2005년도에 세 사람이 모여서 다시 한 번 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우리가 모이게 된 이유는 달리 거창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닌 그냥 재미있어서다. 사실 사람이 많을수록 연주하기가 힘들다는 것은 공공연히 아는 사실일 것이다. 우린 스무 명이 넘는 빅밴드인데다가, 이 인원이 다 같이 300이 넘는 박자에 재즈를 연주해야 할 때도 있다. 그 과정은 실로 어렵다. 미친 듯이 연습하고 노력한 뒤에 모두의 합이 딱 맞았을 때의 그 희열은 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음악적으로는 기존에있던 곡들 외에도 여러 장르의 곡들과 창작곡들을 빅밴드에 맞게 구현해내고 싶은 욕심이 있다.많은 아티스트와 작업을 했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나?누구 한 사람 꼽기가 힘들다. 제일 충격적이었던 사람은 JK김동욱이었다. 라이브를 편하게 음반과 너무 똑같이 부르더라. 뒤에서 반주하는데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앨범에서 듣던 소리가 그대로 나오더라. 그런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최백호 님, 박강성 님, 양수경 님 또 나이드신 분들 중에서는 이미자 선생님이 그랬다. 이런 분들과 같이 공연을 할때는 뒤에서 들어도 즐겁다.이 많은 팀 중에 재즈파파맘마(J.P.M) 라는 팀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만들어진 팀인가?재즈파파맘마가 사실 말이 되는 뜻을 가진 단어가 아니다. 피아노 치는 친구도 말이 되는 이름을 지어야지 말도 안 되는 이름을 지어놨다고 그러길래 좀 말 안 되면 어떠냐고 너스레 떨었던 기억이 난다. J.P.M 같은 경우 처음에는 아이가 있는 사람들끼리 아이들을 위해서 곡 하나씩 써서 만나자라는 얘기에서 시작된 팀이다. 각자 본인의 아들 혹은 딸을 위해서 한 곡씩 만들어서 앨범을 만들었다.아이들이 실제로 본인들을 위한 자작곡을 좋아했나?우리 아이들은 정말 좋아했다. 곡 이름이 T-BROS였는데, 이게 너희형제를 위해 아빠가 만든 곡이야 라고 얘기했더니 엄청 좋아했었다. 멜로디에 심지어 모든 악기의 애드리브 파트까지 다 외워서 입으로 따라부르더라. 신기했었다.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음악적으로 가미된 요소가 있었나?아이들을 위해 쉽고 밝게 썼다. 재밌었던 건 네 명의 곡 색깔이 다 달랐다.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달라서도 있겠고, 아이들을 보며 떠올리는 음악적 영감도 다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나?최근에 제주도에 초청연주로 주현미 선생님과 코리안 재즈오케스트라와 조인 콘서트를 했었다. 우리 팀끼리 바람 쐬러 혹은 놀러 제주도에 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 최근 이 연주로 인해 소원을 풀었다. 제주도에 우리 팀이 다 같이 갔다는 그 자체가 뜻깊었다.슬럼프를 이기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나?연습밖에 없다. 주변에 누군가 내게 슬럼프가 왔다는 얘기를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연습하는 사람에게만 슬럼프가 온다고. 연습하지 않는자신에게 슬럼프가 온 지도 모른다. 오직 연습하는 사람만 슬럼프를 느낀다. 그럴 때는 더 연습해야 한다.레슨은 어떻게 하는 편인가?재즈 같은 경우는 일단 재즈 이론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배우는 화성학에 맞춰 테크닉 레슨을 진행한다. 가요 레슨 같은 경우 재즈 색소폰보다 밴딩이나 바이브레이션이 더 들어간다. 가요 색소폰을 쉽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아무 꾸밈음 없이 가슴을 후벼파는 멜로디를 분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런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몇 번이나 강조했듯이 기본기 연습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작곡한 곡 중에 애착이 가는 곡이 있는가?남진 선생님의 45주년 기념앨범에 수록된 <탱고는 탱고다>라는 곡이다. 일반적으로 작곡가들이 빠른 템포의 곡을 많이 쓰고, 가수들도 빠른 곡을 많이 받으려고 한다. 특히 성인가요 쪽이 더 그런 편인데, 그런것에 상관없이 좋은 성인가요를 만들어보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런 부분에서 탱고 리듬을 골랐다. 그 당시 곡을 들려 드렸을 때 남진 선생님이 지금껏 탱고 리듬을 부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하시더라. 보내드린지 10분 만에 연락을 받아 곡 작업을 하게 됐다. 남진 선생님이 최초로부른 탱고곡을 내가 드렸다는 부분에서 남다르게 생각한다.한국의 색소폰 음악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개선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외국 같은 경우는 아마추어의 수준이 거의 프로 바로 밑 정도까지 와 있는 편이다. 더 나아가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그 문화권이 많이 성장해 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근래에 아마추어 동호회가 짧은 시간에 급속도로 많아졌는데, 이로 인한 장점도 있지만, 그에따른 부작용도 따르는 것 같다. 검증되지 않은 개인지도 법이나 레슨법, 무분별한 정보 남발로 인한 후퇴가 우려된다.인간 엄지용으로서의 꿈과, 색소폰 연주자 엄지용으로서의 꿈이 궁금하다.인간 엄지용으로서의 꿈은 가족의 건강과 행복이다. 아내와 아이들과건강하고 밝게 살다가 가고 싶다. 색소포니스트로서의 꿈을 말하자니 옛 생각이 난다. 예전에 음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에는 우리나라 혹은 아시아 최고의 색소포니스트가 되겠다는 열망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런 꿈들이 나이가 들며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변해왔다. 지금은 좀 더 솔직하고, 과장되지 않은 플레이를 하고 싶다. 음을 빼고, 또 더 빼고, 더 다듬어 절제된 연주를 하고 싶다. 그렇게 매년 몇 장씩의 앨범으로 자취를 남길 수 있는 연주자가 되고 싶다. 글 | 안지인 기자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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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01
  • 기본에 충실한 뿌리깊은 나무 색소포니스트 '엄지용'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우리가 아는 수많은 음악가들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의 삶이 곧 음악이었다는 것. 여기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색소포니스트가있다. 그는 프로 색소포니스트로서의 삶에 책임을 진다고 말한다. 음악과 삶으로만 말하는 ‘진짜 프로’ 색소포니스트 엄지용을 만났다.​색소폰은 어떻게 처음 시작하게 되었나?어렸을 적에 TV 광고에 나오는 색소폰에 매료되었었다. 당시에는 그 악기의 이름이 색소폰인지도 몰랐다. 아버지께 그 광고에 나오는 악기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저거 사주세요.”라고 말했더니 아버지께서 악기를 사 오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사다 주신 악기는 색소폰이 아닌 클라리넷이었다. 그 당시 음대엔 색소폰 전공이 없었기 때문에 혹 음대에 갈 가능성을 두고 그렇게 판단하신 것 같다. 그렇게 맨 처음에는 클라리넷으로 먼저 시작하게 되었다. 해군 군악대를 제대할 때까지 클라리넷을 불다가 제대 후 색소폰으로 전향했다.클라리넷을 불다가 색소폰으로 전향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나?클라리넷과 색소폰은 연관성이 많이 있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부분이 도움이 더 많이 되었다. 어떤 음악이든 클래식을 기초로 하므로, 재즈나 가요를 습득하는 데 있어 훨씬 수월했었다. 주법 같은 경우 나의 계열은 O로 하는데, 이 O모양의 주법 같은 경우 독일 유학파 출신인 선생님에게 클라리넷 레슨을 받으며 배웠던 주법이었고 이것을 색소폰에 많이 응용했다.영향을 받은 아티스트가 있나?재즈 애드리브에 있어서는 맨해튼 재즈 퀸텟의 조지 영이라는 아티스트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고, 가요를 연주하는 데에 있어서는 김원용 색소폰실연자협회 회장님께 많이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이분의 연주를 많이 들었는데,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예전 우리나라 가요에 들어가는 색소폰 연주는 거의 이분이 하셨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도 저렇게 연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부분을 생각하면 리코딩을 할때 더 신중히 연주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김원용 님의 리코딩음반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처럼 앞으로 내 후배들이나 제자들도 그 영향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자신만의 특별한 연습법 같은 것이 있나?음정을 맞추는 것에 굉장히 신경을 쓰는 편이기 때문에, 나와 내 제자들은 꼭 악기에 진동 튜너를 껴 놓는다. 튜너를 악기에 늘 끼워 놓으면 음정에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다.음정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쓰는 이유가 있나?음악을 간단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종종 만나는데, 정말 가장 기본적인 것을 생각해야 한다. 기본적인 것으로는 음정과 박자를 꼽을 수 있는데, 음정과 박자를 안 지키고서는 음악을 할 수가 없다. 색소폰은 솔 포지션을 잡는다고 솔이, 라 포지션을 잡는다고 라가 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부분 때문에 밴딩이라는 매력적인 효과가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그냥 솔을 잡고 솔 맞겠지 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솔을 잡고 라를 낼 수도 있고, 라를 잡고 솔을 낼 수 있는 게 색소폰이라는 악기다. 그러므로 음정이 아주 예민하게 살아야 한다. 어렸을 적 일화로 24살 때 닥터레게라는 팀을 했었다. 당시에 지금 유명가수인 바비킴도 그 팀에 속해 있을 때다. 인생의 첫 리코딩 작업이었는데, 녹음실에 들어가서 엄청나게 고전했었다. 경험도 많이 없는 데다가 음정을 맞추면 박자가 안 맞고, 박자를 맞추면 음정이 안 맞았다. 그때는 너무 창피해서 녹음실에서 빨리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경험 때문에 내가 뭐가 부족한지, 무엇을 어떻게 연습해야 할지를 알았다. 그때부터는 늘 메트로놈을 달고 살았다.기본기 연습 중에 호흡법에 관한 얘기도 나왔었다. 호흡법을 위한 연습방법은 어떤 것이 있나?누운 상태에서 고개를 들고 아랫배 배꼽 밑에 두껍고 빳빳한 책을 올려 놓는다. 그 상태로 숨을 들이 마시면 책이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바람을 내쉬었을 때 책이 밑으로 떨어지지 않게 힘을 받쳐주는 게 이 호흡법의 핵심이다. 많이들 잘못 알고 있는 사실 중에 바람이 나가면서 배가 들어가는 게 아니냐는 얘기도 들었는데 잘못된 방법이다.호흡법에 관한 연구를 따로 했었나?그렇다. 학생일 때부터 호흡법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다. 성악을 하는사람이나 색소폰이 아닌 다른 관악기를 부는 사람들을 찾아가 호흡을 어떻게 하는지, 색소폰의 호흡법과는 어떻게 다른지, 그것을 어떻게 응용하면 좋을지를 쫓아다니면서 연구했다.테크닉연습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메트로놈을 틀어놓고 반음계 스케일을 하는 것이 도움이 많이 된다. 기본적으로 손가락이 돌아가야 테크닉을 구현할 수 있는데 손가락이 잘 돌아가려면 손에 힘이 빠져야 한다. 보통 프로들이 150-160 정도에 4연음을 한다면, 아마추어들은 120 정도까지 4연음이 나오게 만들면 될 것같다. 처음부터 빠르게 하면 절대 안 되고 메트로놈 60에 8분음표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16분음표로 점점 더 속도를 올리는 쪽으로 해야 한다.색소폰을 잘 불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도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색소폰을 분지 2년 차에서 3년 차 정도 된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많이한다. 색소폰을 분지 2년, 3년이 됐는데 왜 색소폰이 더 늘지를 않는지에 대한 고민도 많이들 토로하신다. 주로 그런 분들은 기본기가 안 되어있거나 혹은 기본기에 관한 얘기를 듣도 보도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음계를 배운 다음에 바로 곡을 연주한다든지 혹은 반주기에 커서만 따라서 부는 바람에 색소폰을 10년이나 불었는데 악보를 못 보는 사람도 더러 있더라. 처음 색소폰을 배우는 분들은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좋은레슨을 받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레슨이라는 것은 혼자서 연습하는 방법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앞서 말한 기본기와도 직결된다.그렇다면 초보자가 실력 증진을 위해서는 어떤 곡을 연습하는 게 좋은가?사실 초보자 같은 경우 3개월 동안은 곡을 하면 안 된다. 그 3개월 동안에는 롱톤, 기본발음, 스케일 같은 기초적인 것을 탄탄히 다져놓아야 하는 시기다. 롱톤 같은 경우만 해도 피아니시모 롱톤, 포르테 롱톤,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테로 가는 롱톤 등 종류가 많다. 이런 것들을 어느 정도 만들어놓고 난 후에는 아주 쉬운 가곡을 연주하는 것이 좋다. 1옥타브에서 1옥타브 반까지만 나올 수 있는 음역대의 느린 곡이 좋겠다.악기는 어떤 것을 쓰나?줄리어스 칼베스의 SX90R 빈티지 모델을 쓴다. 이 모델은 세게 불었을때 내 호흡을 백 퍼센트 받쳐주는 것을 느낀다. 볼륨도 큰 편이고, 이 모델만이 가진 독특하고 개성 있는 소리가 난다. 셀마가 아리따운 숙녀 같은 소리를 낸다면 줄리어스는 상남자의 소리가 난다.마우스피스와 리드는 어떤 것을 쓰나?재즈할 때는 부드럽고 깊은 소리를 내는 Vandoren v16을 쓰고 가요나 까랑까랑한 음악을 할 때에는 Blue jumbo java T97을 쓴다. 리드 같은 경우는 Jazz Select 투하드나 3S 중에서 골라 쓴다. 투하드에서는 두꺼운 것을 고르는 편이고, 3S에서는 얇은 걸 고르는 편이다.그 중간이 있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그 중간이 없더라.트리오나 콰르텟이 아닌 재즈 오케스트라를 만들게 된 이유가 있나? 그리고 그것으로 구현하고 싶은 음악은 어떤 음악인가?군대에 제대하자마자 지금 코리안 재즈 오케스트라의 모체인 코리안 팝스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었다. 말이 팝스 오케스트라였지, 하는 음악은 다 빅밴드 음악이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때부터 빅밴드 음악을 많이 들어 와서 그에 대한 로망이 있었는데 막상해보니 너무 재미있었다. 그렇게 팝스 오케스트라를 계속하다가 IMF즈음에 운영문제로 팀이 해체되었었는데, 2005년도에 세 사람이 모여서 다시 한 번 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 우리가 모이게 된 이유는 달리 거창한 무엇이 있어서가 아닌 그냥 재미있어서다. 사실 사람이 많을수록 연주하기가 힘들다는 것은 공공연히 아는 사실일 것이다. 우린 스무 명이 넘는 빅밴드인데다가, 이 인원이 다 같이 300이 넘는 박자에 재즈를 연주해야 할 때도 있다. 그 과정은 실로 어렵다. 미친 듯이 연습하고 노력한 뒤에 모두의 합이 딱 맞았을 때의 그 희열은 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음악적으로는 기존에있던 곡들 외에도 여러 장르의 곡들과 창작곡들을 빅밴드에 맞게 구현해내고 싶은 욕심이 있다.많은 아티스트와 작업을 했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나?누구 한 사람 꼽기가 힘들다. 제일 충격적이었던 사람은 JK김동욱이었다. 라이브를 편하게 음반과 너무 똑같이 부르더라. 뒤에서 반주하는데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앨범에서 듣던 소리가 그대로 나오더라. 그런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최백호 님, 박강성 님, 양수경 님 또 나이드신 분들 중에서는 이미자 선생님이 그랬다. 이런 분들과 같이 공연을 할때는 뒤에서 들어도 즐겁다.이 많은 팀 중에 재즈파파맘마(J.P.M) 라는 팀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만들어진 팀인가?재즈파파맘마가 사실 말이 되는 뜻을 가진 단어가 아니다. 피아노 치는 친구도 말이 되는 이름을 지어야지 말도 안 되는 이름을 지어놨다고 그러길래 좀 말 안 되면 어떠냐고 너스레 떨었던 기억이 난다. J.P.M 같은 경우 처음에는 아이가 있는 사람들끼리 아이들을 위해서 곡 하나씩 써서 만나자라는 얘기에서 시작된 팀이다. 각자 본인의 아들 혹은 딸을 위해서 한 곡씩 만들어서 앨범을 만들었다.아이들이 실제로 본인들을 위한 자작곡을 좋아했나?우리 아이들은 정말 좋아했다. 곡 이름이 T-BROS였는데, 이게 너희형제를 위해 아빠가 만든 곡이야 라고 얘기했더니 엄청 좋아했었다. 멜로디에 심지어 모든 악기의 애드리브 파트까지 다 외워서 입으로 따라부르더라. 신기했었다.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음악적으로 가미된 요소가 있었나?아이들을 위해 쉽고 밝게 썼다. 재밌었던 건 네 명의 곡 색깔이 다 달랐다. 각자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달라서도 있겠고, 아이들을 보며 떠올리는 음악적 영감도 다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나?최근에 제주도에 초청연주로 주현미 선생님과 코리안 재즈오케스트라와 조인 콘서트를 했었다. 우리 팀끼리 바람 쐬러 혹은 놀러 제주도에 갔으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했었는데, 최근 이 연주로 인해 소원을 풀었다. 제주도에 우리 팀이 다 같이 갔다는 그 자체가 뜻깊었다.슬럼프를 이기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나?연습밖에 없다. 주변에 누군가 내게 슬럼프가 왔다는 얘기를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연습하는 사람에게만 슬럼프가 온다고. 연습하지 않는자신에게 슬럼프가 온 지도 모른다. 오직 연습하는 사람만 슬럼프를 느낀다. 그럴 때는 더 연습해야 한다.레슨은 어떻게 하는 편인가?재즈 같은 경우는 일단 재즈 이론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배우는 화성학에 맞춰 테크닉 레슨을 진행한다. 가요 레슨 같은 경우 재즈 색소폰보다 밴딩이나 바이브레이션이 더 들어간다. 가요 색소폰을 쉽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아무 꾸밈음 없이 가슴을 후벼파는 멜로디를 분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런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몇 번이나 강조했듯이 기본기 연습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작곡한 곡 중에 애착이 가는 곡이 있는가?남진 선생님의 45주년 기념앨범에 수록된 <탱고는 탱고다>라는 곡이다. 일반적으로 작곡가들이 빠른 템포의 곡을 많이 쓰고, 가수들도 빠른 곡을 많이 받으려고 한다. 특히 성인가요 쪽이 더 그런 편인데, 그런것에 상관없이 좋은 성인가요를 만들어보고픈 생각이 들었다. 그런 부분에서 탱고 리듬을 골랐다. 그 당시 곡을 들려 드렸을 때 남진 선생님이 지금껏 탱고 리듬을 부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하시더라. 보내드린지 10분 만에 연락을 받아 곡 작업을 하게 됐다. 남진 선생님이 최초로부른 탱고곡을 내가 드렸다는 부분에서 남다르게 생각한다.한국의 색소폰 음악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어떤 개선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외국 같은 경우는 아마추어의 수준이 거의 프로 바로 밑 정도까지 와 있는 편이다. 더 나아가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그 문화권이 많이 성장해 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근래에 아마추어 동호회가 짧은 시간에 급속도로 많아졌는데, 이로 인한 장점도 있지만, 그에따른 부작용도 따르는 것 같다. 검증되지 않은 개인지도 법이나 레슨법, 무분별한 정보 남발로 인한 후퇴가 우려된다.인간 엄지용으로서의 꿈과, 색소폰 연주자 엄지용으로서의 꿈이 궁금하다.인간 엄지용으로서의 꿈은 가족의 건강과 행복이다. 아내와 아이들과건강하고 밝게 살다가 가고 싶다. 색소포니스트로서의 꿈을 말하자니 옛 생각이 난다. 예전에 음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에는 우리나라 혹은 아시아 최고의 색소포니스트가 되겠다는 열망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런 꿈들이 나이가 들며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변해왔다. 지금은 좀 더 솔직하고, 과장되지 않은 플레이를 하고 싶다. 음을 빼고, 또 더 빼고, 더 다듬어 절제된 연주를 하고 싶다. 그렇게 매년 몇 장씩의 앨범으로 자취를 남길 수 있는 연주자가 되고 싶다. 글 | 안지인 기자jii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5-01
  • 어둠속에서 전해져오는 빛의 소리, '소리울림색소폰동호회'
    헬렌 켈러는 이러한 명언을 남겼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것들은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인천 중구 어느 지하 연습실에서는 이 말의 가치를 삶으로 배우게 된 사람들이 모여서 색소폰을 분다. 여느 동호회와 다른 바 없이 쿵짝이는 기계 반주 소리가 문밖까지 전해져 왔다. 마음으로 보고 색소폰으로 노래하는 시각장애인 색소폰동호회 소리울림을 만났다. (박영숙 단장)색소폰은 언제부터 시작하게 되었나?어느 날 시각장애인 복지관에 컴퓨터를 배우러 갔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너무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게아닌가. 그래서 귀에 들리는 음을 더듬더듬 찾아갔다. 가보니 여기 계신 선배님들이 색소폰을 불고 계셨다. 그 당시 너무나 놀랐었다. 악기를 시각장애인이 불거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 계시던 김영철 선배님이 색소폰을 주며 소리가 나는지 한 번 불어보라더라. 그래서 불어보니 소리가 삑-하고 났다. 뭐소리가 제대로 났겠나? 그래도 선배님이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며 힘을 실어 주셨다. 악기가 당장 없었기에 선배님들이 불던 악기로 그때부터 귀동냥으로 배우기 시작했다.악기를 배우는 과정의 어떤 부분이 힘들었나?일단 우리는 악보를 볼 수 없다. 선천적 시각장애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점자 악보를 배우지만 우리같이 일상적인 삶을 살다가 중도 실명을 하게 된 사람들은 점자 악보를 익히기 어렵다. 점자가 된다 한들 악보를 볼 정도는 안 된다. 그래서 악보를 테이프나 녹음기에 녹취하여 음을 하나하나 익힌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래도 일반인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동호회를 하며 힘든 부분이나 난관이 있었다면?아무래도 우리끼리만 이 동호회를 발전시키고 끌고 나가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지역적인 부분이나 시각장애인의 이동권 문제 때문에 나가신 분들도 있고…. 여러 가지로 명맥을 이어가기 힘든 난관들이 많았다.스스로에게 색소폰은 어떤 의미인가?색소폰은 나의 애인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하다. 색소폰을 불면서 위안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색소폰이 자유를 주기도 한다. 우리는 어딘가로 자유롭게 갈 수 없는 답답함을 가지고 항상 살아가는데 그런 부분에서 도움이 많이 됐다. (김영철 회원)소리울림 초창기 회원이라는 얘길 들었는데, 소리울림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원래 하고 있던 프로그램을 그만하게 되어 당장 연습할 공간이 사라졌다. 그러던 중에 박 단장님이 사무실을 하나 제의하면서 그동안 같이 색소폰을 불었던 회원님들과 같이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게 되었다. 그곳이 바로 지금 연습하고 있는 이 장소이다. 같이 연습하고 모이다 보니 이름도 만들게 되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정안인이어서 색소폰을 배우는 데에 힘든 점이 있었다면?처음에 색소폰을 시작할 때에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안 좋은 점이 있다. 소리를 내기 위해 호흡을 세게 불어야 하는데 정안인이다 보니 안압이 와서 머리가 아프다. 호흡을 늘리고 안정을 찾는 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또 한 가지는 시각장애인에게 맞는 교습을 받기가 힘들었다는 점이다. 지금이야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그분의 커리큘럼대로 우리가 수업을 받고 있지만, 그 이전에 다녔던 학원의 원장님이 워낙 프로인 분이라 나 같은 정안인은 그분께 배우는 것이 처음에는 버거웠었다.​다른 시각장애인들에게 색소폰을 추천할만한 이유가 있다면 어떤 점들을 꼽을 수 있을까?일단은 편리성을 들 수 있다. 손가락의 위치와 간격만 잘 습득하면 된다. 시각장애인들은 손가락이 예민한 편이라 그런 부분에선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운동량이 적다 보니 폐활량이 많이 떨어지는데 색소폰으로 인해서 폐활량도 늘릴 수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색소폰을 불면서 성격이 차분해졌다. 원래 성격이 급한 편이었는데, 반주기에 맞춰 색소폰을 불려니 기다림이라는 것이 절로 배워지더라.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에도 색소폰이 제격이다. 지금은 장애인 차별 금지법도 있고 예전보다 일반인과의 거리를 많이 좁혔다지만 그래도 아직 장애인을 보는 시각에 틈이 있다. 가뜩 이나 장애까지 있는 사람이 어디 가서 소리 지르고 그러면, 남들이 볼 때 중증장애인인 줄 안다.(웃음) 그렇게 스트레스가 쌓일 때는 색소폰을 세게 분다. 그러면 스트레스가 풀린다.색소폰을 시작하려는 정안인 혹은 일반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미리 겁먹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나 같은 사람도 하고 있는데, 용기를 내면 못할 것이 없다. 나는 안마사로서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색소폰을 연습한다. 안마로 사람을 치료하는 일은 생각보다 고된 일이다. 나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 음악이 힘이 되었으면 한다. 그것이 내가 색소폰을 부는 이유이기도 하다 (차성회 회원)색소폰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나?봉사하는 것이 좋아 여기저기서 연주를 많이 하게 된다. 요즘은 요양원에서 트로트나 가요를 많이 연주하는데 어르신들이 정말 많이 좋아해 주신다. 같이 손뼉쳐 주실 때마다 옛 추억을 선물해 드린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다. 이런 것이 색소폰 연주의 묘미가 아닐까 하고 느끼게 된다.색소폰에 대한 개인적인 목표나 바람이 있다면?곡을 조금씩 외워서 하다 보니, 지금 150곡 정도는 머릿속에 있는 것 같다. 올해는 200곡까지 외우는게 목표다. 그러면 어딜 가든 색소폰 하나로 다양하게 연주할 수 있다. 그렇게 80세 넘어서까지 나만의 색소폰을 완성시키고 싶다. 하얀 백발을 가진 멋진 노신사가 색소폰을 부는 모습…. 생각만 해도멋지지 않나?정안인들만의 특별한 색소폰 학습능력이 있다면?외우는 걸 잘하게 된다. 어느 단체 공연 행사 같은 곳에서 다른 팀과 공연을 하게 되면 가끔대가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때가 있다. 그런 상황에 우리는 강한 편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색소폰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어려서는 눈이 나빠지게 된 것이 하늘의 탓, 조상 탓인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구를원망하는 것이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40세 넘은 나이에 색소폰을 시작하게 되었다. (박각규 선생님)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레슨 방법이 있나?레슨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입으로 계명을 박자에 맞춰 불러주면, 회원분들이 녹음기로 녹음해서 듣고 연습하신다. 어떻게 소리울림 동호회에 선생님으로 오게 되었나?인천에서 동호회를 운영하다 보니, 인연이 닿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색소폰을 하며 즐거워하시고, 배우려는 열정에 반해 급료에 관계없이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다.시각장애인들을 레슨할 때 힘들었다거나, 혹은 실수했던 부분은 없었나?처음엔 실수도 많이 했지만 의외로 생각했던 것보단 힘들지 않았다. 비장애인분들 중에서도 악보를 못 보시는 분들이 많다. 그런 분들을 대상으로 지금처럼 계명으로 수업을 진행했었다. 수업방식 자체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의 어려운 점은 없었다. 다만 이런종류의 실수는 있었다. 올림픽 시즌이었었는데, 축구를 보고 다음 날 뵙자마자 축구 보셨냐고 말해놓고 아차 싶었다. 이런 종류의 실수를 몇 번 했던 것 같다.자신만의 교육관이 있나?‘쉽고 빠르게ʼ 이다. 색소폰을 배우는 연령대가 주로 40대 이상이다 보니 최대한 재밌고 효율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욕심도 많이 냈었다. 소리울림 동호회 같은 경우, 이분들을 열심히 가르쳐서 연주력을 많이 올린 다음 국내 최고의 시각장애인 색소폰 동호회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래서 3성부로 편곡해 앙상블도 하고, 이것저것 주문했던 게 많았다.시각장애인을 포함해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들 또한 색소폰을 쉽게 접하려면 어떤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지자체의 투자 및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연습실을 가지지 못한 장애인 동호회가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장애인을 위한 레슨 프로그램과 강사도 많아졌으면 한다. 이분들은 일반 사람처럼 악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없으면 색소폰을 배울 수 없다. 그런 현실이 씁쓸하다. 그들에게도 배우고 즐길 권리가 당연히 있다. 그들이 우리처럼 똑같이 누릴 수 있는 사회의 배려가 지금보다 더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시련을 겪는다. 또 어쩌면 아직 그 시련과 만나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 시련과 맞닥뜨렸을 때 우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소리울림 동호회원들처럼 색소폰에 희망을 담아 노래할 수 있을까? 원망을 넘어선 겸허함과 또 그것을 넘어서 즐기게 되는 과정 그 자체가 예술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잔잔한 울림을 응원한다. 글 | 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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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01
  • 어둠속에서 전해져오는 빛의 소리, '소리울림색소폰동호회'
    헬렌 켈러는 이러한 명언을 남겼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그것들은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인천 중구 어느 지하 연습실에서는 이 말의 가치를 삶으로 배우게 된 사람들이 모여서 색소폰을 분다. 여느 동호회와 다른 바 없이 쿵짝이는 기계 반주 소리가 문밖까지 전해져 왔다. 마음으로 보고 색소폰으로 노래하는 시각장애인 색소폰동호회 소리울림을 만났다. (박영숙 단장)색소폰은 언제부터 시작하게 되었나?어느 날 시각장애인 복지관에 컴퓨터를 배우러 갔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너무 아름다운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게아닌가. 그래서 귀에 들리는 음을 더듬더듬 찾아갔다. 가보니 여기 계신 선배님들이 색소폰을 불고 계셨다. 그 당시 너무나 놀랐었다. 악기를 시각장애인이 불거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거기 계시던 김영철 선배님이 색소폰을 주며 소리가 나는지 한 번 불어보라더라. 그래서 불어보니 소리가 삑-하고 났다. 뭐소리가 제대로 났겠나? 그래도 선배님이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며 힘을 실어 주셨다. 악기가 당장 없었기에 선배님들이 불던 악기로 그때부터 귀동냥으로 배우기 시작했다.악기를 배우는 과정의 어떤 부분이 힘들었나?일단 우리는 악보를 볼 수 없다. 선천적 시각장애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점자 악보를 배우지만 우리같이 일상적인 삶을 살다가 중도 실명을 하게 된 사람들은 점자 악보를 익히기 어렵다. 점자가 된다 한들 악보를 볼 정도는 안 된다. 그래서 악보를 테이프나 녹음기에 녹취하여 음을 하나하나 익힌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래도 일반인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동호회를 하며 힘든 부분이나 난관이 있었다면?아무래도 우리끼리만 이 동호회를 발전시키고 끌고 나가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지역적인 부분이나 시각장애인의 이동권 문제 때문에 나가신 분들도 있고…. 여러 가지로 명맥을 이어가기 힘든 난관들이 많았다.스스로에게 색소폰은 어떤 의미인가?색소폰은 나의 애인이기도 하고 친구이기도 하다. 색소폰을 불면서 위안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색소폰이 자유를 주기도 한다. 우리는 어딘가로 자유롭게 갈 수 없는 답답함을 가지고 항상 살아가는데 그런 부분에서 도움이 많이 됐다. (김영철 회원)소리울림 초창기 회원이라는 얘길 들었는데, 소리울림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원래 하고 있던 프로그램을 그만하게 되어 당장 연습할 공간이 사라졌다. 그러던 중에 박 단장님이 사무실을 하나 제의하면서 그동안 같이 색소폰을 불었던 회원님들과 같이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게 되었다. 그곳이 바로 지금 연습하고 있는 이 장소이다. 같이 연습하고 모이다 보니 이름도 만들게 되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정안인이어서 색소폰을 배우는 데에 힘든 점이 있었다면?처음에 색소폰을 시작할 때에 시각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안 좋은 점이 있다. 소리를 내기 위해 호흡을 세게 불어야 하는데 정안인이다 보니 안압이 와서 머리가 아프다. 호흡을 늘리고 안정을 찾는 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또 한 가지는 시각장애인에게 맞는 교습을 받기가 힘들었다는 점이다. 지금이야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그분의 커리큘럼대로 우리가 수업을 받고 있지만, 그 이전에 다녔던 학원의 원장님이 워낙 프로인 분이라 나 같은 정안인은 그분께 배우는 것이 처음에는 버거웠었다.​다른 시각장애인들에게 색소폰을 추천할만한 이유가 있다면 어떤 점들을 꼽을 수 있을까?일단은 편리성을 들 수 있다. 손가락의 위치와 간격만 잘 습득하면 된다. 시각장애인들은 손가락이 예민한 편이라 그런 부분에선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운동량이 적다 보니 폐활량이 많이 떨어지는데 색소폰으로 인해서 폐활량도 늘릴 수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색소폰을 불면서 성격이 차분해졌다. 원래 성격이 급한 편이었는데, 반주기에 맞춰 색소폰을 불려니 기다림이라는 것이 절로 배워지더라.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에도 색소폰이 제격이다. 지금은 장애인 차별 금지법도 있고 예전보다 일반인과의 거리를 많이 좁혔다지만 그래도 아직 장애인을 보는 시각에 틈이 있다. 가뜩 이나 장애까지 있는 사람이 어디 가서 소리 지르고 그러면, 남들이 볼 때 중증장애인인 줄 안다.(웃음) 그렇게 스트레스가 쌓일 때는 색소폰을 세게 분다. 그러면 스트레스가 풀린다.색소폰을 시작하려는 정안인 혹은 일반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미리 겁먹지 말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나 같은 사람도 하고 있는데, 용기를 내면 못할 것이 없다. 나는 안마사로서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부터 색소폰을 연습한다. 안마로 사람을 치료하는 일은 생각보다 고된 일이다. 나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 음악이 힘이 되었으면 한다. 그것이 내가 색소폰을 부는 이유이기도 하다 (차성회 회원)색소폰의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나?봉사하는 것이 좋아 여기저기서 연주를 많이 하게 된다. 요즘은 요양원에서 트로트나 가요를 많이 연주하는데 어르신들이 정말 많이 좋아해 주신다. 같이 손뼉쳐 주실 때마다 옛 추억을 선물해 드린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다. 이런 것이 색소폰 연주의 묘미가 아닐까 하고 느끼게 된다.색소폰에 대한 개인적인 목표나 바람이 있다면?곡을 조금씩 외워서 하다 보니, 지금 150곡 정도는 머릿속에 있는 것 같다. 올해는 200곡까지 외우는게 목표다. 그러면 어딜 가든 색소폰 하나로 다양하게 연주할 수 있다. 그렇게 80세 넘어서까지 나만의 색소폰을 완성시키고 싶다. 하얀 백발을 가진 멋진 노신사가 색소폰을 부는 모습…. 생각만 해도멋지지 않나?정안인들만의 특별한 색소폰 학습능력이 있다면?외우는 걸 잘하게 된다. 어느 단체 공연 행사 같은 곳에서 다른 팀과 공연을 하게 되면 가끔대가 준비가 안 되어 있을 때가 있다. 그런 상황에 우리는 강한 편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색소폰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어려서는 눈이 나빠지게 된 것이 하늘의 탓, 조상 탓인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구를원망하는 것이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40세 넘은 나이에 색소폰을 시작하게 되었다. (박각규 선생님)시각장애인들을 위한 레슨 방법이 있나?레슨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입으로 계명을 박자에 맞춰 불러주면, 회원분들이 녹음기로 녹음해서 듣고 연습하신다. 어떻게 소리울림 동호회에 선생님으로 오게 되었나?인천에서 동호회를 운영하다 보니, 인연이 닿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색소폰을 하며 즐거워하시고, 배우려는 열정에 반해 급료에 관계없이 봉사하는 마음으로 하고 있다.시각장애인들을 레슨할 때 힘들었다거나, 혹은 실수했던 부분은 없었나?처음엔 실수도 많이 했지만 의외로 생각했던 것보단 힘들지 않았다. 비장애인분들 중에서도 악보를 못 보시는 분들이 많다. 그런 분들을 대상으로 지금처럼 계명으로 수업을 진행했었다. 수업방식 자체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의 어려운 점은 없었다. 다만 이런종류의 실수는 있었다. 올림픽 시즌이었었는데, 축구를 보고 다음 날 뵙자마자 축구 보셨냐고 말해놓고 아차 싶었다. 이런 종류의 실수를 몇 번 했던 것 같다.자신만의 교육관이 있나?‘쉽고 빠르게ʼ 이다. 색소폰을 배우는 연령대가 주로 40대 이상이다 보니 최대한 재밌고 효율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욕심도 많이 냈었다. 소리울림 동호회 같은 경우, 이분들을 열심히 가르쳐서 연주력을 많이 올린 다음 국내 최고의 시각장애인 색소폰 동호회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래서 3성부로 편곡해 앙상블도 하고, 이것저것 주문했던 게 많았다.시각장애인을 포함해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들 또한 색소폰을 쉽게 접하려면 어떤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지자체의 투자 및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연습실을 가지지 못한 장애인 동호회가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장애인을 위한 레슨 프로그램과 강사도 많아졌으면 한다. 이분들은 일반 사람처럼 악보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없으면 색소폰을 배울 수 없다. 그런 현실이 씁쓸하다. 그들에게도 배우고 즐길 권리가 당연히 있다. 그들이 우리처럼 똑같이 누릴 수 있는 사회의 배려가 지금보다 더 좋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시련을 겪는다. 또 어쩌면 아직 그 시련과 만나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 시련과 맞닥뜨렸을 때 우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소리울림 동호회원들처럼 색소폰에 희망을 담아 노래할 수 있을까? 원망을 넘어선 겸허함과 또 그것을 넘어서 즐기게 되는 과정 그 자체가 예술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잔잔한 울림을 응원한다. 글 | 안지인 기자 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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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01
  • [SPECIAL] 미래의 음악과 시장을 선도하는 국제무역박람회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2018 독일 프랑크푸르트 악기박람회>(Frankfrut MUSIK MESSE)가 4월 11일(수)~14일(토)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3박 4일 동안 개최되었다. 악기, 악보, 음악제작 및 마케팅을 위한 국제무역박람회인 프랑크푸르트 뮤직메세(Frankfrut MUSIK MESSE)는 유럽에서 열리는 박람회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며 그 역사 또한 오래되어 이미 시장 내에서는 저명한 박람회로 손꼽힌다. 나아가 음악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축제의 장으로 자리 잡혀있으며, 무역 및 개인 방문객뿐만 아니라 소매 업체와 유통 업체에 대한 이벤트의 폭넓은스펙트럼, 지역, 국가 또는 국제 네트워킹을 위한 견고한 기반을 제공한다.올해 2018년에는 52개국이 참가하였으며, 1일권 20유로, 시즌권 60유료, 그리고 15유로(주말요금)로 일반인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 박람회 초반에는 대중교통 파업으로 인한 800편의항공편 취소라는 악재가 있었지만 152개국에서 온 90,000명이넘는 관람객 방문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약 250여 개의 부스에서 악기, 음악 장비, 시스템, 소품 등이 전시되었고, 신제품 소개 및 수출입 상담 등의 악기와 관련된 거의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며, 삼익악기, 영창악기, 삼우악기,일본의 야마하, 야나기사와악기, 미야자와, 독일 자일러피아노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회사들에서부터 소규모 회사들까지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었다. 또한 방문자들에게 워크숍 및 새로운 제품 시연 제공과 더불어 예술가들의 콘서트, 사인회, 이벤트 등 다양한 행사로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장이 되었다. 도움말·사진 | 박광석 해오라기악기사 대표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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