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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AXOPHONE COLUMN] 알고 연주하는 색소폰 암부슈어(Embouchure)
    색소폰을 연주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말. “모차르트(Mozart)의 곡은 연주만 가능하다면 완성도가 매우 높다.”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환상적인 레시피(recipe)는 누구나 끓이기만 하면 완성할 수 있는 라면처럼 오히려 쉽다. 색소폰을 훌륭하게 연주를 하기위한 레시피. 바로 암부슈어이다. Step by Step: 훌륭한 레시피를 위한 단계레시피, 즉 조리법 또는 비법이라고 말하는 것이 색소폰에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편곡이 좋아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실력 있는 편곡자의곡을 합주하면 만족도가 높은 연주를 기대할 수 있다.필자가 이제 겨우 편곡을 배우는 사람의 곡을 연주하느라 고생을 해보았기에, 천재가 만든 곡의 완성도에 동의한다. 반면, 유명 셰프는 아니지만 다양함으로 공감을불러오는 레시피로 유명해진 명사가 있다. 요리하는 사람들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많은 사람의 입맛을 사로 잡는다는 점에서 그의 레시피는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는 한다.색소폰 입문자에게 있어서 좋은 레시피는 빠르고 쉬운완성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독학으로 고생을 해보았다면 레시피의 중요성을 조금은 알 것이다. 누군가 나를이끌어 주었다면 조금 덜 고생을 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이것저것 해보고 다양한 방법을 주워듣고 시도했지만, 오히려 온 산을 파고도 금은 커녕작은 돌도 줍지 못하는 모습이다. 새해를 시작하고 작심삼일을 잘 넘긴 사람들에게 월간색소폰이 전해줄 수 있는 선물이 있다면 알고 연주할 수 있도록 레시피를 알려주는 것이다.가장 좋은 레시피는 순차적인 단계만 거치면 완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레시피를 위해서 전문 강사들은 많은 노력을 한다. 서로 지닌 비법이 다를 수 있지만, 결국 공통적인 레시피는 바로 가장 쉽고 편안한 연주를 하기 위한 순서는 같다는 것이다. 엄청난 것이 숨어 있다기보다는 편안하게 소리를 낼 방법을 잘 설명하는 것. 즉 누가 끓여도 망치는 일이 거의 없는 라면의 레시피처럼 말이다.이달의 ‘알고 연주하는 색소폰’ 레시피는 이 단계의 중요성을 중심으로 시작한다. 그 순서만 잘 따라서 연습한다면 간단하게 맛있는 라면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나도 완성할 수 있다는 성취감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연주감각을 만나게 될 것이다.색소폰 연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단 한 가지로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호흡, 주법, 기교, 감성 그리고 악보 습득력 정도에 동의할 것이다. 알고 연주한다는 표현에서 무엇을 알고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쉽게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색소폰을 연주하는 사람들에게 ‘텅잉(tonguing)’을 물어보면 쉽고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이를 통해서 어떤 단어를 분명히 아는것이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데에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예를 들어서. 텅잉은 음과 음을 명확히 구분하기 위함이고, 아이가 말을 배우면서 “엄마” “아빠”를 하듯 단어를 구분해서 발음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때로는 흐르는 물을 손으로 가르는 것과텅잉을 비교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설명에 앞서 ‘명확한 소리의 구분을 위한 혀 사용’ 정도로 정의를 내릴 수 있어야 하겠다.색소폰과 입술의 상관관계: 암부슈어(Embouchure)암부슈어(Embouchure)라는 용어를 정의해 보라고 한다면 가능한가?‘주법’이라는 대답이 가장 먼저 나올 것 같다. 그리고 ‘입모양’이라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암부슈어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리드의 진동을 호흡으로 다스리는 색소폰은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고 연주하기에 그적정한 힘의 조절이 연주 능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악기와 마우스피스 심지어 리드까지 같다고 하더라도 연주자에 따라서 서로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는 이유는 호흡의 다스림도 원인이지만, 마우스피스를 무는 암부슈어의 차이에서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입문자에게 첫 주법, 입모양은 클래식 전공자의 ‘싱글 립(SingleLip)’, 그러니까 아랫입술로 아랫니를 말아서 소리 내는 방식의 암부슈어가 가장 일반적이다. 하지만 통증에 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보니 ‘팻 립(Fat Lip)’처럼 아랫입술에 크게 힘을 주지 않는 형태의 주법에 대한 선호도 높다. 하지만 클래식과 팝, 재즈 등 장르로만 주법을 구분하기에 앞서서 ‘안정감’에 대한 분명한 감각을 먼저 알고 연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때에 따라서는 클래식 연주자도 팻 립에 가까운 싱글 립을 사용하기도 한다.호흡의 통로에서 진동체 역할을 하는 마우스피스와 리드를 다스리는 감각은 매우 섬세하다. 작은 원인에서 크게 달라지는 소리로 나타난다. 앞서 이야기했던 ‘안정감’의 차이를 ‘내공의 힘’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이유이다. 연주자는 한결같은 소리를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원하는 감성을 조절하는 능력을 지닐 때 연주의 완성과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 장소와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안정적인 연주를 만드는 감각이 바로 마우스피스를 무는 적정한 힘이며, 그것이 암부슈어이다.배의 노를 어떻게 저어야 하는지에 앞서서 노를 견고하게 잡는 것이 기본이다. 야구선수가 홈런을 치기에 앞서 적정한 손목의 힘으로 배트를 잡는 것은 매우 기본적인 부분이다. 골프 선수의 그립잡는 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색소폰을 배우는 사람들을 관찰하면 마우스피스를 무는 적정한 힘에 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게 물어야 하는지, 가볍게 물어야 하는지가 아니다. 적정함이란 상당히 중요한 감각이다. 때로는그 훈련을 시간이 해결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처음 배움의 단계에 이상적인 마우스피스 물기를 배울 경우 가장 쉬운 레시피 한 가지를 얻을 수 있다.편안한 나의 모습: 암부슈어(Embouchure)의 시작보이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는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지 않기 위함이다.암부슈어의 첫 레시피는 거울을 보는 것이다. 거울 속 마우스피스를 무는 입이 편안하다는 것은 힘의 적정한 나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가끔 아래턱을 당기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싱글 립이라고 하더라도 통증이 덜 생긴다는 점과 음정의 변화에 있어서 아랫입술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알기 때문이다. 또한, 턱의 당김으로 호흡 사용의 원활함을 지도하는 강사는 잘 알고있다.거울 속, 보기 좋은 모습처럼 평소 자신이 편안하게 입을 다물고 있을 때와 같은 마우스피스 물기를 만들자. 볼이 나오는 경우도 예방할 수 있다. 순환 호흡 때문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도 있지만 입문자의 볼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다. 양쪽 볼이 나온 상태에서는 늘어지는 소리가 도드라지게 나타나기도 한다. 입문 과정에서 가능하다면 평소 편안한 표정이 암부슈어에도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잊지 말자.편안한 모습을 거울을 통해서 완성했다면, 느껴지는 통증을 줄이는 법에 집중해야 한다. 대부분의 성인은 치열의 고르지 못함과 날카롭게 변해버린 아랫니라고 말한다. 일부는 사실이다. 하지만 리드와 피스의 적절한 사이즈를 선택하지 못함에서 오는 누르는 현상도 원인이다.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야구 배트를 너무 세게 잡아서 손에서 피가 나는 것이다. 이 무서운 상황이 입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색소폰을 연주하는 순간은 즐거움이 아닐 수 있다. 그래서 암부슈어의 가장 중요한 기본을 ‘보기 좋고, 편안하게’라고 하는 것이다.색소폰의 아름다운 소리는 편안한 암부슈어에서 시작된다. 몸에힘을 빼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어깨를 낮추는 것만으로도 호흡에 좋은 영향을 준다는 사실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우스피스를 무는 적정한 힘을 모르고 있다면 쉽게 힘을 빼는 것과 호흡의 안정감도 기대하기 어렵다.안다는 것: 곧 생각하는 것알고 연습하는 것은 ‘생각하면서 연습하기’라는 말과도 통한다. 항상 ‘나의 암부슈어는 적절한 모습과 적정한 힘의 안배를 알고 있는가’ 생각하면서 호흡의 다스림으로 이어가려고 한다면 좋은 소리의완성을 위한 좋은 레시피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분명한내 것이 될 수 있도록 알아가려고 노력하기를 바란다. 또한 마우스피스와 리드의 조합이 잘 맞아야 편안한 암부슈어를 끌어낼 수 있다. 그 부분에 관해서도 곧 다루기로 한다. (월간색소폰)송인권 칼럼니스트= suyeo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7-01
  • [SAXOPHONE COLUMN] 알고 연주하는 색소폰 암부슈어(Embouchure)
    색소폰을 연주하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말. “모차르트(Mozart)의 곡은 연주만 가능하다면 완성도가 매우 높다.”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환상적인 레시피(recipe)는 누구나 끓이기만 하면 완성할 수 있는 라면처럼 오히려 쉽다. 색소폰을 훌륭하게 연주를 하기위한 레시피. 바로 암부슈어이다. Step by Step: 훌륭한 레시피를 위한 단계레시피, 즉 조리법 또는 비법이라고 말하는 것이 색소폰에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편곡이 좋아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보았을 것이다. 실력 있는 편곡자의곡을 합주하면 만족도가 높은 연주를 기대할 수 있다.필자가 이제 겨우 편곡을 배우는 사람의 곡을 연주하느라 고생을 해보았기에, 천재가 만든 곡의 완성도에 동의한다. 반면, 유명 셰프는 아니지만 다양함으로 공감을불러오는 레시피로 유명해진 명사가 있다. 요리하는 사람들이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많은 사람의 입맛을 사로 잡는다는 점에서 그의 레시피는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는 한다.색소폰 입문자에게 있어서 좋은 레시피는 빠르고 쉬운완성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독학으로 고생을 해보았다면 레시피의 중요성을 조금은 알 것이다. 누군가 나를이끌어 주었다면 조금 덜 고생을 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이것저것 해보고 다양한 방법을 주워듣고 시도했지만, 오히려 온 산을 파고도 금은 커녕작은 돌도 줍지 못하는 모습이다. 새해를 시작하고 작심삼일을 잘 넘긴 사람들에게 월간색소폰이 전해줄 수 있는 선물이 있다면 알고 연주할 수 있도록 레시피를 알려주는 것이다.가장 좋은 레시피는 순차적인 단계만 거치면 완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 레시피를 위해서 전문 강사들은 많은 노력을 한다. 서로 지닌 비법이 다를 수 있지만, 결국 공통적인 레시피는 바로 가장 쉽고 편안한 연주를 하기 위한 순서는 같다는 것이다. 엄청난 것이 숨어 있다기보다는 편안하게 소리를 낼 방법을 잘 설명하는 것. 즉 누가 끓여도 망치는 일이 거의 없는 라면의 레시피처럼 말이다.이달의 ‘알고 연주하는 색소폰’ 레시피는 이 단계의 중요성을 중심으로 시작한다. 그 순서만 잘 따라서 연습한다면 간단하게 맛있는 라면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나도 완성할 수 있다는 성취감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연주감각을 만나게 될 것이다.색소폰 연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단 한 가지로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호흡, 주법, 기교, 감성 그리고 악보 습득력 정도에 동의할 것이다. 알고 연주한다는 표현에서 무엇을 알고있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쉽게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색소폰을 연주하는 사람들에게 ‘텅잉(tonguing)’을 물어보면 쉽고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이를 통해서 어떤 단어를 분명히 아는것이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데에 중요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예를 들어서. 텅잉은 음과 음을 명확히 구분하기 위함이고, 아이가 말을 배우면서 “엄마” “아빠”를 하듯 단어를 구분해서 발음하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때로는 흐르는 물을 손으로 가르는 것과텅잉을 비교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설명에 앞서 ‘명확한 소리의 구분을 위한 혀 사용’ 정도로 정의를 내릴 수 있어야 하겠다.색소폰과 입술의 상관관계: 암부슈어(Embouchure)암부슈어(Embouchure)라는 용어를 정의해 보라고 한다면 가능한가?‘주법’이라는 대답이 가장 먼저 나올 것 같다. 그리고 ‘입모양’이라고 말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암부슈어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시작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리드의 진동을 호흡으로 다스리는 색소폰은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고 연주하기에 그적정한 힘의 조절이 연주 능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악기와 마우스피스 심지어 리드까지 같다고 하더라도 연주자에 따라서 서로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는 이유는 호흡의 다스림도 원인이지만, 마우스피스를 무는 암부슈어의 차이에서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입문자에게 첫 주법, 입모양은 클래식 전공자의 ‘싱글 립(SingleLip)’, 그러니까 아랫입술로 아랫니를 말아서 소리 내는 방식의 암부슈어가 가장 일반적이다. 하지만 통증에 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보니 ‘팻 립(Fat Lip)’처럼 아랫입술에 크게 힘을 주지 않는 형태의 주법에 대한 선호도 높다. 하지만 클래식과 팝, 재즈 등 장르로만 주법을 구분하기에 앞서서 ‘안정감’에 대한 분명한 감각을 먼저 알고 연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때에 따라서는 클래식 연주자도 팻 립에 가까운 싱글 립을 사용하기도 한다.호흡의 통로에서 진동체 역할을 하는 마우스피스와 리드를 다스리는 감각은 매우 섬세하다. 작은 원인에서 크게 달라지는 소리로 나타난다. 앞서 이야기했던 ‘안정감’의 차이를 ‘내공의 힘’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이유이다. 연주자는 한결같은 소리를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원하는 감성을 조절하는 능력을 지닐 때 연주의 완성과 만족도를 높일 수 있다. 장소와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안정적인 연주를 만드는 감각이 바로 마우스피스를 무는 적정한 힘이며, 그것이 암부슈어이다.배의 노를 어떻게 저어야 하는지에 앞서서 노를 견고하게 잡는 것이 기본이다. 야구선수가 홈런을 치기에 앞서 적정한 손목의 힘으로 배트를 잡는 것은 매우 기본적인 부분이다. 골프 선수의 그립잡는 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색소폰을 배우는 사람들을 관찰하면 마우스피스를 무는 적정한 힘에 관해서 깊이 생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세게 물어야 하는지, 가볍게 물어야 하는지가 아니다. 적정함이란 상당히 중요한 감각이다. 때로는그 훈련을 시간이 해결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처음 배움의 단계에 이상적인 마우스피스 물기를 배울 경우 가장 쉬운 레시피 한 가지를 얻을 수 있다.편안한 나의 모습: 암부슈어(Embouchure)의 시작보이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는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지 않기 위함이다.암부슈어의 첫 레시피는 거울을 보는 것이다. 거울 속 마우스피스를 무는 입이 편안하다는 것은 힘의 적정한 나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가끔 아래턱을 당기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싱글 립이라고 하더라도 통증이 덜 생긴다는 점과 음정의 변화에 있어서 아랫입술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알기 때문이다. 또한, 턱의 당김으로 호흡 사용의 원활함을 지도하는 강사는 잘 알고있다.거울 속, 보기 좋은 모습처럼 평소 자신이 편안하게 입을 다물고 있을 때와 같은 마우스피스 물기를 만들자. 볼이 나오는 경우도 예방할 수 있다. 순환 호흡 때문이라고 강조하는 사람도 있지만 입문자의 볼은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이다. 양쪽 볼이 나온 상태에서는 늘어지는 소리가 도드라지게 나타나기도 한다. 입문 과정에서 가능하다면 평소 편안한 표정이 암부슈어에도 나타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잊지 말자.편안한 모습을 거울을 통해서 완성했다면, 느껴지는 통증을 줄이는 법에 집중해야 한다. 대부분의 성인은 치열의 고르지 못함과 날카롭게 변해버린 아랫니라고 말한다. 일부는 사실이다. 하지만 리드와 피스의 적절한 사이즈를 선택하지 못함에서 오는 누르는 현상도 원인이다. 과장해서 이야기하면 야구 배트를 너무 세게 잡아서 손에서 피가 나는 것이다. 이 무서운 상황이 입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색소폰을 연주하는 순간은 즐거움이 아닐 수 있다. 그래서 암부슈어의 가장 중요한 기본을 ‘보기 좋고, 편안하게’라고 하는 것이다.색소폰의 아름다운 소리는 편안한 암부슈어에서 시작된다. 몸에힘을 빼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어깨를 낮추는 것만으로도 호흡에 좋은 영향을 준다는 사실도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우스피스를 무는 적정한 힘을 모르고 있다면 쉽게 힘을 빼는 것과 호흡의 안정감도 기대하기 어렵다.안다는 것: 곧 생각하는 것알고 연습하는 것은 ‘생각하면서 연습하기’라는 말과도 통한다. 항상 ‘나의 암부슈어는 적절한 모습과 적정한 힘의 안배를 알고 있는가’ 생각하면서 호흡의 다스림으로 이어가려고 한다면 좋은 소리의완성을 위한 좋은 레시피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분명한내 것이 될 수 있도록 알아가려고 노력하기를 바란다. 또한 마우스피스와 리드의 조합이 잘 맞아야 편안한 암부슈어를 끌어낼 수 있다. 그 부분에 관해서도 곧 다루기로 한다. (월간색소폰)송인권 칼럼니스트= suyeo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7-01
  • 소중한 인연, 행복한 만남!'제2회 김미영(밍밍) 색소폰라인 전국모임'
    (월간색소폰)지현숙 기자= 2018년 6월 16일(토) 충남 공주에서 <제2회 김미영(밍밍) 색소폰라인 전국모임>이 있었다. ‘김미영(밍밍) 색소폰라인ʼ은 여성 색소폰 연주자인 ‘김미영’ 프로와 드럼 연주자인 ‘박민수’ 프로가 운영하는 밴드로서,아마추어 연주자 2,400여 명과 유명 프로 연주자들이 다수 가입되어 있고, 2017년 6월 밴드 회원 및 팬들의 요청으로 1차 전국모임을 개최한 데 이어 올해에도 역시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임광빈’ 회원이 운영하는 이화가든에서 2차 전국모임을 개최하게 되었다. 음악을 통해 만난 우정전국 각지에서 모인 90여 명의 회원은 공주 갑사 주변의 청정한 공기와 푸르름이 가득한 야외에서 신선한 송어회 무침과 시원한 음료로 더위를 식히며 삼삼오오 서로 인사하고 반갑게 정을 나누었으며, 일찍 도착한 회원들은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돌아보며 온라인으로만 교류하던 회원들과도 금세 친해지고 환담이 끊이지 않았다. 모두가 함께 한 무대오후 3시에 ‘리라밴드ʼ의 오프닝 연주로 시작을 알리며, ‘강문구’ 회원의 재치 있는 진행으로 ‘김미영’, ‘박민수’ 밴드 운영자와 ‘신홍배’ 공동리더의 소개와 함께 이어진 연주시간은 많은 아마추어 회원들의 데뷔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사전에 1곡씩 신청을 받아 가능한 많은 회원들에게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노력한 ‘김미영’ 프로의 마음 씀씀이가 엿보이는 무대이기도 하였다. 함께 참여한 유명 프로 연주자 ‘최정환’, ‘김유승’, ‘박정호’, ‘석성노’, ‘박동준’의 리드미컬하고 품격 있는 연주는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감탄과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특히 인천에서 온 ‘전종열’ 회원은 가장 낮은 음역대인 바리톤 솔로 연주를 멋지게 하여 눈길을 끌었으며, 작고 귀여운 곡관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소리를 느낄 수 있는 연주로 흥을 더했다. 저녁 9시까지 계속된 연주의 중간중간에는 후원을 통한 다양한 경품들로 사람들에게 설렘과 기쁨을 주었으며, 마지막 연주자인 ‘김미영’ 프로는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뜨거운 무대로 대미를 장식하였다. 청중들의 열띤 반응에 ‘김미영’ 프로는 연이은 앙코르 연주로 화답하였고, 무대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아쉬움에 발걸음을 쉽사리 떼지 못하였다. 배려와 포용속에 다져진 끈끈함모임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수고한 ‘이미경’ 총무를 비롯한 스텝들은 ‘김미영’, ‘박민수’ 프로의 6학년 딸이 직접 디자인한 색소폰라인 로고가 그려진 흰색 티와 모자를 착용하고 각자 맡은 역할을 묵묵히 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김미영’ 프로는 각 테이블을 돌아보며 참여한 회원 및 회원 가족, 프로 연주자를 소중한 인연으로 생각하며 열외되거나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수시로 주변을 살피며 배려하고 포용하였는데, 그런 모습에서 ‘김미영(밍밍) 색소폰라인ʼ의 끈끈하고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김미영 프로는 끝까지 자리를 함께하며 행복한 표정으로 헤어지기를 아쉬워했고, 그런 모습을 통하여 ‘색소폰라인 밴드ʼ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글Ι지현숙 객원기자 suyeon@keri.or.kr사진Ι전종열 색소폰라인 회원
    • 월간색소폰
    • Review
    2018-07-01
  • 소중한 인연, 행복한 만남!'제2회 김미영(밍밍) 색소폰라인 전국모임'
    2018년 6월 16일(토) 충남 공주에서 <제2회 김미영(밍밍) 색소폰라인 전국모임>이 있었다. ‘김미영(밍밍) 색소폰라인ʼ은 여성 색소폰 연주자인 ‘김미영’ 프로와 드럼 연주자인 ‘박민수’ 프로가 운영하는 밴드로서,아마추어 연주자 2,400여 명과 유명 프로 연주자들이 다수 가입되어 있고, 2017년 6월 밴드 회원 및 팬들의 요청으로 1차 전국모임을 개최한 데 이어 올해에도 역시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임광빈’ 회원이 운영하는 이화가든에서 2차 전국모임을 개최하게 되었다. 음악을 통해 만난 우정전국 각지에서 모인 90여 명의 회원은 공주 갑사 주변의 청정한 공기와 푸르름이 가득한 야외에서 신선한 송어회 무침과 시원한 음료로 더위를 식히며 삼삼오오 서로 인사하고 반갑게 정을 나누었으며, 일찍 도착한 회원들은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돌아보며 온라인으로만 교류하던 회원들과도 금세 친해지고 환담이 끊이지 않았다. 모두가 함께 한 무대오후 3시에 ‘리라밴드ʼ의 오프닝 연주로 시작을 알리며, ‘강문구’ 회원의 재치 있는 진행으로 ‘김미영’, ‘박민수’ 밴드 운영자와 ‘신홍배’ 공동리더의 소개와 함께 이어진 연주시간은 많은 아마추어 회원들의 데뷔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사전에 1곡씩 신청을 받아 가능한 많은 회원들에게 연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노력한 ‘김미영’ 프로의 마음 씀씀이가 엿보이는 무대이기도 하였다. 함께 참여한 유명 프로 연주자 ‘최정환’, ‘김유승’, ‘박정호’, ‘석성노’, ‘박동준’의 리드미컬하고 품격 있는 연주는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감탄과 부러움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특히 인천에서 온 ‘전종열’ 회원은 가장 낮은 음역대인 바리톤 솔로 연주를 멋지게 하여 눈길을 끌었으며, 작고 귀여운 곡관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소리를 느낄 수 있는 연주로 흥을 더했다. 저녁 9시까지 계속된 연주의 중간중간에는 후원을 통한 다양한 경품들로 사람들에게 설렘과 기쁨을 주었으며, 마지막 연주자인 ‘김미영’ 프로는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뜨거운 무대로 대미를 장식하였다. 청중들의 열띤 반응에 ‘김미영’ 프로는 연이은 앙코르 연주로 화답하였고, 무대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아쉬움에 발걸음을 쉽사리 떼지 못하였다. 배려와 포용속에 다져진 끈끈함모임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수고한 ‘이미경’ 총무를 비롯한 스텝들은 ‘김미영’, ‘박민수’ 프로의 6학년 딸이 직접 디자인한 색소폰라인 로고가 그려진 흰색 티와 모자를 착용하고 각자 맡은 역할을 묵묵히 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김미영’ 프로는 각 테이블을 돌아보며 참여한 회원 및 회원 가족, 프로 연주자를 소중한 인연으로 생각하며 열외되거나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수시로 주변을 살피며 배려하고 포용하였는데, 그런 모습에서 ‘김미영(밍밍) 색소폰라인ʼ의 끈끈하고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김미영 프로는 끝까지 자리를 함께하며 행복한 표정으로 헤어지기를 아쉬워했고, 그런 모습을 통하여 ‘색소폰라인 밴드ʼ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글Ι지현숙 객원기자= suyeon@keri.or.kr사진Ι전종열 색소폰라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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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1
  • [MUSIC ESSAY] 포르투갈의와 속의 색소폰 선율
    (월간색소폰)박형섭 칼럼니스트= 여행은 다르게 살아보기이다. 나의 배낭과 색소폰은 언제나 신선한 이야깃거리를 가져다준다. 낯선 문화에 대한 동경과 음악적 환상은 길 위에서 해소되거나 길 위에서 생겨난다. 이런 이유로 나의 방랑벽은 아마도 지속될 것이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비행기가 이륙할 즈음이면 흥얼거린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일상을 벗어나는 순간 꿈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에 젖는다. 여행자에게 행복한 시간은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리스본은 항구다포르투갈은 서유럽 이베리아 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나라다. 대지가 끝나는 곳, 바다가 시작되는 곳. 바다는 이 나라 사람들에게 정복의 대상인 동시에 영감을 주는 요소다. 그 옛날 대항해 시대 바스코 다가마와 같은 탐험가들의 얘기는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그들은 황금과 명예를 위해 목숨 걸고 바닷길을 개척했다. 15세기 인도항로를 발견하고, 아프리카 연안, 남미 브라질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그들의 성과로 당시 포르투갈은 자국보다 큰 식민지 영토를 경영하며 제국의 반열에 올랐다. 특히 해외식민지 정복과 무역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에 맞서는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 나라는 유럽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로 전락했다. 지난날 화려한 역사와 부귀영화는 빛바랜 지 오래다. 국민들은 소박하게 살면서 과거의 영광을 반추하며 아쉬워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포르투갈 인들이 자존심을 잃고 사는 것은 아니다. 세계로 수출되는 전통적 포트 와인과 빵의 종주국,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로 대변되는 최강의 축구팀 등을 내세우며 부활을 꿈꾼다. 특히 생선요리에 어울리는 베르데 와인(Vinho Verde)은 포르투갈만의 특색 있는 와인으로 정평이 나있다. 빵이란 말은 원래 포르투갈에서 왔다. 빵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디저트로 먹는 달콤한 빵부터 호밀이나 곡물로 반죽한 바게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달걀을 통째로 넣거나 부드러운 커스터드 크림을 넣은 에그 타르트는 포르투갈이 오리지널이라며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황혼 무렵, 리스본에 도착했다. 초행길 운전이라 어둡기 전에 숙소를 찾아야 했다. 이 오래된 도시에는 유난히 경사진 언덕들이 많다. 나는 서민들의 생활을 직접 체험할 요량으로 구시가지 알파마에 숙소를 정했다. 알파마 구역은 저렴하고 깨끗하게 리모델링한 아파트 호텔들이 많았다. 나는 내비게이터가 알려주는 대로 알파마 지구에 들어섰다. 그런데 예약한 호텔이 지척에 있는 듯한데 영 접근하기 어려웠다.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들을 겨우 빠져나가면 일방통행이 진행을 막았다. 오간 길을 반복해 지나며 거리 이름을 살폈다. 한참 만에 숙소 아탈라이아 레지던트를 찾았다. 숙소는 허름한 3층 아파트의 2층에 있었다. 입구의 비밀코드 번호를 누르니 덜컹 문이 열렸다. 바로 정면에 가파른 좁은 계단이 나왔다. 올라가 열쇠로 방문을 따니 잘 정돈된 아담한 실내였다. “여기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녁에 드실 수 있도록 포트 와인과 빵, 잼, 에그 타르트, 커피를 준비했습니다. 맛있게 즐기세요.” 식탁 위에 꽃병과 함께 관리인 조안나가 써놓은 메모가 보였다. 금세 여로의 피곤함이 가시는 것 같았다. 사실 이 아파트를 예약하기 전 인터넷 검색을 통해 투숙객의 높은 평가점수 를 확인한 터였다. 비록 단칸방이었지만 깔끔했고 공간에 물건들을 효율적으로 배치한 것이 맘에 들었다. 부엌, 식탁, 침대, 화장실, 냉장고, 세탁기에 인터넷 서버까지 모두 갖추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식사 후 색소폰을 들고 거리 산책에 나섰다. 낮에 보니 어젯밤 헤맸던 골목들이 아름답게 보였다. 가지런한 높이의 아파트들은 낡았고, 벽엔 낙서투성이였지만 저마다 독특한 색깔에 난간엔 빨래들이 널려있고, 발코니엔 화분이 장식돼 있었다. 서민들의 살림살이 냄새가 풍기는 듯해 정감이 갔다. 레일이 깔린 차도 위로 자동차와 트램이 곡예 하듯 번갈아 지나갔다. 내 앞으로 승객들을 태운 노란 트램이 덜컥거리며 다가오자, 까마득하게 어린 시절 서울 동대문 근처에서 보았던 전차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래, 저걸 한 번 타봐야겠어! 겉모습이 아주 인상적인걸.” 트램은 리스본 시내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빼곡한 건물들 사이를 비집고 느릿느릿 잘도 다닌다. 나는 방문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한다는 E28번 노선을 탔다. 알파마 뒤쪽의 그라사에서 바이루 알투(언덕 지구)의 쉬아두까지 시내구경을 실컷 할 수 있었다. 리스본은 여느 대도시의 화려함은 없지만 고상한 매력을 지녔다. 유행에 아랑곳 않고 빈티지한 양복을 걸친 노신사의 느낌을 풍겼다. 난 지금 그 노신사와 함께 리스본 거리를 산책하는 중이다. 쪽빛 하늘에 파스텔 톤의 건물들, 가로수 그늘 아래에서 노니는 새들, 광장의 벤치에서 담소하는 사람들이 조화롭게 보였다. 현실의 삶은 녹녹하지 않아도 도시 곳곳에 낙천성이 배어 있었다. 트램은 이곳 시민의 중요한 교통수단인 동시에 여행자를 위한 관광 상품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어느덧 리스본 스토리센터 앞에 도착했다. 트램에서 내려 이 도시의 상징인 호시우 광장으로 걸었다. 광장 중앙에는 독립 브라질의 첫 번째 왕인 동 페드로 4세 동상이 서있다. 이 광장은 13세기부터 국가의 주요 행사가 거행된 곳으로 언제나 많은 인파로 북적인다. 광장 한가운데 청동분수에서 솟아나는 물줄기들이 햇살에 반짝였다. 또한 광장은 리스본 최고의 중심 상가 코메르시우 거리와 길 건너 태주 강변을 잇는 통로이기도 하다. 주변에는 고급 레스토랑과 노천카페들이 있어서 관광객뿐 아니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다. 버스킹을 하는 악사들도 곳곳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대서양으로 흐르는 태주 강을 바라보며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을 연주했다. 2월 초의 강바람이 제법 차갑고 매서웠지만 노천카페에서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은 따듯해보였다.파두의 집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고유한 노래와 가락이 있다. 프랑스에 샹송, 이태리에 칸초네, 스페인에 플라멩코가 있듯이 포르투갈엔 파두가 있다. 파두의 노랫말은 인간의 운명이나 역경, 사랑과 이별의 아쉬움을 테마로 한다. 파두는 숙명을 뜻하는 라틴어 파툼(fatum)에서 파생되었다. 거기서 비롯한 진한 향수와 한을 포르투갈 말로 사우다데(saudade)라고 하는데, 이 나라 사람들의 비극적 정서를 대변한다. 파두는 박자와 코드가 단순하고 섬세한 가락과 구슬픈 선율이 특징이다. 노래 중간에 들어간 당김음은 가수의 음색과 해석하는 스타일에 따라 심오한 정취 를 자아낸다. 포르투갈의 전통기타인 12현의 기따라(guitarra)와 만돌린으로 반주하는데 구성진 화음이 일품이다. 파두 가수를 파디스타라고 하는데, 그(녀)는 검은 드레스에 검은 숄을 두르고 마이크 없이 육성으로 노래한다. 목을 뒤로 젖혀서 성량을 최대로 발산하는 멜리스마 창법을 구사한다. 파두는 ‘파두의 집(Casa do Fado)’이라는 소규모 술집에서 파디스타, 연주자, 관객이 일체감을 이루며 완성된다. 파두의 집은 리스본 어디에나 있다. 특히 알파마 지구에 모여 있는데, 저녁 무렵이면 골목마다 파두 공연을 홍보하는 “파두 라이브 fado live”라고 쓰인 팻말과 파디스타의 사진들을 볼 수 있다. 내부를 흐릿한 색색의 조명으로 밝힌 파두의 집들을 기웃거리다보니 골목들이 한데 모이는 광장에 도달했다. 나는 서둘러 광장 저편의 <파두박물관Museo do Fado>으로 달려갔다. 폐관 시간이 임박해서인지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2층 안쪽 벽면에 그려진 파두 가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영혼의 소리’를 지닌 가수라고 알려진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를 배경으로 인증 샷을 찍었다. 그녀의 공연 사진들과 음반, 기록물들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눈을 감고 기도하듯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노래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녀의 노래들을 몇 곡 선택해 들었다. 파두박물관에서 그녀의 노래를 들으니 느낌이 새로웠다. 비록 헤드폰을 끼고 음반으로 들었지만 음악이란 어디서 어떻게 듣는가의 현장감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녀의 섬세한 감성과 폭발적 가창력은 나의 머릿속에 하나의 청각영상으로 깊이 박혀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가 절규하듯 부르는 <검은돛배>의 구절이 귓전에 어른거린다. 당신이 탄 검은 돛배는 밝은 불빛 속에서 너울거리고, 당신이 지친 두 팔로 내게 손짓하는 것을 보았어요. 내게 손짓하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바닷가 노파들은 당신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죠. (…) 난 당신의 사랑을 알고 있어요. 당신이 떠나가 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의 노래에서 여인의 비장미가 느껴진다. 언제 바닷속에 침몰해 사라질지 모르는 뱃사람들의 운명이지만 주어진 바닷길을 당당히 헤쳐 나가는 그들의 정서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파두란 우리들이 결코 마주하고 싸울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아무리 발버둥 치며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 왜 라고 물어도 결코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것, 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파두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을 아말리아 호드리게스 공헌으로 인식한다. 파두박물관을 나와 숙소 쪽 언덕을 오르면서, 잠시 뒤돌아보니 마치 바다처럼 거대한 태주 강이 시야에 들어온다. 때마침 훅하고 불어오는 해풍이 비릿한 냄새를 풍긴다. 출렁이는 파도 위에 배들이 떠다니고 뱃사람들은 고기잡이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 눈을 감으니 동화 속 어부 이야기가 오버랩된다. 옛날 바닷가 갯마을에 가난한 어부가 살았다. 그 부부는 궁핍했지만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지냈다. 어느 날 고기잡이 나갔던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다. 아내는 매일 바닷가에 나가 빌었다. 하늘이시여,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도록 도와주세요! 어느 날,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검은 물체가 보였다. 아, 남편의 배다! 기다림에 지쳐있던 아내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배, 그러나 그 배에는 검은 돛이 달려 있었다. 검은 돛,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녀의 남편은 영영 돌아올 수 없었다. 호드리게스의 <검은 돛배>는 이러한 뱃사공들의 슬픈 운명을 노래한다. 여행자의 눈에는 바다가 낭만과 환상으로 비춰지지만 바다에서 생활하는 어부에겐 죽음과 공포의 대상일지 모른다. 포르투의 색소폰 선율포르투갈의 수도는 리스본이지만 과거 한 때 포르투가 수도였다. 포르투갈이라는 나라명도 포르투에서 나왔다. 대항해 시대부터 이 도시는 경제, 무역의 거점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해왔다. 전통적 방식을 고수하는 포트 와인의 산지로 유명하다. 이 와인은 부드러우면서 달콤하고 강한 포도 향을 지녔다. 도루 강을 따라 와인 저장고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강가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유람선들, 오크통을 싣고 오가는 와인 운반선 라벨로(Ravelo)들이 시선을 끈다. 강의 양쪽은 동 루이스 다리로 이어져 있다. 이 다리는 아치형 철교로 하층은 자동차와 보행자용이고 상층은 도시철도의 철로와 역시 보행자용 도로로 쓰인다. 내가 다리 위에서 석양의 풍경을 바라보고 걷는데 때마침 전동차가 스치듯 지나간다.앗, 위험해요! 아내가 내손을 잡아끌었다. 다리 아래의 도루 강 풍경은 그림 속에 정지된 듯 마냥 느릿하고 평화로웠다. 도루 강의 저녁노을 풍경은 그 자체로 거대한 자연의 채색화였다. 밤에 조명이 켜진 다리의 모습은 주변의 색과 어울려 더욱 아름다웠다. 아침식사 후 숙소를 나와 도루 강으로 향했다. 역시 낯선 거리는 발로 걸어야 제 맛이다. 이방인의 눈엔 모든 게 신선하게 보인다. 언어, 사람들, 건물, 가로등, 자동차, 공기의 냄새까지. 희귀한 사물들을 보면 즉각 카메라 셔터를 누르거나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았다. 옛 성터, 오래된 성당, 낡은 건축물 등의 고고학적 가치는 알 수 없지만 지금 현장에서 보고 느끼는 감정이 얼마나 소중한가. 나 자신이 오래된 거리 풍경의 일원이 되어 그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렇지. 과거의 현재, 현재의 과거라는 말이 있지. 지나간 시간은 역사다. 그리고 과거 속을 걷는 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당을 드나들었는지닳아빠진 문고리의 쇠붙이는 까마반지르했다. 성당 건너편에 허물어진 성벽이 보인다. 그 아래쪽으로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아내는 기념품 가게들을 기웃거리더니 결국 머플러와 아줄레주 장식품들을 샀다. “색깔이 좋아요. 머플러가 이 골목의 추억을 증거할거야.” 이곳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깃든 어두운 뒷골목도 고상하게 보인다. 건축양식도 색깔도 도로의 포석도 모두 일종의 설치미술이다. 예술품이 별 것이던가, 여행자의 마음속을 미적으로 자극해 영감을 준다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감탄의 언어는 시가 될 것이고, 소리로 흥얼거리면 노래가 될 것이다. 어느새 언덕 아래의 도루 강에 이르렀다. 도루 강변에 동아시아 관광객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일본인 신혼부부인 듯 커플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남자는 재일교포, 여자는 일본인인데 그들 역시 아마추어 색소포니스트란다. 나의 색소폰을 가리키며 어서 한 곡 연주하라고 부추긴다. 나 역시 여행의 추억을 담기 위해 어디서 연주할까 탐색하던 중이었다. 그들의 제안대로 강을 등지고 색소폰을 연주한다면 멋진 그림이 탄생할 듯싶었다. 나는 용기를 내서 색소폰을 꺼내 들었다. 내가 색소폰 연주에 심취해 있는 동안 중국인들이 몰려와 박수치며 환호했다. 그 때 근처의 레스토랑 <토끼집 Chez Lapin>의 종업원이 다가왔다. 이런, 나의 연주가 식당 손님들에게 방해가되었나. 언제나 그렇듯이 길거리 색소폰 연주는 음악인 동시에 소음일 수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종업원 앙드레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나를 식당으로 안내하는 것 아닌가. 나와 아내는 노천에 마련된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앙드레가 추천한 바칼라우라는 요리를 주문했다. 바칼라우는 말린 대구로 요리한 것인데, 이 레스토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란다. 앙드레의 말에 따르면 바칼라우는 우리말로 대구인데 옛날 대항해시대 배가 출항하기 전 양식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도록 그것을 햇빛에 말린 것에서 비롯했단다. 그는 오늘날 포르투갈의 바칼라우 요리는 백가지가 넘는다고 너스레를 떤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포르투의 상벤투 역을 들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이라고 가이드북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원래 베네딕트회 수도원(Mosteiro de São Bento de Avé-Maria)이 있던 곳인데 화재로 사원이 소실되자 그 자리에 역을 세웠다고한다. 보자르(Beaux-Arts) 양식에 따른 건축물이라 모습이 웅장하고 위엄이 있었다. 리스본, 브라가, 코임브라 등 포르투갈의 주요도시로 가는 중앙역이다. 역사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높은 천장과 거대한 청백색의 아줄레주 벽화에 압도당했다. 내부의 벽이 온통 청백색의 아줄레주로 장식되어 있었던 것이다. 벽화의 내용은 이 나라의 역사적 사건들을 모자이크해 붙여놓은 것이란다. 아줄레주는 “표면이 매끄럽고 빛나는 돌”이란 뜻인데, 통상 주석 유약을 사용해 그림을 그려 만든 독특한 타일장식을 말한다. 농담(濃淡)의 조절만으로 완성된 타일 예술의 절제미를 느낄 수 있다. 하얀 타일 위에 청색의 이미지들이 매우 청아하고 고급스럽다. 아줄레주는 수백 년 전부터 생산되어 일상생활에 폭넓게 쓰이며 오늘날 포르투갈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유명한 건축물과 미술관뿐만 아니라 성당 내부, 아파트 외벽, 표지판, 팻말, 화장실, 계단, 벤치등 어디에나 쓰인다. 나는 올드 타운을 가로질러 볼량 시장으로 향했다. 100년 전통의 포르투 최대 재래시장이란다. 시장 구경도 하면서 필요한 식재료도 사보고 싶었다. 시청사가 정면에 있는 리베르다드 대로는 지날 때마다 새로웠다. 알면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발길이 닿는 곳 마다 고색창연한 분위기에 시간의 흔적들이 묻어났다. 시장 내부에는 신선한 채소와 과일, 식품 등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업종에 따라 늘어서 있고, 외부에는 옷가게, 커피숍, 향수 등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있었다. 한국의 재래시장에서처럼 주로 나이든 아줌마들이 야채, 과일, 감자, 곡물 등을 팔았다. 한 끼 양의 쌀, 딸기, 상추등을 팔면서도 저울로 잰 후 가격을 매기고, 이어서 한줌 더 얹혀주고는 했다. 이 나라 시장사람들의 후한 인심과 미소, 친절함은 삶속에 녹아있는 듯하다. 레스토랑이나 슈퍼마켓, 베이커리 등에 서도 느꼈지만 생활물가는 다른 대도시보다 저렴했다. 내일은 포르투를 떠난다. 마지막 밤, 여느 때 같으면 근사한 야경의 레스토랑에서 고급요리와 와인을 놓고 세레모니를 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뜨거운 쌀밥에 된장국, 상추쌈이 유달리 그리웠다. 그리움은 노스탤지어에서 비롯한다. 나는 볼량의 재래시장 상인들에게서 어떤 한국적 풍토를 느꼈을지 모른다. 한반도 남쪽 끝 부산과 이베리아반도 서쪽 끝 포르투는 지리적으로 멀다. 하지만 바다의 비릿한 냄새와 전통시장의 분위기에서 두 도시가 너무도 닮았다. 향수병은 이렇게 우연한 것에서도 도진다. 오늘은 된장국에 쌈장으로 향수병을 달래야겠다. 글 | 박형섭 부산대 불문과 교수 suyeon@keri.or.kr사진 | HAM.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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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1
  • [MUSIC ESSAY] 포르투갈의 파두와 아줄레주 속의 색소폰 선율
    여행은 다르게 살아보기이다. 나의 배낭과 색소폰은 언제나 신선한 이야깃거리를 가져다준다. 낯선 문화에 대한 동경과 음악적 환상은 길 위에서 해소되거나 길 위에서 생겨난다. 이런 이유로 나의 방랑벽은 아마도 지속될 것이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비행기가 이륙할 즈음이면 흥얼거린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발걸음을 재촉하고 일상을 벗어나는 순간 꿈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에 젖는다. 여행자에게 행복한 시간은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리스본은 항구다 포르투갈은 서유럽 이베리아 반도의 끝자락에 위치한 작은 나라다. 대지가 끝나는 곳, 바다가 시작되는 곳. 바다는 이 나라 사람들에게 정복의 대상인 동시에 영감을 주는 요소다. 그 옛날 대항해 시대 바스코 다가마와 같은 탐험가들의 얘기는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그들은 황금과 명예를 위해 목숨 걸고 바닷길을 개척했다. 15세기 인도항로를 발견하고, 아프리카 연안, 남미 브라질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그들의 성과로 당시 포르투갈은 자국보다 큰 식민지 영토를 경영하며 제국의 반열에 올랐다. 특히 해외식민지 정복과 무역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에 맞서는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오늘날 이 나라는 유럽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로 전락했다. 지난날 화려한 역사와 부귀영화는 빛바랜 지 오래다. 국민들은 소박하게 살면서 과거의 영광을 반추하며 아쉬워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포르투갈 인들이 자존심을 잃고 사는 것은 아니다. 세계로 수출되는 전통적 포트 와인과 빵의 종주국,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로 대변되는 최강의 축구팀 등을 내세우며 부활을 꿈꾼다. 특히 생선요리에 어울리는 베르데 와인(Vinho Verde)은 포르투갈만의 특색 있는 와인으로 정평이 나있다. 빵이란 말은 원래 포르투갈에서 왔다. 빵 종류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디저트로 먹는 달콤한 빵부터 호밀이나 곡물로 반죽한 바게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달걀을 통째로 넣거나 부드러운 커스터드 크림을 넣은 에그 타르트는 포르투갈이 오리지널이라며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황혼 무렵, 리스본에 도착했다. 초행길 운전이라 어둡기 전에 숙소를 찾아야 했다. 이 오래된 도시에는 유난히 경사진 언덕들이 많다. 나는 서민들의 생활을 직접 체험할 요량으로 구시가지 알파마에 숙소를 정했다. 알파마 구역은 저렴하고 깨끗하게 리모델링한 아파트 호텔들이 많았다. 나는 내비게이터가 알려주는 대로 알파마 지구에 들어섰다. 그런데 예약한 호텔이 지척에 있는 듯한데 영 접근하기 어려웠다.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들을 겨우 빠져나가면 일방통행이 진행을 막았다. 오간 길을 반복해 지나며 거리 이름을 살폈다. 한참 만에 숙소 아탈라이아 레지던트를 찾았다. 숙소는 허름한 3층 아파트의 2층에 있었다. 입구의 비밀코드 번호를 누르니 덜컹 문이 열렸다. 바로 정면에 가파른 좁은 계단이 나왔다. 올라가 열쇠로 방문을 따니 잘 정돈된 아담한 실내였다. “여기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녁에 드실 수 있도록 포트 와인과 빵, 잼, 에그 타르트, 커피를 준비했습니다. 맛있게 즐기세요.” 식탁 위에 꽃병과 함께 관리인 조안나가 써놓은 메모가 보였다. 금세 여로의 피곤함이 가시는 것 같았다. 사실 이 아파트를 예약하기 전 인터넷 검색을 통해 투숙객의 높은 평가점수 를 확인한 터였다. 비록 단칸방이었지만 깔끔했고 공간에 물건들을 효율적으로 배치한 것이 맘에 들었다. 부엌, 식탁, 침대, 화장실, 냉장고, 세탁기에 인터넷 서버까지 모두 갖추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식사 후 색소폰을 들고 거리 산책에 나섰다. 낮에 보니 어젯밤 헤맸던 골목들이 아름답게 보였다. 가지런한 높이의 아파트들은 낡았고, 벽엔 낙서투성이였지만 저마다 독특한 색깔에 난간엔 빨래들이 널려있고, 발코니엔 화분이 장식돼 있었다. 서민들의 살림살이 냄새가 풍기는 듯해 정감이 갔다. 레일이 깔린 차도 위로 자동차와 트램이 곡예 하듯 번갈아 지나갔다. 내 앞으로 승객들을 태운 노란 트램이 덜컥거리며 다가오자, 까마득하게 어린 시절 서울 동대문 근처에서 보았던 전차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래, 저걸 한 번 타봐야겠어! 겉모습이 아주 인상적인걸.” 트램은 리스본 시내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빼곡한 건물들 사이를 비집고 느릿느릿 잘도 다닌다. 나는 방문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한다는 E28번 노선을 탔다. 알파마 뒤쪽의 그라사에서 바이루 알투(언덕 지구)의 쉬아두까지 시내 구경을 실컷 할 수 있었다. 리스본은 여느 대도시의 화려함은 없지만 고상한 매력을 지녔다. 유행에 아랑곳 않고 빈티지한 양복을 걸친 노신사의 느낌을 풍겼다. 난 지금 그 노신사와 함께 리스본 거리를 산책하는 중이다. 쪽빛 하늘에 파스텔 톤의 건물들, 가로수 그늘 아래에서 노니는 새들, 광장의 벤치에서 담소하는 사람들이 조화롭게 보였다. 현실의 삶은 녹녹하지 않아도 도시 곳곳에 낙천성이 배어 있었다. 트램은 이곳 시민의 중요한 교통수단인 동시에 여행자를 위한 관광 상품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어느덧 리스본 스토리센터 앞에 도착했다. 트램에서 내려 이 도시의 상징인 호시우 광장으로 걸었다. 광장 중앙에는 독립 브라질의 첫 번째 왕인 동 페드로 4세 동상이 서있다. 이 광장은 13세기부터 국가의 주요 행사가 거행된 곳으로 언제나 많은 인파로 북적인다. 광장 한가운데 청동분수에서 솟아나는 물줄기들이 햇살에 반짝였다. 또한 광장은 리스본 최고의 중심 상가 코메르시우 거리와 길 건너 태주 강변을 잇는 통로이기도 하다. 주변에는 고급 레스토랑과 노천카페들이 있어서 관광객뿐 아니라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다. 버스킹을 하는 악사들도 곳곳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대서양으로 흐르는 태주 강을 바라보며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을 연주했다. 2월 초의 강바람이 제법 차갑고 매서웠지만 노천카페에서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은 따듯해보였다. 파두의 집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고유한 노래와 가락이 있다. 프랑스에 샹송, 이태리에 칸초네, 스페인에 플라멩코가 있듯이 포르투갈엔 파두가 있다. 파두의 노랫말은 인간의 운명이나 역경, 사랑과 이별의 아쉬움을 테마로 한다. 파두는 숙명을 뜻하는 라틴어 파툼(fatum)에서 파생되었다. 거기서 비롯한 진한 향수와 한을 포르투갈 말로 사우다데(saudade)라고 하는데, 이 나라 사람들의 비극적 정서를 대변한다. 파두는 박자와 코드가 단순하고 섬세한 가락과 구슬픈 선율이 특징이다. 노래 중간에 들어간 당김음은 가수의 음색과 해석하는 스타일에 따라 심오한 정취 를 자아낸다. 포르투갈의 전통기타인 12현의 기따라(guitarra)와 만돌린으로 반주하는데 구성진 화음이 일품이다. 파두 가수를 파디스타라고 하는데, 그(녀)는 검은 드레스에 검은 숄을 두르고 마이크 없이 육성으로 노래한다. 목을 뒤로 젖혀서 성량을 최대로 발산하는 멜리스마 창법을 구사한다. 파두는 ‘파두의 집(Casa do Fado)’이라는 소규모 술집에서 파디스타, 연주자, 관객이 일체감을 이루며 완성된다. 파두의 집은 리스본 어디에나 있다. 특히 알파마 지구에 모여 있는데, 저녁 무렵이면 골목마다 파두 공연을 홍보하는 “파두 라이브 fado live”라고 쓰인 팻말과 파디스타의 사진들을 볼 수 있다. 내부를 흐릿한 색색의 조명으로 밝힌 파두의 집들을 기웃거리다보니 골목들이 한데 모이는 광장에 도달했다. 나는 서둘러 광장 저편의 <파두박물관Museo do Fado>으로 달려갔다. 폐관 시간이 임박해서인지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2층 안쪽 벽면에 그려진 파두 가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영혼의 소리’를 지닌 가수라고 알려진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를 배경으로 인증 샷을 찍었다. 그녀의 공연 사진들과 음반, 기록물들이 빼곡히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눈을 감고 기도하듯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노래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나는 그녀의 노래들을 몇 곡 선택해 들었다. 파두박물관에서 그녀의 노래를 들으니 느낌이 새로웠다. 비록 헤드폰을 끼고 음반으로 들었지만 음악이란 어디서 어떻게 듣는가의 현장감이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녀의 섬세한 감성과 폭발적 가창력은 나의 머릿속에 하나의 청각영상으로 깊이 박혀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가 절규하듯 부르는 <검은돛배>의 구절이 귓전에 어른거린다. 당신이 탄 검은 돛배는 밝은 불빛 속에서 너울거리고, 당신이 지친 두 팔로 내게 손짓하는 것을 보았어요. 내게 손짓하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바닷가 노파들은 당신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죠. (…) 난 당신의 사랑을 알고 있어요. 당신이 떠나가 버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의 노래에서 여인의 비장미가 느껴진다. 언제 바닷속에 침몰해 사라질지 모르는 뱃사람들의 운명이지만 주어진 바닷길을 당당히 헤쳐 나가는 그들의 정서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파두란 우리들이 결코 마주하고 싸울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아무리 발버둥 치며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것, 왜 라고 물어도 결코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것, 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포르투갈 사람들은 파두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것을 아말리아 호드리게스 공헌으로 인식한다. 파두박물관을 나와 숙소 쪽 언덕을 오르면서, 잠시 뒤돌아보니 마치 바다처럼 거대한 태주 강이 시야에 들어온다. 때마침 훅하고 불어오는 해풍이 비릿한 냄새를 풍긴다. 출렁이는 파도 위에 배들이 떠다니고 뱃사람들은 고기잡이에 몰두하고 있을 것이다. 눈을 감으니 동화 속 어부 이야기가 오버랩된다. 옛날 바닷가 갯마을에 가난한 어부가 살았다. 그 부부는 궁핍했지만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지냈다. 어느 날 고기잡이 나갔던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다. 아내는 매일 바닷가에 나가 빌었다. 하늘이시여,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도록 도와주세요! 어느 날,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검은 물체가 보였다. 아, 남편의 배다! 기다림에 지쳐있던 아내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배, 그러나 그 배에는 검은 돛이 달려 있었다. 검은 돛,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을 의미했다. 그녀의 남편은 영영 돌아올 수 없었다. 호드리게스의 <검은 돛배>는 이러한 뱃사공들의 슬픈 운명을 노래한다. 여행자의 눈에는 바다가 낭만과 환상으로 비춰지지만 바다에서 생활하는 어부에겐 죽음과 공포의 대상일지 모른다. 포르투의 색소폰 선율포르투갈의 수도는 리스본이지만 과거 한 때 포르투가 수도였다. 포르투갈이라는 나라명도 포르투에서 나왔다. 대항해 시대부터 이 도시는 경제, 무역의 거점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해왔다. 전통적 방식을 고수하는 포트 와인의 산지로 유명하다. 이 와인은 부드러우면서 달콤하고 강한 포도 향을 지녔다. 도루 강을 따라 와인 저장고들이 늘어서 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강가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유람선들, 오크통을 싣고 오가는 와인 운반선 라벨로(Ravelo)들이 시선을 끈다. 강의 양쪽은 동 루이스 다리로 이어져 있다. 이 다리는 아치형 철교로 하층은 자동차와 보행자용이고 상층은 도시철도의 철로와 역시 보행자용 도로로 쓰인다. 내가 다리 위에서 석양의 풍경을 바라보고 걷는데 때마침 전동차가 스치듯 지나간다.앗, 위험해요! 아내가 내손을 잡아끌었다. 다리 아래의 도루 강 풍경은 그림 속에 정지된 듯 마냥 느릿하고 평화로웠다. 도루 강의 저녁노을 풍경은 그 자체로 거대한 자연의 채색화였다. 밤에 조명이 켜진 다리의 모습은 주변의 색과 어울려 더욱 아름다웠다. 아침식사 후 숙소를 나와 도루 강으로 향했다. 역시 낯선 거리는 발로 걸어야 제 맛이다. 이방인의 눈엔 모든 게 신선하게 보인다. 언어, 사람들, 건물, 가로등, 자동차, 공기의 냄새까지. 희귀한 사물들을 보면 즉각 카메라 셔터를 누르거나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았다. 옛 성터, 오래된 성당, 낡은 건축물 등의 고고학적 가치는 알 수 없지만 지금 현장에서 보고 느끼는 감정이 얼마나 소중한가. 나 자신이 오래된 거리 풍경의 일원이 되어 그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렇지. 과거의 현재, 현재의 과거라는 말이 있지. 지나간 시간은 역사다. 그리고 과거 속을 걷는 나는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당을 드나들었는지 닳아빠진 문고리의 쇠붙이는 까마반지르했다. 성당 건너편에 허물어진 성벽이 보인다. 그 아래쪽으로 좁은 골목들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아내는 기념품 가게들을 기웃거리더니 결국 머플러와 아줄레주 장식품들을 샀다. “색깔이 좋아요. 머플러가 이 골목의 추억을 증거할거야.” 이곳 사람들의 삶과 애환이 깃든 어두운 뒷골목도 고상하게 보인다. 건축양식도 색깔도 도로의 포석도 모두 일종의 설치미술이다. 예술품이 별 것이던가, 여행자의 마음속을 미적으로 자극해 영감을 준다면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감탄의 언어는 시가 될 것이고, 소리로 흥얼거리면 노래가 될 것이다. 어느새 언덕 아래의 도루 강에 이르렀다. 도루 강변에 동아시아 관광객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일본인 신혼부부인 듯 커플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반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남자는 재일교포, 여자는 일본인인데 그들 역시 아마추어 색소포니스트란다. 나의 색소폰을 가리키며 어서 한 곡 연주하라고 부추긴다. 나 역시 여행의 추억을 담기 위해 어디서 연주할까 탐색하던 중이었다. 그들의 제안대로 강을 등지고 색소폰을 연주한다면 멋진 그림이 탄생할 듯싶었다. 나는 용기를 내서 색소폰을 꺼내 들었다. 내가 색소폰 연주에 심취해 있는 동안 중국인들이 몰려와 박수치며 환호했다. 그 때 근처의 레스토랑 <토끼집 Chez Lapin>의 종업원이 다가왔다. 이런, 나의 연주가 식당 손님들에게 방해가되었나. 언제나 그렇듯이 길거리 색소폰 연주는 음악인 동시에 소음일 수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종업원 앙드레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나를 식당으로 안내하는 것 아닌가. 나와 아내는 노천에 마련된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앙드레가 추천한 바칼라우라는 요리를 주문했다. 바칼라우는 말린 대구로 요리한 것인데, 이 레스토랑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란다. 앙드레의 말에 따르면 바칼라우는 우리말로 대구인데 옛날 대항해시대 배가 출항하기 전 양식을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도록 그것을 햇빛에 말린 것에서 비롯했단다. 그는 오늘날 포르투갈의 바칼라우 요리는 백가지가 넘는다고 너스레를 떤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포르투의 상벤투 역을 들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이라고 가이드북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원래 베네딕트회 수도원(Mosteiro de São Bento de Avé-Maria)이 있던 곳인데 화재로 사원이 소실되자 그 자리에 역을 세웠다고한다. 보자르(Beaux-Arts) 양식에 따른 건축물이라 모습이 웅장하고 위엄이 있었다. 리스본, 브라가, 코임브라 등 포르투갈의 주요도시로 가는 중앙역이다. 역사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높은 천장과 거대한 청백색의 아줄레주 벽화에 압도당했다. 내부의 벽이 온통 청백색의 아줄레주로 장식되어 있었던 것이다. 벽화의 내용은 이 나라의 역사적 사건들을 모자이크해 붙여놓은 것이란다. 아줄레주는 “표면이 매끄럽고 빛나는 돌”이란 뜻인데, 통상 주석 유약을 사용해 그림을 그려 만든 독특한 타일장식을 말한다. 농담(濃淡)의 조절만으로 완성된 타일 예술의 절제미를 느낄 수 있다. 하얀 타일 위에 청색의 이미지들이 매우 청아하고 고급스럽다. 아줄레주는 수백 년 전부터 생산되어 일상생활에 폭넓게 쓰이며 오늘날 포르투갈 문화의 상징이 되었다. 유명한 건축물과 미술관뿐만 아니라 성당 내부, 아파트 외벽, 표지판, 팻말, 화장실, 계단, 벤치등 어디에나 쓰인다. 나는 올드 타운을 가로질러 볼량 시장으로 향했다. 100년 전통의 포르투 최대 재래시장이란다. 시장 구경도 하면서 필요한 식재료도 사보고 싶었다. 시청사가 정면에 있는 리베르다드 대로는 지날 때마다 새로웠다. 알면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발길이 닿는 곳 마다 고색창연한 분위기에 시간의 흔적들이 묻어났다. 시장 내부에는 신선한 채소와 과일, 식품 등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업종에 따라 늘어서 있고, 외부에는 옷가게, 커피숍, 향수 등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있었다. 한국의 재래시장에서처럼 주로 나이든 아줌마들이 야채, 과일, 감자, 곡물 등을 팔았다. 한 끼 양의 쌀, 딸기, 상추등을 팔면서도 저울로 잰 후 가격을 매기고, 이어서 한줌 더 얹혀주고는 했다. 이 나라 시장사람들의 후한 인심과 미소, 친절함은 삶속에 녹아있는 듯하다. 레스토랑이나 슈퍼마켓, 베이커리 등에 서도 느꼈지만 생활물가는 다른 대도시보다 저렴했다. 내일은 포르투를 떠난다. 마지막 밤, 여느 때 같으면 근사한 야경의 레스토랑에서 고급요리와 와인을 놓고 세레모니를 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뜨거운 쌀밥에 된장국, 상추쌈이 유달리 그리웠다. 그리움은 노스탤지어에서 비롯한다. 나는 볼량의 재래시장 상인들에게서 어떤 한국적 풍토를 느꼈을지 모른다. 한반도 남쪽 끝 부산과 이베리아반도 서쪽 끝 포르투는 지리적으로 멀다. 하지만 바다의 비릿한 냄새와 전통시장의 분위기에서 두 도시가 너무도 닮았다. 향수병은 이렇게 우연한 것에서도 도진다. 오늘은 된장국에 쌈장으로 향수병을 달래야겠다. 글 | 박형섭 부산대 불문과 교수사진 | HAM.J.I
    • 월간색소폰
    2018-07-01
  • [JAZZ AGE]세계 재즈의 역사,1930년대의 재즈를 넘어1940년대의 비밥 재즈로
    (월간색소폰)이종우 칼럼니스트= 경제대공황의 고난을 이긴 재즈는 즐거울 필요가 있었다. 열심히 일한 후에 달달한 믹스커피가 더욱 끌리듯이 음악도 감미로운 스윙재즈로 활력을 얻고 싶은 마음이 대중들에게 더욱 와 닿았을 시기였다. 스윙의 왕, 베니 굿맨(Benny Goodmen 1909-1986)베니 굿맨은 1909년 데이비드 벤자민(David Benjamin)이라는 본명으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열 살 때부터 클라리넷 연주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에 학교를 자퇴한 후 ‘벤 폴락 밴드’의 일원으로 프로로 데뷔하게 된다. 4년간의 밴드 생활을 마치고 뉴욕에 정착하여 라디오 방송과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프리랜서로 악사 생활을 하게 된다. 1931년 자신의 첫 앨범 를 히트시키며 1934년에는 자신의 빅밴드를 만들었고, NBC라디오 프로그램 ‘Let`s Dance’에 고정출연을 계기로 대중적인 관심을 얻으며 자신의 입지를 굳혀 가게 된다. 이듬해 1935년부터 자신의 밴드와 함께 미국 대륙을 횡단하며 연주 활동을 하게 되는데 1935년 8월21일 로스앤젤레스 팔로마 볼룸홀 공연을 계기로 베니 굿맨이란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게 된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스윙재즈는 전국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재즈사에서는 본격적인 스윙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기도 한다. 당시 흑인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재즈를 미국 주류 백인층에 파급시키며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당시 흑인과 백인의 갈등이 심했던 시대 (클럽에 들어가는 입구가 백인과 흑인으로 따로 있기도 했다)에 베니 굿맨 밴드에는 라이오넬 햄프턴(Rionel Hampton,비브라폰), 테디 윌슨(Teddy Wilson,피아노) 같은 흑인 연주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흑인과 백인이 섞인 밴드의 구성은 음악을 흑과 백의 차별이 아닌 순수 예술의 영역으로 바라본 베니 굿맨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단순히 그가 백인 재즈 아티스트여서 얻은 어드벤테이지(Advantage)가 아닌 그의 출중한 연주력에 더해진 빛나는 그의 인간미가 진정한 굿맨을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1940년대 모던재즈(Modern Jazz)1930년에 이르러 재즈는 그 중심을 뉴욕으로 이동하였다. 스윙재즈가 관중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재즈였다면 연주자들 또한 연주를 통해 즐거워야 했다. 그렇기에 예술가들은 새로운 창작에 대한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충족이 희열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새로운 창작의 욕구로 이어졌다. 바야흐로 재즈는 스윙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관중을 즐겁게 하는 연주에서 연주자 자신을 위한 연주로 가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그 시작은 크고 화려한 대규모 공연장이 아닌 뉴욕의 작은 재즈클럽에서 시작되었다.비밥(Be Bop)의 탄생빅밴드 스윙 스타일을 나이트클럽의 댄스음악이라 한다면 모던재즈는 좀 더 연주자 중심으로의 예술성을 부각시키는 재즈라 할 수 있다. 스윙은 흥겨운 리듬감에 달달한 멜로디로 가득 차야 했고 박자는 춤을 추기에 좋아야 했다. 베니 굿맨이나 글렌 밀러의 음악은 이러한 스타일에 매우 부합하는 음악이었고, 그렇기에 대중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백인들의 춤 곡으로 변해가고 있는 스윙에 대한 불편함을 느낀 몇몇 연주자들은 새로운 시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빅밴드 연주가 끝나면 연주자들은 삼삼오오 자신들만의 잼 세션(After Hours Jam Sessions)을 하기 위해 뉴욕 뒷골목에 있는 작은 클럽으로 모였다. 그곳에서 연주자들은 빠르고 현란한 독주로 자신의 연주를 뽐내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스타일이 바로 비밥(Be Bop)재즈이다. 1943년 뉴욕 할렘 118번가 민턴즈 플레이하우스(Minton's Playhouse)에서 찰리 파커(Charlie Parker)를 중심으로 시작한 잼 세션은 재즈사에서 비밥 재즈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비밥은 1940년대에 들어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찰리 파커, 버드 파웰, 디지 길레스피 등을 필두로 재즈는 비밥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얻게 되며, 스윙의 매너리즘을 벗어나는 듯했다. 그와 함께 대중적인 인기도 조금씩 벗어나게 되었지만, 비밥에 열광하는 마니아층이 생겨나며 비밥은 더욱더 발전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대중들로선 재즈를 듣는 선택의 폭이 넓어지게 된 계기이기도 하지만 비밥을 들으면서 춤을 출 수 없는 대중들에겐 많은 부분 아쉬움이 남았을 것이다. 후에 로키빌리(Rockabilly, 로큰롤의 초창기 스타일)의 유행으로 재즈와 대중은 더욱 거리를 두게 되지만 재즈는 그 자체로 예술적인 가치가 더욱 상승하여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질 수 있게 된다.비밥(Be Bop)재즈의 음악적 특징스윙재즈보다 복잡한 화성진행과 빠른 템포, 주 멜로디와는 새로운 개연성을 가지는 격렬하고 역동적인 즉흥연주는 비밥재즈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블루 노트(Blue Note)를 사용하는 즉흥연주이다. 기존의 메이저 스케일에(Major Scale) 3, 5, 7 음에 반음을 추가하는 음계인데 이 반음을 각각 이끔음(Leading Tone)으로 사용하여 멜로디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때 반음으로 내린 3b, 5b, 7b음을 블루 노트라 하고 이를 이용해 상위 4개 음을 반음계로(Chromatic Scale) 하위 4개 음을 장음계로(Major Scale)로 사용하여 비밥 음계(Be Bop Scale)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이 스케일을 사용하여 기존의 스윙재즈 곡들을 2배속 이상으로 연주하는 것이 바로 비밥재즈이다. 쉽게 말하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2~3배로 빠르게 연주하며 거기에 즉흥연주를 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악보에 의존하여 연주하는 스윙 스타일과는 다르게 각각의 파트의 즉흥성이 더욱 강조되는 연주를 지향하므로 연주자의 연주력이 중요한 감상 포인트이다. 그렇기에 악기 구성은 피아노, 드럼, 베이스를 기본으로 혼 세션이 가미되는 캄보(Combo Band) 형태가 보통이었다. 캄포 밴드가 주를 이루게 되는 데에는 세계2차대전으로인한 재정상태의 어려움을 겪게 된 빅밴드들의 해체 이유도 있지만, 비밥이란 새로운 장르에 적응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사진출처 | 구글이미지글 Ι 이종우 경성대 동주대 외래 교수suyeo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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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1
  • [JAZZ AGE] 세계 재즈의 역사,1930년대의 재즈를 넘어 1940년대의 비밥 재즈로
    경제대공황의 고난을 이긴 재즈는 즐거울 필요가 있었다. 열심히 일한 후에 달달한 믹스커피가 더욱 끌리듯이 음악도 감미로운 스윙재즈로 활력을 얻고 싶은 마음이 대중들에게 더욱 와 닿았을 시기였다. 스윙의 왕, 베니 굿맨(Benny Goodmen 1909-1986) 베니 굿맨은 1909년 데이비드 벤자민(David Benjamin)이라는 본명으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열 살 때부터 클라리넷 연주 레슨을 받기 시작하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에 학교를 자퇴한 후 ‘벤 폴락 밴드’의 일원으로 프로로 데뷔하게 된다. 4년간의 밴드 생활을 마치고 뉴욕에 정착하여 라디오 방송과 브로드웨이 뮤지컬에서 프리랜서로 악사 생활을 하게 된다. 1931년 자신의 첫 앨범 를 히트시키며 1934년에는 자신의 빅밴드를 만들었고, NBC라디오 프로그램 ‘Let`s Dance’에 고정출연을 계기로 대중적인 관심을 얻으며 자신의 입지를 굳혀 가게 된다. 이듬해 1935년부터 자신의 밴드와 함께 미국 대륙을 횡단하며 연주 활동을 하게 되는데 1935년 8월21일 로스앤젤레스 팔로마 볼룸홀 공연을 계기로 베니 굿맨이란 이름을 전국적으로 알리게 된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스윙재즈는 전국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재즈사에서는 본격적인 스윙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기도 한다. 당시 흑인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재즈를 미국 주류 백인층에 파급시키며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당시 흑인과 백인의 갈등이 심했던 시대 (클럽에 들어가는 입구가 백인과 흑인으로 따로 있기도 했다)에 베니 굿맨 밴드에는 라이오넬 햄프턴(Rionel Hampton,비브라폰), 테디 윌슨(Teddy Wilson,피아노) 같은 흑인 연주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흑인과 백인이 섞인 밴드의 구성은 음악을 흑과 백의 차별이 아닌 순수 예술의 영역으로 바라본 베니 굿맨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단순히 그가 백인 재즈 아티스트여서 얻은 어드벤테이지(Advantage)가 아닌 그의 출중한 연주력에 더해진 빛나는 그의 인간미가 진정한 굿맨을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1940년대 모던재즈(Modern Jazz) 1930년에 이르러 재즈는 그 중심을 뉴욕으로 이동하였다. 스윙재즈가 관중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재즈였다면 연주자들 또한 연주를 통해 즐거워야 했다. 그렇기에 예술가들은 새로운 창작에 대한 욕망과 그 욕망에 대한 충족이 희열을 가져다 준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새로운 창작의 욕구로 이어졌다. 바야흐로 재즈는 스윙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관중을 즐겁게 하는 연주에서 연주자 자신을 위한 연주로 가기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그 시작은 크고 화려한 대규모 공연장이 아닌 뉴욕의 작은 재즈클럽에서 시작되었다. 비밥(Be Bop)의 탄생 빅밴드 스윙 스타일을 나이트클럽의 댄스음악이라 한다면 모던재즈는 좀 더 연주자 중심으로의 예술성을 부각시키는 재즈라 할 수 있다. 스윙은 흥겨운 리듬감에 달달한 멜로디로 가득 차야 했고 박자는 춤을 추기에 좋아야 했다. 베니 굿맨이나 글렌 밀러의 음악은 이러한 스타일에 매우 부합하는 음악이었고, 그렇기에 대중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그러나 백인들의 춤 곡으로 변해가고 있는 스윙에 대한 불편함을 느낀 몇몇 연주자들은 새로운 시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빅밴드 연주가 끝나면 연주자들은 삼삼오오 자신들만의 잼 세션(After Hours Jam Sessions)을 하기 위해 뉴욕 뒷골목에 있는 작은 클럽으로 모였다. 그곳에서 연주자들은 빠르고 현란한 독주로 자신의 연주를 뽐내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탄생한 스타일이 바로 비밥(Be Bop)재즈이다. 1943년 뉴욕 할렘 118번가 민턴즈 플레이하우스(Minton's Playhouse)에서 찰리 파커(Charlie Parker)를 중심으로 시작한 잼 세션은 재즈사에서 비밥 재즈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비밥은 1940년대에 들어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찰리 파커, 버드 파웰, 디지 길레스피 등을 필두로 재즈는 비밥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얻게 되며, 스윙의 매너리즘을 벗어나는 듯했다. 그와 함께 대중적인 인기도 조금씩 벗어나게 되었지만, 비밥에 열광하는 마니아층이 생겨나며 비밥은 더욱더 발전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대중들로선 재즈를 듣는 선택의 폭이 넓어지게 된 계기이기도 하지만 비밥을 들으면서 춤을 출 수 없는 대중들에겐 많은 부분 아쉬움이 남았을 것이다. 후에 로키빌리(Rockabilly, 로큰롤의 초창기 스타일)의 유행으로 재즈와 대중은 더욱 거리를 두게 되지만 재즈는 그 자체로 예술적인 가치가 더욱 상승하여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비밥(Be Bop)재즈의 음악적 특징 스윙재즈보다 복잡한 화성진행과 빠른 템포, 주 멜로디와는 새로운 개연성을 가지는 격렬하고 역동적인 즉흥연주는 비밥재즈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징은 블루 노트(Blue Note)를 사용하는 즉흥연주이다. 기존의 메이저 스케일에(Major Scale) 3, 5, 7 음에 반음을 추가하는 음계인데 이 반음을 각각 이끔음(Leading Tone)으로 사용하여 멜로디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때 반음으로 내린 3b, 5b, 7b음을 블루 노트라 하고 이를 이용해 상위 4개 음을 반음계로(Chromatic Scale) 하위 4개 음을 장음계로(Major Scale)로 사용하여 비밥 음계(Be Bop Scale)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이 스케일을 사용하여 기존의 스윙재즈 곡들을 2배속 이상으로 연주하는 것이 바로 비밥재즈이다. 쉽게 말하면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2~3배로 빠르게 연주하며 거기에 즉흥연주를 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악보에 의존하여 연주하는 스윙 스타일과는 다르게 각각의 파트의 즉흥성이 더욱 강조되는 연주를 지향하므로 연주자의 연주력이 중요한 감상 포인트이다. 그렇기에 악기 구성은 피아노, 드럼, 베이스를 기본으로 혼 세션이 가미되는 캄보(Combo Band) 형태가 보통이었다. 캄포 밴드가 주를 이루게 되는 데에는 세계2차대전으로 인한 재정상태의 어려움을 겪게 된 빅밴드들의 해체 이유도 있지만, 비밥이란 새로운 장르에 적응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글 Ι 이종우 경성대 동주대 외래 교수
    • 월간색소폰
    2018-07-01
  • ‘한(恨)’의 정서를 자신만의 색으로 풀어내는 '색소포니스트 허철행'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고속버스를 타고 두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전주의 하늘은 쾌청했다. 쾌청한 하늘만큼 푸른 정장을 차려입은 색소포니스트 허철행이 인사를 건네왔다. 전라도 사투리와 꾸밈없는 모습 속에서 나타나는 그의 소탈한 매력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구슬픈 찔레꽃 연주는 그런 순수함 속에서도 자신의 것을 지키며 걸어 왔을 그의 고독한 여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색소폰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전북 임실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임실하면 고추와 치즈의 고장으로 많이 알려진 곳이다. 고등학교도 그곳에서 나왔고. 그 고등학교에 밴드부가 있어 그곳에 들어가게 된 것이 계기라고 할 수 있다.밴드부에 들어가서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한 것 인가.처음부터 색소폰을 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트럼펫을 하다가 유포니엄(Euphonium)이라는 악기를 했다(3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내가 원하는 악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밴드부 음악발표회가 있었는데 나보다 한 학년 위의 선배가 음악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영화 ‘밤안개 속의 데이트’ 주제가인 를 색소폰 솔로로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 그 소리가 너무나 좋았다. 그 소리를 마음속에 간직하다 3학년 때 비로소 색소폰을 잡을 수 있었다.밴드부에서 색소폰을 배우는 과정이 어땠었나.3학년이 되자마자 색소폰을 잡았지만 이미 색소폰을 한 지 3년이 넘어가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던 만큼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열정만큼은 그 어디에도 비할 데가 없었다. 레슨을 해주는 선생님이 따로 없었던 터라 당시 3만원을 주고 샀던 카세트 플레이어와 버스에서 흘러 나오는 라디오 음악이 나의 선생님이었다. 재즈, 가요 등 다양한 음반을 듣고 내 소리를 녹음하여 비교하면서 공부하고, 생각하며 색소폰에 대한 갈망이 커져나갔었다.어린 시절의 허철행에 대해 더 얘기해 달라.학창시절의 나는 여학생 얼굴만 봐도 얼굴이 빨개지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고집과 주관이 뚜렷하고 해야 할 일은 꼭 해내는 성격이었다. 지금은 음악을 하면서 외향적으로 변한 부분이 아주 많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은 잘 바뀌지 않았다.내향적인 성격 때문에 처음에는 무대에서 연주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무대에서 색소폰을 잡으면 눈빛이 달라진다는 얘길 많이 듣는다. 그만큼 무대에 서면 자신감이 생기고 감정을 이입(조​절)하면서 연주에 몰입하기 때문인 것 같다.연주하는 방식은 대략 어떤 편인가.어떤 곡이든 기승전결이 있다. 그래서 인생의 기승전결을 풀어내는 것처럼 진지하게 연주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만큼 정말 힘들다. 절제를 할 때 더 많은 호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영향을 받은 아티스트가 있나.외국 연주자로는 ‘찰리 파커’(Charlie Parker)와 ‘데이비드 샌본’(David Sanborn)이 있고, 국내 연주자로는 ‘이봉조’, ‘길옥윤’, ‘최석재’, ‘황천수’ 등 여러 선생님들의 영향을 받았다.어떤 영향을 받았나.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르듯이 노래하는 방법이나 감성, 색깔도 각기 다르다. ‘데이비드 샌본’은 강렬하게 쏘는 칼톤, ‘찰리 파커’는 소리가 작으면서도 32비트, 24비트로 연주한다. 그러면서도 소리와 비트가 깨지지 않는다. ‘이봉조’ 선생님으로부터는 맑은 음색을, ‘길옥윤’ 선생님에게서는 특유의 색깔있는 음색을 모방하였고, ‘황천수’ 선생님의 경우에는 반음 스케일이나 밴딩을 써서 음이 넘어가는 흐름에 대해 배웠다. 이렇듯 다양한 연주자들의 감성 속에서 내 음색을 찾기까지는 무던히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음에는 분명히 선이 있고, 색깔이 있다. 자신의 톤이 완성이 되고, 호흡이 완성 되었을 때 선이 살아 있고 자신만의 색깔이 있는 연주를 할 수 있다.색소폰을 잘 불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잘 하고 싶다면 첫째 ‘좋은 선생님에게 정식으로 배워라’, 둘째 ‘선생님이 주문하는 대로 연습해라’이다. 셋째 ‘음악을 많이 들어라’인데 어떻게 보면 최고의 선생님은 음악을 많이 듣는 것이지만 그저 듣는 것만으로는 내 음악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레슨을 통해 깊이 있게 접근하는 것이 좋다.음반에서 소프라노 색소폰 연주가 인상적이었다. 소프라노 색소폰을 잘 부는 비법이 있나.롱톤과 텅잉같은 기본적인 주법을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이다. 소프라노 색소폰은 악기의 공간(관의 내경)이 좁기 때문에 순간의 압력을 필요로 하므로 색소폰 중에서 가장 연주하기 힘들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쎈 소리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크고 세게 부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그래야 압력이 강해지고 소리를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2014년도에 발표한 1집과 앨범 발매 공연이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1집 앨범 ‘봄’에 대한 설명 부탁드린다.이 음반이 내 인생에서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를 담아 타이틀을 ‘봄’이라고 정하고 타이틀 곡도 <찔레꽃>을 택했다. ‘장사익’ 선생님의 노래 <찔레꽃>을 색소폰으로 풀어내기 위많은 노력을 했는데, 특히 ‘한(恨)’을 표현하기 위한 음색과 색깔을 찾는 데에 오랜 시간을 할애 했다.말씀하시는 ‘한(恨)’은 어떤 것에 대한 ‘한(恨)’인가.우리 민족의 ‘한(恨)’이 될 수도 있고, 어린 시절의 좋고 나빴던 기억을 되살리는 추억의 ‘한(恨)’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 겪었던 우울했던 ‘한(恨)’을 음악으로 풀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나.1집 앨범 발매기념 첫 번째 콘서트 때이다. 공연하기 전에 가수 ‘현당’ 씨랑 같이 밥을 먹는데 밥이 입으로 안 들어가더라. 그만큼 긴장도 많이 하고 기대도 컸던 연주였다. 늘 염원했던 대로 그 자리에 어머님을 모시고 당신이 좋아하시는 가수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혼신을 다해 연주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감정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진다.만약 2집을 낸다면 어떤 컨셉으로 가고 싶나.고민이 된다. 오래 남을 수 있는 깊이 있고 예술적인 음악을 하고 싶으면서도 대중적인부분을 간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집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 듣기에 조금 어려웠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의 음악적 욕심도 채울 수 있는 곡을 준비하려고 한다.2004년부터 5년 동안 퓨전재즈그룹 ‘J.ZEN’에서 활동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J.ZEN에 대해 말해달라.J.ZEN이라는 그룹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선배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그 선배가 국악 판소리를 피아노 악보로 채보하면 그것을 토대로 나를 포함한 드럼, 기타, 베이스 주자들이 퓨전재즈로 풀어냈다. 국악곡을 편곡해 색소폰을 주 멜로디로 한 연주로 풀어내고 리베르 탱고와 같은 탱고음악부터, 가요(한오백년), 스페인의 플라멩코까지 여러 장르를 시도했다.음악적 영감은 어디서 받나.생활 속에서 이다. 누군가를 만나면서 영감이 떠오르기도 하고, 산에 올라 자연을 보면서 혹은 낚시를 가서 이기도 하다. 라디오를 들으면서도 영감을 많이 받는데, 다른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 많다.자신이 생각하는 연주자로서의 마인드는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나.연주자는 음악적인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한걸음씩 꾸준히 갈 수 있는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연주자들이 자신의 색깔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므로 어려운 일이다. 연주자가 되려면 자신만의 소리와 음악을 찾는 일에 몰두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트로트를 연주하더라도 클래식에 기초해서 연주할 수 있는 학구적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연주한다면 트로트도 그냥 트로트가 아닌 고급스러운 곡이 된다.인간 허철행과 색소포니스트 허철행으로서의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연주할 때는 가급적 격식을 갖추고자 하는 편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메이크업도 하고, 의상도 제대로 갖춰 입는다. 이런 것을 관객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연주가 끝나면 평소의 소탈한 나로 돌아간다. 막걸리와 산을 좋아하는 자유로운 나로 말이다. 꼭 프로의 마인드라기보다는 나만의 스타일 이라고 생각한다. 간혹 주변에서 사투리가 심하다는 얘길 들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게 내 모습이고, 그런 나의 모습을 숨기고 싶지 않다. 방송을 하던 무대에서 연주를 하던 내 앞에 있는 사람 혹은 청중들에게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 원곡에 충실하면서 나만의 색깔을 담담하게 표현하는 내공 있는 색소포니스트로 살고 싶다. 글 Ι 안지인 기자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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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7-01
  • ‘한(恨)’의 정서를 자신만의 색으로 풀어내는 '색소포니스트 허철행'
    (월간색소폰)안지인 기자= 고속버스를 타고 두 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전주의 하늘은 쾌청했다. 쾌청한 하늘만큼 푸른 정장을 차려입은 색소포니스트 허철행이 인사를 건네왔다. 전라도 사투리와 꾸밈없는 모습 속에서 나타나는 그의 소탈한 매력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구슬픈 찔레꽃 연주는 그런 순수함 속에서도 자신의 것을 지키며 걸어 왔을 그의 고독한 여정이 느껴지기도 했다. 색소폰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전북 임실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임실하면 고추와 치즈의 고장으로 많이 알려진 곳이다. 고등학교도 그곳에서 나왔고. 그 고등학교에 밴드부가 있어 그곳에 들어가게 된 것이 계기라고 할 수 있다.밴드부에 들어가서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한 것 인가.처음부터 색소폰을 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트럼펫을 하다가 유포니엄(Euphonium)이라는 악기를 했다(3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내가 원하는 악기를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밴드부 음악발표회가 있었는데 나보다 한 학년 위의 선배가 음악선생님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영화 ‘밤안개 속의 데이트’ 주제가인 를 색소폰 솔로로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 그 소리가 너무나 좋았다. 그 소리를 마음속에 간직하다 3학년 때 비로소 색소폰을 잡을 수 있었다.밴드부에서 색소폰을 배우는 과정이 어땠었나.3학년이 되자마자 색소폰을 잡았지만 이미 색소폰을 한 지 3년이 넘어가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던 만큼 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열정만큼은 그 어디에도 비할 데가 없었다. 레슨을 해주는 선생님이 따로 없었던 터라 당시 3만원을 주고 샀던 카세트 플레이어와 버스에서 흘러 나오는 라디오 음악이 나의 선생님이었다. 재즈, 가요 등 다양한 음반을 듣고 내 소리를 녹음하여 비교하면서 공부하고, 생각하며 색소폰에 대한 갈망이 커져나갔었다.어린 시절의 허철행에 대해 더 얘기해 달라.학창시절의 나는 여학생 얼굴만 봐도 얼굴이 빨개지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고집과 주관이 뚜렷하고 해야 할 일은 꼭 해내는 성격이었다. 지금은 음악을 하면서 외향적으로 변한 부분이 아주 많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은 잘 바뀌지 않았다.내향적인 성격 때문에 처음에는 무대에서 연주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무대에서 색소폰을 잡으면 눈빛이 달라진다는 얘길 많이 듣는다. 그만큼 무대에 서면 자신감이 생기고 감정을 이입(조​절)하면서 연주에 몰입하기 때문인 것 같다.연주하는 방식은 대략 어떤 편인가.어떤 곡이든 기승전결이 있다. 그래서 인생의 기승전결을 풀어내는 것처럼 진지하게 연주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만큼 정말 힘들다. 절제를 할 때 더 많은 호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영향을 받은 아티스트가 있나.외국 연주자로는 ‘찰리 파커’(Charlie Parker)와 ‘데이비드 샌본’(David Sanborn)이 있고, 국내 연주자로는 ‘이봉조’, ‘길옥윤’, ‘최석재’, ‘황천수’ 등 여러 선생님들의 영향을 받았다.어떤 영향을 받았나.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르듯이 노래하는 방법이나 감성, 색깔도 각기 다르다. ‘데이비드 샌본’은 강렬하게 쏘는 칼톤, ‘찰리 파커’는 소리가 작으면서도 32비트, 24비트로 연주한다. 그러면서도 소리와 비트가 깨지지 않는다. ‘이봉조’ 선생님으로부터는 맑은 음색을, ‘길옥윤’ 선생님에게서는 특유의 색깔있는 음색을 모방하였고, ‘황천수’ 선생님의 경우에는 반음 스케일이나 밴딩을 써서 음이 넘어가는 흐름에 대해 배웠다. 이렇듯 다양한 연주자들의 감성 속에서 내 음색을 찾기까지는 무던히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음에는 분명히 선이 있고, 색깔이 있다. 자신의 톤이 완성이 되고, 호흡이 완성 되었을 때 선이 살아 있고 자신만의 색깔이 있는 연주를 할 수 있다.색소폰을 잘 불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잘 하고 싶다면 첫째 ‘좋은 선생님에게 정식으로 배워라’, 둘째 ‘선생님이 주문하는 대로 연습해라’이다. 셋째 ‘음악을 많이 들어라’인데 어떻게 보면 최고의 선생님은 음악을 많이 듣는 것이지만 그저 듣는 것만으로는 내 음악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에 레슨을 통해 깊이 있게 접근하는 것이 좋다.음반에서 소프라노 색소폰 연주가 인상적이었다. 소프라노 색소폰을 잘 부는 비법이 있나.롱톤과 텅잉같은 기본적인 주법을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이다. 소프라노 색소폰은 악기의 공간(관의 내경)이 좁기 때문에 순간의 압력을 필요로 하므로 색소폰 중에서 가장 연주하기 힘들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쎈 소리가 부드러워질 때까지 크고 세게 부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한다. 그래야 압력이 강해지고 소리를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2014년도에 발표한 1집과 앨범 발매 공연이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1집 앨범 ‘봄’에 대한 설명 부탁드린다.이 음반이 내 인생에서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를 담아 타이틀을 ‘봄’이라고 정하고 타이틀 곡도 <찔레꽃>을 택했다. ‘장사익’ 선생님의 노래 <찔레꽃>을 색소폰으로 풀어내기 위많은 노력을 했는데, 특히 ‘한(恨)’을 표현하기 위한 음색과 색깔을 찾는 데에 오랜 시간을 할애 했다.말씀하시는 ‘한(恨)’은 어떤 것에 대한 ‘한(恨)’인가.우리 민족의 ‘한(恨)’이 될 수도 있고, 어린 시절의 좋고 나빴던 기억을 되살리는 추억의 ‘한(恨)’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 겪었던 우울했던 ‘한(恨)’을 음악으로 풀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기억에 남는 무대가 있나.1집 앨범 발매기념 첫 번째 콘서트 때이다. 공연하기 전에 가수 ‘현당’ 씨랑 같이 밥을 먹는데 밥이 입으로 안 들어가더라. 그만큼 긴장도 많이 하고 기대도 컸던 연주였다. 늘 염원했던 대로 그 자리에 어머님을 모시고 당신이 좋아하시는 가수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혼신을 다해 연주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감정이 떠올라 가슴이 뭉클해진다.만약 2집을 낸다면 어떤 컨셉으로 가고 싶나.고민이 된다. 오래 남을 수 있는 깊이 있고 예술적인 음악을 하고 싶으면서도 대중적인부분을 간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1집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 듣기에 조금 어려웠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의 음악적 욕심도 채울 수 있는 곡을 준비하려고 한다.2004년부터 5년 동안 퓨전재즈그룹 ‘J.ZEN’에서 활동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J.ZEN에 대해 말해달라.J.ZEN이라는 그룹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선배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그 선배가 국악 판소리를 피아노 악보로 채보하면 그것을 토대로 나를 포함한 드럼, 기타, 베이스 주자들이 퓨전재즈로 풀어냈다. 국악곡을 편곡해 색소폰을 주 멜로디로 한 연주로 풀어내고 리베르 탱고와 같은 탱고음악부터, 가요(한오백년), 스페인의 플라멩코까지 여러 장르를 시도했다.음악적 영감은 어디서 받나.생활 속에서 이다. 누군가를 만나면서 영감이 떠오르기도 하고, 산에 올라 자연을 보면서 혹은 낚시를 가서 이기도 하다. 라디오를 들으면서도 영감을 많이 받는데, 다른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음악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 많다.자신이 생각하는 연주자로서의 마인드는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나.연주자는 음악적인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한걸음씩 꾸준히 갈 수 있는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연주자들이 자신의 색깔을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므로 어려운 일이다. 연주자가 되려면 자신만의 소리와 음악을 찾는 일에 몰두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트로트를 연주하더라도 클래식에 기초해서 연주할 수 있는 학구적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연주한다면 트로트도 그냥 트로트가 아닌 고급스러운 곡이 된다.인간 허철행과 색소포니스트 허철행으로서의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연주할 때는 가급적 격식을 갖추고자 하는 편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메이크업도 하고, 의상도 제대로 갖춰 입는다. 이런 것을 관객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연주가 끝나면 평소의 소탈한 나로 돌아간다. 막걸리와 산을 좋아하는 자유로운 나로 말이다. 꼭 프로의 마인드라기보다는 나만의 스타일 이라고 생각한다. 간혹 주변에서 사투리가 심하다는 얘길 들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게 내 모습이고, 그런 나의 모습을 숨기고 싶지 않다. 방송을 하던 무대에서 연주를 하던 내 앞에 있는 사람 혹은 청중들에게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 원곡에 충실하면서 나만의 색깔을 담담하게 표현하는 내공 있는 색소포니스트로 살고 싶다. 글 Ι 안지인 기자jii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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