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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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색소폰의 랜드마크를 향해, '송도글로벌색소폰클럽'
    음역과 크기에 따라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 색소폰은 연주특성에 맞게 골라 사용할 수 있는 매력 넘치는 악기다. 소프라노,알토, 테너, 바리톤… 송도글로벌색소폰클럽은 색소폰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색소폰 선율에 이끌려 들어온 동호회에서 행복한 삶이라는 뜻밖의 선물을 받은 회원들. 깊은 색소폰의 음색처럼 저마다 다른 이야기가 그려내는 아름다운 하모니에 귀를 기울여보자.1년, 송도글로벌색소폰클럽의 비상(飛翔)인천광역시 연수구에 있는 송도글로벌색소폰클럽은 창립한지 1년을 갓 넘긴 동호회다. 새내기 동호회이지만, 짧은기간에 펼친 송도글로벌색소폰클럽의 날개짓은 어느 동호회보다 화려한 모양새다. 창립한 지 1년 만에 60여 명의회원으로 늘어났고, 색소폰과 드럼 회원을 확보한 대형 동호회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유석정 대표와 고창성 교육원장, 이선균 동호회장을 비롯한 다수의 임원진은 꼼꼼한 회원 관리와 함께 공개 리듬강좌 교육과 다채로운 행사등을 진행해, 활력이 넘치는 동호회 운영에 큰 힘을 보태고있다. 또한 강기만 프로와 박광식 프로 연주자 등을 섭외해 질적으로도 성장할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현재까지 송도 센트럴파크를 비롯해 월미도 학공연장과 인천시립박물관 등지에서 이웃과 함께 하는 길거리 공연을 30여 차례 진행하고, 매월 향상음악회와 재능기부까지 펼치는 등 송도글로벌색소폰클럽의 열정은 끝이 없다.미약하지만 원대한 시작송도글로벌색소폰클럽의 시작은 유석정 대표와 고창성 교육원장, 이선균 동호회장, 단 세 명이었다. 그들은 색소폰을 접한 계기는 달랐지만, 색소폰에 대한 같은 열정으로 똘똘 뭉쳤다. 유석정 대표는 안팎을 아우르며 섬세하지만 강단 있는 모습으로 동호회를 이끌었고, 색소폰 전공자인 고창성 교육원장은 회원들의 교육을 전담했다. 이선균 동호회장은 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창구 역할을 하며, 자칫 소홀할 수 있는 회원들의 마음을 살피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이들의 노력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로 나타났다. 1년 만에 회원 수는 3명에서 60여 명으로 늘어났고, 개인 연습룸 30여 개와 공연장을 보유한 70평 규모의 대형 연습실을 갖추게 되었다.길거리 예술가들이 들려주는 행복송도글로벌색소폰클럽에서 진행하는 활동 중 버스킹은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부분이다. 버스킹을 하기 좋은 시즌인 4~10월에는 매주 토요일에 저마다 악기와 장비를 짊어지고 거리로 향한다. 또 여름에는 매주 일요일마다 청량산호불사에 있는 병풍바위 앞에서 <찾아가는 작은 음악회>를 개최하고 있다. 야외라는 특성상 비가 내리는 등의 제약이 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빠짐없이 연주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활발한 버스킹 활동 덕분에 동호회에 들어온 회원 중 거리에서 공연을 보고 들어온 경우도 많다. 2017년에는 인천광역시 문화예술과에서 지정한 길거리 예술활동가 팀으로 선정, 같은 해 연말에는 인천시장 표창까지 받는 등 차곡차곡 수확을 거두고 있다.봉사를 넘어 음악과 꿈을 나누다송도글로벌색소폰클럽은 현재 매월 첫째 주 토요일에 복지시설 소망의 집과 요양병원에서 연주 봉사활동을 한다. 여느 동호회의 봉사활동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야심 찬 꿈이 숨겨져 있다. 머지않아 <송도글로벌 MUSIC & DREAM>이라는 사단법인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재능기부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음악을 하고 싶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혹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꿈을 포기한 사람들이 대상이다. 음악이 먼 이야기가 아닌, 일상이 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어 동기부여를 해주는 것이 목적이다. 이라는 명칭처럼, 음악에 대해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고 실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이들의 바람이다.회원, 한솥밥을 먹는 식구동호회 창립 1년 만에 인천을 대표할 만한 규모로 성장했다는 것은 운영진과 회원들의 마음이 한데 모였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의미다. 유석정 대표는 아침마다 직접 준비한 밥과 찌개로 회원들의 마음을 배불리 채웠다. 말 그대로 함께 지내면서 밥을 먹는 ‘식구’가 된 것이다. 다른 운영진들 역시 맡은 업무 외에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솔선수범했다. 회원들 역시 본인들의 삶 속에서 동호회 활동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운영진의 역할도 컸지만 생동감이 넘치는 지금의 동호회 모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회원들의 애정 어린 관심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동호회를 비약적으로 키우는 계기가 되었고, 자부심을 느낄만한 밑거름이 되었다.색소폰으로 바뀐 삶, 유석정 대표송도글로벌색소폰클럽의 대표이자 색소폰랜드의 본부 운영사무국장인 유석정대표. 그녀에게 색소폰은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힘든 시기에 우연히 접한 색소폰은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색소폰을 통해 마음의 치유를 경험하고, 좋은 사람들과 음악적인 유대 관계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음악적인 성장면에서도 어릴 적 리코더를 곧잘 불었던 재능이 나타났기 때문인지, 처음 연주하는 색소폰인데도 수월하게 소리가 났다. 덕분에 길거리 연주 활동에 이어 오케스트라 입단까지 단 1년이 걸렸다.원래 유 대표는 종합건설 재무팀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 와중에 고창성 교육원장, 이선균 동호회장과 의기투합하여 동호회를 창단하고, 회원들을 위해 아침일찍 일어나 음식을 준비하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일과 동호회 활동을 병행하다 보니 관리가 원활히 되지 않음을 느꼈다. 결국 26년 차 때 일을 그만두고 동호회에 집중하기로 했다. 동호회에 들어와 새 삶을 살고 계신 회원, 악보를 펼쳐 놓고 함께 음악 공부를 하는 열정적인 회원들의 모습을 볼 때면, 힘들었던 과정은 눈 녹듯이 사라진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감을 갖고 꿈을 꿀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유 대표의 최종 목표다. 돌고 돌아 되찾은 열정, 고창성 교육원장고창성 교육원장은 초등학교 브라스밴드부에서 접한 클라리넷으로 음악과 인연이 시작됐다. 이후 고등학교 브라스밴드부의 트럼펫과 대학교 그룹사운드 동아리에서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하며 음악에 대한 막연한 꿈을 키웠다. 하지만 당시 음악 전공은 부유한 자녀들이 아니면 하기 힘들었다. 일찍이 꿈을 접고 취업이 잘 되는 토목공학과에 진학해 인천시 토목직 공무원이 됐지만, 점점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는 느낌이 들었다.퇴직 후 10년 동안 건축과 인테리어 사업을 하던중, 2008년에 우연히 색소폰에 입문하면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다시 일깨웠다. 마흔네 살 때 다시 실용음악 전공으로 대학교에 진학하고, 음악 학원을차린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속 열정과는 달리 학원 운영은 쉽지 않았고, 하던 사업을 접고 다른 분야에 도전하는 삶이 반복되었다. 당시 인천 주안에서 색소폰 아카데미를 운영하던 고 원장은 색소폰랜드 커뮤니티를 통해 알게 된 유석정 대표와 만난것을 계기로, 송도글로벌색소폰클럽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했다. 다시금 음악 인생에 불을 지필 수 있게 된 사실에 감사하며, 최고의 동호회가 되는 그날까지 열심히 노력할 생각이다.회원들의 대변자, 이선균 동호회장이선균 동호회장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악기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악기는 전문가나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는데, 8년 전 선배의 연말 동호회 음악회에서 아마추어들이 색소폰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공연을 본 후 다음날 바로 음악 학원에 등록해 색소폰을 배웠다. 그러던 중 유석정 대표, 고창성 교육원장과 만나게 되었고, 함께 학원 자리를 알아보는 등 셋이 힘을 합해 동호회를 설립했다. 또한 동호회장이라는 직함에 걸맞게 회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회원과 운영자 간의 중재자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인생의 한가지 꿈을 이룬 그는 이곳에서 하루하루 회원들과 재미있는 동호회를 만들어 가겠다는 또 다른 꿈을 향해 꿋꿋하게 걸어가고 있다. 색소폰을 통한 투병 극복기, 유성옥 회원유성옥 회원은 2010년 9월에 유방암 진단을 받아 1년이 넘는 투병생활을 했다.약을 한 주먹씩 먹을 정도로 힘든 생활을 이어가던 그녀에게 설상가상 우울증마저 찾아왔다. 이를 보다 못한 남편의 권유로 부부가 함께 색소폰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다른 동호회에서 5개월 동안 색소폰을 배웠지만, 독학으로 배운 탓인지 실력이 잘 늘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인의 소개로 송도글로벌색소폰클럽에 들어오게 되었는데,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현재는 건강까지 회복해서 행복한 삶을살고 있다. 색소폰을 배운 지 이제 겨우 7개월이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연주 봉사 활동도 다니고 싶다. 송도글로벌색소폰클럽이 있다는 사실에 고맙게 생각하며,건강이 따라줄 때까지 동호회 활동도 열심히 할 예정이다.송도글로벌색소폰클럽 창립 1주년 기념행사2018년 3월 1일 인천 연수구에 있는 한 파티하우스에서 송도글로벌색소폰클럽의 창립 1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오후 2시부터 5시 30분까지 향상음악회와 장기자랑으로 이루어진 회원들만의 무대가 꾸며졌다. 오후 6시부터는 본격적인 2부 행사가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송도글로벌색소폰클럽 창립 1주년과 색소폰랜드 프랜차이즈 현판수여식이 함께 진행된 이번 행사에서 색소폰랜드의 대표이기도 한 강기만 대표가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유석정 대표의 개회선언을 시작으로 고창성 교육원장의 환영사, 강기만 대표의 축사와 현판수여식이진행되었고, 축하 케이크 절단식과 건배 제의가 이어졌다.음악 동호회답게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연주회였다. 7080 월드팝 가수 한키의 기타 연주를 시작으로, 송도글로벌앙상블단이 <라밤바>, <베사메무쵸>, <아름다운 강산>을 연주하며 무대를 달궜다. 뒤를 이어 유석정 대표의 벗이기도 한인천시립합창단원 이양희 씨가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부르며 1주년을 축하했다. 이후 우종문 회원과 오민숙 회원을 필두로 다수의 회원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마음껏 뽐냈다. 바쁜 와중에 뒤늦게 행사에 참석한 서현진 연주자는 현란한 연주 솜씨로 회원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축하의 대미는 강기만 대표가 장식했다. <축배의 노래>, <스페인> 등을 화려한 퍼포먼스와 함께 열정적으로 연주해 함성을 이끌어냈다. 모든 공연을 마친 후, 참석자들이 함께 한1주년 기념 단체사진 촬영을 마지막으로 송도글로벌색소폰클럽 회원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행사를 마무리했다. 글 | 염재인 기자 suyeon@keri.or.kr
    • 월간색소폰
    • Focus
    2018-04-01
  • 편하게 즐기는 가요 색소폰 - 사랑의 거리
    # 첫 장에는 1절과 2절이 나와 있습니다.이 부분은 꾸밈음을 넣고 리듬의 변화를 주어 편곡하였습니다. 두 번째 장에는 3절입니다. 애드리브로 편곡하여 지루해지지 않도록 재미를 주었습니다.# 애드리브에 사용된 스케일은 지난 달과 마찬가지로 G펜타토닉 스케일입니다.글쓴이는 다양한 스케일을 활용하여 애드리브 하는 것을 즐기지만, 이 곡에서만큼은 펜타토닉 스케일만큼 잘 어울리는 스케일이 없는 듯합니다. 이유는 아주 기본적인 코드 진행이며, 전체적인 배경 사운드와 멜로디가 펜타토닉으로 만들어진 곡이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원곡과 다른 부분은 모두 펜타토닉 스케일로 만들어진 애드리브입니다.# 템포가 빠르고 리듬이 복잡하기 때문에 느린 템포로 차분히 연습했으면 좋겠습니다.느리게 연습하여 얻어진 리듬감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주실력 발전이 더딘 이유가 리듬 연습의 부재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색소폰의 기본 연습은 톤 연습이지만, 음악의 기본 연습은 리듬 연습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즐거운 연주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월간색소폰)임민택 칼럼니스트= suyeon@keri.or.kr
    • Lesson
    • 가요
    2018-04-01
  • 2018년 04월(22호)
    - 색소폰의 랜드마크를 향해, '송도글로벌색소폰클럽' - 화려한 선율 속에 비친 감성 색소포니스트 '김성주' - 금호아트홀 시리즈 첫 연주 -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기 위한 황금나팔 콘서트 - [JAZZ CLUB] 재즈 뮤지션들의 성지 'CLUB EVANS'
    • 지난 호
    • 2018년
    • 04월
    2018-04-01
  • 애드리브를 위한 화성학 및 색소폰 - 사랑님(2부)
    1번 구간의 애드리브는 A마이너 펜타토닉 스케일이 활용된 것으로 아래 그림처럼 스케일의 역순으로 연습하면 애드리브 사용에 도움이 된다. 역순으로 도라솔미 / 라솔미레 / 솔미레도 / 미레도라… 순으로 연습하도록 하자. 2번 구간의 애드리브는 A하모닉 마이너 스케일이 응용된 부분으로 마이너 곡뿐만이 아닌 메이저 곡에도 많이 사용되니 꼭 연습을 해두는 것이 좋다. 2번 구간의 원곡의 음은 시(B)가 되는데 이렇게 길게 연주되는 음은 악보에서 볼 수 있듯이기준음(시)에서 높게 이동(도) → 원음(시) → 낮게 이동(라) → 원음(시) 이렇게 간단히 꾸밀수 있다. 예를 들어 라(A) 음으로 길게 연주되는 마지막 음을 위의 예제처럼 꾸민다면 아래 그림과 같다. 3번 구간의 애드리브는 1번 구간과 같이 A마이너 펜타토닉 스케일로 이루어져 있지만 패턴이 1번과는 다르게 되어 있다. 비슷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아래 그림처럼 연습해 보자. 같은 스케일이더라도 다양한 패턴으로 느낌이 다르게 활용이 가능하다. 유튜브에 연주 영상이 있으니 참고하며 연습해보도록 한다. (월간색소폰)신용욱 기자= suyeon@keri.or.kr
    • Lesson
    • 화성학
    2018-03-08
  • 트로트와 함께하는 색소폰 연주 – 너무합니다
    이번 호에는 트로트 매니아들이 좋아하는 S미디어의 <강승용 명작 색소폰> 앨범 여덟 번째 곡이자 윤복희 노래(윤항기 작사/작곡)로 유명한 <너무합니다>로 테너 색소폰(Tenor Saxophone) 연주 를 설명합니다. 다음 페이지의 악보는 제가 레코딩 때 사용한 악보입니다. 윤복 희 씨의 노래를 들어 보신 후 연주하시기 바랍니다. 이 곡은 발 라드 성향의 트로트로 해석하여 연주했습니다. 1절과 2절을 비 교해 보시고 차이점을 찾아 연주하시면 더욱 좋은 연주가 되리 라고 생각합니다. 이 곡에서 가장 놓치기 쉬운 부분은 일곱 번째 소절입니다. 1절과 2절의 프레이즈가 다른 점을 파악하셔서 가사에 맞 는 연주를 하시기 바랍니다. 또 첫 번째 소절의 첫 번째 음 은 1절엔 그대로 D음을 사용하고, 2절엔 옥타브 아래 D음 을 사용하여 변화를 주었습니다. 홈페이지의 기사내용은 일부 내용만 보여지며 전체기사(내용과 사진, 악보)는 월간색소폰에 실려있습니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월간색소폰)강승용 KSA대한민국색소폰연주자협회 명예회장= suyeon@keri.or.kr
    • Lesson
    • 트로트
    2018-03-01
  • [MUSIC ESSAY] 그리스 지중해 선상으로의 '색소폰초대'
    (월간색소폰)박형섭 칼럼니스트= 서구문명의 원천지 그리스와 지중해는 뗄 수 없는 사이다. 지중해(地中海)는 말 그대로 그리스 땅(유럽)과 아프리카 땅 사이의 바다란 뜻이다. 고대로부터신화의 물줄기는 모두 지중해로 통했다. 나는 그 신화의 메카인 아테네, 델피, 크레타, 산토리니를 색소폰과 함께 순례했다. 크레타에서 영원한 자유인 카잔차키스의 족적을 따라가며, 산토리니에서 아틀란티스의 전설을 확인하고, 지중해 동쪽 에게해 선상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는 여정이었다. 신(神)들의 땅8월의 그리스는 여행자의 열기로 더욱 뜨겁다. 이 계절의 아테네인들은 주로 태양이 저무는 저녁에 활동한다. 늦은 시간, 노천카페나 식당엔 사람들로 북적인다. 지중해 유역의 나라들의 여름 낮잠을 시에스타(siesta)라고 말한다. 그것은 낮이 길고 뜨겁기 때문에 생긴 생활습관이다. 그들은 시에스타를 게으름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기후적 환경에 적응해 살아가는 지혜로 생각한다.이른 아침 햇빛을 등지고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올랐다. 그리스의 태양은 유난히 크고 불덩이처럼 타올랐다. 아테네에 와서 먼저 신들의 무대 파르테논 신전을 찾았다. 신전은 신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아테네는 고대도시답게 어디가나 고고학의 현장이다. 시내 여기저기 유물 발굴 현장으로 땅을 파헤쳐놓았거나 보수 혹은 복원 공사 중이다. 파르테논 신전의 거대한 돌기둥은 규모에서 압도했고 우아한 기품이 돋보였다. 골동품은 아무리 낡은 것이라도 고고하게 보인다. 그것이 세월의 흔적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 영감은 언제나 옛 것에서 잉태된다. 시간은 켜켜이 삶의 두께를 형성하여 역사가 되고, 역사는 또다시 새로운 이야기(history)의 원천으로회귀한다.아테네 여행 이틀째, 북쪽 델피의 파르나스 산으로 향했다. 산기슭에 신화 속의 신탁이 내리는 장소가 있다. 고대인은 가파른 산 중턱에 성소(聖所)를 마련하고 신들의 예언을 기다렸다. 나라가 위험에 처했거나 인간이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섰을 때 신탁에 의존했던 것이다. 신들이 살았던 올림포스 산은 허구의 장소지만 파르나스 산은 현실에 존재하는 성스러운 곳이다. 델피는 언덕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주위의 험준한 계곡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신성한 기운이 전율로 감싸온다. 델피의 신탁과 관련된 일화들은 무수히 많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오이디푸스 신화이다. 바로 이곳 델피가 무대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라이오스 왕과 이오카스테 왕비의 아들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한테 죽임을 당하리라는 신탁이 내려졌다. 왕은 아기가 태어나자 발목을 묶어 산에 버린다. 한 목동이 아기를 발견하고, 아기는 무사히 청년으로 자란다. 그는 훗날 자신의 슬픈 운명을 알고 방랑한다. 어느 날 그는 노인 일행과 좁은 산길에서 누가 먼저 지나갈 것인가 시비 끝에 노인을 죽인다. 노인은 자신의 아버지인 왕이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채 그는 고향 테베로 향한다. 왕비이오카스테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로 골머리를 앓던 중 스핑크스를 물리치면 왕위를 주고 혼인하겠다고 선언한다.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를 풀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해 왕이 된다. 아뿔사,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인데 말이다. 신들은 근친상간에 분노하여 역병을 퍼뜨린다. 오이디푸스는 모든 사실을 알고 괴로워한다. 결국 그는 스스로 눈을 뽑아 장님이 되고 왕비도 자살한다. 비극이다. 이 신화에서 사내가 어릴 때 아버지를 경쟁자로 여겨 질투하며 어머니에게 애착을 갖는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나왔다.델피는 작은 마을로 분위기가 한적했다. 델피의 신탁으로 유명한 아폴론 신전에 올랐다. 멀리 코린트 만(灣)에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한낮의 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이었다.에게해 크레타와 <그리스인 조르바>아테네 남서쪽 항구 피레우스에서 크레타로 가는 크로노스 팰리스 호에 올랐다. 밤열시에 출발해 다음 날 아침 크레타 이라클리온 항에 도착했다. 크로노스 팰리스 호는 삼성중공업이 건조한 대형 크루즈였다. 선실은 마치 호텔에 투숙한 것처럼 완비되어 있었다.팰리스 호는 지중해의 검푸른 망망대해를 유유히 순항했다. 색소폰과 함께 선상에 올랐다. 야심한 시각이었지만 밤바다를 감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렁이는 파도 위에달빛이 어른거리는 모양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북아프리카의 시로코(sirocco)인듯 습하고 미지근한 바람이 살갗을 스쳤다. “아, 내가 지금 지중해를 항해하고 있구나!” 야릇한 전율이 일었다. 선상에서 마시는 그리스 맥주의 맛이 일품이었다. 일행 중 누군가가 노래를 불렀고, 난 색소폰을 연주했다. 하늘 높이 떠올랐던 달이 저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동녘이 밝아올 즈음 크레타에 닿을 것이었다. 크레타는 13세기 베네치아 식민지 시대 미노아 문명의 발생지였지만 혼란스런 땅이었다. 이라클리온 앞바다엔 끊임없이 포를 앞세운 탐욕의 배들이 출몰했다. 먼 바다에서 오는 자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대학살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정교회 신자와 회교도들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섬은 누가 지배하든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크레타인의 이중성은 태어날 때부터 숙명이었다. 그들은 그리스인인 동시에 크레타인이었다. 바다 사람이었지만 바다에서 오는 모든 것을 두려워했다. 대학살과 내전은 자신이 죽거나 가족과 이웃을죽이고 묻어야했다. 영원한 자유인 ‘그리스인 조르바’를 창조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들의 아들이자 아버지였다. 조르바의 역동적 생명력은바로 동시대 그리스인의 이중성을 대변한다.카잔차키스는 크레타 출신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 섬은 터키의 지배하에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외적에 대항한 독립투사였고, 아버지 역시 포도농장을 경영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전쟁과 이슬람국의 종교적 박해를 겪었다. 그런 역사적 환경에서 자랐기에 절대적 자유에 대한 갈망이 몸에 뱄다. 소설 속의 조르바는 그의 분신이다. 주인공조르바의 영적 투쟁을 통해 카잔차키스의 삶을 읽을 수 있다.이야기는 젊은 지식인 ‘나’가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다 자유인 조르바를 만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는 친구에게 책벌레라는 조롱을 받은 후 새로운 삶을 결심한다. 그리하여 ‘나’는 동반자 조르바와 함께 크레타 섬의 폐광을 빌려 사업을 벌인다.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일기>에 썼다. “조르바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쳤던 나의 우상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사나이였다.” 하지만 카잔차키스의 오랜 영혼의 편력과 투쟁은 그리스 정교회와 교황청의 노여움을 샀다. 작품의 내용이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문학적 상상력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어떤 이데올로기도 표현의 자유를 구속할 수 없다. 예술은 자유, 그 자체이므로.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은 에게 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베네치안 성벽 위에 있다.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말했다. “바다, 가을의 따사로움, 빛에 씻긴 섬, 영원한 나신 그리스 위에 투명한 너울처럼 내리는 상쾌한 비, 나는 생각했다. 죽기 전에 에게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여자, 과일... 이 세상에 기쁨이 얼마든지 있다.” 그는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자이다.“ 한번 마음먹으면 밀고 나가라. 후회도 주저도 하지 말라. 그 고삐는 다시오지 않는 젊음에게 주어라.”그리스인 조르바와 카잔차키스는 영원한 자유영혼의 표상이 되었다. 그의 소설은 20세기 크레타 섬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뛰어넘어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만든다. 지금 나의 영혼이 자유를 찾아 어디론가항해하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날씨와 침묵, 고독 등에 따라 전혀 다르게 펼쳐진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이지만 조국에서 외면당했다. 그는 치열하게 사유하며 온전한 인간의 모습, 즉 아폴론의 이성과 디오니소스의 열정을 추구했다. 한때 그리스 과도정부의 장관이 되어 정치인으로 살았고, 또한 스스로 정한 운명인 자유로운 방랑자로 살았다. 그가 생전에 남긴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나는 자유다.-니코스 카잔차키스 아침식사 후 크노소스 궁전으로 향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미노타우로스, 즉 머리는 황소, 몸은 인간인 괴물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제우스의 시대에 크레타 왕권을 놓고 미노스가(家) 형제들이 다툰다. 미노스는 백성의 신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황소를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물론 돌려줄 것을 약속하고 말이다. 포세이돈은 그에게 튼튼한 황소 한 마리를 보냈다. 황소는 새로운 문명의 창조와 생산 수단의 상징물이다. 미노스는 마침내 지도자의 능력을 인정받아 왕좌에 올랐다. 하지만 미노스는 포세이돈에게 황소를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는 비슷하게 생긴 거짓 황소를 보냈다. 대가는커녕 은혜를 배신한 것이다. 신화의 비극은 언제나 운명적으로 자신의 행동 속에서 비롯한다. 포세이돈은 분노했다. 그는 미노스 왕의 아내 파시파에가 황소와 사랑에 빠지도록 복수했다. 왕비가 황소와 사랑에 빠지다니! 정욕에 휩싸인 왕비, 그것은 비윤리적이고 타락의 극치를 의미한다. 이 상황을 먼발치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바로 다이달로스다. 그는 황소와 사랑에 빠진 왕비를 빗대어 나무로 황소의 형상을 제작했다. 마침내 왕비는 인간 세상에서 저주받을 생명체를 낳는다. 그가 바로 황소의 머리를 한 인간 미노타우로스다. 포세이돈의 저주를 깨달은 미노스 왕은 후회했지만 소용없었다. 신화는 우리 인간사의 축소판과 다름없다. 아그네스 발차, 기차는 8시에 떠나네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니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않으리, (…)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않으리,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그리스 여행 내내 <기차는 8시에 떠나네>의 애잔한 선율과 함께 했다. 이 곡은 그리스의 민중음악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Theodorakis)의 작품이다. 역시 그리스의 여류성악가 아그네스 발차의 목소리로 세계적으로 알려졌는데 한국의 조수미도 불렀다. 나치에 저항한 그리스의 청년 레지스탕스가 노래의 주인공이다. 그리스는 발칸의 화약고다. 오랜 역사만큼 무수히 전쟁을 치루거나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반도국가인 탓이다 전쟁은 끝났는데 사랑하는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여인은 매일 카테리니 기차역에 나가서 기다리지만 연인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한 심정이 가사에 짙게 배어있다. 멜로디 그 자체로도 애절하고 애잔하다. 이 노래의 유명세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별하는 곳은 어디든 카테리니가 되었다. 영화에서 흔히 보는 장면들, 사랑을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사람의 뒤에는 언제나 쓸쓸한 기차역이 있을 테니까.우리의 생은 흐르는 시간과 함께 서서히 소멸된다. 누구든 사랑과 열정, 기억과 망각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고 희망을 읊조리지만 덧없다. 노래를 들으며 어떤 이는 과거의 쓰라린 상처를, 또 어떤 이는 떠난 사랑을 떠올리며 그리움에 젖고, 또 어떤 이는 사라지는 것들을 회상할 것이다. 기차는 바로 우리의 삶의 모습을 싣고 있다. 막 떠난 기차는 역에 쓸쓸한 흔적을 남기지만, 또한 기다림의 여운도 남기는 것이다. 그래서 카타리니행 열차는 늘 우리 맘속에존재한다.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토리니의 꽃노을에게 해의 섬들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산토리니의 사진 속 풍경은 유난히 이국적이고 신비롭게 보인다. 바다에 떠있는 듯 크고 작은 두 섬은 얼핏 초승달 모양새다. 이섬에서 고대 키클라데스 문명이 번성했다. 그런데 화산 폭발로 한 순간 멸망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것을 어느 날 바닷속으로 사라진 아틀란티스라고 믿는다. 바로 그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산토리니 관광의 하이라이트는 이오마을의 석양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하얀 집들이 그림처럼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섬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가파른 절벽 위에 하얀 집들, 푸른색 돔형 지붕의 교회들. 교회는 여행자의 휴식처인 동시에 성스러운 장소이다. 누구든 차분히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이끈다. 섬은 다양한 색깔의 모래밭들로 둘러싸여 있다. 화산에 따른 용암에 세월의 흔적이 더해져 빚어진 자연현상이다. 특히 붉은 모래밭의 레드비치, 검은 자갈들의 블랙비치, 백사장의 화이트비치가 유명하다.해가 기울기도 전에 풍경을 보려는 사람들로 아우성이다. 저마다 시야가 트인 장소를 찾느라 분주하다. 이 순간의 미학을 위해 열정을 받칠 수 있는 여행자는 로맨티스트임에 틀림없다. 에게 해의 일몰은 살아 있는 그림이다. 푸른 바다와 붉은 노을이 시시각각 놀라운 색조를 창조한다. 그야말로 꽃노을이다. 태양이 바다에 매순간 덧칠하는 색채의 일렁임, 바다 속으로 빨려들어 간 석양은 서서히 파랗게 물들어갔다. 일몰의 숭고한 여운 속에 <썸머 타임>의 선율이 귓전에 울렸다. 나는 느리게 아주 느리게 <썸머 타임>의 음을 색소폰으로 짚어갔다. 산토리니의 아름다운 일몰 풍경이 색소폰 선율로 하나가 되고 있었다.음악은 무엇보다도 감각의 환희를 위해 존재한다. 음악은 미지의 곳으로 영혼을 이끄는 힘이 있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산토리니의 풍경은 실제적인 동시에 환상적이다. <썸머 타임>의 마지막 음을 끝으로 노을이 사라진 바다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글 | 박형섭 부산대 불문과 교수 suyeo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3-01
  • [MUSIC ESSAY] 그리스 지중해 선상으로의 '색소폰초대'
    서구문명의 원천지 그리스와 지중해는 뗄 수 없는 사이다. 지중해(地中海)는 말 그대로 그리스 땅(유럽)과 아프리카 땅 사이의 바다란 뜻이다. 고대로부터신화의 물줄기는 모두 지중해로 통했다. 나는 그 신화의 메카인 아테네, 델피, 크레타, 산토리니를 색소폰과 함께 순례했다. 크레타에서 영원한 자유인 카잔차키스의 족적을 따라가며, 산토리니에서 아틀란티스의 전설을 확인하고, 지중해 동쪽 에게해 선상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는 여정이었다. 신(神)들의 땅8월의 그리스는 여행자의 열기로 더욱 뜨겁다. 이 계절의 아테네인들은 주로 태양이 저무는 저녁에 활동한다. 늦은 시간, 노천카페나 식당엔 사람들로 북적인다. 지중해 유역의 나라들의 여름 낮잠을 시에스타(siesta)라고 말한다. 그것은 낮이 길고 뜨겁기 때문에 생긴 생활습관이다. 그들은 시에스타를 게으름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기후적 환경에 적응해 살아가는 지혜로 생각한다.이른 아침 햇빛을 등지고 아크로폴리스 언덕을 올랐다. 그리스의 태양은 유난히 크고 불덩이처럼 타올랐다. 아테네에 와서 먼저 신들의 무대 파르테논 신전을 찾았다. 신전은 신화를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아테네는 고대도시답게 어디가나 고고학의 현장이다. 시내 여기저기 유물 발굴 현장으로 땅을 파헤쳐놓았거나 보수 혹은 복원 공사 중이다. 파르테논 신전의 거대한 돌기둥은 규모에서 압도했고 우아한 기품이 돋보였다. 골동품은 아무리 낡은 것이라도 고고하게 보인다. 그것이 세월의 흔적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 영감은 언제나 옛 것에서 잉태된다. 시간은 켜켜이 삶의 두께를 형성하여 역사가 되고, 역사는 또다시 새로운 이야기(history)의 원천으로회귀한다.아테네 여행 이틀째, 북쪽 델피의 파르나스 산으로 향했다. 산기슭에 신화 속의 신탁이 내리는 장소가 있다. 고대인은 가파른 산 중턱에 성소(聖所)를 마련하고 신들의 예언을 기다렸다. 나라가 위험에 처했거나 인간이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섰을 때 신탁에 의존했던 것이다. 신들이 살았던 올림포스 산은 허구의 장소지만 파르나스 산은 현실에 존재하는 성스러운 곳이다. 델피는 언덕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주위의 험준한 계곡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신성한 기운이 전율로 감싸온다. 델피의 신탁과 관련된 일화들은 무수히 많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오이디푸스 신화이다. 바로 이곳 델피가 무대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라이오스 왕과 이오카스테 왕비의 아들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한테 죽임을 당하리라는 신탁이 내려졌다. 왕은 아기가 태어나자 발목을 묶어 산에 버린다. 한 목동이 아기를 발견하고, 아기는 무사히 청년으로 자란다. 그는 훗날 자신의 슬픈 운명을 알고 방랑한다. 어느 날 그는 노인 일행과 좁은 산길에서 누가 먼저 지나갈 것인가 시비 끝에 노인을 죽인다. 노인은 자신의 아버지인 왕이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채 그는 고향 테베로 향한다. 왕비이오카스테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로 골머리를 앓던 중 스핑크스를 물리치면 왕위를 주고 혼인하겠다고 선언한다. 오이디푸스는 수수께끼를 풀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해 왕이 된다. 아뿔사,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인데 말이다. 신들은 근친상간에 분노하여 역병을 퍼뜨린다. 오이디푸스는 모든 사실을 알고 괴로워한다. 결국 그는 스스로 눈을 뽑아 장님이 되고 왕비도 자살한다. 비극이다. 이 신화에서 사내가 어릴 때 아버지를 경쟁자로 여겨 질투하며 어머니에게 애착을 갖는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나왔다.델피는 작은 마을로 분위기가 한적했다. 델피의 신탁으로 유명한 아폴론 신전에 올랐다. 멀리 코린트 만(灣)에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한낮의 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이었다. 에게해 크레타와 <그리스인 조르바>아테네 남서쪽 항구 피레우스에서 크레타로 가는 크로노스 팰리스 호에 올랐다. 밤열시에 출발해 다음 날 아침 크레타 이라클리온 항에 도착했다. 크로노스 팰리스 호는 삼성중공업이 건조한 대형 크루즈였다. 선실은 마치 호텔에 투숙한 것처럼 완비되어 있었다.팰리스 호는 지중해의 검푸른 망망대해를 유유히 순항했다. 색소폰과 함께 선상에 올랐다. 야심한 시각이었지만 밤바다를 감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렁이는 파도 위에달빛이 어른거리는 모양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북아프리카의 시로코(sirocco)인듯 습하고 미지근한 바람이 살갗을 스쳤다. “아, 내가 지금 지중해를 항해하고 있구나!” 야릇한 전율이 일었다. 선상에서 마시는 그리스 맥주의 맛이 일품이었다. 일행 중 누군가가 노래를 불렀고, 난 색소폰을 연주했다. 하늘 높이 떠올랐던 달이 저편으로 기울고 있었다. 동녘이 밝아올 즈음 크레타에 닿을 것이었다. 크레타는 13세기 베네치아 식민지 시대 미노아 문명의 발생지였지만 혼란스런 땅이었다. 이라클리온 앞바다엔 끊임없이 포를 앞세운 탐욕의 배들이 출몰했다. 먼 바다에서 오는 자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것은 대학살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정교회 신자와 회교도들의 싸움이 계속되었다. 섬은 누가 지배하든 갈등으로 점철되었다. 크레타인의 이중성은 태어날 때부터 숙명이었다. 그들은 그리스인인 동시에 크레타인이었다. 바다 사람이었지만 바다에서 오는 모든 것을 두려워했다. 대학살과 내전은 자신이 죽거나 가족과 이웃을죽이고 묻어야했다. 영원한 자유인 ‘그리스인 조르바’를 창조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들의 아들이자 아버지였다. 조르바의 역동적 생명력은바로 동시대 그리스인의 이중성을 대변한다.카잔차키스는 크레타 출신이다. 그가 태어날 당시 섬은 터키의 지배하에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외적에 대항한 독립투사였고, 아버지 역시 포도농장을 경영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전쟁과 이슬람국의 종교적 박해를 겪었다. 그런 역사적 환경에서 자랐기에 절대적 자유에 대한 갈망이 몸에 뱄다. 소설 속의 조르바는 그의 분신이다. 주인공조르바의 영적 투쟁을 통해 카잔차키스의 삶을 읽을 수 있다.이야기는 젊은 지식인 ‘나’가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다 자유인 조르바를 만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나’는 친구에게 책벌레라는 조롱을 받은 후 새로운 삶을 결심한다. 그리하여 ‘나’는 동반자 조르바와 함께 크레타 섬의 폐광을 빌려 사업을 벌인다.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일기>에 썼다. “조르바는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쳤던 나의 우상이었다. 그는 살아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사나이였다.” 하지만 카잔차키스의 오랜 영혼의 편력과 투쟁은 그리스 정교회와 교황청의 노여움을 샀다. 작품의 내용이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문학적 상상력은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어떤 이데올로기도 표현의 자유를 구속할 수 없다. 예술은 자유, 그 자체이므로.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은 에게 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베네치안 성벽 위에 있다. 그는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말했다. “바다, 가을의 따사로움, 빛에 씻긴 섬, 영원한 나신 그리스 위에 투명한 너울처럼 내리는 상쾌한 비, 나는 생각했다. 죽기 전에 에게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여자, 과일... 이 세상에 기쁨이 얼마든지 있다.” 그는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주의자이다.“ 한번 마음먹으면 밀고 나가라. 후회도 주저도 하지 말라. 그 고삐는 다시오지 않는 젊음에게 주어라.”그리스인 조르바와 카잔차키스는 영원한 자유영혼의 표상이 되었다. 그의 소설은 20세기 크레타 섬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뛰어넘어 진정한 자유란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만든다. 지금 나의 영혼이 자유를 찾아 어디론가항해하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날씨와 침묵, 고독 등에 따라 전혀 다르게 펼쳐진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이지만 조국에서 외면당했다. 그는 치열하게 사유하며 온전한 인간의 모습, 즉 아폴론의 이성과 디오니소스의 열정을 추구했다. 한때 그리스 과도정부의 장관이 되어 정치인으로 살았고, 또한 스스로 정한 운명인 자유로운 방랑자로 살았다. 그가 생전에 남긴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나는 자유다.-니코스 카잔차키스 아침식사 후 크노소스 궁전으로 향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미노타우로스, 즉 머리는 황소, 몸은 인간인 괴물의 전설이 깃든 곳이다. 제우스의 시대에 크레타 왕권을 놓고 미노스가(家) 형제들이 다툰다. 미노스는 백성의 신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황소를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물론 돌려줄 것을 약속하고 말이다. 포세이돈은 그에게 튼튼한 황소 한 마리를 보냈다. 황소는 새로운 문명의 창조와 생산 수단의 상징물이다. 미노스는 마침내 지도자의 능력을 인정받아 왕좌에 올랐다. 하지만 미노스는 포세이돈에게 황소를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는 비슷하게 생긴 거짓 황소를 보냈다. 대가는커녕 은혜를 배신한 것이다. 신화의 비극은 언제나 운명적으로 자신의 행동 속에서 비롯한다. 포세이돈은 분노했다. 그는 미노스 왕의 아내 파시파에가 황소와 사랑에 빠지도록 복수했다. 왕비가 황소와 사랑에 빠지다니! 정욕에 휩싸인 왕비, 그것은 비윤리적이고 타락의 극치를 의미한다. 이 상황을 먼발치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바로 다이달로스다. 그는 황소와 사랑에 빠진 왕비를 빗대어 나무로 황소의 형상을 제작했다. 마침내 왕비는 인간 세상에서 저주받을 생명체를 낳는다. 그가 바로 황소의 머리를 한 인간 미노타우로스다. 포세이돈의 저주를 깨달은 미노스 왕은 후회했지만 소용없었다. 신화는 우리 인간사의 축소판과 다름없다. 아그네스 발차, 기차는 8시에 떠나네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내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니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않으리, (…)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않으리,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 속에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그리스 여행 내내 <기차는 8시에 떠나네>의 애잔한 선율과 함께 했다. 이 곡은 그리스의 민중음악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MikisTheodorakis)의 작품이다. 역시 그리스의 여류성악가 아그네스 발차의 목소리로 세계적으로 알려졌는데 한국의 조수미도 불렀다. 나치에 저항한 그리스의 청년 레지스탕스가 노래의 주인공이다. 그리스는 발칸의 화약고다. 오랜 역사만큼 무수히 전쟁을 치루거나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반도국가인 탓이다 전쟁은 끝났는데 사랑하는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여인은 매일 카테리니 기차역에 나가서 기다리지만 연인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한 심정이 가사에 짙게 배어있다. 멜로디 그 자체로도 애절하고 애잔하다. 이 노래의 유명세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별하는 곳은 어디든 카테리니가 되었다. 영화에서 흔히 보는 장면들, 사랑을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사람의 뒤에는 언제나 쓸쓸한 기차역이 있을 테니까.우리의 생은 흐르는 시간과 함께 서서히 소멸된다. 누구든 사랑과 열정, 기억과 망각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하고 희망을 읊조리지만 덧없다. 노래를 들으며 어떤 이는 과거의 쓰라린 상처를, 또 어떤 이는 떠난 사랑을 떠올리며 그리움에 젖고, 또 어떤 이는 사라지는 것들을 회상할 것이다. 기차는 바로 우리의 삶의 모습을 싣고 있다. 막 떠난 기차는 역에 쓸쓸한 흔적을 남기지만, 또한 기다림의 여운도 남기는 것이다. 그래서 카타리니행 열차는 늘 우리 맘속에 존재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토리니의 꽃노을에게 해의 섬들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산토리니의 사진 속 풍경은 유난히 이국적이고 신비롭게 보인다. 바다에 떠있는 듯 크고 작은 두 섬은 얼핏 초승달 모양새다. 이섬에서 고대 키클라데스 문명이 번성했다. 그런데 화산 폭발로 한 순간 멸망했다. 후세 사람들은 그것을 어느 날 바닷속으로 사라진 아틀란티스라고 믿는다. 바로 그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산토리니 관광의 하이라이트는 이오마을의 석양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하얀 집들이 그림처럼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섬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이루는 요소들이다. 가파른 절벽 위에 하얀 집들, 푸른색 돔형 지붕의 교회들. 교회는 여행자의 휴식처인 동시에 성스러운 장소이다. 누구든 차분히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이끈다. 섬은 다양한 색깔의 모래밭들로 둘러싸여 있다. 화산에 따른 용암에 세월의 흔적이 더해져 빚어진 자연현상이다. 특히 붉은 모래밭의 레드비치, 검은 자갈들의 블랙비치, 백사장의 화이트비치가 유명하다.해가 기울기도 전에 풍경을 보려는 사람들로 아우성이다. 저마다 시야가 트인 장소를 찾느라 분주하다. 이 순간의 미학을 위해 열정을 받칠 수 있는 여행자는 로맨티스트임에 틀림없다. 에게 해의 일몰은 살아 있는 그림이다. 푸른 바다와 붉은 노을이 시시각각 놀라운 색조를 창조한다. 그야말로 꽃노을이다. 태양이 바다에 매순간 덧칠하는 색채의 일렁임, 바다 속으로 빨려들어 간 석양은 서서히 파랗게 물들어갔다. 일몰의 숭고한 여운 속에 <썸머 타임>의 선율이 귓전에 울렸다. 나는 느리게 아주 느리게 <썸머 타임>의 음을 색소폰으로 짚어갔다. 산토리니의 아름다운 일몰 풍경이 색소폰 선율로 하나가 되고 있었다.음악은 무엇보다도 감각의 환희를 위해 존재한다. 음악은 미지의 곳으로 영혼을 이끄는 힘이 있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산토리니의 풍경은 실제적인 동시에 환상적이다. <썸머 타임>의 마지막 음을 끝으로 노을이 사라진 바다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글 | 박형섭 부산대 불문과 교수
    • 월간색소폰
    2018-03-01
  • [JAZZ AGE] 세계 재즈의 역사
    (월간색소폰)이종우 칼럼니스트= 1910년대, 재즈의 태동재즈는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의 흑인 브라스밴드(Brass band)를 통해 생겨났는데, 주로 관악기에 타악기를 곁들인 형태이다. 브라스밴드의 솔리스트가 반주에 맞춰 즉흥 연주(Improvisation)를 하는 형식으로 춤과 퍼레이드를 위해 연주했다. 1914년경 재즈는 Jass, Jas, Jaz, Jazz 등 그 명칭이 다양하게 존재했다. 또한 재즈의 어원에 대해서도 흑인들의 성행위를 묘사하는 은어라는 등의 다양한 설들이 있다. 처음 흑인 밴드는 백인 밴드를 본 따 유럽 음악의 기법에 따라 연주를했으나, 점차 행진곡, 래그타임(Rag Time) 등의 연주에 흑인 특유의 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래그타임이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미국 남부의 크리올(흑인과 프랑스인의 혼혈) 사회에서 유행한 춤과 춤곡 등을 말하며, 래그(Rag) 또는 래그타임(RagTime)이라고 한다. 스콧 조플린, 조지프 램, 제임스 스콧의 연주를들어보면 래그타임에 대한 이해가 쉬울 것이다. 점차 흑인 특유의 리듬감에 래그타임의 영향이 곁들여지고, 멜로디와 하모니 등을 외워 원곡을 쉽게 연주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런 약간의 원곡 변형은 클래식의 변주(Variation)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래그타임 연주 방식의 클래식 변주가 재즈의 즉흥 연주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초기에는 트럼펫과 클라리넷, 트롬본의 트리오 편성으로 하는 집단 즉흥 연주(Collective Improvisation)가 많았다. 이 스타일로 백인들이 연주하는 스타일을 딕시랜드 재즈(Dixieland Jazz)라고 부르게 되었고, 본격적인 재즈 시대가 열리게 된다. 딕시랜드 재즈 밴드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 밴드는 머리글자만을 딴 ‘ODJB’로 부르고있다. ODJB는 뉴욕에 재즈 음악의 진수를 소개한 최초의 밴드로 인정받고 있으며, 대부분 연주자는 백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ODJB는1905년부터 뉴올리언스의 시카고를 무대로 활동해왔으며, 초창기에는 딕시 재즈 밴드라고 불렸다. 뉴욕에 진출한 이들은 대규모 레스토랑인 라이젠 베버에서의 연주를 통해 서서히 명성을 쌓아갔다. 1917년 2월 ODJB는 기존 명칭에서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 밴드’로 팀명을 바꾼다. ODJB의 가장 큰 의미는 스탠다드 재즈(당시 유행가들을 재즈로 연주한 장르) 곡들을 최초로 녹음했다는 점이다. ODJB 이전의 음악 활동 자료는 녹음 기술의 부재로 인해 남아 있지 않아, ODJB의 연주가 최초의 재즈 연주 자료가 되는 셈이다. 1920년대 들어서 ODJB는 밴드의 인원이 커지면서 재즈 빅 밴드로 발전하게 된다. 초창기 빅밴드는 즉흥 연주보다는 악보에 의존한 연주가 대부분이었다. 플레처헨더슨(Fletcher Henderson)이 탄생시킨 재즈 빅 밴드는 비슷한편성에 연주자의 즉흥 연주 요소를 크게 부각시켜, 비로소 재즈 빅 밴드 솔리스트들이 주목 받는 시대가 오게 된다. 이로써 본격적인 재즈시대가 열린 것이다. 연주자들은 자유로운 솔로 연주를 통해 자신의 색깔을 강하게 드러낼 수 있었으며, 솔리스트의 역량은 곡의 완성도에 큰 영향을 주었고,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나 콜맨 호킨스(ColemanHawkins) 같은 걸출한 연주자들이 명성을 얻게 했다. 콜맨 호킨스의 성공은 색소폰을 솔로 악기로서의 자리를 탄탄하게 만들어주는계기가 되었고, 이후 많은 재즈 색소포니스트들에게 큰 동기를 부여했다.1920년대, 재즈 번영의 시대192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현대 재즈다운 스타일이 탄생하게 되었지만, 이 시절 밴드나 소규모 캄보 밴드는 어렵고 난해한 스타일의 재즈가 아닌, 술 한 잔을 걸치고 춤을 추면서 플로어에 있는 예쁜 아가씨에게 추파 던지기 좋은 정도의 대중음악이었다. 1920년대까지는 세계적인 경제 부흥에 힘입어 카바레(Cabaret) 같은 문화 공간을 중심으로 연주자들이 활동했다. 카바레는 재즈를 세계적인 대중음악으로 자리 잡게 했다. 이는 음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중 예술 전반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루이 암스트롱은 재즈를 미국 음악에서 세계적인 음악으로 소개시킨대표적인 연주자이다. 탁월한 혼(Horn) 연주는 기본이고 노래에 코미디까지 섭렵했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스캣(Scat)의 창시자라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고, 스캣(Scat)을 연주곡에 접목해 대중화를 이룬공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인종차별이 심했던 상황에서 흑인도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를 남긴 위대한 엔터테이너이다. 그는 초창기 재즈 시대부터 70년대 모던 재즈 시대까지 살면서 재즈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자타가 공인하는 재즈 레전드 이기도 하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루이 암스트롱은 13세 무렵 친척 집에서 훔친 권총으로 장난을 치다가 소년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소년원에서 뜻밖의 행운을 얻게 된다. 당시 비행청소년들에게 교화를 목적으로 음악교육을 했던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계기로 코넷을 연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시대도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으려면 부유한 집안 환경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루이를 비롯한 여러 재즈 뮤지션들을 보면, 재즈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꽃을 피우는 야생화 같은 느낌이 든다. 당시 백인우월주의 사상이 팽배했던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사회적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의 성공은 많은흑인에게 큰 동기 부여가 되었다. 루이 암스트롱은 미국 근대 사회의 문화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이다.그는 사치모(Satchmo)라는 애칭으로도 유명한데, 다름 아닌 그의 큰 입을 비유해서 부르는 별명이다. 디퍼마우스(Dippermouth)라는 별명도 있는데, 후에 라는 재즈 스탠다드 곡이 나오기도 한다. 윤복희 씨가 어릴 적 루이 암스트롱의 성대모사를하며 노래하는 레퍼토리가 있었다. 내한한 루이 암스트롱이 일부러 찾아와 듀엣을 제안했고, 이후 미국으로 데려가 음악 공부와 공연을 한 일화가 유명하다.세계대공황, 재즈를 휩쓸다1920년대는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고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재즈의 대중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진 시대이다. 라디오의 발명은 재즈를 세계에 소개하는 발판이 되었고, 이후 전 세계적인 대중음악이 되었다. 몇몇 지역의 음악으로 머물 수도 있었던 재즈는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 그 음악을 연주하는 뮤지션들은 체계적인 음악을 받고 자란 부유한 사람이 아닌, 상대적으로 약자와 빈곤한 흑인들이 많았다. 이렇듯 재즈는 1910년대에 태동하여, 1920년대에 이르러서 대중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이때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복잡한 코드가 난무하는 어려운 재즈가 아닌, 술 한 잔 걸치면서 흥겨운 리듬에 취할수 있는 그런 음악이었다. 이후 1929년 세계대공황이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재즈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글 | 이종우 경성대 동주대 외래 교수 suyeon@keri.or.kr
    • 월간색소폰
    2018-03-01
  • [JAZZ AGE] 세계 재즈의 역사
    1910년대, 재즈의 태동재즈는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의 흑인 브라스밴드(Brass band)를 통해 생겨났는데, 주로 관악기에 타악기를 곁들인 형태이다. 브라스밴드의 솔리스트가 반주에 맞춰 즉흥 연주(Improvisation)를 하는 형식으로 춤과 퍼레이드를 위해 연주했다. 1914년경 재즈는 Jass, Jas, Jaz, Jazz 등 그 명칭이 다양하게 존재했다. 또한 재즈의 어원에 대해서도 흑인들의 성행위를 묘사하는 은어라는 등의 다양한 설들이 있다. 처음 흑인 밴드는 백인 밴드를 본 따 유럽 음악의 기법에 따라 연주를했으나, 점차 행진곡, 래그타임(Rag Time) 등의 연주에 흑인 특유의 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래그타임이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미국 남부의 크리올(흑인과 프랑스인의 혼혈) 사회에서 유행한 춤과 춤곡 등을 말하며, 래그(Rag) 또는 래그타임(RagTime)이라고 한다. 스콧 조플린, 조지프 램, 제임스 스콧의 연주를들어보면 래그타임에 대한 이해가 쉬울 것이다. 점차 흑인 특유의 리듬감에 래그타임의 영향이 곁들여지고, 멜로디와 하모니 등을 외워 원곡을 쉽게 연주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런 약간의 원곡 변형은 클래식의 변주(Variation)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래그타임 연주 방식의 클래식 변주가 재즈의 즉흥 연주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초기에는 트럼펫과 클라리넷, 트롬본의 트리오 편성으로 하는 집단 즉흥 연주(Collective Improvisation)가 많았다. 이 스타일로 백인들이 연주하는 스타일을 딕시랜드 재즈(Dixieland Jazz)라고 부르게 되었고, 본격적인 재즈 시대가 열리게 된다. 딕시랜드 재즈 밴드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 밴드는 머리글자만을 딴 ‘ODJB’로 부르고있다. ODJB는 뉴욕에 재즈 음악의 진수를 소개한 최초의 밴드로 인정받고 있으며, 대부분 연주자는 백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ODJB는1905년부터 뉴올리언스의 시카고를 무대로 활동해왔으며, 초창기에는 딕시 재즈 밴드라고 불렸다. 뉴욕에 진출한 이들은 대규모 레스토랑인 라이젠 베버에서의 연주를 통해 서서히 명성을 쌓아갔다. 1917년 2월 ODJB는 기존 명칭에서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 밴드’로 팀명을 바꾼다. ODJB의 가장 큰 의미는 스탠다드 재즈(당시 유행가들을 재즈로 연주한 장르) 곡들을 최초로 녹음했다는 점이다. ODJB 이전의 음악 활동 자료는 녹음 기술의 부재로 인해 남아 있지 않아, ODJB의 연주가 최초의 재즈 연주 자료가 되는 셈이다. 1920년대 들어서 ODJB는 밴드의 인원이 커지면서 재즈 빅 밴드로 발전하게 된다. 초창기 빅밴드는 즉흥 연주보다는 악보에 의존한 연주가 대부분이었다. 플레처헨더슨(Fletcher Henderson)이 탄생시킨 재즈 빅 밴드는 비슷한편성에 연주자의 즉흥 연주 요소를 크게 부각시켜, 비로소 재즈 빅 밴드 솔리스트들이 주목 받는 시대가 오게 된다. 이로써 본격적인 재즈시대가 열린 것이다. 연주자들은 자유로운 솔로 연주를 통해 자신의 색깔을 강하게 드러낼 수 있었으며, 솔리스트의 역량은 곡의 완성도에 큰 영향을 주었고,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이나 콜맨 호킨스(ColemanHawkins) 같은 걸출한 연주자들이 명성을 얻게 했다. 콜맨 호킨스의 성공은 색소폰을 솔로 악기로서의 자리를 탄탄하게 만들어주는계기가 되었고, 이후 많은 재즈 색소포니스트들에게 큰 동기를 부여했다. 1920년대, 재즈 번영의 시대192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현대 재즈다운 스타일이 탄생하게 되었지만, 이 시절 밴드나 소규모 캄보 밴드는 어렵고 난해한 스타일의 재즈가 아닌, 술 한 잔을 걸치고 춤을 추면서 플로어에 있는 예쁜 아가씨에게 추파 던지기 좋은 정도의 대중음악이었다. 1920년대까지는 세계적인 경제 부흥에 힘입어 카바레(Cabaret) 같은 문화 공간을 중심으로 연주자들이 활동했다. 카바레는 재즈를 세계적인 대중음악으로 자리 잡게 했다. 이는 음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중 예술 전반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루이 암스트롱은 재즈를 미국 음악에서 세계적인 음악으로 소개시킨대표적인 연주자이다. 탁월한 혼(Horn) 연주는 기본이고 노래에 코미디까지 섭렵했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스캣(Scat)의 창시자라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고, 스캣(Scat)을 연주곡에 접목해 대중화를 이룬공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인종차별이 심했던 상황에서 흑인도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를 남긴 위대한 엔터테이너이다. 그는 초창기 재즈 시대부터 70년대 모던 재즈 시대까지 살면서 재즈의 대명사가 되었으며, 자타가 공인하는 재즈 레전드 이기도 하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루이 암스트롱은 13세 무렵 친척 집에서 훔친 권총으로 장난을 치다가 소년원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때 소년원에서 뜻밖의 행운을 얻게 된다. 당시 비행청소년들에게 교화를 목적으로 음악교육을 했던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 계기로 코넷을 연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시대도 클래식 음악 교육을 받으려면 부유한 집안 환경이 어느 정도 뒷받침되어야 한다. 루이를 비롯한 여러 재즈 뮤지션들을 보면, 재즈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꽃을 피우는 야생화 같은 느낌이 든다. 당시 백인우월주의 사상이 팽배했던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사회적으로 성공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그의 성공은 많은흑인에게 큰 동기 부여가 되었다. 루이 암스트롱은 미국 근대 사회의 문화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이다.그는 사치모(Satchmo)라는 애칭으로도 유명한데, 다름 아닌 그의 큰 입을 비유해서 부르는 별명이다. 디퍼마우스(Dippermouth)라는 별명도 있는데, 후에 라는 재즈 스탠다드 곡이 나오기도 한다. 윤복희 씨가 어릴 적 루이 암스트롱의 성대모사를하며 노래하는 레퍼토리가 있었다. 내한한 루이 암스트롱이 일부러 찾아와 듀엣을 제안했고, 이후 미국으로 데려가 음악 공부와 공연을 한 일화가 유명하다. 세계대공황, 재즈를 휩쓸다1920년대는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고 생활 수준이 향상되면서, 재즈의 대중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진 시대이다. 라디오의 발명은 재즈를 세계에 소개하는 발판이 되었고, 이후 전 세계적인 대중음악이 되었다. 몇몇 지역의 음악으로 머물 수도 있었던 재즈는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 그 음악을 연주하는 뮤지션들은 체계적인 음악을 받고 자란 부유한 사람이 아닌, 상대적으로 약자와 빈곤한 흑인들이 많았다. 이렇듯 재즈는 1910년대에 태동하여, 1920년대에 이르러서 대중음악으로 자리 잡았다. 이때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복잡한 코드가 난무하는 어려운 재즈가 아닌, 술 한 잔 걸치면서 흥겨운 리듬에 취할수 있는 그런 음악이었다. 이후 1929년 세계대공황이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재즈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글 | 이종우 경성대 동주대 외래 교수
    • 월간색소폰
    2018-03-01
  • [JAZZ CLUB] 우리나라 최초의 재즈클럽 "ALL THAT JAZZ"
    (월간색소폰)염재인 기자= 어느 누구도 밟지 않은 눈 내린 대지,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그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살이 에이는 그 눈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한국 재즈 1세대가 우리나라에 재즈를 선물했다면, 올댓재즈는재즈가 머물 수 있는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올댓재즈가 걸어가고 있는 그 길은 곧, 한국 재즈카페 역사의 발자취이다.거장들이 선사하는 열정적인 무대는 자칫 가벼운 마음으로 올댓재즈에 방문한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올댓재즈에서는 자신이사랑하는 음악을 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감내하며 피 나는 노력을 했을 거장들의 삶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다. About ALL THAT JAZZ올댓재즈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문을 연 재즈 클럽이다. 1976년 오픈한 이래 한국의 재즈 역사와 그 길을 함께 걸어 온 올댓재즈는 매일 마다 새로운 재즈 공연으로 무대를 가득 채우고 있다. 지하철 6호선 이태원역 2번 출구를 나와 해밀턴호텔 옆길을 직진하다 보면 작은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때 우측으로 30미터 정도 길을 걸으면 올댓재즈를 만날 수있다. 올댓재즈의 입구를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흡사 미국의 어느 유명한 재즈바에 와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의 블루노트라는 명성이 어색하지 않다.거장의 열정이 살아 숨 쉬는 곳우리나라 최초라는 타이틀을 걷어 내더라도 올댓재즈는 특별하다. 다른곳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재즈 거장들을 올댓재즈에서는 쉽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라틴 타악기의 거장인 류복성 같은 아티스트가 바로 그 예다. 그는 한국 재즈 1세대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브라보! 재즈 라이프>에도 출연한 바 있다. 거장들이 선사하는 열정적인 무대는 자칫 가벼운 마음으로 올댓재즈에 방문한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올댓재즈에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을 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감내하며 피나는 노력을 했을 거장들의 삶을 잠시나마 엿볼 수 있다. ALL THAT JAZZ, 제대로 즐기자!올댓재즈는 우리나라 재즈 클럽을 대표하는 만큼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가 많다. 주말 같은 경우 조금이라도 늦으면 한참 기다려야 하니 참고한다. 매일매일 출연진들이 바뀌기 때문에, 방문 전에 미리 올댓재즈 홈페이지에 들러 출연진들을 확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올댓재즈에서는 공연을 관람하면서 식사가 가능하며, 주로 메뉴는 피자나 파스타, 샐러드 종류이다. 주류는 칵테일이나 와인, 위스키까지 다양하다. 1인 당입장료 5,000원이면 재즈 신예의 신선한 연주부터 거장의 혼이 담긴연주까지 즐길 수 있다. 단, 입장료는 현금만 가능하다. 글 | 염재인 기자suyeon@keri.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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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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